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훈여주] 변하지 않는 이름

01. 꿈의 시작

별의 바다 by 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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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따금 눈이 마주치던 여자애가 품 안에 곤히 잠들어있다.

심성훈은 여자의 내리깐 속눈썹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흐릿한 시야를 틔우며 눈꺼풀을 느릿하게 슴벅였다.

이상한 꿈이다. 말 한번 제대로 걸어본 적 없는 같은 반 여자애와 같은 침대에 누워 아침을 맞이하다니.

“으음….”

여주가 꾸물거리며 단단한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정말 이상한 꿈이다. 이런 건 바란 적이 없는데. 감히 상상하지 않았는데.

“여주…….”

성훈이 밀착하는 여자를 말리려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쿵쿵쿵. 늘 느리게만 뛰어 있는 줄도 몰랐던 심장이 제 존재를 알린다. 귀끝이 뜨겁고 머리로 열이 몰아쳐 손에 슬쩍 땀이 배어났다.

“잠시, 그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남몰래 좋아하던 같은 반 여자애가 난데없이 안기는데, 동요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터.

심성훈은 말아쥔 어깨를 갓 태어난 토끼처럼 대했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으니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손이 미끄러지자 여주는 간지러운지 옅게 움찔거렸다.

포옥. 얼굴이 가슴팍 한가운데로 오르자 부푼 뺨이 조금 눌렸다. 깜빡. 이번에 움직인 눈꺼풀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으음……. 응? 성훈 씨? 웬일로 벌써 일어났어요?”

“…….”

여주가 그의 이름을 알고, 부르며, 친근하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교실에서 언뜻 스칠 때마다 데인 것처럼 시선을 피하기 바빴는데. 제대로 바라본 적도 없어 조금 낯선 얼굴이 무척 가깝다. 망상으로 그리고 또 그린 얼굴은 코끝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보니 제 상상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실감하게 했다.

놀란 성훈은 무표정한 낯으로 눈만 깜빡였다.

가볍게 웃은 여주가 그의 가슴께에 뺨을 비비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상체를 일으켰다.

“잠이 덜 깼네요. 좀 더 잘래요? 쉬는 날이잖아요.”

정답이 있는 문제를 마주한 감각이다.

심성훈은 여주가 보는 ‘성훈 씨’가 자신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애초에 같은 침실에서 눈을 뜬다는 건 망상에서도 감히 꿈꾼 적 없는 일이다.

말을 고르느라 성훈이 대답하지 않자 여주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같이 사는 건가.

애초에 여주가 맞을까.

“성훈 씨~ 잘 거면 자고, 아침 먹을 거면 이리로 와요. 오늘 많이 피곤해요? 대답도 없고…….”

서운해 보여 성훈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침, 먹을… 래.”

“그럴 줄 알았어요.”

다행히 의심받지 않을 괜찮은 답이 나왔다.

가벼운 웃음소리에 안도한 성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이부자리를 말끔히 정돈했다. 그러다 협탁에 놓인 거울로 제 얼굴을 확인했다. ‘심성훈’이 맞다.

‘그렇다면 여주가 말한 ‘성훈 씨’ 역시 내가 맞을까…….‘

거울을 들고 침묵한 그의 뒤로 장난스러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성훈 씨!”

폴짝 뛴 여주는 거리낌 없이 성훈의 등을 끌어안았다. 달려드는 기척을 눈치채고 있던 덕에 기습에도 두 다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성훈은 거울 속 여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동그란 머리통, 허리를 가득 끌어안은 손. 함께할 식사.

아. 우린 연인이 됐구나, 결국.

의아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나 당장은 그렇게 여겼다. 어찌 되었든 우린 연인이 되었다고.

성훈이 옅게 웃었다.

“넘어지겠어.”

“성훈 씨가 받아줄 텐데요, 뭘. 이 정도도 못 버티고 어떻게 헌터를 해요?”

“…응. 네 말이 맞아.”

너의 ‘성훈 씨’가 나라면 분명 이렇게 대답했겠지.

심성훈은 여주의 손을 맞잡고 식탁으로 향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차는 햇살과 바람이 더없이 평화로웠다. 학교에선 이런 날에 반드시 졸음이 쏟아졌지만 지금은 졸리지 않았다. 지루하긴커녕 즐거웠다.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올 정도로.

“…그, 있잖아요.”

식사에 집중하던 여주가 그릇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여주의 그릇은 거의 비어 있었고, 성훈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응, 말해.”

“왜 자꾸 쳐다봐요?”

순간 바로 어제의 일이 떠올라 열이 화르륵 올랐다. 성훈은 어제도 그제도 대각선 뒷자리에 앉아 여주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저 시선이 자연스레 향했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시선을 돌려도 온몸의 신경이 그에게 곤두서는 듯했다.

…그래도 적당히 쳐다봤는데, 이번엔.

