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온리전]같이 사는 중 (SAMPLE)

가비지타임 | 종뱅온리전 | 위탁판매예정

* 종뱅온리전 : 너와 나의 시간은 6분 5초부터> 박[2a] 2d3님 부스에 위탁 예정입니다

* 원래 썼던 <같이사는중> 링크-> https://glph.to/pptwy7

* B6 / 무선 / 102p / 6,000원

* 공개된 분량 수정(3편까지 전문 공개) + 각 에피소드 이어지지 않는 문단 짧게 추가


갈색머리

현관문 바깥에서 일정한 손놀림으로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띡띡띡띡 거실을 울렸다. 거실소파에 앉아 스마트TV로 농구경기를 보고 있던 종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손으로 어색하게 머리를 넘기고 헝클였다. 병찬을 맞이하기 위해 현관문 앞에 섰다.

외출 후 돌아올 때면 현관 신발장으로 마중 나오는 병찬을 종수도 몇 번 따라하다가 이제는 두 사람의 약속처럼 자리 잡힌 일이다. 병찬은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도 종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고무장갑을 벗고 단숨에 현관 앞으로 왔다. 종수야 어서 와. 오늘도 고생 많았어.

도어락 잠금을 해제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병찬은 마트에 들렸다 오는지 한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운동화를 벗던 병찬의 눈에 낯선 색감이 들어온다. 음? 장바구니를 받아 드려는 종수와 눈이 마주쳤다. 어어엉? 뭘 잘못 보기라도 한 듯 눈을 끔벅끔벅거린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누구세요?”

“아.”

“종수 너 미용실 갔다 왔냐?”

……많이 이상해?”

“어, 아니? 야 자세히 좀 보자.”

병찬은 집안으로 후다닥 들어와 어두컴컴한 거실 전등 스위치를 켰다. 거실이 환해져 종수는 눈을 잠깐 찡긋거린다.

최종수의 머리카락은 달라졌다. 병찬의 눈에 익은 검은 곱슬머리카락이 아니다. 갈색 곱슬곱슬머리카락으로 변했다. 종수 주변의 공기에서 미용실 특유의 파마약 냄새도 난다. 종수를 위아래로 훑어본 병찬은 허헛, 웃었다. “아 뭐야뭐야.” 병찬은 손도 안 씻고 최종수의 머리카락과 이마를 마구 만진다. “하지 마.” 종수가 어깨로 손을 쳐내자 병찬이 또 성격 좋은 사람처럼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하하!

병찬은 종수에게 들렸던 짐을 다시 받아들었다. 대신해서 냉장고 앞으로 가져간다. 냉장고 문을 열고 오늘 장 본 것들을 한꺼번에 쑤셔 넣은 후 경쾌하게 문을 퉁 닫는다. 종수가 눈을 매섭게 뜬다. 저거 또 정리 안 하고 냉장고에 마구잡이로 쑤셔두지. 갈 곳 잃은 고대 조각상처럼 거실에 덩그러니 서 있는 종수에게 병찬이 온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만에 코앞이다. 박병찬 손이 종수의 머리카락에 닿는다.

“머리 이쁘다, 야.”

“만지지 말고 손이나 씻고 와.”

“참나 까칠하긴.”

하여튼 병찬은 연하남친의 말을 잘 듣는다. 화장실로 직행해서 바지런히 움직인다. 수도꼭지를 열어놓은 듯 쏴, 물소리도 들렸다. 종수는 부끄럽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검은 액정에 자신의 머리를 본다.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겠어서 부엌으로 간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 앞에 철푸덕 앉는다.

병찬은 푸른 잎채소와 버섯, 깐 마늘, 쌈 채소, 라면묶음, 타임세일 초밥, 달걀, 소화가 잘 되는 칼슘우유를 사왔는데 그걸 냉장고 빈 곳에 아무렇게나 넣어뒀다. 심지어 초밥 담긴 도시락은 위아래가 뒤집어져 있다. 와, 성격도 좋다. 사온 물건을 이 따위로 처넣어도 아무 생각도 없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종수는 냉장고 속 라면을 꺼냈다. 병찬이 쑤셔 넣은 상품들을 죄 다시 꺼내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정리했다.

손을 씻고 겉옷을 벗어둔 병찬이 종수 옆에 쓱 다가왔다. 갈색머리 최종수라니. 병찬은 푸스스 웃으며 종수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문다. 뜨뜻한 입술과 혀도 닿는다. 종수는 얼굴이 빨개져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으으으.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너 이런 컬러가 얼굴에 잘 어울리네. 초코색 푸들 같아.”

“내가 분명히 말했어. 하지 마.”

“어쩌다가 미용실에 간 거야?”

종수는 냉장고에서 방치된 반찬통을 잘 보이는 곳으로 꺼내둔다. 맨 아래 신선식품 보관 칸에 들어있던 오이와 깻잎과 절반 잘린 애호박도 끄집어낸다. 이걸로 무슨 요리를 할지 박병찬이 생각해야 한다.

그런 건 모르겠고 병찬은 종수의 갈색 곱슬곱슬 머리카락을 만진다.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초등학교 남자애 같다. 종수는 휙 몸을 돌려 비닐포장 속 모듬쌈채소를 가리켰다.

“박병찬. 쌈채소는 왜 샀어?”

“응? 고기 먹게.”

“장 본 것 중에 고기 없던데. 영수증 봐.”

“아, 내가 깜빡하고 정육코너 안 들렸나?”

태평한 소리 한다. 종수는 냉장고 정리를 마치고 엉겨 붙는 병찬을 털어냈다. 타임세일 초밥과 라면만으로도 두 사람은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지만, 쌈채소를 샀는데 고기는 안 사왔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냉장고 앞을 떠나는 종수를 따라서 병찬도 일어났다. “응? 종수야. 형 말에 대답 좀. 미용실 왜 갔어? 완전 본격적인데? 너 평소에는 그냥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 자르고 올 때가 더 많잖아.” 병찬은 종수를 잡아 끌고 거실소파에 가서 앉았다. 종수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엄마친구 분이 청담동에서 미용실 하는데…….”

“응.”

“거기가 연예인 전문샵 되면서 손님이 진짜 많거든.”

“종수야. 앞에 내용 다 자르고 본론만 말해주면 안 돼?”

……미용실에서 헤어 모델 하고 왔어.”

병찬은 손바닥을 짝짝 마주치며 학학학 웃었다. 종수가 머리 염색 하나 했다고 이렇게나 즐겁다. 너무너무 좋다. 어디 가서도 박병찬은 최종수의 애인 티를 숨기긴 힘들겠다. 병찬은 평소보다 더 빠안히 종수를 본다. 좋은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처럼 종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 열렬한 눈길에 종수의 피부가 달아오른다. 어딘가에 숨고 싶어졌다. 종수는 화난 사람처럼 뺨이 붉어져 병찬과 시선을 피했다.

“오늘 갑자기 불려간 거야?”

“응. 오전에 엄마한테 전화 와서.”

“그러면 나한테도 말해주지. 너 머리하는 거 사진 보내달라고 했을 텐데.”

병찬은 종수의 곱슬곱슬하게 구부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졌다. 부드럽다. 병찬의 손끝에 종수의 갈색 머리카락이 몇 갈래로 갈라진다. 병찬에게서 손세정제의 레몬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종수가 입속말처럼 작게 말했다.

