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보라색깻잎조림
*대사가 적어요 왕궁을 장악한 후, 기사단은 본격적으로 이단을 색출해냈다. 신전 내부의 이단은 물론이고, 왕당파였던 귀족 가문들도 들쑤셔졌는데, 불행하게도 그중엔 메릭의 가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메릭의 가문은 교황파에서 왕당파로 돌아선 지 오래되지 않아서 의심은 강하지 않았고, 이단으로 추정할 증거도 나오지 않아서 금방 혐의를 벗었지만, 니스 백작은 이번
위대하신 분. 그렇게 불린 이는 천천히 걸어 나와 달빛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다만, 그 존재는 현실에 발을 디딘 이가 아니라서 달빛은 그의 몸을 통과해 다 무너진 동상의 잔해를 비춰주었다. “성녀라고 해도 인간 하나일 뿐이야. 내가 모든 인간의 생과 사를 결정하지 않지. 그 아이는 그저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새하얀 옷차림과 가지런한 금색 머리카락이 흐린
“그만해.” 시도폰은 중얼거리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를 감쌌던 검은 액체는 불꽃에 재가 되어 사라졌고, 악마는 그런 시도폰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시도폰이 기절하기 전에 내리던 눈은 이미 그쳤고, 하늘도 눅눅한 구름 하나 없이 깨끗해져 있었다. 산 아래로 져가는 해는 모든 것을 태울 것처럼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그런 해를 등진 악마가, 눈을 가늘게 뜬
“메릭이… 죽었다니요. 그게 무슨.” 출정한 지 이틀 뒤, 메릭은 시신으로 돌아왔다. 카리타스는 보고를 받고 비틀거리며 영안실로 향했다. ‘말렸어야 했어. 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무시하고 성하께 빌어서라도 그 사람이 못 가게 해야 했는데.’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둔 영안실엔 굳게 닫힌 관들이 누워있었다. 사제의 안내에 따라 어떤 관에
시도폰은 기도하듯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는 솔라에게 아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예…. 하지만, 저는….” 여전히 대답을 망설이던 솔라에게 시도폰이 한마디 하려던 그때, 누군가 대뜸 외쳤다.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이도 외쳤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집행자껜 짐이 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희도 기사입니다. 악마에
누군가 중얼거렸다. “눈은 전혀 내리지 않고 있는데….” 그의 말대로 길거리는 깨끗했다. 눈이 금방이라도 내릴 것처럼 하늘이 어두웠고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지만,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모두 도망친 조용한 거리에서, 아페가 시도폰에게 물었다. “원래 여기에선 신전이나 거주관이 보이지 않는 건가요?” “…아뇨. 거주관이라면 몰라도 신전은 지붕
이해를 위해 지도가 필요할 거 같아서 그려봤어요 며칠 동안 사냥 대회를 위해 준비한 기사들은 아르모리크 산맥을 향해 행진했다. 행진이라고 했지만, 짐은 최대한 간소화해서 그리 거창한 행렬은 아니었다. 빠르게 아르모리크 산맥을 넘어간 기사들은 정화할 필요도 없는 깨끗한 대지와 그곳에서 노니는 동물들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들의 중심에서 시도
편지가 도착하기 일주일 전, 신전에 요란한 종소리가 울렸다. 비상소집 명령이었으니, 고위 사제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급히 교황의 집무실로 모였고, 카리타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육중한 문이 닫히고, 교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노쇠한 몸에 맞지 않은 형형한 눈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는데, 카리타스는 그 시선이 자신에게 유독 따갑다고 느꼈다. “격리 구역
*혹시 까먹으셨을까봐 알립니다. 플뢰르: 꽃 좋아하는 애. 정화된 대지에 꽃을 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조경담당자입니다. 호셰: 기사단 건물을 짓는 총책임자입니다. 툭하면 솔라를 채석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현재는 기사단 건물도 다 지어져서 유지 보수 역할을 하고 있으며, 플뢰르를 돕거나 취미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아, 돌아오셨구나. 저분들이 이번에
“올해도 오신다고 하셔서 조금 걱정했습니다. 이미 두 번이나 남부에 와주셨잖습니까. 말을 길게 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번 안내는 이 아이가 대신할 겁니다.” 교황이 자신의 뒤의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리타스가 맞이하러 오지 않는 게 의아했던 시도폰이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교황에게 인사하며 기사를 따라갔다. ‘사실 하도 자주 와서 아는 길이지만, 그
