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사랑해서 이별도 사랑할 수 있었어

백업 by 개천
3
0
0

할 말이 있어.

넌 그런 말로 나를 불렀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는데도 네가 먼저 있었다. 카페의 구석자리에 음료 두개를 두고 앉아있는 너는 나를 발견하고는 살풋 미소짓더니 손을 들어올려 인사했다. 너의 미소가 꽤 씁쓸했다. 부드럽게 주름이 지는 네 눈가, 네 눈동자는 나를 향했다가 살짝 아래로 요동쳤다. 나는 그게 연민이라고 생각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너를 사랑하면서부터 각오했던 그 순간은 기어코 이런 방식으로 오고야 말았다고. 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눈짓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너의 맞은편에 앉았다. 앞에는 아이스 바닐라 라떼, 얼음은 거의 녹지 않았다.

미리 음료는 시켜놨어.

너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내 앞의 컵을 잠깐 바라봤다. 넌 언제부터 여기 왔을까. 날 얼마나 기다렸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를 시켜두고서 너는.

컵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표면을 타고 흘렀다. 난 너를 흘깃 보고, 고맙다고 말하고, 컵을 들었다.

맛은 달았다.

넌 안심한 것 처럼 보였다. 날 보고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이 부드럽게 접히는 그 웃음은 나를 향했다. 저 웃음은 정이었다. 좋아하는 이가 좋아하는 것을 기뻐하는 순수한 그의 마음, 정. 따뜻한 종류의 것. 그도 그 앞에 있는 컵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얼음이 달그락 거렸고, 카모마일의 향이 잔뜩 향그러웠다.

그 후로는 잠시간의 침묵. 너와 나는 서로 말이 없었다. 너는 시선을 떨구고 컵을 만지작 거렸다. 나는 너를 보았다. 응시처럼 강렬하게보다는 관찰에 가까웠다. 네 입이 몇번 벙긋 거렸다. 너와 이따금 눈이 마주치면, 넌 나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너의 검은 눈동자에는 연민 따위가. 그런 것이 보였다. 내 표정은? 너의 눈동자에 내가 비치지 않아서 짐작할 수 없었다. 침착하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난 눈을 깜빡이며 기다렸다. 혹은 생각했다.

너와 눈이 다시 마주쳤을때, 아. 네 그 표정. 뭔가가 나를 강하게 관통했다. 난 입을 열었다.

널 사랑하지 않아.

네 눈이 커졌다. 금방 원래 표정을 되찾은 네 얼굴에 슬픔이 번졌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어.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가슴이 요동쳤다. 잠깐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언제나 날 위하던 너.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았고, 나에게 웃어주었고, 내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 넌 내게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넌 나를 좋아했고 난 그것에 확신이 있었다. 날 바라보던 네 표정에 어리던 감정들. 정, 연민, 믿음같은 것. 그리고 방금 내 말에 번지는 너의 슬픔. 하지만 그 속에는 사랑이 없었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게 이유였다. 난 그걸 알았다. 알면서도 놓지 못해서 위태한 관계를 잡아두고 매달리다가 결국, 네 다정이 헤매고 헤매다 이곳까지 도달할 것을 알았음에도.

나는 숨을 삼키고 마저 말을 잇는다.

그냥 그게 전부야. 그게 내 진심인거야.

너에게 말했지만, 다시 내게로 쏟아진다. 난 용기를 내 시선을 너에게로 옮긴다. 네 표정은 가늠하기 어렵다. 내 눈으로 옮겨가는 네 시선이 고통스럽게도 짜릿하다.

그만하자.

겨우 내뱉는다. 주변을 감싸는 공기가 숨쉬지 못할 만큼 무겁다.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진다. 이 장면, 모든 순간이 내게 새겨진다. 마지막까지 나를 걱정하는 너의 다정한 얼굴이, 나를 훑는 네 눈이 새겨진다. 아, 나는 너를 사랑해서 이 이별마저도 사랑한다. 그정도로 지독해서 사랑할 수 있었다.

안녕.

말하지 말자고 생각했던 인사가 불쑥 튀어나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뜨는 내 뒷모습을 네가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나가는 내내 네 시선을 느끼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눈물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헤어지고 나면 늘 안부를 묻던 너에게 그날은 밤새 문자 한통이 없었다. 그런데도 난 잠잠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한참 기다렸던 것 같다.

가끔 그날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올 때가 있다. 그 향기는 꽤나 미지근하다. 손에 닿는 유리잔의 축축한 느낌과 너의 향인지 카페에서 나던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미묘한 나무 향. 매끄럽게 혀를 구르던 단 액체. 그런 것들이 떠오르면 난 언제나 뻑뻑하게 느껴지는 눈을 두어번 깜빡거리고서 저 멀리 어딘가를 잠시 바라보아야 했다. 강렬하게 떠오르는 그때의 장면은 이상하리마치 너와 함께한 아름다운 추억보다도 앞서서 언제나 나를 씁쓸하게 만들고는 했다.

..왠지 다정했던 네 눈이 내게 닿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네가 나를 향해 말갛게 웃으면 내 마음은 저기 구름 위까지 올라갔다가 쑥하고 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체온이 높은 너의 긴 손이 내게 닿으면 까무러치게 놀랄 만큼이나 간질거리고 전율이 일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너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싶어 견딜수가 없을 때가, 가끔 있었다. 아마 난 널 아직도 사랑하는 지도 몰랐다.

그래, 영원이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지만 아마 난 널 영원히 사랑할지도 몰랐다. 너는 그정도로 유일무이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