“너 웃을까 봐.”

“웃으면 안 돼? 비웃는 것도 아니고 예뻐서 웃는 건데.”

“사람 너무 많아서 사진 찍기도 좀 그랬어.”

“이건 무슨 펌이래?”

“몰라……. 샘플 책자에 넣어야 하는 남자 연예인 머리로 미용실 디자이너님이 알아서 한 거래.”

“오, 샘플 책자에 들어갈 사진도 찍었어?”

“유튜브랑 인스타그램에 홍보영상도 올라가는데 얼굴은 모자이크로 가려주겠다고 해서…….”

“기럭지가 최종수인데 얼굴 가린다고 퍽이나 모르겠다, 사람들이. 아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려나.”

“모를 걸. 그냥 키 큰 사람인가 보다, 하고 말 텐데.”

“그래그래. 우리 종수도 머리하니까 진짜 연예인 같다.”

가끔씩 ‘농구선수 최종수’는 병찬의 핸드폰에 얼굴을 내밀었다. 최종수에게는 각종 브랜드 모델 제의가 들어왔다. 저번 아시안 경기 때 ‘모델처럼 잘생긴 농구선수’로 일반인들의 기억에 콱 박힌 덕분이었다.

병찬이 눈길을 끌어당긴 화면에는 M신사 셋업수트 광고 속 최종수의 얼굴이 대문짝하게 박혀 있었다. 입은 옷은 안 보이고 종수 얼굴만 덜렁. 노골적인 사심이 느껴지는 편집이었다. 이거 괜찮은 건가? 셋업수트 광고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병찬은 ‘자세히 보기’ 버튼을 누른다.

종수가 유튜브 프리미엄 구독자인 덕분에 병찬과 계정을 공유하는 중이다. 그날 병찬이 검색한 ‘M신사 셋업수트 모델 최종수’ 때문에 한동안 두 사람의 인스타그램에는 M신사 광고만 엄청나게 쏟아졌다. 종수가 유튜브 검색 기록을 확인한 뒤 병찬에게 ‘이게 대체 뭐냐.’고 물었고 병찬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종수가 모델로 계약해서 활동했던 6개월 동안 셋업수트 판매량은 어마어마했다고 들었다.

이후로도 병찬의 핸드폰에는 각종 알고리즘에 의해 최종수의 농구경기뿐 아니라 매혹적인 광고영상도 나타난다.

알고리즘 : 박병찬 너 최종수 좋아하지?

전문가의 손길로 메이크업을 받고 겁나게 비싼 카메라로 촬영된 최종수인데 박병찬이 뭐 어쩌겠나. 좋아할 수밖에 없다. 어, 나 최종수 진짜 좋아하지. 병찬은 꾸준히 최종수와 관련된 컨텐츠의 조회수를 높여주었다.

이제 또 한동안 최종수 머리 관련으로 남자들이 미용실을 드나들게 될까?

[질문 : 남자헤어스타일 질문! 이 사진 속 농구선수 최종수 애쉬브라운으로 염색하고 셰도우 펌 한 거 맞나요??]

[답변 : 맞으면 니가 뭘 어쩔 건데요.]

그런 대화를 상상해본다. 병찬은 히죽대며 어깨를 들썩들썩거린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만 쪼개. 고기 사러 가자.”

종수의 말에 병찬이 건성건성 끄덕였다. “같이 갈까?” 종수가 차갑게 대꾸한다.

“네가 장 보면서 고기를 안 사왔으니까 네가 가야지. 나는 너 감시하러 가는 거고.”

“근처 정육점 갈까, 아니면 차 끌고 나가서 큰 마트 갔다가 드라이브나 한 바퀴하고 올까? 운전은 종수 네가 해주고.”

싱크대 옆 선반 서랍에 넣어둔 장바구니를 다시 꺼내며 병찬이 묻는 말에는 대답이 없다. “응? 최종수. 대답해줘.” 병찬이 조용해진 집안을 살핀다. 애인을 숨어버린 고양이 부르듯 부른다. “쫑수야. 최종수. 쫑쫑쫑수야.” 병찬은 화장실 안쪽을 쓱 본다.

종수는 화장실 벽면에 붙은 거울을 보고 있다. 제 갈색머리를 신중하게 둘러보고 손끝으로 만지작거린다. 밝은 색깔의 머리가 어색한 듯했다. 뭐라고 혼자 궁시렁대며 종수가 화장실을 나왔다.

“야, 신경 쓰지 마. 예쁘다니까.”

병찬이 종수의 머리를 다시 한 번 만지려고 손을 뻗었다. 종수는 고개를 아래로 숙여주었다. 병찬은 종수의 파마약을 먹인 풍성하고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카락을 마음껏 매만졌다. 갈색머리 최종수는 얼굴도 순해 보인다. 으응? 자세히 보니 눈썹도 머리색과 맞춰 염색되었다. 순둥순둥한 최종수.

이토록 사랑스러운 최종수.

나 얘 얼굴 좋아했던가. 병찬은 지금껏 종수가 제 취향의 얼굴이라고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다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달라 보인다. 좀 웃긴 일이다. 함께 살면 매일매일 이벤트가 일어난다.

병찬에게 최종수는 그냥 좋았다. 뭐 나름의 이유가 있는 척 떠들긴 했어도 누가 최종수를 왜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똑똑히 대답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제 보니 박병찬은 최종수의 얼굴도 좋아한다. 최종수의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도 좋아하고. 곱슬곱슬한 최종수의 헤어스타일은 말할 것도 없고.

어차피 농구는 내가 더 잘하니까 패스…….

병찬은 종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정말 예뻤다. 고기 없이 쌈채소만 우적우적 씹어 먹어도 될 만큼 종수의 갈색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아무런 약속이 없는 오후의 침대방. 병찬은 침대헤드에 기대어 책을 읽는다. 옆에 누운 종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종수는 이어폰 한쪽을 끼고 영상에 시선을 두고 있다. 영상 밑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또 혼자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액정을 노려본다. 병찬이 페이지를 넘길 때 종수도 다른 영상으로 넘어간다.

핸드폰을 만지는 종수의 손길은 부산스럽다. 이어폰 소리 볼륨을 줄이거나,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을 때 바로 답장을 해주거나, 뭘 읽고도 답장을 안 하거나, 광고 문자 삭제도 좀 하고. 큰 손가락이 꼬물꼬물 바쁘게 움직인다.

종수가 핸드폰 액정을 보며 미간을 찡그리고 있으면 병찬은 팔을 옆으로 넓게 펼친다. 최종수의 콧등과 이마 사이로 오른손이 살포시 내려와 짙은 눈썹 사이를 살살살 펴준다. 그러면 종수는 꾸깃꾸깃 긴장했던 어깨도 쭉 내려가고 한숨도 훅 쉰다. 병찬의 손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종수를 이해 못하는 건 또 아니어서 한 동안은 내버려두게 된다.

종수는 핸드폰 속 화면을 계속 응시한다. 영상 하나를 지긋하게 노려보았다. 병찬이 페이지를 넘겨도 계속 보고 있길래 고개를 낮춰 뭘 보고 있나, 흘긋 살폈다. 종수 자신의 실수가 많았던 이전의 경기다. 컨디션이 안 좋았던 날이었다. 감기몸살로 이마에 열이 끓는데도 코트에 나가서 곰처럼 무식하게 식은땀을 쭉쭉 흘리며 3쿼터 내내 뛰다가 마지막에 벤치로 들어왔다. 기절하지 않은 게 용했다. 주저앉은 채 검은 비닐봉지에 얼굴을 처박고 먹은 물까지 다 토했던 날.