8월 말, 곧 여름이 끝나가는 시기에 부는 바람은 뜨뜻미지근했고, 기사들도 늘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니 시도폰은 여론을 고려해서 일정을 느슨하게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 보니 여유 시간이 너무 많아져 버렸다. 거기에 일 처리 속도가 빠른 솔라가 가세하다 보니 대부분의 일과가 오전에 끝나거나 길어봤자 점심을 넘기지 않았다. 편지를 봉투에 넣고 루카에게
악마의 침입을 걱정한 시도폰이 솔라를 남겨두고 가려 했으나, 프라이에가 ‘국왕 폐하와 관리들을 상대해야 할 텐데 솔라 없이 혼자 가면 힘들지 않을까?’라고 하는 바람에 솔라는 시도폰과 동행하게 되었다. 이제는 완공된 게이트를 따라 시도폰과 솔라는 수월하게 남부에 도착했다. 그런데 시도폰이 국왕과의 대면을 통보하고 답장을 기다리지 않은 채 출발해버려서, 수도
6월 8일 오후, 이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여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비가 와도 시원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 사람들은 가뜩이나 안 좋은 기분을 떨쳐내지도 못하고 하루를 보냈다. 거친 말발굽 소리가 기사단의 정문에 닿았다. 프라이에의 막사로 누군가 뛰어와 외쳤다. “집행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벌써?” 집행자가 예상한 날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는 소식
기사들은 두코의 얼굴이 땅으로 떨어지려던 건 간신히 막았지만 그뿐이었다. 미동도 없는 몸은 축 늘어진 채 그들에게 붙들려있었고, 누구도 그 몸을 뒤집어 얼굴을 확인해보자고 말하지 못했다. 먼저 움직인 건 아페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두코의 앞에 섰다. “….” 무언가 말하고자 입을 달싹였지만, 아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허공에서 뻐끔거리던
사무관과 함께 왔던 남부의 기사도 그들을 따라 이주민들을 분류했고, 크로마는 그 기사에게 은근히 다가가 왜 이쪽을 돕느냐고 물었다. 기사는 크로마가 그런 질문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해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안전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검사한다고 낭비되는 시간이라고 해봤자 여기까지 오는 시간보다 적을 텐데 굳이 검사를 생략하면서 위험을 감수할
1501년 5월 20일 밤 “단장님, 주무십니까?” 솔라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울렸다. 시도폰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면서 깨어있다고 답했다. “성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응?” 시도폰은 벌써 아침인가 싶어 눈을 크게 떴지만, 여전히 방은 어두웠다. 자기 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아직 밤인데 왜 찾아온 거지?’ “이, 일단 숙소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말씀드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쇼. 이쪽은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두코가 아페의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크로마도 그 옆에서 일행을 배웅했다. 오랜만에 두른 검은 망토가 어색했지만, 시도폰은 말에 가볍게 올라탔고, 그 뒤를 솔라를 비롯한 기사 몇 명이 따랐다. 아직 게이트가 전부 만들어진 건 아니어서 일행은 평소 오순절 행사에 참석할
“남부와 기후가 비슷하다더니, 겨울은 제외하고 인가 봐요?” 두꺼운 외투를 걸친 아페가 막사 밖의 의자에 혼자 앉아있는 시도폰에게로 걸어왔다. 아페는 시도폰이 일어나려는 걸 막고 그의 옆에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았다. 시도폰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말했기에, 아페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머물러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눈이 내려서 더 추울 겁니다. 돌아
“솔라, 괜찮나요?” 누군가가 조심스레 제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손짓에, 솔라가 눈을 떴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크로마를 보고 시도폰이 자신을 불렀냐고 물었다. “아, 아뇨. 단장께서는 딱히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어째서 이곳에 오신 겁니까?” 난감한 얼굴로 크로마가 대답했다. “꼭 무슨
이후 몇 주 동안 악마의 공격이 평소보다 거세게 몰아쳤다. 두코는 이런 상태의 기사단을 두고 본부로 돌아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본부를 오래 비워둘 수도 없었으니 그는 크로마를 두고 홀로 돌아갔다. 치유 사제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바빴고, 그만큼 많이 다쳐서 돌아왔다. 시도폰은 전투와 치유 모두에 능숙한 데다 신성력도 남들보다 많았으니 여기저기 동
