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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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 고깃덩이들이 터져나가는 소음이 귓구멍을 성가시게 찔러댔다. 피가 얼마나 튀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 새까만 옷의 어린 남자는 다시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호기롭게 달려오는 칼리고의 졸개들도 그의 앞을 막을 존재가 못 되었다. “…사이렌?” 흑신회의 보스 이태민, 그는 익숙한 경보음에 미간을 한 번 찡그렸다. 승합차에서 쏟아지는 경찰들이
“나 왔어, 기범아.” “…….” 어쩌면 나는 단념했을지도 몰랐다. 이 도시에서는 사방에 깔린 게 종현의 눈과 손이었다. 그는 버려지고, 자라고, 상처받고, 사랑하기를 모두 이곳에서 겪었다. 죽어서 귀신이 되어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할 작자였다. 내가 아주 멀리 떠나버리지 않는 이상 종현은 나를 너무나도 쉽게 찾아낸다. 그걸 종현도 알고 있겠지. 그는
잠복 중에 침까지 주륵 흘리며 곯아떨어진 민호의 가슴께에서 웅- 진동이 울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그가 웃옷 안주머니를 휘적거리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번호 모양새가 딱 공중전화였다. 하지만, 요즘 누가 공중전화를 써? 곰곰이 생각하다가 순간 떠오르는 이름 석 자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김기범?” - 최민호……. “저기, 박 형사님. 저 나가
“남는 방 있습니까?” 이제 네온사인도 하나 둘 꺼져가는 새벽, 묵산시 모처의 한 여관에 도착한 기범은 연신 주변을 살피며 카운터에 물었다. 그다지 인상이 좋지 않은 늙은 주인장에게 열쇠를 받은 그는 계단을 올라 자신이 묵을 방으로 향했다. 곧 동틀 새벽에도 켜놓는 핑크빛 조명이라든지 이 기분 나쁜 찝찝한 공기라든지, 이 새벽까지 카운터를 열어놓는 꼴
점심도 거른 기범은 해가 지고 이제 저녁마저 거르려고 했다. 하지만 옆에서 민호가 ‘아픈 사람일수록 밥은 더 챙겨 먹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기범은 깨작깨작 억지로라도 병원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마저 물속에 빠뜨렸던 그 거칠었던 소나기는 이제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저기요.” “네?” “좀 팍팍 드세요. 울었잖아요, 우는 거 그
“폭행으로 인한 상처로 보이는데……. 아시는 것 없으십니까?” 백발의 여성 의사가 민호에게 물었다. 사지 곳곳에 붕대를 감고 덕지덕지 반창고를 붙인 기범이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새근새근, 조금 편안해진 듯한 기범의 숨소리가 다행히도 규칙적이었다. “아, 우선 저는 묵산서부경찰서 마약반 소속 최민호 경위입니다.”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야, 기범아, 일어나!” 기범이 베개를 껴안고 잠에 취해 뒹굴었다. 그리다 문득, 그동안의 기억이 몰아치듯 떠올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리자 종현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옷을 갈아입은 건지, 교복을 입고 있던 녀석이 지금은 낡은 운동복 차림이었다. 위의 형들이 입고 또 물려주기를 몇 번 반복한 옷이겠지. “…왜.” “해는 졌고,
기범이 닫지도 못하고 가버린 현관 틈으로 찬 바람이 불었다. 민호는 문을 닫고 현관에 서서 다시 혼자가 된 집 안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온기는 물처럼 금방 증발했다. 음식만 덩그러니 남은 식탁에도, 불이 켜진 거실에도, 지금 서 있는 현관에도, 기범의 온도는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집들이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시끌벅적한 손님들이 나간 뒤의 공허함보다
‘오피스텔 앞이야, 내려와.’라는 종현의 문자 하나에 기범이 급히 오피스텔의 1층으로 내려갔다. 종현의 차, 익숙한 번호판을 본 기범은 별 의심 없이 조수석에 탑승하며 운전석을 보았다. “누, 흡……!” 운전석에 앉아있는 이는 종현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두꺼운 가죽 장갑으로 기범의 입을 꽉 눌러 막았다. 기범은 침착하게 안주머니에서 칼
“자 1번, 2번, 그리고 3번. 이 종이에 쓰인 글자와 숫자가 말하고 있는 게 과연 뭘까.” 해가 질 때였다. 붉은 노을빛이 나무들 사이로 어스름히 들어와 기범의 구두코에 떨어졌다.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진 기범은 제 앞에 무릎이 꿇린 한 남자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기범은 여러 장의 서류 뭉치를 그 남자의 얼굴에 뿌리듯이 던졌다. 그의
묵산시는 검은돈으로 돌아가는 도시였다. 뒷골목의 깡패들이 저들의 이권을 위해 윗선과 함께 이 도시의 시작을 만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다. 마치 고려 시절의 호족처럼 그들은 도시를 조종하고, 군림하며, 힘을 유지했다. 그 호족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묵성단' 또는 '흑신회'로. “묵산고아원에서 자란 연고 없는 사내아이 중에 쓸 만한 놈이 있나
남상동에 있는 대형 클럽 ‘더룸’은 이 일대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이는 장소 중 하나였다. 우범 지역으로 낙인 찍힌 묵산시에서도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그만큼 돈을 삽처럼 퍼다 주는, 칼리고의 주요 재정 공급원인 곳이었다. 흑신회가 거기를 막무가내로 침범했다는 것은 칼리고를 제대로 엿먹이겠다는 뜻이었다. 검은색 벤츠 한 대가 길을 달려 더룸 근처 그늘
태민의 아찔한 운전 실력 덕에 민호의 팀은 예상 도착 시각을 5분 앞당길 수 있었다. 운전만 보고 마약반에서 오케이한 놈다웠다. 그렇게 도착한 현장은 한마디로 말해 아수라장이었다. 조폭과 경찰이 뒤엉켜 쌈박질하는 진풍경이란, 아주 장관이었고 절경이었다. “뭐해! 빨리 장비 챙겨서 내려!” 박 형사의 호통에 민호는 정신을 차려 총을 들었다. 민호와 박
암막커튼이 쳐진 어두운 방은 잠든 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로 가득했다. 푹신한 침대를 한껏 만끽하듯 깊게 잠이 든 그의 웃는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휴식은 오래 가지 못했다. 시끄러우면서도 경쾌한 멜로디의 알람 소리가 민호의 침실 안을 울렸다. 기본 알람음 중에서 제일 시끄러운 것을 고른 거였다. “으으…….” 구겨진 이불 속에서 쏙 빠져나온
짠내가 풍기는 부둣가, 갈매기 몇 마리가 떼를 지어 날아가고 망가진 그물들과 부표들이 쌓인 곳. 썩어가는 생선의 흉물스러움도, 말라 부서지는 조개 껍데기의 파편과도 어울리지 않는 그 청년은 바다를 바라보며 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종이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담배 연기가 희게 퍼졌다. 한편, 멀리서 차에 기대어 청년을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