경기가 끝나고 종수는 옷도 못 갈아입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어 겨우 병찬을 불렀다. 손가락이 얼얼해서 자판을 못 치겠다고 말했다. 병찬은 차를 몰고 혼자 훌쩍거리고 있을 최종수를 데리러 갔다.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유니폼 위에 구단 저지만 걸친 종수는 비틀비틀 차에 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병찬은 아픈 종수를 보면서 어째 막막하기도 하고 좀 안타깝기도 하고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그랬다. 몸뚱이가 재산인 선수들에게 몸 관리는 필수고 ‘아픈 몸도 자기관리 못한 것’이라는 말은 체육계에서 흔히 언급된다. 종수와 병찬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러나 아무리 선수여도 정작 아플 때 그런 말을 들으면 서러워졌다.

집에 도착하자 종수는 바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병찬이 종수의 새 속옷과 실내복을 꺼내놓았다.

샤워를 끝낸 종수의 젖은 머리를 병찬이 헤어드라이어로 말려준다. 종수가 아파서 우는 건지 서글퍼서 우는 건지 몰라서 병찬은 침대 곁을 서성였다. “종수야. 너무 아프면 아픔이 나 자신 같고 막 그렇지?” 병찬이 빙그레 웃자 종수가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흘겼다.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조그맣게 웅얼댄다. “박병찬 잠깐만 이리 와.” 병찬은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 쓴 종수를 포옥 안아준다. “이제 저리 가. 감기 옮아.” 병찬은 말을 잘 듣는다. “필요한 거 있음 형아 불러라, 종수야.” 병찬이 종수를 두고 방을 나갔다.

몇 시간 후, 뜨거운 숨을 헐떡이던 종수가 울먹하게 젖은 목소리로 병찬을 불렀다. 박병찬. 박병찬……. 병찬은 아픈 종수가 부르면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아주 작고 여린, 콱 가라앉은, 아픈 목소리. 박병찬. 물 좀 갖다 줘. 컵에 물을 따라 건네준다. 아픈 종수는 전혀 다른 새로운 종수 같다. 종수가 가냘프게 헉헉거렸다. 박병찬. 약도 못 먹겠어. 입맛이 하나도 없어. 몸이 너무 아파……. 지금 병찬과 함께 누워있는 이 침대에서 종수는 꼬박 사흘 내내 끙끙 앓았다.

병찬이 옆을 슬쩍 본다. 화면을 응시하던 종수는 또 한껏 집중한 얼굴이다. 미간을 찡그리고, 눈썹을 치켜세우고, 턱 아래에 힘이 들어가고, 아랫입술이 쭉 내밀어져 있어서 침울하게 조바심 나는 냄새가 솔솔 피어난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있던 병찬은 종수를 향해 책을 내밀었다. 종수는 화면에서 눈을 떼어내고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다. 뭐야? 하고 묻는 듯이 뾰족해진 눈이었다. 제가 뛰는 경기를 볼 때 최종수는 제일 가차 없다. 으이그. 또, 또 못 된 눈이다.

병찬은 핸드폰 화면을 째려보던 종수에게 푸근하게 안겼다. 종수가 쌀쌀맞게 말한다. “왜 이래, 박병찬.” 뒤에 꺼지라는 말은 안 붙네. 귀여운 짜식. 병찬은 손끝으로 눈을 꾹꾹 만지고 피곤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침대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종수야 이거 읽어줘 봐. 형 노안 와서 눈이 뻑뻑해.”

살다 보면 언젠가 노안이 오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아양을 떨어대는 연상의 연인이 힘에 겨워 종수는 어깨로 병찬을 밀어냈다. 병찬은 꿋꿋하다. 이 정도로 밀려나지 않는다. 손으로 움킨 도톰한 이불을 넓게 펼쳐 종수의 가슴 위로 이불을 둘러주었다. 종수는 안겨오는 병찬을 모른 척하고 핸드폰을 본다.

볼살이 쑥 빠진 뺨과 높은 콧대. 발그스름한 입술 아래의 깨끗이 면도한 민낯. 병찬은 종수의 얼굴을 붙잡고 뽀뽀해버리려다가 참아냈다. 연하의 남자친구의 옆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병찬은 제 과거의 어느 날과 조우한다.

이전의 기억 중 ‘정말로 농구를 잘하던 감각’은 병찬에게 거의 다 잊혔다. 그 감각은 사라졌는데 기억하는 상황은 또렷하다. 뭐랄까, 그건. 자신이 농구공 자석이 된 느낌이었다. 노란 유니폼을 입은 병찬이 손을 뻗으면 거기에 공이 달라붙었다. 백코트로 달려가 고개를 젖히면 그곳에 공이 날아와 있기도 했다. 빛나던 재능, 화려한 센스, 다른 친구들에게 으스댈 순 없지만 스스로가 잘한다는 확신. 중학교 시절을 더듬어 떠올리는 데에도 병찬은 못내 민망하고 씁쓸해진다.

그 다음엔 병찬의 현재. 지금 박병찬은 성실하게 노력하는 농구를 하는 중이다. 잘해왔던 모습을 떠올리면 병찬은 분명히 잘하게 된다. 아쉬웠던 경기에서도 기어이 제가 잘한 점을 뽑아낸다. 점수판의 숫자가 지지부진하던 날이나 운이 따르지 않는 날이 왜 없겠나. 그렇지만 상대 팀을 제치고 짜릿하게 덩크를 넣고 림을 잡은 채 두 발로 살짝 내려오는 느낌마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병찬은 농구와 하던 힘겨루기를 관뒀다. 소위 밀당이 성질에 안 맞았다. 그냥 앞뒤 가리지 않고 농구를 마구마구 좋아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생 때에도 잘 되지 않았지만 요즘은 제법 아무 생각 없이 농구를 좋아한다. 앞으로도 더더욱 농구를 좋아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농구를 좋아할 수 없게 된다면? ……아휴, 뭘 그런 걸 벌써 생각해. 그건 그런 날이 왔을 때 생각하면 된다.

그런 병찬과 다르게 종수는 자신이 제일 못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 실패를 보상하듯 농구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농구를 못했던 저 경기를 땔감으로 삼아 제 안의 불을 붙이고 재가 될 때까지 뛰는 타입. 최종수는 장도고등학교 농구부에서 뛰던 때엔 국내에 존재하지도 않는 전설적인 인물을 만들어 자신의 동기부여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게 아직도 종수에게 효과가 유효했다. 종수의 농구 자체를 향한 질투, 열등감, 불안……. 이그, 최종수. 피곤하지도 않나. 병찬은 애인의 불같은 성정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혀를 내두른다. 농구도 최종수도 뭉뚱그려 좋아해버린다.

종수의 품에 안겨 책등에 적힌 제목을 바라보던 병찬은 손으로 종수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흠칫 놀란 종수가 병찬을 향해 꽥 소리를 지른다.

“아 진짜, 귀찮게 하지 말고 제발 저리 가.”