“드디어, 도착했다!” 제망의 수도, 시작의 땅에 입성한 기사와 인부들은 이전과 다를 것 없는 폐허에 그닥 감흥이 없었지만, 시도폰과 니옌의 표정은 달랐다. 시작의 땅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표기된 지도나 안내판 따위 없이도 시도폰은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건…,” 니옌을 비롯한 일행은 돌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문양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코가
“못 하시겠습니까?” 교황의 말에 카리타스는 고개를 들었다. 카리타스의 얼굴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교황과 카리타스, 두 사람 사이엔 손목을 뒤로 묶인 채 꿇어 앉혀진 사내가 있었다. 그는 두려운 눈으로 카리타스를 올려다보았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겁을 먹은 듯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고스란히 그 감정을 받아낸 카리타스가 겨우 입을 뗐다. “성하, 사
막사 안엔 착잡한 표정의 세 사람이 있었다. 솔라는 익숙하게 봉투를 받아들었고, 시도폰이 먼저 읽어보라는 뜻으로 손짓하자 잠깐 머뭇거리더니 봉투를 뜯었다. 전령은 이제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구석에 앉았고, 솔라는 [사제 피데이스의 이단 혐의 공소장(재수정안)]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몇 주간 이런 지루한 공방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시도폰은 밀린 편지의
다리 끝에 붙어있는 다 무너져가는 표지판에서 제망과 브리오소라는 글자를 발견한 그는 베론에게 제망과 브리오소의 언어가 달랐는지 물었다. “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용하는 문자는 비슷한데 발음은 조금 달랐습니다. 게다가 제망은 멸망한 지 꽤 되어서 할 줄 아는 사람도 몇 없을 겁니다.” “아쉽군, 가는 길에 이것저것 발견한다고 해도 읽을 수 없으면 소용이
“니옌 자매.” 잔뜩 쌓인 고서들 사이에서 고개를 든 시도폰이 창백한 얼굴의 니옌을 맞았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나?” “제 걱정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단장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제가 멀쩡한 것이 더 이상하겠지요.” 뼈가 있는 말이었다. 시도폰은 니옌에게 시작의 땅이 궁금하지 않냐고 물었지만, 니옌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학문적
카리타스는 기사단을 배웅하고 난 후 일상으로 돌아왔다. 지루한 서류, 지루한 기도를 반복하며 하루를 다 보냈을 무렵, 메릭이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잠시만요, 이것까지만 보고 하죠.” 손을 들어 메릭의 말을 멈추게 한 카리타스가 서류 하나를 붙들고 끙끙거리다가 한참
베론은 회의 분위기가 예전보다 유해졌다고 말했고, 피데이스는 집행자께 사제들이 겁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니냐고 농담조로 말했다. 그는 이어서 이단의 자금줄이 어디인지 대충 짐작이 된다고 이야기하며 창문을 슬쩍 보았다. 사제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평일이라 그런지 귀족들은 드물게 보였다. 기사단 숙소에 근접한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피데이스가 말했다.
기사들은 어제와 다른 게임을 하며 내기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돈이 걸려있거나 하는 건 아니었고 훈련장 열 바퀴 돌기, 뭐 이런 소소한 것들이 걸려있었다. 두코의 말대로 솔라는 이런 내기나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단장이 자고 있다면 달리 할 일이 없는 것도 맞았다. 솔라가 의자를 끌고 와서 무리의 가장자리에 앉자, 기사들은 그를 발견하고 중앙으로
다음 날 아침, 시도폰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그는 선물상자의 개수를 세어보더니 빠진 게 없다며 한 손에 네 개씩, 총 여덟 개를 들었고, 기겁한 프라이에가 그중 세 개를, 두코가 두 개를 빼앗아 들었다. 뒤에서 이디스는 아침부터 무슨 일정이 있으시길래 단장님이 저렇게 급하게 움직이시냐고 솔라에게 물었다. “거주관에서 오토 대주교님과 친우 분들을 만나고
“응? 그런데, 솔라 어디 갔어?” 연회가 끝나, 북부 기사단은 숙소로 돌아왔다. 씻고 나온 두코가 기사단에게 물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고개는 크로마에게로 향했고, 그는 헛기침하더니 왜 자길 쳐다보냐며 중얼거렸다. “부관은 모르나?” “아뇨, 압니다. 아까 집행자께서 잠깐 나갔다 오신다 하셔서 따라가는 걸 봤습니다.” “계속 보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하기
교황보단 젊게 보이는 국왕이 행렬의 맨 앞에 서 있었고 그의 옆엔 왕비가, 뒤엔 왕가의 자식들이 줄을 이었다. 개중 가장 앞에 선 왕자가 시도폰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는데,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와 시도폰의 체격이 비슷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괜찮으려나….’ 시도폰은 그를 보다가 베론을 흘끔 쳐다보았다. 아까 급하게 춤 연습 상대가 되어줬던 베론과
