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9/22~)

100일 챌린지_2일차 [박사팬텀]유자차

날씨가 추우면 유자차가 생각나죠

Ranunculus by 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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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일차 약 2900자

  • 쓰면서 들은곡: 브로콜리너마저<유자차>

  • 노골적이진 않으나 약간 그렇고 그런 행위 후의 느낌이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으레 생각나는 마실 것이 있다. 코코아, 유자차, 에그노그 같은 것들. 각자의 기호나 취향에 따라 어느정도 선호가 달라지겠지만 이 중에 박사의 선택은 유자차였다. 이를 테면 잠이 안오는 눈이 시리게 차디찬 날에는 머그컵에 유자청을 담고 전기포트의 뜨거운 물을 부어 휘휘 저어주면 올라오는 향긋함과 새콤하고 가볍지 않은 뜨뜻함이 추운 바람에 상처입은 목을 사르르 풀어주는 감각을 박사는 좋아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유자차보단 이성을 지켜주는 아주 간편한 기호식품인 커피에 손이 더 자주 가기 마련이었다. 커피는 계절을 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사실 커피는 맛보단 기능적인 이유로 마시는 것이므로 유자차와는 비교하기 힘들 것이다.

박사는 바로 지금이 유자차를 마시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한창 뜨겁게 사랑의 온도를 나누어 느끼고 난 뒤에 맨살에 닿는 차디찬 밤공기는 막 채운 구멍을 씽씽 통과하는 바람이 빼앗는 느낌같아서 박사도 팬텀도 그다지 썩 좋아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다른 날이라면 팬텀과 좀더 이불속에서 노곤노곤하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부비적거렸겠지만 박사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을 지나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맛있을 유자차를 마시는 타이밍을 늘 생각해왔기에 지금이 아니면 내일 아침에 조금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러니 박사는 이 순간을 잡기로 했다. 막상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박사였지만 이불속에서 바로 쓱하고 나오는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추위에 약한건지 아니면 박사의 체온이 좋은건지 팬텀은 여전히 박사의 허리를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대로 매정하게 팬텀의 체온을 두고 가기엔 박사는 맘이 약한 존재였다. 그러면 새로운 선택지를 고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 팬텀...? 많이 졸려?

"...박사?"

"좀 뜬금없는데 부탁이 있어"

박사의 개인실에는 바쁜 현대인이 살아가는 대도시의 원룸에나 있을 법한 간이부엌이 있는데 이 밤에 나란히 맨몸에 기다란 담요만 걸친 성인 남성 둘이 머그컵이나 전기포트을 들고 서있는 광경은 제법 웃기기도 했다. 박사는 평소에 커피나 컵라면을 마시느라 애착까지 가지게 된 로도스 마크가 부착된 전기포트에 물을 한가득 담았다. 그러고는 한칸짜리 작은 냉장고에서 얼마전에 인터넷으로 주문한 유자청을 꺼내었다. 박사가 척척 프로세스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팬텀은 커피가 담긴 틴케이스를 들고 멀뚱히 서서 바라보았다. 팬텀의 낯선 시선이 느껴진 박사는 물을 가득 담은 전기포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물었다. 너도 유자차로 마셔볼래? 팬텀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최근에 팬텀에게 스틸머그컵을 선물해 주었는데 종종 팬텀이 어시스턴트인 날에는 박사가 커피를 마셨고 팬텀이 박사가 선물해준 컵에 미지근하게 데운 우유를 마셨었다. 팬텀은 뜨거운 걸 못마시려나, 박사는 팬텀에게 유자차를 권하면서도 어쩐지 팬텀은 뜨거운 음료를 마시는데 서툴거라는 근거없는 믿음이 있었다. 박사가 팬텀에게 유리머그컵이 아닌 스틸머그컵을 선물해준것도 어쩌면 그런 근거없는 믿음에서였다. 하지만 오늘같이 추운날에는 조금 뜨거운 걸 마셔도 괜찮을 거 같다. 팬텀도 괜찮아 할테지. 박사는 약간 의기양양한 기분에 팬텀의 컵에 유자청을 털어냈다.

띵~ 어느새 전기포트의 끓는물이 알맞게 올랐을 때 알림음이 울렸다. 팬텀은 씽크대에 턱에 놓인 뜨거운 집기를 집을 때 쓰는 장갑을 보았다. 그리고 장갑을 착용하곤 전기포트의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는 손잡이를 잡았다. 다행히 전기포트는 뜨거운 열을 뿜는거에 비해 심하게 뜨겁진 않았고 팬텀은 무사히 자신의 컵에 유자청을 덜어내는 박사의 옆에 전기포트를 내려놓았다. 팬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팬텀은 뜨거운 음료에 익숙하지 않았다. 차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유독 약하디 약한 입속 점막이 뜨거울 때 향을 가장 잘느끼는 차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다. 그렇다고 해서 차를 식혀서 마시는 건 어릴적 극단에 있을 때부터 예의를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배워서 늘 예를 갖춘 티타임에선 고통을 견디며 뜨거운 차를 마시곤 했었다. 극단을 나오고 혼자 적적할 때는 미스 크리스틴과 유당이 제거된 우유를 살짝 데운것을 마시곤 했었다. 그게 팬텀에겐 뜨거운 차에 데인 상처에 덧바를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팬텀은 박사가 타준 유자차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처럼 예의니 뭐니 그런걸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데도.

박사는 팬텀이 내려놓은 전기포트의 뜨거운 물을 팬텀의 컵에 먼저 부었다. 뜨거운 김과 함께 올라오는 새콤달콤한 향기는 사뭇 잎차가 주는 무거운 풀향기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팬텀은 유자청이 풀리며 녹아 흐트러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컵에 물을 적당히 부은 후 박사는 팬텀의 컵을 들었다. 그러고는 열기를 식히려는 듯이 후후 불었다. 이러면 조금 마시기 편할거야. 박사는 몇번을 정성스럽게 팬텀의 유자차를 식혔고 약간의 온도가 적당하다 싶을때 팬텀에게 건네주었다. 박사가 준 컵은 아직 뜨거움이 남아있어 팬텀은 손끝부터 살며시 컵을 잡았다. 박사는 팬텀이 안정적으로 컵을 잡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팬텀에게 컵을 쥐어준 박사는 기대가 담긴 눈빛으로 팬텀을 바라보았다. 팬텀은 머그컵에 입을 대고 살짝 아주 살짝 차를 홀짝였다.

"어때? 괜찮아?"

뜨겁다. 그러나 예전처럼 못견딜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팬텀은 담요를 쥔손의 힘을 살짝 놓았다. 단 한모금의 유자차였지만 어쩐지 아까까지 맨살에 닿는 한기도 입안이 데이는 것도 싫어지지 않아졌다. 이제까지 뜨거운 차는 힘들었었는데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귀를 쫑긋거리며 유자차를 한모금 더 입에 홀짝이는 팬텀의 모습을 어느새 자신의 유자차를 타는 것도 잊을 정도로 박사는 단단히 새겼다. 답지않게 금방 유자차 한컵을 다 비워낸 팬텀은 노곤노곤한 표정으로 컵을 내려놓았다. 박사는 그 사이 자신의 컵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들고있었다. 오늘 마시는 이 유자차는 아마 이제까지 마신 차 중에서 가장 맛있는 타이밍이라고 박사는 자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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