Equatorium ; MAIN

천칭이 재지 못한 단 한 가지 욕망 ; 심장 하나 분량의.

ㅡ거머쥔 생애 무이할 순백의 기착지에게.

Equatorium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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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운명을 땋아 네게 쥐여줄게

바닷속 바다까지 삶의 저편 그 어느 숲의 늑골까지도

너 나와 함께 가자

우리 손 놓는 것이 죽음인 듯 하자

_너는, 서덕준

Livingston - Lifetime


사는 내내, 남자는 뜻모를 허기에 시달려왔다.

삭아빠진 판자를 엮어 만든 지붕에 기어올라 해가 걸린 지평선을 내다보고, 작달막한 체구가 간신히 끼이지 않는 좁다란 골목을 달음박질 치던 소년기부터 시작된 고질병이었다. 옴짝할 수 없게 사지를 녹여내는 무더위였으며 열사熱砂의 능선 아래서도 웅크려 떨게 하는 한기였다. 귀퉁이가 부서진 가구, 동자가 떨어져 나간 계단 난간을 짚을 때면 스미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덧없다가도 높고 맑은 여름하늘에 둘러싸인 와중 웃음도 감상도 없이 그저 한참을 멈추어 서도록 아득했다.

빈곤, 결여, 무력감. 사람들은 수많은 이름으로 그의 병증을 진단했으나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아귀가 없었다.

열다섯, 그는 마침내 그것을 정의하는 법을 알아낸다. 

그것의 이름은 고독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명명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깨달음은 그것의 충족과 함께 찾아왔으므로 그는 외로움을 앓을 필요가 없었다. 손 쓸 틈 없는 상실이 간신히 주어졌던 모든 것들을 거두어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6 피트 아래에 처박힌 심장을 형제의 관과 함께 묻으며 그는 뇌까렸다. 이토록 역약한 것, 망가지고 부서지기 쉬운 것,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이 마음의 본질이라면. 그리하여 번번이 손아귀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를 내려다보며 느끼는 격통이 이 소유의 유일한 결말, 필연이라면. 설령 이 공허를 채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온전한 조각이라 한들 탐을 내는 일은 없으리라고. 두 번 다시는. 

그리고 당신이 청한다. 지독하게 불공정한 거래를.


게임, 거래, 계약.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손쉽게 휘발하는 낱말로 테이블을 짓고 천칭을 올리며 그는 마냥 경쾌했다. 저울이 평형을 이루는 경우는 두 가지다. 첨예하게 수평을 맞추었거나, 양편의 누구도 추를 올리지 않았거나. 달각이며 휘청이던 눈금이 정북을 가리킨다. 무게없는 결과값과 같았으므로 바야흐로 가볍기만 한 비행이었다.

이야기와 하루.

습관이 될 만큼. 

마음─가장 우선할 것. 먼저 이야기할 것. 

자야, 진실할 당신에게. 

그러므로 머리끝까지 알코올에 잠겼던 간밤으로부터 가까스로 헤어나온 그가 발견한 오른손목의 계약서는, 정말이지 의아스러운 이변이었다.

아릿한 독주와 함께 망각이 엎질러져 그는 오늘까지도 그 밤, 주홍으로 떨어지던 조명과 당신의 꾸중, 등을 받치던 체온이며 뒤섞여 머금은 빈티지 라벨링 가운데 무엇 하나 떠올리지 못한다. 당신이 손톱으로 아로새긴 무형의 날인이자 호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대질할 대상이라고는 하나 남은 단서, 사기꾼이라 불리는 남자조차 헛웃음을 삼킬만치 불합리한 거래가 전부였다. 하물며 서명마저도 당신의 몫 뿐인.

잘근이던 입술에서 불현듯 청포도 내음이 났다. 쓸어본 손끝에는 묻어난 자국이 없다. 그럼에도 그 잠시간의 착각은 오래도록 설을 맴돌았다. 자야, 끊임없이 샘솟는 물소리 속에서 그가 당신을 부를 때까지. 

이 다음은 당신은 미처 알지 못할 이야기다. 