시도폰은 창을 등에 멘 채 카리타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둘은 익숙한 장소에 도착했다. 카리타스의 집무실로 가는 복도에 면한 정원이었다. 장미를 비롯한 색색의 꽃이 피어있는 그곳에 도착해서야 카리타스는 걸음을 멈췄다. 먼저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자리를 옮기자고 말했던 건 시도폰이었지만, 막상 조용한 곳에 도착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카리타스
이때, 멀리서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는 불빛이 있었다. 프라이에가 그를 알아보고 먼저 고개를 숙였고 두코는 뒤늦게 그를 따라 했다. “두 사람은 여기 어쩐 일인가? 밤이 늦었는데.” “오순절 전까지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많아서 말입니다. 그러는 집행자께서도 이 시간에… 설마 훈련하다가 나오신 겁니까?”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시도폰의 이마엔 땀이 맺혀있었다
2년 후, 1499년 4월의 어느 날. 이디스는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던 해머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땅을 향해 육중한 무기를 내리칠 때마다 악마들은 반죽처럼 으깨졌고,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두코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반면에 이디스는 매우 상쾌해 보였다. “너 그러다가 손목 다친다.” “괜찮아요. 제 몸은 잘 지킨답니다?” “아
“성녀님!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가게 밖에서 카리타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사색이 된 피에르 경과 그 뒤에서 마찬가지로 당황한 메릭이 있었다. 가게 안으로 먼저 들어온 건 메릭이었다. 그는 카리타스에게 어디 다친 곳이 없냐고 물으면서 꼼꼼하게 카리타스를 살폈고 아무런 위해가 없었다는 게 확인이 되고 나서야 상황을 살폈다. ‘아까 세쿠
“참견이 심하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하지만 어제도 피곤하다고 운동을 쉬셨잖습니까. 오늘은 하셔야죠.” 카리타스는 메릭의 권유에 고개를 저었다. 안 들리는 척 빠르게 걸어가는 카리타스의 뒤로 메릭이 따라붙었고,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아페는 메릭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한테 저렇게 끈덕지게 달라붙을 수 있다니, 신기하네. 뭐, 당사자도 그
“베론 님은 제외하고 부르셨군요?” 모집된 사람들을 둘러본 피데이스가 시도폰에게 묻듯이 말했다. 시도폰의 집무실, 모인 사람은 총 여덟 명으로, 평소 모임이었다면 여기서 니옌 사제가 아니라 베론 기사단장이 앉아있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뵙는다며 니옌 사제가 대화의 물꼬를 텄고, 시도폰은 그제야 모임의 목적을 설명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프라이에에게 쏠렸고,
“흠, 이번 마을도 아무 이상이 없네요. 다행이다.” 이디스가 한 마을을 떠나며 안도했다. 두 번째 마을을 떠날 때 받은 간식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두코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마을은 전날 시도폰과 기사들이 훈련했던 숲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기사들이 마을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봄꽃을 여기저기서 뿌려주었다. 기사단이 중앙에 난 길로 향
“오순절 동안 늘어난 악마들을 처리하는 동시에, 전투 대형을 익히는 훈련이니 잘 따라주길 바란다. 오늘은 첫날이니 들판에서 대형을 연습할 테지만, 내일부턴 숲으로 들어갈 예정이네.” 시도폰이 간단히 훈련의 목적을 설명했다. 프라이에와 두코는 각자 부대를 이끌고 처음 들판에 도착할 때처럼 대형을 이뤘고, 베론은 기사 몇 명과 함께 짐을 지키면서 훈련을 지켜보
한편 남부의 카리타스는 이주마다 바뀌는 호위 기사 중 한 사람이 유독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피에르가 있을 때는 조용히 있다가, 그가 돌아가고 나면 얼마 안 되어서 제게 말을 걸어오는 인간이었다. 얼굴도 외우기 싫었는데 어느새 카리타스는 그의 이름과 가문, 나이도 알게 되었고 그에게 형제가 있다는 사실까지 기억하게 되었다. 해오는 말도 별로 시답잖은 이야
기도가 끝나고, 프라이에가 시도폰의 뒤에 따라붙으며 말했다. “루카에게는 비밀로 해두겠습니다.” 미카가 주술을 해제한 뒤에야 루카의 아버지는 제대로 진술할 수 있었는데, 그는 미카가 루카를 돌려받을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자신을 꼬여냈다고 말했다. 죄수로서 갇혀있었던 미카를 도대체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자, 자신이 그를 만난 건 기사단 건물 밖이라고 대답했기
