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lheureux

빛과 어둠 by 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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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heureux : 불행한

차갑고 음습한 바닥, 몸 위로 떨어지는 물과 비슷한 농도의 액체, 곧이어 달려오는 들개들. 아, 내 삶이 여기서 종료되는구나. 이 순간 생각나는 얼굴 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집을 나오기 전 네게 못 다한 말을 다 해줄 걸 그랬다. 다른 게 아니라 이게 후회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안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죽음이 자신을 덮쳐온다.

허억.

다시 눈을 뜬다. 여기가 어디지. 놀라 주변을 살피고 보니 붙어있는 다 낡은 영화 포스터, 익숙한 책상과 익숙한 방 구조, 곧이어 보이는 그리웠던 얼굴 하나. 세숫대야를 들고 오는 네 얼굴에 미소가 펴있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 ‘다행이다, 깨어나셨네요. 몸은 좀 어때요? 아직 무리하지 마세요……’ 뭐지, 평소와 다른 말투에 입을 열려다 머리를 스쳐 가는 장면 하나에 멈칫한다. 내가 이 말을 네게 또 들었던 적이 있지 않았나, 생각하다 처음 너와 대면했을 때를 떠올린다. 그럼 지금은 1998년, 자신이 서울에서 입지를 다져갈쯤이라는 소리가 된다. 꿈인가, 아니라면 이런 곳이 사후세계라는 건가 싶어 이불을 만져보지만 감촉이 생생하다. 그렇다면 정말 과거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제게, 생이 한 번 더 주어진 게 아닐까.

이건 기회다.

두일의 머리를 스쳐 가는 문장 하나였다. 다시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 조금 있으면 네가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비울 거고, 자신은 그 길로 나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지 않으면 된다. 그럼 완벽하게 네 인생에서도 없어질 수 있다.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이로 남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심이 된다. 이번에는 반드시 네 세상에 내가 없어야 했다.

“잠시만 계세요, 요기할 것 좀 사가지고 올게요.”

네가 나간 사이 옷을 챙겨입었다. 그 뒤는 비슷했다. 나오는 길에 지갑에 있던 현금을 책상 위에 남겨놓고 나왔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렇게 우리 우연인지, 인연인지 모를 것을 정리하려고 했다.

***

그러나 피를 흘리면 이성이 무뎌지고, 너무나 당연하게 네 집을 찾는 내가 있다. 너는 이 생을 살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얼굴보단 조금 앳된 얼굴로 묵묵히 치료하느라 바빴고. 결국 내 삶에서 너를 떼는 일은 하지 못했다. 똑같은 삶이 반복된다. 단 하나 바뀐 것은 박태수를 온전히 믿지 않는 것. 그럼에도 내 삶은 전생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다시 출소했을 때도…… 변함없이, 태수를 구했다. 이번엔 네 생각을 좀 더 많이 했다. 하지만, 생각을 많이 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엔 연결고리가 적었으므로 나는 변함없이 그 차를 들이받았고 지명수배자가 되어 쫓기다 또 한 번 차갑고 음습한 바닥에 눕게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대체 어디서 꼬인 걸까 내 삶은. 모두 내가 선택한 길인데 후회가 됐다. 또다시 네 생각이 난다. 그래도 이번엔 기억이랄지, 추억이랄지 그런 것들을 조금 덜 남겼으니 남은 너의 삶이 순탄할지도 모른다. 아니, 순탄해야만 한다. 나 같은 놈에게 묶여 살기엔 너는 너무 어리고, 잘못이 없으니까. 또다시 들개들이 나를 덮쳐온다. 이번엔 정말 내 삶이 끝나기를 바래보며 눈을 감는다.

허억.

또다시 눈을 뜬다. 저번에 눈을 떴을 때와 같은 풍경. 똑같은 옷차림을 한 너. 이상한 기시감이 든다. 대체, 이 삶은 또 무엇일까.

“다행이다, 깨어나셨네요. 몸은 좀 어때요? 아직 무리하지 마세요.”

네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건 내게 내려진 기회 같은 게 아니라, 과거에 내가 쌓은 업보에 대한 형벌임을. 그리고,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반복될지 모른다는 것 또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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