“넌 노안 온 형이 불쌍하지도 않냐? 유튜브 그만 보고 책 좀 읽어주라니깐.”

“처 자, 그냥.”

“어허, 우리 종수. 형님한테 말본새가 나쁘구나.”

병찬이 이불 속을 파고들어 종수를 간지럽힌다. 아 하지 마. 종수는 간지러워 하며 웃지 않는다. 고통스러워하듯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병찬의 손은 종수가 간지러워하는 겨드랑이와 목 뒤를 거쳐 허리 뒤쪽과 발바닥까지 손톱을 세워 살살살살 긁었다. 괴로워하던 종수는 병찬의 손을 피하려다가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 모습에 병찬이 아하하 웃었다. “안 다쳤어, 종수야?” 이불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병찬에게 종수가 꽥 소리쳤다. “하지 말랬지!” 평소 조근조근 말하는 종수의 목구멍에서 터진 날벼락 같은 목소리.

“너 손가락 분질러 버릴 거야, 진짜!”

외치고도 본인이 더 놀랐는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실수인 척 밟아서 네 손가락 분질러 버린다.’는 말은 트래쉬 토크 레퍼토리 중 하나였고 종수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잦은 빈도로 병찬이 코트 위에서 듣는 말이었다.

병찬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종수가 제 커다란 손으로 입까지 틀어막는다. 얼굴이 초 단위로 창백해졌다. 말이라는 게 무섭다. 뱉어버리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병찬은 침대 아래의 종수에게 손을 뻗었다. 종수가 안심할 수 있도록 미소도 잊지 않으며. 미안하고 쓸쓸해진 표정의 종수는 귀여운 맛이 있다. 이쯤 되면 박병찬 취향이 좀 위험한 건 아닐까 싶었다. 머쓱해진 종수는 연인의 손을 잡아 쥐고 침대로 올라왔다. “박병찬 진짜 열받아…….” 종수는 왜 자신이 이 남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병찬은 일으켜 세운 종수의 어깨를 손으로 톡톡거리며 말했다.

“어우, 종수 네가 너무 놀라니까 내가 다 당황스럽네. 괜찮아, 괜찮아. 운동선수는 그런 기세가 있어야지.”

“박병찬. 너 왜 자꾸…… 자꾸 나 건드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뭐래냐. 최종수가 하지 말라는 거 전부 다― 들어줬으면 이 형아는 너랑 연애도 못 했어, 인마.”

“지금 그런 얘기하는 거 아니잖아.”

“엉, 시끄럽고. 형아한테 나쁜말 한 최종수는 이제 핸드폰 그만 보고 책이나 읽어줘.”

결국 국가대표 농구선수 최종수의 보이스로 책에 인쇄된 문장을 읽는다. 박병찬 1인 한정 오디오북 서비스. 병찬은 평소와 다르게 최종수의 왼쪽 팔 안쪽으로 몸을 구겨 넣고 가슴과 어깨 사이에 뺨을 댄다. 병찬이 읽고 있던 책은 일본 작가가 쓴 유명한 소설이었다.

역시나 노안 어쩌고는 뻥이다. 책을 읽다 보니 종수도 대충 알아챈 느낌이었다. 박병찬 구라쟁이. 속으로 말을 삼킨다.

두 사람은 하나로 자라나는 두 그루의 나무처럼 붙어 있다. 병찬은 종수의 가슴에 귀를 댄다. 최종수의 몸통에서 진동하는 목소리와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밴드음악에 깔리는 베이스처럼 무겁고 힘차게 들려온다. 병찬의 입매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종수가 질러버린 말에 병찬은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뭐 최종수가 성질 못 이겨서 소리 지르는 게 한 두 번인가. 웃기지도 않지만 고작 이 정도로 마음에 상처 입으면 최종수랑 길게 연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병찬은 꽤 강한 편이다. 박병찬이 심약했다면 쌍용기 전국고교농구대회에서 만난 장도고 에이스 최종수에게 “쿠크다스 X아.” 라는 말을 들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야 했다.

종수는 책을 계속 읽는다. 듣기 좋은 종수의 음성이 책을 읽을 때엔 억양이 딱딱해진다. 병찬은 또박또박 읽는 종수의 목소리에 배꼽 아래와 발가락 사이사이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거 다 읽힌 다음엔 저쪽 방에 꽂혀 있는 영어로 된 원서 아무거나 갖고 와서 읽어달라고 해야지…….

종수는 제 옷 위로 병찬의 호흡이 닿는 걸 느끼며 문장을 느릿느릿 읽어 내려간다. 이미 병찬의 눈은 페이지 끝에 가닿았다.

“종수야. 방금 대사 실감나게 연기해줘.”

“싫어.”

양말

이곳 최종수와 박병찬이 함께 살고 있는 집. 종수네 부모님이 대출도 없이 전세 계약으로 구해주신 서울 소재지 30평대 방 세 개짜리 구축 아파트의 503호.

종수가 계약금을 넣었다고 말한 이틀 뒤, 병찬도 이 집을 보러 왔었다. 부동산 소장이 병찬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곧 아파트 단지 내 엘리베이터가 전부 교체된다고, 어쩌다 이틀 씩 수리하기는 하는데 어차피 두 분이 들어가는 집은 저층이라 괜찮지 않느냐며, 이 집에 오래 살았던 주인 부부가 정말 양반들이라 집도 깨끗하고 쓰던 가전도 몇 대 팔고 간다고, 집이 살짝 오래되긴 했지만 전세보증보험도 들 수 있고, 무엇보다 구축이라 방음이 좋아서 농구선수 두 명이 맨발로 거실을 돌아다녀도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병찬은 그저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종수와 같이 살기로 했을 때 머릿속으로 그린 동거와는 사뭇 비껴나간 결과였다. 방 세 개짜리 30평대 아파트. 병찬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아파트 관리비는 약 25만원. 세대 내 수도세와 전기세 등등 모두 계산 후 관리비에 포함된 금액이다. 매달 최종수가 날짜에 맞춰서 통장에 자동이체를 걸어뒀댄다. 병찬은 즐거우면서도 걱정스럽다. 왜 이렇게 나 혼자만 꿀 빠는 것 같지? 종수가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해 보여서 그랬다.

에어컨과 세탁기는 오래 되었지만 깨끗하게 썼다며 집주인이 거저 주듯이 싸게 팔았고, 냉장고랑 서큘레이터는 또 새로 샀다고 최종수가 사진을 덜렁 보내온다. 종수는 자꾸 어딜 혼자 종종종종 다녔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들떴다.

자신과 함께 살 집을 최종수가 부모님과 보러 다니고 혼자서 계약하고 올 줄 알았으면 병찬은 같이 안 살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이제 와서 네가 독단적으로 행동한 게 싫다, 같이 사는 사람은 우리인데 왜 너희 부모님이 개입하시냐, 네가 어린애냐…… 그런 가오 빠지는 말은 하지 않는다. 병찬이 어떻게 말해도 종수는 커다란 눈만 끔뻑이면서 못 알아 들을 테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해도 박병찬의 마음은 찜찜하다. 병찬의 결정이란 서큘레이터 디자인을 고르는 정도다.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 병찬은 뭘 해야 하나.