“그리고, 저…, 집행자님. 솔라 부관께서 기다리고 있으십니다.” “일이 그새 쌓였나….” “그건 아니에요. 부관님이 일을 미루지 않고 잘 처리해주신 덕분에 집행자님 결재가 필요한 일 외에는 쌓인 게 없답니다.” 루카의 대답에 더욱 아리송해진 시도폰은 옷을 갖춰 입고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자 루카가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 나와, 솔라는 시도폰의
거주관에서 코지를 붙들고 시도폰이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자, 코지는 또 그랬냐며 놀리기 바빴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이 함께 자는 게 뭐가 문제냐고 물었던 코지는 동행한 두코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사실 이렇게 반말로 대면하는 것도 누가 알면 큰일 날 일인데 말이야.” 코지가 살짝 거리를 두는 시늉을 하자, 시도폰이 우는 소리를
“솔라 님, 설마 아침부터 지금까지 여기 계셨던 건가요?” 해가 저물어가는 도서관에서 루카가 솔라를 발견했다. 솔라는 책들을 몇 권 쌓아두고 읽고 있었는데, 루카는 책 내용을 추측할 수도 없었다. 평소 같았다면 도서관에서 정숙 하라는 말을 들었겠지만, 지금 도서관엔 솔라와 루카 외엔 없었다. “어제 그렇게 일을 빨리 끝내신 게 이것 때문이었나요?” “네,
“우리의 등불이신 집행자를 뵙습니다.” 피에르가 먼저 인사했고 뒤이어 후보자들이 한 명씩 자신을 소개했다. 카리타스의 호위를 맡을 사람이라고 하니 시도폰도 그들을 면밀히 살폈는데, 집행자를 대면했다는 사실에 긴장한 이들만 있을 뿐, 다행히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이는 없었다. 다만 시도폰이 보기엔 이들의 무위가 다소 부족해 보였다는 게 문제였다. 피에르는 그런
“꽃도 생화가 이만큼이나 묶여있으면 무겁구나, 두코 나랑 교대 좀 해줘.” “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교대야? 조금만 더 들고 있어 봐.” 두코와 프라이에는 시도폰의 뒤에서 서로에게 꽃다발을 넘기고 있었다. 남부 행 출발 전날, 시도폰은 어떤 꽃다발을 들고 갈까 고민만 했지 정작 어디에서 그것을 살 것인가는 생각해두지 않고 있었다. 프라이에가 여정의 반
내용을 쭉 보니까 다음 해, 올해, 작년 등의 표현이 많이 보여서 헷갈릴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래에 정리해둠 1493년 2월 14일 시도폰 각성 1496년 2월 헤일로 사망, 3월 장례식, 5월 25일 솔라의 부관 임명 1497년 1월 이디스(16세)의 북부수행, 4월 수행단의 남부귀환 이디스 갈릴레아 다음 해 겨울, 북부 수행단이 도착했다. 멀리서
“성하, 북부에서 급하게 전령이 왔습니다.” 정기 회의가 한창 진행되던 중, 누군가가 무례하게 회의실 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예산안을 조정하느라 달궈져 있던 방은 순간 침묵했다가 다시 술렁였고, 교황의 귀에 짧게 뭐라 속삭인 시종이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교황은 살짝 커진 눈으로 편지를 빠르게 읽어내려갔고, 아까완 다르게 낮아진 목소리로 당장 회의를 중지하
투르스 거리에 도착할 때까진 나와 아페 사이의 대화라고 할 게 거의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아페는 뛰어내리듯 마차에서 내렸고, 그 뒤를 내가 천천히 따라갔다. 봉사 장소엔 귀부인들이 미리 모여있었고, 그들은 아페가 도착하자 그를 따라 가난한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참여했지만 내 주요 임무는 이쪽이 아니었으니 금
“나는 루카가 고아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살아계실 줄은 몰랐네. 어… 말이 좀 그렇다, 그래도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응, 나도 단장님께 들었던 건데-.” 뒷말을 잇지 못한 시도폰은 걸음을 멈췄고 그의 뒤통수를 보고 있던 프라이에도 그제야 누가 복도에 있는지 깨닫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뱉었던 말이 없었던 게 될 리는 없었다. “제
남부로 보낸 편지는 사흘 만에 답장이 왔고, 유족은 당연히 장례를 남부에서 치르길 원했다. 답장을 받은 날 밤, 시도폰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베론을 맞았다. “정말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침묵하던 베론이 자신을 등진 시도폰에게 물었다. 바깥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느라 말이 없던 시도폰이 뒤돌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단장님과 당신이 하던 대
“집행자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단장은 어디, 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겁니까?” 제 쪽으로 허둥지둥 뛰어온 슈바헨에게 시도폰은 할 말이 없었다. 시도폰의 안내로 헤일로의 시신을 확인한 슈바헨이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시도폰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린 뒤, 슈바헨은 사제들에게 시신을 깨끗이 닦고