심성훈은 제 전부를 들킨 것처럼 당황했다. 겉으로는 그리 티가 나지 않았지만.

“아……. 미안.”

진지하고 멋쩍은 답에 여주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밀었다.

“미안하긴요, 우리 사이에. 그냥 농담이에요.”

달그락. 괜히 식기를 만지작거리던 성훈이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여주를 응시했다.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네? 갑자기요?”

확실히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심성훈은 그가 진짜 ‘성훈 씨’가 아니라는 걸 나서서 알릴 마음 따위 없었다. 그러니 질문은 빠른 상황 파악을 위한 수단이었다.

“…파트너, 죠? 좋은 파트너고 동료고…….”

“파트너…?”

하지만 연인을 제외한 답은 예상하지 못했다.

파트너? 남자 친구가 아니라 동료라고? 그런데 침대에서 같이 잤다고…?

두 사람은 눈을 떴을 때 옷을 전부 갖춰 입고 있었다. 반응을 차치하고도 다른 일은 없던 것 같다. 그렇다면 동료끼리 정말 같은 침대에서 잠만 잤다는…….

“너…….”

“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남자를 집에 함부로 들이지 말라고? 그 정도 말할 자격은 되나? 이 ‘성훈 씨’는 그에게 어디까지 간섭할 수 있지?

여주를 늘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아카데미의 심성훈은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답이 좀… 잘못 됐어요?”

여주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성훈이 식탁에 고개를 박고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탓에 볼 수 없었다.

“아니, 아니야.”

“…하하. 마저 먹을…까요?”

분위기를 환기하려 웃는 걸 보니 역시 못 참겠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지.

“여주…….”

말을 이으려는 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이내 점멸한다. 몸이 거대한 힘에 짓눌려 터질 것 같고, 동시에 끝없는 구렁에 빠지는 것 같다.

토할 것 같…….

“저기…….”

덜컹. 책걸상이 크게 흔들린다. 앉아 있는 곳은 식탁이 아니었다.

“점심시간…….”

“…….”

숨 쉬는 것도 잊은 성훈이 익숙한 목소리에 곧바로 상체를 세웠다. 엎드려 자며 꿈을 꾼 건지 몰라도 마주한 상대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교복을 입은 여주는 처음 말을 거는 같은 반 남자애가 어색한지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마워.”

끄덕. 대답만 기다린 듯 여주가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너…….”

성훈은 묻고 싶은 말이 남아있었다. 꿈속 헌터 여주에게 묻고 싶었던 말. 동시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사라지려는 여주에게 하고 싶은 말.

“다른 사람한테도 그래?”

“…응?”

다른 사람과도 같이 잠들 수 있어? 다른 사람도 이렇게 다정하게 깨워주는 거야?

울렁거린 감정은 또렷하지 않은 이성과 함께 더욱 날뛰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하게 했다.

꿈 좀 꿨다고….

자조적으로 웃은 성훈이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탓에 책상이 큰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조금 놀란 여주가 몇 걸음 물러났고, 숨을 삼킨 성훈은 그대로 뒷문으로 나갔다.

‘자고 있는데 깨워서 화가 났을까…….’

여주는 속이 상했다. 짝사랑하는 같은 반 남자애에게 그저 가볍게 말을 걸고 싶었을 뿐이다.

그 와중에도 자고 있을 땐 예민하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좋았다. 슬프고 비참한 동시에, 아주 조금 기쁘다. 그의 기억에 조금이나마 남을 것 같아서.

쿵. 문을 닫은 성훈은 곧바로 따라붙은 여러 개의 시선에 몸서리를 쳤다. 그의 아버지가 보낸 이들이다. 직전에 여주와 나눈 대화도 그들의 귀에 들어갔을 테다.

꿈속엔 너와 나. 단둘이었는데. 그 집엔 우리밖에 없었는데.

화가 난 듯 성큼 걷는 걸음이 보폭을 넓히며 조금씩 빨라진다. 좋아하는 여자를 지키려면 그와 가까워져서는 안 됐다. 사이를 의심할 만한 아까 같은 말은 더더욱.

동료든 연인이든 상관없으니…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성훈은 다시 같은 꿈을 꾼다면 질투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욕심부리지 않고 곁을 지킬 것이다.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을 누리면서.

“성훈 씨, 왜 말을 안 해요?”

“…….”

“불렀는데 아무 말도 안 해서…. 혹시 제가 말실수한 거면 말해줘요. 사과할게요.”

성훈은 너무 놀라면 반응이 느려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꿈이, 무의식처럼 흘러 다시 나타난 것이다.

분명 이번엔 잠들지 않았는데. 제대로 걷고 있었을 텐데.

심지어 꿈은 일시정지 후 다시 재생되는 것처럼 이어졌다. 여주는 여전히 입을 비죽이며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아…….”

뭔가 큰일이 난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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