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빛과 어둠 by 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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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바쁜 저녁 시간이 지나고 조금 한가해질 무렵,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서 오세요.’를 외치며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본 민준이 반가운 얼굴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손님들 몰래 손을 살짝 흔들면 들어온 남자는 고개만 끄덕일 뿐, 별말 없이 바 테이블에 앉아 민준의 동선을 따라 눈을 움직일 뿐이었다. 민준은 남자에게 오늘 들여온 고급 위스키를 온더록스로 한 잔 내어주고 제 일을 마저 한다. 손님들은 각자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고 가게에서는 통통 튀는 선율의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어서 분위기를 더한다.

영업시간도 얼마 안 남은 시점인지라 이대로만 유지된다면 오늘 민준의 하루도 무난하게 끝날 예정이었다. 이쯤 되면 찾아올 때가 됐는데. 민준은 슬슬 찾아올 누군가를 대비해 주류 제조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마감 직전에 나타나 늘 버번위스키를 시키는 여자 손님이었는데, 아마도 이 근처에서 일하는 직장인인 듯했다. 하루를 정리하는 의식처럼 버번위스키 두 잔을 다 마시면 사라지곤 하는 사람이었기에 오늘도 변함없이 나타날 터였다. 딸랑, 문에 달아둔 종소리가 울린다. 역시, 오늘도 왔구나. 남자가 앉은 바 테이블 옆옆 자리에 앉은 여자는 오늘도 ‘메이커스 마크, 샷으로 주세요.’라고 이야기하고 가게로 시선을 돌린다. 민준은 그에 맞춰 제조해 기본 안주와 따뜻한 물을 함께 내어준다. 다시 시선을 주방으로 돌리기 전 남자와 눈이 마주치면 민준은 해맑게 웃는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는지.*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민준의 웃음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온통 민준의 취향으로 가득한 가게는 분위기에 취하기 딱 좋은 느낌을 주어서, 남자는 오늘 밤도 자신이 해온 일들, 해야 할 일들을 잊어본다. 잠시 시름을 달래고 있을 때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소리치기 시작한다.

“사장님, 끅, 아니…… 뭘 그렇게 고고한 학처럼 굴어요? 손 한번 만져보자는 게 그렇게 못 할 짓이에요?”

취한 남자 하나가, 서빙하던 민준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들고 있었다. ‘손님, 일단 진정하시고… 이것 좀 놔주세요.’ 남자의 눈에 민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타인이 보면 침착하네, 싶을 만큼 차분한 목소리였다. 일행들도 다들 취했는지 혀 꼬인 발음으로 사장님, 어디 여기 한 번 앉아보시라니까, 따위의 성희롱을 하는 탓에 민준은 입술을 꾹 물었지만 이내 하, 한숨을 푹 내쉬고 손을 힘껏 뿌리친 뒤 ‘나가세요.’ 단호하게 말한다.

“돈 안 받을 테니까 나가라고, 경찰 부르기 전에.”

서늘한 얼굴이다. 남자로서는 그리 오래 함께 살았어도 본적 없는 얼굴. 그 얼굴을 유심히 관찰한다. 너는 내가 없는 곳에서 이런 얼굴도 할 줄 아는구나. 남자는 더 일이 커지기 전에 나서려던 것을 멈추고 민준이 하는 행동을 지켜본다. 나갈 기미가 안 보인다 싶자 경찰을 불러 영업방해로 쫓아내고 나서야 진정된 가게 안에서 민준은 몇 안 남은 손님들에게 사과를 하며 오늘 드신 부분에서 술, 음료값은 제외하고 계산 받겠다 이야기하고 영업을 마무리 짓는다.

모든 손님들이 나가고 남자와 민준 둘만 남게 되어도 민준은 말없이 설거지와 뒷정리를 할 뿐이었다. 남자는 안다. 저건 민준만의 감정을 갈무리하는 방법이라는 걸. 자신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이 많을 때 민준은 오히려 말수가 줄어들곤 했다. 남자는 그런 민준을 이해하게 되었다. 산 세월만큼, 민준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많아졌다. … 가끔은 떨쳐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참을 말없이 정리를 하던 민준이 앞치마를 벗고 나서야 웃으며 남자에게 말을 건다.

“아, 열받는다. 우리 오늘 닭발 먹을까?”

남자는 민준의 말에 피식, 웃는다. 그래, 이래야 너답지. 금방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민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남자가 다른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고 한 마디한다.

“고생 많았다.”

남자의 한마디의 민준의 시름이 잊힌다. 몇 년이 지나도 이 작은 스킨십엔 적응을 못해 얼굴을 붉히는 것을 남자도 알고 있겠지만 굳이 말을 보태지 않는 게 좋았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민준의 하루는 무사히 끝난 셈이었다. 민준은 그제야 신이 나 ‘아까 네 옆에 앉았던 여자 손님 봤어? 매일 오는 사람인데……’ 종알종알 말문이라도 트인 애같은 민준을 남자는 바라보며 문득 얘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민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두 사람의 하루가 저문다.

*대사는 저희집 천사님의 문장을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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