“피데이스님, 잠시….” 수행단 아이들의 훈련 시간이었지만, 헤일로가 임무 수행을 나가는 바람에 피데이스가 대신 아이들의 지도를 맡고 있었다. 한창 훈련이 진행되던 중, 한 사제가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와 피데이스를 불렀고 귓속말로 무언가 전달했다. 점점 심각해지는 피데이스의 표정에, 목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했던 방이 점차 조용해졌다. “왜… 그런 일
만찬이 끝나고 시도폰이 직접 수행단을 축성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시도폰이 읽어주는 콘피테오르를 따라 읽으면 축성이 끝나는, 아주 간단한 과정이었다. 가장 먼저 축성을 받을 사람은 이번에 북부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는 이들이었고, 두코는 어느새 장난기를 싹 걷어낸 폰의 얼굴을 보고 ‘애들은 정말 빨리 변하는구나. 저런 표정을 짓게 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앞 시점에서 3년 후입니다) “짐은 다 챙겼어? 추위도 많이 타는 게 가서 어떡하려고 그러냐~.” “걱정도 많다! 애 감기 안 걸리게 내가 잘 챙길 거야.” 북부 행 마차에 탄 코지는 제 옆에서 얀에게 쩌렁쩌렁 소리치는 두코를 쳐다보았다. 코지에게 짐을 건네던 센은 두코가 왜 마차에 타고 있는지 물었다. “그야 북부 기사단에 입단하려고 지. 왜겠어?” “
훈훈해진 거주관과 다르게 신전은 침울한 분위기에 짓눌리고 있은 지 오래였다. 아세쿠토레는 미들 부인의 사망 이후로 제대로 잠을 못 자다가 쓰려졌고, 카리타스는 그 이후 혼자 뒷수습을 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녔다. 사건 현장에 대한 조사 보고서와 현장을 목격한 인부와 그 주변 사람들의 사건 경위서, 기타 등등의 잡다한 서류들 사이에서 카리타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코가 왜 저렇게 사색이 돼서 뛰어가는 거야?” 휑하니 열려있는 두코의 방을 힐끔 들여다본 코지는 얼떨떨한 표정의 프라이에에게 물었다. “아…, 가족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들었는데 자세하게 설명해주진 않더라고. 두코도 혼란스러운데 침착한 척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더 캐묻지는 않았어.” 코지는 저를 교회에 맡긴 부모님을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
카리타스는 그림을 완성한 다음 날 아침, 잔뜩 피곤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캔버스 앞에 섰다. 처음엔 제가 잠이 덜 깨서 착각했나 했지만, 캔버스의 그림은 어제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었다. 빨간 장미와 녹색 정원이 맑은 하늘과 어우러졌던 풍경은 거친 회색 붓칠에 가려져 있었다. 잿빛 하늘 아래엔 물에 잠긴 집들이 그려져 있었고 수면에 둥둥 떠다니는 수상한 덩
“반갑습니다. 이번에 제게 창술을 가르쳐 주실 선생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시도폰은 자신을 보며 말을 잇지 못하고 감격에 찬 기사를 올려다보다, 결국 먼저 말을 걸었다. “기초적인 창술을 베론 님께 배웠지만, 다수에 적용할 수 있는, 그러니까 악마들을 상대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몰라서요. 저기…,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기사는 세차게 고
“잘 다녀와! 나중에 보자.” 제 방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시도폰에게 카리타스는 마주 웃어주고 나왔다. 카리타스의 침대 옆 마루엔 두꺼운 이불이 두 겹 깔려있었고 시도폰은 거기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닫히는 문 사이로 계속 손을 흔들었다. “같이… 계셨군요.” “네, 아무래도 오래 함께할 시간이 나질 않아서 이렇게라도 해야겠더라고요. 좋은 아침입니다.” 아페는
“모처럼 평범한 옷을 입고 돌아다닐 기회였는데 지금 나가면 너무 늦게 돌아오겠지?” “그러게…. 시장에서 밤에 뭐라도 하면 그걸 핑계로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머무는 동안엔 오순절 행사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행사는 아마 없을 거야.” 아쉬워하던 폰은 신전의 복도를 걸으며 노을이 예쁘다고 감탄했다. 매일 지나치던 복도라 감흥 없이 걷고 있던 카리
폰은 남부로 향하는 14일 동안 그 길에 있는 모든 마을에 들러 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고, 7일째 되던 날에 가면을 쓸 수 없겠냐고 베론에게 물어봤다가 거절당했다. “저들은 당신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겁니다. 이런 힘든 시기에 존재만으로 희망이신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꾸짖는 말은 아니었다. 베론은 삶이 힘든 이들이
북부의 4월은 꽤 분주했다. 오순절 행사에 참석하기 전에 미리 악마들에 대한 대비를 해두어야, 경계와 그 주변이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악마들이 자주 나타나는 곳에 미리 신성력으로 만든 함정을 설치해두어 밟는 즉시 다리 네 개쯤은 날아갈 수 있게 했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악마 토벌을 자주 나갔다. 민간인 중에 지원자를 받아 신성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하기