생활하면서 드는 자잘한 금액을 병찬이 내려고 하는데 최종수의 식비가 만만찮다. 종수가 한 달 동안 식비에 쓰는 카드 값을 듣고 병찬은 놀라지 않으려 했다. 다시 정신 차리고 계산하니, 그 정도는 박병찬의 연봉으로 감당 가능한 수준이었다.

병찬 자신에게는 달리 큰 즐거움도 없는 식사지만 최종수 한 명을 위해서 기꺼이 참여한다. 농구선수 두 사람의 식비 결제하기……. 이건 무조건 박병찬 손해겠지만.

“종수야. 너 지금 당장 폰에서 배달 어플 지워. 내 폰에서 내 카드로만 결제하게.” 병찬이 늠름하게 어깨를 펴며 말하자 종수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뭔 소리야. 너 없을 때 난 어떻게 주문해서 밥 먹으라고.”

*

종수가 계약한 집은 좋았다. 정확히는 나쁠 게 하나도 없는 집이었다. 인천 한곳에서 어릴 때부터 성인 초반까지를 보내온 병찬도 사람들이 어째서 넓고 좋은 집에 목숨을 거는 지도 알 듯하다. 이곳에서 종수랑 지낸다. 그러자 휑뎅그렁한 집도 아늑하게 느껴졌다. 병찬이 종수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집안일은 내가 다 할게.”

“뭐? 왜? 너 청소 같은 집안일 잘 해? 내가 전에 너 원룸 개 드럽게 사는 거 보고 얼마나 충격……”

“그…… 형아에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지 않겠니.”

병찬은 가슴에 손을 얹고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썩 안 내키겠지만 일단 해보는 거지. 나도 너무 어렵다고 느껴지거나 내가 열심히 해도 네 마음에 안 차면 다시 조율해보고. 그런데 종수야, 형아는 한다면 하는 남자다.”

“박병찬 네가 한다면 하는 남자인 게 뭐가 중요해?”

그렇게 병찬은 이 집에 제 옷만 넣은 캐리어 하나만 덜렁 들고 왔다. 병찬은 종수와 살기로 결정하면서 무엇을 상상하고 원했던가. 이제 그런 건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

*

베란다에 세워둔 빨래건조대 위로 널어놓은 양말과 수건을 손으로 만져본다. 오늘 햇볕이 좋더니 빨래가 까슬하게 다 말랐다. 병찬은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마른 옷과 수건을 담아 거실 안으로 돌아온다. 종수는 이미 거실 바닥에 앉아서 병찬이 마른 빨래를 바닥에 놓아두길 기다리고 있다. 병찬이 종수 앞에 마른 빨래를 내려놓는다. 운동하는 남자 두 명이라 젖은 옷이나 수건이 많아 매일 세탁기를 돌렸다.

“어이 친절한 최종수 씨, 안 비키냐. 내가 한다니까?”

“너 전에 내 셔츠 뜨거운 물로 빨아서 작아졌잖아. 하나하나 다 검사해야 해.”

“아…… 네네 그러셔요.”

베란다에는 작은 통돌이 세탁기가 있고 건조기는 따로 없었다. 건조기는 여름과 겨울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가전이라고 종수가 강조해서 말했지만 병찬은 듣는 척도 안 했다. “요즘은 실내 건조 가능한 세탁세제 따로 나와서 여름에 빨래 널어둬도 괜찮다니까?” 듣는 척 안 했더니 종수가 바로 어제 통보했다. 요즘은 가전도 구독할 수 있다며, 빨래 건조기를 대여하기로 했으니 이틀 뒤에 설치기사님이 오신다고 했다.

이 빨래는 병찬이 손수 건조대에 널은 마지막 빨래였다. 병찬은 베란다로 돌아가 건조대를 접어 구석에 세워두고 거실로 돌아온다. 종수는 이미 수건을 개고 있었다.

“종수야. 이렇게 사람이 점점 기계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면 어떡하냐.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박병찬 너 혼자 타임머신 타고 석기시대 가서 고인돌 쌓으면서 살던지.”

“그러다가 나중에 농구하는 기계가 생겨서 걔네끼리 경기하면 너 어떡할 거야.”

“농구하는 기계가 왜 생겨. 스포츠는 사람이 하는 건데.”

“그럼 이세돌이랑 알파고는 바둑을 왜 뒀는데?”

투닥투닥 말을 이어가며 꼬투리가 길어진다. 매일같이 운동하며 아침저녁으로 씻어대니 수건과 속옷이 산처럼 쌓였다. 종수는 수건을 두 개씩 썼다. 몸 닦는 수건 하나, 얼굴을 닦고 머리를 말리는 수건 하나. 병찬은 그런 거 없고 수건 하나로 머리카락과 몸과 발바닥까지 전부 닦았다. 수건은 몇 개를 사도 모자라다.

딴 생각에 빠진 병찬은 자신이 집어든 하얀 양말에 뭉친 먼지가 묻은 줄 알고 손바닥으로 탈탈 털었다. 그러나 먼지가 떨어지지 않는다. 병찬이 양말을 다시 본다. 그건 구멍이었다. 깨끗한 흰 양말에 안쪽 천이 드러나 보일 만큼 큰 구멍이 난 모양새다. 이건 종수의 양말이었다. 매끈하고 도톰한 게, 얼마 전에 잔뜩 산 새 양말 중 하나였다. 병찬이 종수에게 구멍 난 양말을 내밀었다.

……종수야. 너 이거, 양말 빵꾸 났다.”

종수는 수건을 개다가 얼굴을 들었다.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건지 잠시 멍한 얼굴을 하다가 서서히 수줍음이 과해서 거북해진 표정으로 변했다. 종수의 귀가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병찬의 손에서 양말을 홱 채갔다.

“버릴 거야.”

“응?”

“버릴 거라고.”

최종수 또 왜 저래. 이게 부끄러워 할 일이야? 병찬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허, 벌린다. 종수가 제 옆으로 밀어둔 양말을 병찬이 슬금슬금 다가가서 가져왔다. “으쌰.” 종수가 병찬을 지겹다는 듯 노려보았지만 곧 새침하게 시선을 거두고 묵묵히 빨래를 갠다.

종수가 버리겠다는 양말은 새 것이었다. 구매했던 양말의 질이 나빴던 걸까. 병찬이 만져보면 멀쩡하다. 구멍이 났지만.

“야아, 멀쩡한 양말인데 왜 버려? 이거 얼마 전에 네가 인터넷으로 한 무더기 주문한 양말 아니야?”

“됐어. 구멍 난 양말을 어떻게 신어.”

“그게 뭔 소리야. 갑자기 또 최 도련님 빙의했네.”

종수의 구멍 난 양말을 제 쪽으로 가져온 병찬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구멍 난 가슴에에, 우리 추억이 흘러 넘쳐어어 흐어어 잡아보려해도오, 가슴을 막아도오……, 백지영의 총맞은 것처럼이다. 구멍 말고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노래 선곡에 종수는 미간을 꽉 찡그린다.

국산 양말이 질이 좋고 도톰하지만 종수의 발 모양새가 날 서다는 이유로 구멍이 날 때도 있었다.

종수는 손도 크고 발도 크다. 손가락도 길고 매일 아침 가지런히 정돈해두는 손톱도 크고 발가락은 뭐 말할 것도 없다. 농구는 뛰기도 많이 뛰는데 버티는 힘도 필요하다. 가만히 서서 상대 팀이 힘으로 밀어붙일 때 잘 버텨내고, 그들을 추월해야 한다. 농구화 안쪽에서 양말은 이리 쓸리고 저리 쓸려 결국 최종수가 뭘 크게 잘못하지 않아도 구멍이 뚫린다.