그는 본디 그리 다정한 인사가 못 되었다. 내비치는 친절이라고는 쌍둥이 형제를 본따 답습한 결과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그 자신은 매양 반틈이 모자라다 느끼는 실정이었다.

아침 반나절을 골몰한 끝에 그가 처음으로 명시한 당신의 이름마저도 이해가 소실된 단편이었다. 계약의 이행, 수평을 맞추는 행위, 가뿐한 걸음과 한 줄기 바람 외에는 필요치 않은─없어야만 하는 경예한 비행을 위한, 찰나의 관성. 

그러나 바벨이 문을 닫아잠그고 가누지 못한 혼란으로 도전자들의 활기를 종식시킨 그날, 그는 당신으로부터 불안을 읽는다. 재생이 예정되어 있건만 부축하는 손이 조심스럽다. 이제와 파열의 순간은 헤아려지지도 않는, 몇쯤은 당신이 직접 목견했을 상흔을 아파한다. 전장의 마지막까지 고개를 쳐들며 버티고 서는 그를, 삭이 기울면 자취를 감추었다가 달이 차오르면 여상한 낯짝으로 돌아와 인사를 건네는 가이드를 파트너, 그런 명목 아래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센티넬이. 

그는 잠시간 의아했다가, 조금은 우스워지고, 이윽고 깨닫는다. 그래, 당신은 도무지 물정을 몰라서 이 유망謬妄한 협잡꾼에게 받아낸 담보라고는 없이 벌써 그 경계를 한켠이나마 허물어뜨린 모양이라고. 

그 터무니없음에 실소마저 사그라들었다. 그는 대단히 하잘 것 없는 거짓말쟁이라 진솔할 줄도 반듯하게 보답할 줄도 모른다. 어쩔 줄 모르는 초라한 몇 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조잡한 확약 뿐이다. 불안할 구석이라고는 없이 길고 태만하며 뻔뻔스러운 삶을. 뒤늦게나마 명징한 인지로, 호명에 묵언을 담아. 내가 가장 진실할 당신에게. 


당신 방향으로 무겁게 떨어진 권칭이 한켠으로 쏠리고 그가 당신을 향해 치우친 최초의, 혹은 두 번째 순간이었다.

그 다음의 순간들이 어찌나 빛살처럼 흘러갔는지 우리는 안다.

이슥한 잠에서 문득 깨어나 옆자리가 비어있지 않은 아침이 올 때까지 당신의 감은 첩미를 헤아렸다. 붕괴된 지반 아래 먼 잔광으로부터 당신을 먼저 떠올렸고 익숙해진 줄도 모르게 맹점 없는 논의가 당연했다. 까닭에 불현듯 찾아든 부재의 예고가 기이하리만치 낯설었던가. 그럼에도 침묵과 망설임은 길어지지 못하고 당신에게로의 귀환을, 시일도 적혀 있지 않은, 다만 당신을 유일한 기착지로 새긴 백지의 티켓을 증거로 약속했다. 

당신이라는 센티넬을 실념할 만큼 당신이라는 사람을 염려했다. 가정된 죽음이 이미 끔찍해 잠시나마 주축을 놓치고 휘청였다. 그가 살아가기를 바라는 센티넬이 오직 당신임을 천명키 위해 차마 낯 들지 못할 고해를 쏟아냈다. 

마지막에 이르러, ‘당신’을 지키겠다 맹세한다.

다시, 마지막, 숨 끊어지던 찰나 지키지 못한 ‘당신’을 생각했다.

시작으로 돌아와, 떠오른 최초의 미련은 ‘당신’이었다.

쌓인 날말 가운데 어느 하나 가벼운 것이 없다. 

형편없이 무너진 저울대를 내려다본다; 천칭을 허물어트린 약속이, 바람이, 마음이 무수하다. 

여느 때처럼 무게를 덜어내려는 시도는 커녕 낭자한 편린의 비뚜름한 외곽을 끼워맞추어 보겠다는 발상조차 잊고, 그는 다만 색도 향도 맛도 소리도 촉감마저 지니지 못해 언어로만 존재가 확인된 기치를 당신에게 검증받을 방안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몇 마디 교언이면 굴러떨어지곤 했던 신뢰가 당신을 목전에 두면 어째서 이리도 어렵기만 한지. 