황홀한 빛을 마주한 그 날부터 목표가 생겼다. 나에게 그 빛을 보여준 사람의 옆에 선다. 될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한 적은 없었다. 무조건 되어야 했고, 되게 하리라고 다짐했으니까. 게다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그날 이후로 나에게 새로운 힘이 생긴 것 같았다. 아직 어떤 형태인지도, 어떤 속성인지도 모르는 힘이라 이것이 신성력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오늘부터 궁을 떠나서 신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첫째 오빠는 입구까지 나와 내가 탄 마차를 배웅해주었지만 다른 가족들은 그림자조차 비추지 않았다. 마차가 정원을 지나 궁 입구를 나서자 멍청한 시종이 다른 가족분들이 매정하다는 둥 내 눈치를 보며 조잘거렸다. “조용, 말이 많구나.” 이제야 조용해진 마차 안에서 멀어지는 궁을 지켜보았다. 그
창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얼굴을 덮쳐 미약하게 남아있던 잠기운조차 달아났다. 온열 기구를 끄고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평소에 들리던 칭얼거림이 들리지 않는 게 어색했다. 깨워야 일어나는 녀석이 수행단 생활은 잘 할 수 있는지 걱정됐지만, 수행 첫 달은 외부와 소통할 수 없다는 규칙 때문에 시도폰의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반대로, 똑같이 소식이
그리고 생각보다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오늘은 눈이 많이 내리는군요. 장작을 더 넣어두고 가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시도폰의 말에 시종은 꾸벅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일렁거리는 불꽃을 보던 시도폰은 멀어지는 발소리를 확인하고 이불 속에 책더미를 넣었다. 머리와 몸통의 굴곡까지 표현이 되도록 섬세하게 모양을 잡은 뒤 캐노피를 치고
“베론 님, 그래서 시도폰이 어떻게 지내는지 정말 말씀 안 해주시는 건가요?” “그래. 기밀이다.” 두코의 삐쭉삐쭉 날 선 태도에도 베론은 눈썹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대답했다. 실망한 두코는 제 등 뒤에서 나타난 카리타스에게 혹시 아는 게 있느냐 물었지만, 카리타스도 정말 아는 게 없었다. 시도폰이 집행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당일부터, 아이들은
“그렇게 기뻐?” 환하게 미소짓는 폰에게 카리타스가 물었다. “응. 솔직히 그전까진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도 능력이 안 되어서 힘들었거든. 내 몫만 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단한 힘을 받게 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네.” “좋은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해. 근데… 지나간 일이지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그날, 왜 거기에
‘경전에서 영혼을 뜻하는 투명한 천은 우리의 몸을 감싸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해. 평소엔 보이지 않지만 죽을 때가 되면 영혼이 몸에서 떨어져 우리는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천은 하늘로 날아가 신에게 도착한다고 하지.’ ‘카리, 그럼 천이 날아갈 때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 새 모양으로 날아가려나.’ 같이 책을 읽던 중 폰이 엉뚱한 질문을
‘내가 뭘 보고 있는 걸까.’ 카리타스는 이 풍경을 본 적이 있다. 다만 현실이 아니라 꿈, 단순한 꿈이라기보다는 돌이켜보니 예지몽이었던 그것을 통해. 눈과 같이 하얀 자작나무들이 빽빽하게 서서, 갈색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자신을 바라본다. 갈색 눈이란 것은 아주 자주 보았지만, 저것은 익숙한 색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당시의 저는 혼자 있었지만, 지금은
보호소로 가는 마차에서 프라이에는 반쯤 죽은 사람처럼 두코의 어깨에 기대어있었다. 마차 입구에 앉아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멀미는 여전한지 눈을 꼭 감은 채로. “확실히 길이 좀 험하긴 하다.” “자주 왔다 갔다 한 거로 아는데 정비를 안 한 걸까?” “기사단 인원수가 적으니까 정비하러 나오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어.” 차례대로 두코, 폰, 카리타스의 말이었다
“오….” 자신들의 방 책상에서 책 한 권을 펼쳐두고 내려다보던 폰과 카리타스는 폰이 작게 중얼거린 이후로 말없이 종이를 넘겼다. 사제 관계였던 엘로와 아벨이 점점 미묘한 관계로 발전해 나가는데, 그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나 난다는 것도 문제였고 사랑의 표현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것도 문제였다. “…근데 이런 책은 어디서 구해온 거야?”