병찬은 마른 빨래 속에서 종수의 구멍 난 양말을 찾기 시작한다. 흠,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종수야. 형아가 양말을 단단히 꿰매주마.”

“뭐? 됐다니까. 대량으로 산 양말이라 그럴 필요 없어.”

종수의 말은 또 못 들은 척 하고 병찬은 바로 핸드폰을 들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야. 저녁 드셨죠.”

야 박병찬 넌 진짜 내 말이 말 같지가 않느냐고. 종수는 마른 수건에 이마를 대고 끄응, 앓는 소리를 참는다.

“나? 나도 잘 챙겨 먹었지. 응응. 아 엄마 드라마 보는 중이야? 아 그래 그거 재미있다더라. 어, 엄마 나 바느질해야 할 일 생겼는데 반짇고리? 그런 건 어디서 팔아요? 다이소? 아하 다이소에 파는구나. 봉제 인형 파는 구역? 엉 알겠어. 찾아보고 없으면 거기 직원한테 물어보지 뭐. 아 별 건 아니고 양말에 구멍이 나서요. 바느질? 아 내가 쫌 하지. 걱정 마. 응, 반짇고리 하나 사두면 잘 쓰겠죠. 네, 엄마도요. 또 전화 할게.”

목소리가 퍽 살갑다. 병찬은 통화를 끊고 핸드폰으로 시계를 본다. 이제 막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매장 문이 닫힐 때까지 시간은 넉넉했고, 세대 수 많은 구축 아파트 주변이라 근처 5분 거리에 삼층짜리 다이소가 있었다.

“종수야. 다이소 다녀오자.”

“너나 가.”

“그래. 빨래 다 개고 나가자. 너 먼저 옷 갈아입어도 돼.”

“안 간다고.”

“야 우리 다이소에서 뭐 살 거 없었나? 최종수 너 빨래 개지 말고 유튜브에 다이소 추천템이나 찾아 봐.”

병찬은 집밖을 나서기 전에 종수와 함께 스마트TV를 켰고, 한 주부 크리에이터 유튜브 채널에 쫙 정리된 ‘다이소 추천템 종결편’을 끝까지 다 보고 나서야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미 시간이 9시에 가까웠다. 두 사람은 서둘러 집밖으로 나왔다.

*

병찬은 다이소에 반짇고리 하나 사러 왔으면서 매장운영이 끝났다는 안내음성이 나올 때까지 집에 갈 생각을 안했다. “슬슬 집에 가볼까?” 병찬은 장바구니에 자잘한 물건을 담고 셀프계산대로 향했다. 물건 집고 바코드 찍고 삑삑삑삑 하더니 2만8천 원이나 카드를 긁었다. 제품명이 쭉 적힌 흰 영수증이 목도리처럼 길었다.

가로등이 비치는 아스팔트 도로를 걸으며 박병찬은 여전히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을 흥얼거린다.

밤바람이 끈적하긴 해도 한결 선선해졌다. 도로에 차 한 대가 느리게 지나갔다. 신호가 바뀌자 라이더박스를 매단 오토바이가 여기저기서 질주한다. 불어오는 바람이 좋아서 병찬은 낮게 콧노래를 부른다. 한손에는 집에서 챙겨온 장바구니, 다른 한 손은 종수와 손등이 스칠 만큼의 거리에 있다. 도로에 차가 몇 대 지나가자 종수는 나란히 선 병찬에게서 한 걸음 물러선다. 병찬은 별로 개의치 않아 보인다.

“종수야. 아이스크림 먹을래?”

종수를 거리에 내버려두고 병찬은 쌩하니 무인으로 운영되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갔다. 어차피 갈 거면서 왜 물어보는 건데? 종수는 꿍얼대며 병찬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혼자서 이 길을 지날 땐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는데, 둘이서 같이 산책하면 꼭 저 가게를 들리게 된다. 아무것도 사지 않더라도 새로운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병찬은 가게 문 앞에 매직으로 커다랗게 적힌 경고문을 읽고는 노인처럼 혀를 끌끌 찼다. “으휴, 요즘 이런 무인가게에 도둑질하는 사람이 많아서 점주들이 진짜 머리 아프다더라.”

종수는 체중을 유지하고 근육을 관리하는 중에는 단 음식은 거의 먹지 않았지만 병찬이 아이스크림 먹자고 말하면 졸래졸래 따라간다. 함께 아이스크림을 고른다. 병찬은 종수와 함께 살게 된 이후로 이런 과자들을 달갑게 군것질했다.

메로나를 고른 병찬은 종수가 고른 소다맛 뽕따 꼭지를 달라고 졸랐다. 종수가 뚝 분질러서 병찬에게 준다.

달달한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찬찬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천둥이 친다. 눈이 번쩍 뜨인다. 병찬이 핥던 아이스크림을 한 번에 먹어치웠다. “뭐야. 방금 번개 쳤나?” 한쪽 손에 장바구니와 아이스크림 막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종수의 손을 잡는다. 습기를 머금은 써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게으르게 머무르던 계절도 바싹 정신 차리고 한 걸음씩 멀어진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어휴, 종수야. 비 오겠다. 얼른 들어가자.”

아파트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 병찬은 종수에게 요즘 진짜 날씨가 이상하다고 투덜거렸다. 너도 차 없이 외출할 때는 날이 맑더라도 삼단우산을 꼭 챙겨 다니라고 거듭 말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있다. 종수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잡은 손이 엘리베이터 CCTV에 잡히는 건 아닐까. 눈을 옆으로 굴려본다. 오래 잘 사귀고 있지만 가끔 밑도 끝도 없이 종수의 마음은 싱숭생숭해졌다. 대한민국 농구선수인 자신과 병찬을 이 아파트 세대의 누구도 모르면 좋겠는데 키 때문에 다 망했다.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병찬은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인다. 습기 탓에 삐질삐질 땀 흘리는 병찬의 옆얼굴은 진지하고 권태롭다.

구축 아파트의 오래 된 엘리베이터가 웅웅 소리 내며 올라간다. 내부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저층이라 눈 깜짝할 새 도착한다. 끼릭끼릭 기묘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종수의 먹다 만 소다맛 뽕따는 손 안에서 다 녹아버렸다. 미끈한 쭈쭈바 튜브 포장 안에서 형태를 잃은 아이스크림은 하늘빛으로 찰랑찰랑 흔들렸다.

*

핸드폰 알람 소리에 종수가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손 뻗어 알람을 확인하고 끈다. 종수의 옆에 누워 있는 병찬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꿈쩍을 않았다. 침대에서 께느른하게 내려 선 종수는 작게 하품을 했다. 방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몽사몽이라 내딛는 걸음도 흔들거렸다. 거실을 지나쳐 화장실을 가려는데 식탁 위에 다섯 개의 하얀 거죽이 납작한 생선처럼 졸졸이 놓여 있었다.