그때 당신이 다가와 말하기를, 당신을 몰아세운 불안과 그를 잠식한 초조를 해소할 방법이 남아있다고. 역약한 당신의 믿음이, 망가지거나 부서지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못하도록 당신을 온통 옭아매는 서약이.

애처롭도록 다디단 입맞춤. 검고 질척이는 기류에 뒤엉켜 가파른 호흡 새로 당신이 그를 부르는 순간.

그는 다시금, 마침내 외로워진다. 그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당신의 부재가 유난히도 아팠던 까닭과, 길 잃지 않을 나침반을 건네며 하필 당신이 지상으로 안착하기를 바랐던 기저를 이해하고 말았으므로.

기어코 당신을 원하게 되어서.

“ ⋯⋯당신을, 내게 주시겠다고. ”


그거 아니. 나는 항상 너보다 한뼘어치 많은 것들을 바랐다. 네가 바벨 천정으로부터의 재회를 말할 때 나는 고작 한 층의 유리가 부당하다 곱씹었다. 탑의 정언이 우리의 뼈와 살을 기워 되살릴 것을 알면서도 네게 닥칠 혹시 모를 한 번의 죽음에 치를 떨면서. 어느 가이드라도 좋으니 너를 부단히 지키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그 가이드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으면, 하고. 

그것이 내가 오래 앓아온 병증의 연원이자 너를 향한 척애의 근간이다.

흘려내는 목소리는 나직하고 얼핏 웃음마저 서려있다. 지상에서 달까지는 38만 5천 킬로미터. 선회의 여력 따위를 남겨두어서야 당신에게 닿을 길은 요원하다. 아니, 전무하다. 

그러니까. 그가 운을 뗀다. 당신이 내 센티넬이 되고 내가 당신의 가이드가 되어서, 언젠가 손날과 손뼘, 지문으로는 형태를 덧그릴 수도 없는 한 줄기 바람에 안도하게 된다면. 내 미약한 날갯짓만으로 지상에 내려앉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오면.

“ 내가, 나만이 당신을 가질 수 있게 해줘⋯⋯. ”

한 꺼풀의 마음도 남김없이. 젖은 하순을 떨어트리며 그가 감히 당신을 욕망한다. 천 너머로 맥박을 움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부족해. 애타는 심중을 토해내며 닫힌 여밈을 풀어내고 밤이 스민 살갗을 손금으로 비끄러트린다. 외복사근을 지나쳐 셔츠 안으로 파고든 손이 허리를 휘감아 당기면 얄따란 홑겹의 방해마저 없이 살갗이 곁붙고 비스듬히 심장이 맞닿는다. 구순을 머금고 입틈으로 숨결을 새겨나가며 기다린다. 이내 붉은 고동이 하나처럼 울린다. 그 잠깐은 당신이 온전히 제 것 같다.

대신. 버릇처럼 뱉어낸 어절 끝에 실소가 어린다. 이런 순간에마저 거래의 형식을 본뜨는 스스로가 우습고도 지리멸렬해서. 그러니까 그는 고작 그뿐인 남자다. 허울 뿐인 교량일지언정 취하지 않고서는 무엇 하나 건넬 줄 모르는. 천칭 따위는 집어치우라지. 폐부에 든 바람이 잦아들고 그는 당신이 본 중에 가장 볼품없을 고백을 사람의 언어로 가다듬으려 애를 쓴다.

게임도, 거래도, 계약도 아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절박한 바람이며 또한 가장 무구한 기원이다. 

뒤집은 패는 하이 카드. 그러나 딜러는 당신의 승리를 단언한다. 

“ 허락해주신다면, 자야. 내가 가진 시간 전부를 드리죠. “

여전히 만질 수도 더듬을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것. 다만 불가역하며 대체될 수 없는 것. 천공을 수직으로 범람하는 저 바벨조차도 손대지 못하고 수평으로 펼쳐진 지상의 누구도 강탈할 수 없는 것. 

하루의 시간과 한 톨의 마음. 다시, 모든 시간과⋯⋯.

비로소 그가 당신에게로, 끝모르게 검고 서정적인 밤에게로 거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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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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