“이번 주 빨래 담당 누구야?” 가득 찬 빨래 바구니 여러 개를 내려다본 프라이에가 폰에게 물었지만, 폰은 알 턱이 없었다. 프라이에는 고개를 젓는 폰을 지나쳐 빨래통이 놓인 벽에 붙은 종이를 읽었다. “… 학교 쪽 사람이네. 예상대로긴 한데, 정말로 안 할 줄은 몰랐어.” 요리는 위험하다며 기사단 소속 주방에서 담당하지만 빨래는 수행단이 돌아가면서 맡기로
어두운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마침내 북부 기사단 본부에 도착한 수행단은 기숙관에 들러 짐을 풀고 본관에 집합했다. 넓은 공간의 벽엔 각종 무기와 연습용 짚 인형이 걸려있었고 돌로 된 벽 사이로는 바람 한 점 새어들지 않았다. 황량한 느낌에 아이들은 들어가길 꺼렸지만, 베론은 자주 오다 보면 익숙해질 거라며 먼저 들어가 버렸다. “어서 와라
“그런데 카리타스는 어디서 자? 거기 다 어른들 아냐?” “어른인 게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문제가 있어서 너희 쪽에 신세를 져야 할 거 같아.” 카리타스가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한 말에 폰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침구를 나누어주던 두코는 멈춰버린 폰의 손에 2인용 침구를 얹어주었다. “어, 어?” “둘이 같이 자는 거 아녔어? 어서 들어가.” “네. 두
바람과 추위를 막으려 두꺼운 천을 둘러둔 마차엔 열 명의 아이들이 오밀조밀 모여 앉아있었다. 시도폰을 포함한 여자아이 넷, 남자아이 여섯이 올해 거주관에서 북부 수행을 가는 아이들이었다. 같은 거주관 소속이라지만 친한 친구들끼리만 놀다 보니 바로 제 옆자리 사람과 어색한 아이도 있었다. 시도폰은 저와 함께 신전에 올라갔던 아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술래잡
"내가 보기엔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아." 책장 뒤에서 나온 코지가 한 품 가득 책들을 안고 책상에 내려놓자, 시도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오른쪽에 드리운 책 탑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코지가 엄선한 자료면 믿을만하다고 생각해. 내 쪽에서도 몇 권 가지고 왔어." 폰의 왼쪽에선 카리타스가 유난히 두꺼운 책 한 권위에 평범한 책 몇 권을 더 쌓아서 들고
여름이 끝났다. 그늘에만 앉아있었는데도 땀이 흐르는 시기가 가버리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시도폰은 여름엔 귀리 파종을 준비하느라 바빴는데 가을이 오니 아마풀을 수확해야 한다며, 왜 농사 일이 끝나지 않느냐고 투덜거렸다. 노동도 하지 않고 신전에만 틀어박혀서 남들의 수고로움을 받아먹는 처지에서 차마 위로할 말이 없었다. 근육통이 심하다며 우는소
나는 그 뒤로 올리비아를 볼 수 없었다. 뒤늦게 얀을 통해 전해 들은 정보만 남긴 채 올리비아는 거주관을 떠났다. 사람을 찌른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고 코지의 신체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참작되어, 여기서 멀리 떨어진 교회 직속 상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본 올리비아의 정신 상태가 불안해 보이기도 했고 아직
편지로 소식을 전하겠다고 말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카리타스는 신전으로 돌아간 후 연락이 없었다. 성서를 외우려 앉아있던 폰은 창문으로 신전 쪽을 올려다보다가 맞은편의 코지에게 혼나기 일쑤였고, 그런데도 자꾸 흘깃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도 왜 카리님이 연락이 없는지 궁금하긴 한데 바쁘신 거겠지. 우리랑 다르잖아." "그렇지…." 결국, 담당 주교
시도폰을 배웅하고 문을 닫았다. 일기장을 찢어서 준 건 계획에 없었는데 뭐라도 쥐여주고 싶은 마음에 어느새 내 손이 어제 일기를 뜯어다가 손수건 속으로 감추고 있었다. 보여줄 생각 않고 쓴 글이라 너무 날 것의 진심이 담겨 있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구냐고 불쾌해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아침부터 대주교에게 불려가 혼이 났지만, 폰은 아무래도 좋았다. 카리타스의 손수건은 들키지 않았고 반나절 만에 독방에서 풀려났으니 말이다. ‘이게 웬 행운이람.’ 콧노래를 부르며 거주 관의 제 방에 돌아온 폰은 코지의 잔소리가 노랫소리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들떠 복도에서 누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뭐야. 네 녀석이 왜 벌써 나왔
"폰!" "응?" "빨래 다 널었으면 놀러 가자! 이쪽은 다 끝났어." "나도 곧 끝나니까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카락이 빨랫줄을 스치며 지나갔다. 맑은 햇빛 아래 널린 갖가지 천들은 부드럽진 않았지만 깨끗하고 구김이 없었다. ‘폰’이라 불린 아이는 빨래 바구니에 남아있던 마지막 천을 야무지게 털어 빨랫줄에 걸었다. 물방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