종수는 이게 뭔가 했다. 병찬이 새벽 늦은 시간까지 침대로 오지 않아서 종수는 먼저 자버렸고, 지금 병찬보다 먼저 일어나서 양말 다섯 짝을 보고 있다. 큰소리 뻥뻥 치더니 병찬은 엉성하고 조잡한 솜씨로 종수의 양말 구멍을 꿰매뒀다. 흰 양말에 빨간색 실을 삐뚤빼뚤 박아 넣었다. 종수가 양말 안으로 손을 집어 넣어본다. 구멍은 막혀 있었다. 일단은. 기능은 제대로 하는데 예쁘지가 않았다. 뭐야. 왜 하필 빨간색 실로 꿰맨 건지. 같이 반짇고리를 고를 땐 분명 무난한 색상의 실이 있는 걸 종수도 보았는데.

종수는 그냥 하염없이 양말을 내려다보았다. 뒷목이 아프다. 방금 눈을 뜬 탓에 시간감각도 안개처럼 불투명했다.

새빨간 존재를 과도하게 드러내는 하얀 양말이 다섯 짝. 빨간 실은 구멍 외부의 영역까지도 침범했다. 이게 뭐야. 바보? 라고 쓴 건가. 종수는 눈을 비비며 양말을 본다. 이것 봐, 박병찬이 양말로 장난칠 줄 알았어, 내가…….

병찬은 다이소에서 세 종류의 바늘과 알록달록한 실이 담긴 반짇고리를 샀다. 종수에게는 버려도 되는 양말이었는데. 그러려고 애초에 많이 산 양말인데. 그러나 앞으로도 제 옷과 양말에 구멍이 나면 박병찬이 꿰매어 줄 것이다. 어쩌면 종수의 구멍 난 가슴도 그 형이 채워 줄 거라고 믿게 된다. 이 허술한 손재주가 나중에는 좀 볼 만 해지려나.

종수가 한참을 들여다보니까 그건 하트였다. 정확히는 하트 모양으로 기우려고 노력한 박병찬의 흔적이었다.

데이트 플랜

병찬의 생각보다 남자친구 최종수는 낭만주의자였다. 핸드폰 화면은 종수의 손바닥보다 작았지만 그 속에 펼쳐진 우주와 자연을 영상으로나마 탐험하길 좋아하고, 거대한 세계에서 작고 초라하고 막막한 인간됨을 경험했다. 준향대 농구부 동기 성준수와는 또 다른 낭만이었다.

종수는 발아래에서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감겨오는 먹먹한 감동을 연인인 병찬과 나누고 싶어 했다. 광활한 낭만과 강렬한 전율. 뭐 그런 것이려나. 병찬은 솔직히 농구 외에는 무엇에도 큰 관심이 없었지만 때문에 뭐든 오케이였다. 좋은 말로는 사람이 감정기복이 적은 만큼 평안하고 무던하다. 나쁜 말로는 냉담한 구석이 있었다.

병찬은 종수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걸 선호했고, 둘의 데이트 코스는 종수가 맡아서 짜는 걸로 굳어졌다.

병찬도 딱 한 번 데이트 플랜을 시도해봤다. 예상한 결과로, 연하 남자친구의 ‘데이트’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

민트맛 치약 냄새를 폴폴 풍기며 식탁 맞은편에 앉은 종수가 병찬에게, “나 혼자 너랑 놀고 싶어? 가끔은 네가 먼저 계획 짜서 나한테 말해줘.” 라고 어딘가 쌀쌀하고 외로운 얼굴로 말한 적 있다. 병찬은 또 멋쩍은 얼굴이다. 무슨 계획? 하고 되물으니 데이트 계획이라고 답이 돌아온다.

눅눅해진 시리얼을 퍼먹고 있던 병찬은 흰 우유가 묻은 입술을 티슈로 닦으며 “아이고 우리 종수. 형아랑 놀고 싶었구나.” 하고 말꼬리를 길게 늘였고 또 종수에게 욕먹었다.

20분 뒤 병찬이 침대 방에 농구공이랑 누워있는 종수에게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일어나서 씻기. 집에서 대충 아침 먹기. 종수 컨디션 보고( 중요☆) 근처 수목원 가기. 잘생긴 종수 사진 100장 찍어주기. 거기서 점심 먹기. 커피 마시기. 디저트 먹으면서 종수 카톡 프사 골라주기. 서울 돌아와서 헬스장 같이 가기. 헬스장 근처 식당에서 저녁 먹기. 집에 와서 넷플릭스로 영화 보기. 같이 푹 자기♥😄오예~

오예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비오는 낮

날씨가 우중충하게 흐려서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이끼 낀 회색빛 숲속을 걷는 기분에 병찬이 망설이듯 걸음을 멈춘다. 종수와 병찬은 외부에서 볼일을 마친 후 여유롭게 데이트 중이었다. 현재 시간은 막 정오를 지난다.

병찬은 핸드폰 날씨 어플을 열어 확인했다. 습기 찬 바람을 만끽하면서도 우산 생각을 못했는데, 부실부실 부풀어 오르는 종수 머리카락을 보니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플에서 상세히 지역을 설정해도 날이 흐리다고만 표기되어 있다. 비 소식은 없었지만 느낌이 별로 좋지 않다. 병찬은 핸드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었다. 음울하게 컴컴한 하늘을 보며 뺨을 긁었다.

“야 종수야. 비 오겠는데?”

“어…… 그래도 오후 여섯 시까진 비 안 온댔는데.”

“그래?”

대화가 끝나자마자 아스팔트 위로 큼지막한 동그라미가 뚝, 떨어진다. 병찬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빗물이 몇 초 만에 병찬의 얼굴 위로 야단스럽게 쏟아진다.

병찬이 종수의 팔목을 붙잡고 가로수 밑에서 비를 피했다. 와, 이게 뭐야? 빗물이 굵어 한참 내릴 것 같다. 병찬은 가로수 나뭇잎 사이로 둑둑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말했다.

“종수야 안 되겠다. 우산 사러 편의점 다녀올게.”

“같이 가.”

“넌 정말 형아의 희생정신을 우습게 보는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병찬이 씩 웃었다.

병찬은 종수와 함께 빗속에서 꼴사납게 전력질주를 한다. 쭉 가다가 골목 꺾어서 왼쪽 세 번째 블록. 두 사람은 그나마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온다. 종수는 제 손바닥으로 어정쩡하게 머리를 가려보았지만 노력한 흔적도 없이 어깨부터 바짓단까지 싹 다 젖었다.

요가

종수의 요가수업 1일차. 병찬이 차를 몰고 요가 센터 앞으로 왔다. 종수가 등록한 요가센터는 신축 아파트 단지가 많은 크고 허름한 건물의 3층이었다. 2층에는 수학과 영어 학원이, 4층에는 뷰티 에스테틱 간판이 걸려 있었다. 건물 뒤 지정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병찬은 종수에게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데리러 왔엉♥] 시간을 확인하니 수업 마치기 3분이다.

여전히 종수는 병찬이 요가 강습에 관심가지는 걸 떨떠름해서 강습 마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오는 것에도 긴 시간을 들여 설득해야 했다. 요 며칠 최종수 성질머리 왜 이러는지 아시는 분? 병찬은 손으로 뒷덜미를 긁는다.

건물 바깥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멀대 같이 큼지막한 남자가 나왔다. 주변을 살피며 두리번거리는데 그 어깨에 정수리도 닿지 않는 여자 둘이 지나간다. 눈이라도 마주친 듯 남자에게 가벼이 목례한다. 남자도 덩달아 어수룩한 몸짓으로 꾸벅 인사했다. 최종수다. 병찬이 차창을 내리고 이름을 불렀다.

