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죽음의 모방. 1. 연단에 올라선 앙졸라스는 숨을 골랐다. 친애하는 동지들이여. 그 한 마디를 할 때에, 수백 개가 넘는 머리들 가운데 앙졸라스가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저기, 푸른 조끼를 입은 채 자신의 정 반대편에 앉아 있는 콩브페르. 어김없이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 그 눈을 볼 때마다
쿠르페락은 방금 청혼을 받았다. 혁명 전야의 날 파리 교외의 어느 성당에서. 사실 그런 것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법이다. 청년은 수백번의 청혼을 받았으나 거절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 그저 웃어 넘기기만을 즐겨 했었으니. 청혼한 상대마저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함께 웃어 넘겼으니. 그러나 이
─ 제가 들었던 이야기 하나를 해 드릴까요. 아니. 들은 것이 아니라. 보고 느꼈던 이야기 말입니다. 부족한 솜씨로 꾸며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게 있다면. 이것이 아주 좁은 의미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로망스지요. 거창한 단어를 덧붙일 것도 없습니다. 제가 보았던 것들에는 희망도, 영광
1.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¹ 잔여물을 남기지 않는 죽음을 꿈꿀 때에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시지프스임을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올 것이라는 다소 오만한 장담을 하여 보는 일은, 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과정일 것이다. 이것의 정正은 곧바로 생의 뿌리를 직격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을 것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것은 달 없는 밤의 긴긴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다. 一. 망나니가 칼춤을 춘다. 그 춤사위가 여상하다. 긴 칼 들고 휘두르며 추는 춤은 더 이상 저세상 떠나 갈 망자를 위한 위로의 춤이 아니다. 사흘째 이어지는 난장에 망나니 또한 지쳤다. 예를 다하지도 않고, 힘을 들이지도 않으며, 그저 의무 다하듯
나는 ‘방법’은 안다. 그러나 ‘이유’는 모른다. - 조지 오웰, <1984> 中 그는 ‘방법’을 안다. 여기, 아주 잘 설계된 감시탑이 하나 있음을 보라. 어찌나 잘 만들어졌는지 사람들은 그곳에 감시탑이 서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지나치게 은근히 자리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 감시탑이 자신들을 보기 위해 만들어진 곳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
***이 글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픽션적 상상력을 더한 허구의 작품입니다.*** 각주는 기울임체로 표기되었습니다. 삼미군왕봉송지조문三眉君王奉送之弔文. - 삼미(정약용)가 군왕(정조)을 받들어 떠나보내며 쓰다. 달이 밝을 적에 약용은 성상聖上을 그리었다.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누군가를 그리며 웃는 일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술 한 잔 할래요?” 작가가 말한다. “그럽시다.” 장미가 답한다. 파리는 거대한 극장이다. 등장인물은 셀 수 없이 많다. 상연 시기는 왼종일, 인류의 역사가 무너질 때까지. 어떤 배우들은 빠르게 퇴장을 하며, 어떤 배우들은 지나치게 긴 시간 동안 무대 위에 머물러 마침내 지쳐 버리고 만다.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 모두를 알기가 어렵다. 이곳은 거대
Kyrie eleison,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Christe eleison, 그리스도여,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Kyrie eleison.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Catholic Chants. 1. 그가 속죄하는 법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그’라 함은, 노트르담의 그 키마이라을 말했다. 얼룩덜룩한 얼굴, 꼴사
Oh, let the sun beat down upon my face. And stars fill my dream. -Led Zeppelin, Kashmir. 런던의 새벽이 희부옇다. 저기 저 멀리 다가오는 달이 손짓한다. 여기 영원히 머물자. 영원히. 나와 은빛 춤을 추며 행복하자. 그래야 떠날 수 있어. 나의 이안테. 그는 손짓
Miserere mei, Deus.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신앙이란 죽음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피 위에. 수많은 마녀와 이단자들의 피 위에. 성벽 바깥, 사원 바깥에서 악다구니치며 죽은 사람들의 피눈물 위에. 공고한 토대는 핏물에 젖어 있다. 그 비린내 풍기는 액체는 죄를 지은 인간이 스스로 토해내는 속죄다.
젊다는 것은 무엇인가? 젊음, 한창 때, 혈기왕성한 시기, 혹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단어를 붙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젊은’이라는 말을 들으면 특별한 시기를 떠올린다. 그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빛났거나 혹은 열정적이었던 시기를 생각한다. 젊음은 치기, 실수, 아픔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음에 대해 각별히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 봄 이 시대에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어떤 혁명적인 떨림이 은연중에 흐르고 있었다. 거리와 건물들 사이 사이에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같은 속삭임, 은밀한 다짐, 약속,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는 쪽지 같은 것들이 존재했다. 또한 기묘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 오래된 노르트담 성당의 종처럼 – 거대한 울림으로 젊은이들을 매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