병찬의 차 조수석에 올라탄 종수는 뺨이 발그스름했다. 병찬이 빙그레 웃으며 종수를 흘깃거렸다. 차를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우리 쫑수. 피곤하지. 저녁으로 치킨 먹을래? 집 앞에 새로 생긴 곳 가볼까?”

“어, 좋아…….”

종수는 조수석에 푹 늘어져 있었고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랑말랑해졌다. 헬스클럽에서 근력운동 후에 유산소운동까지 마치고 나왔을 때의 표정과 살짝 비슷하다. 병찬은 빨간 불에 차를 멈춘다. 오, 괜찮았던 모양인데? 같은 클래스 사람들이랑 인사도 나누고? 종수의 나른한 얼굴에 차창 너머 쏟아져 들어오는 빨간 불빛이 스며들었다.

설거지

종수와 함께 살게 된 이후 병찬이 제일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은 싱크대였다.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구축 아파트 싱크대는 과장을 조금 포함해서, 병찬의 골반보다 아래에 위치했다. 맞춤으로 제작되지 않는 이상 농구선수들의 체구와 신장에 맞춰진 가구나 선반은 잘 없다. 더군다나 구축 아파트 싱크대의 높이는 대한민국 여성 평균 키에 맞춰져 제작되었다.

병찬은 다리를 넓게 벌리거나 허리를 숙여서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를 빨리 끝낼 수 있도록 갖은 수를 쓴다.

병찬은 제가 쓰는 접시나 컵은 물로 헹구고 탈탈 털어서 다시 썼다. 종수가 물을 부어 마셨던 유리컵도, 식사가 끝나면 접시와 그릇도 바로 씻어버렸다. 때문에 그릇이나 수저가 부족한 적 없고, 한 여름에도 싱크대 근처에 벌레가 꼬이지도 않았다. 불편함을 토대로 나름의 체계를 잘 꾸려나간다.

종수는 함께 살게 된 병찬이 설거지를 할 때에만 살림을 꽤 잘하는 사람처럼 느껴져 한참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무리할 필요 없는데.”

“뭐가? 나? 종수야 너 방금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야?”

“야, 그럼 내가 지금 혼잣말 하고 있겠냐?”

병찬은 설거지를 끝낸 후 젖은 손을 가볍게 털었다. 얼마 전에 고무장갑이 찢어져 버렸는데 새로 사는 일을 몇 번이고 깜빡했다. 마른 행주에 손을 닦고 병찬은 뒤를 돌았다. 종수와 병찬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최종수 쟤는 내가 싱크대 앞에만 서 있으면 꼭 저렇게 간식 기다리는 고양이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더라…….

소파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으며 종수는 눈빛으로 병찬을 부른다. 이리 와, 박병찬. 뭐 그런 텔레파시를 시도하는 듯했다. 병찬은 소파로 다가와 종수 곁에 널브러진다.

“아이고, 종수야. 싱크대 낮아서 진짜 허리가 아프거든? 넌 혼자 있을 때 말고는 하지 말어라. 아니다. 웬만해서는 혼자 있을 때도 하지 마. 내가 나중에 몰아서 할 테니까.”

“식기세척기 사자고 했잖아.”

“왜? 네가 식기세척기 사면 나는 어떡하라고? 설거지 끝내고 최종수한테 칭얼대기를 못하게 되는데?”

병찬은 종수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며 크크큭 웃었다.

술과 춤

같이 살게 된 지금까지도 종수는 병찬의 주량을 모른다. 병찬도 취할 때까지 마셔보질 않아서 모른댄다. 종수와 함께 술을 마셔도 맥주 한 캔만 기분 좋게 비워냈다. 구단 사람들과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날도 있었지만, 술 권하는 문화가 점점 줄어들어 그나마 살 것 같다고 중얼대던 날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랑 섞여서 노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박병찬은 최종수 옆에서 사이다만 홀짝거린다. 병찬이 음식을 씹고 쩝쩝대며 말한다.

“종수야. 나 금훈이 형한테 손절 당했다?”

“왜? 어쩌다가?”

“뭐라더라. 내가 여자들이랑 노는 걸 안 좋아해서 나랑 술 마시는 게 재미없대. 나 참, 그 형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종수는 병찬이 밤놀이 문화에 관심 없다는 점이 좋았다. 연애 초부터 그러기에, 내숭 떠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병찬은 자긴 정말 그런 쪽으론 관심 없다며 억울해 했다.

종수의 머릿속엔 밤, 술, 춤, 빛나는 네온사인,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 타인 간 적절한 단계를 뛰어넘고 무시하는 스킨쉽 어쩌고저쩌고가 하나의 범주에 속해 있었다. 종수도 그런 쪽으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학생 때에는 학생이라고, 프로 농구선수가 되었을 땐 바른 몸가짐을 생활화해야 컨디션 조절을 잘 하는 거라고 대답하며. 아마도 태어나길 그런 문화와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종수는 당연히 박병찬도 한밤중 노래에 맞춰 춤추는 일에 전혀 흥미가 없을 거라고, 아주 막연하게 믿고 있었다.

*

구단 회식자리에 오기 전부터 종수는 머리가 아팠다. 술을 거의 안 마셨는데도 알코올이 속에 들어올 때마다 손발이 저린 느낌이 들었다. 입맛은 없는데 많이 움직였던 터라 배가 고팠다. 종수는 평소보다 더 얌전했다. 상추에 고기 두 점과 마늘과 무생채와 김치와 밥을 조금씩 얹어 쌈을 싸먹는다. 소처럼 오래 씹고 삼켰다. 누군가 종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종수는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계속 입을 오물거렸다.

“새끼야, 너는 왜 이렇게 혼자 고고한 척 해서 분위기를 망쳐? 하여간 재미없는 자식.”

구단 선배 중 누군가 종수에게 그런 말을 했다. 맥락을 알 수가 없어서 종수는 입안의 쌈을 질겅질겅 씹었다. 상추, 고기, 밥알, 고추장, 김치, 무생채, 양파절임이 각각 따로 놀았다. 감독님과 다른 선배들이 권한 술을 조금 마신 종수는 순간,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차반’을 보는 눈으로 옆자리의 선배를 내려다보았다. 종수의 도전적인 눈빛은 금방 지워졌다. 선배에게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종수는 입안의 음식물을 꿀꺽 삼킨다. 죄송하다고 웅얼거렸다.

2차까진 어영부영 따라갔는데 3차로 이동하던 중에 종수는 집으로 돌아왔다. 선배의 목소리가 동굴처럼 종수의 머릿속에서 윙윙 울렸다. 대응하지 못한 악의는 파도가 되어 몰아친다. 종수의 아래에 가라앉은 것들이 긁혀 올라왔다. 이전에는 이런 감정에 대비해뒀던 것 같은데.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도록 최종수는 아주 두꺼운 철벽을 둘렀는데. 어쩌다 종수는 이렇게 물러터지게 된 걸까. 바보가 된 기분이다.

집에는 토끼…… 아닌 그냥 박병찬이 종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찬은 해맑게 현관 신발장 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종수에게 웃어준다. “왔냐, 최종수―” 기분이 좋아보였다.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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