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반야
물오름달 열하루, 해시亥時 생원들의 수다 소리와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명이 움트는 시점, 새날이 시작되기 직전. 딱 좋았다. 노곤노곤하게 창틀에 몸을 기대고 눈을 끔벅이던 승철의 어깨 위로 누군가의 손이 얹어졌다. "기분이 어때." "또 뭐가." “음, 5년 생원이 된 느낌?”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지. 너나, 홍지수나. ..
시샘달 열이틀 겨울의 추위가 한 걸음 물러난 지도 꽤 되었다. 봄에 들어선 덕에 서당은 또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몇 생원들은 농사일을 돕기 위해 사유서를 내고 황룡들을 찾아 다니기 바빴다. 나비들 중에서는 이번에 외출하는 생원이 단 한 명도 없어 삼삼오오 모여 돌아다닐 뿐이었다. 담장 너머 소란을 듣던 명호가 지겹다는 듯 한숨을 쉬며 뒤로 벌러덩
밤늦게 들어온 순영은 남들이 자고 있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누웠다. 그다지 피곤하단 생각이 들지 않아서, 누워서 잠이 안 오면 어찌하나 걱정했는데 우습게도 눈을 감고 뜨자마자 다음날 대낮이 되어있었다. 허허 웃고는 엉거주춤 일어나 제게 덮여있는 이불을 정리했다. 세안을 하고 들어온 승철이 어제 서당에 일어났던 작지 않은 소란을 이야기해 줬고, 순영은 마침
시샘달 열하루 서당에 들어서기 위해 대문 앞에 섰다. 신라의 기풍을 이어받은 경주의 서당은 한양과 제주의 대문보다 수십 배는 더 화려했다. 금으로 감싸진 문고리를 잡고 두드리자 거슬리는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가장 가운데에 서 있던 경주의 생원이 복조리 다섯 개를 품에 안은 채로 다가왔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는 길이 험하진
시샘달 아흐레 날이 점점 흐려지더니 경주로 떠나는 당일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자연을 건드리지는 못하기에, 황룡들은 생원들의 출발 시간을 앞당기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백호의 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나마 비가 그칠 때 생원들을 보내기로 하는 것뿐, 별다른 방법은 찾지 못했다. 원칙적으로 가지 않는 5, 6년 생원들에
시샘달 이틀 봄이 시작됐다. 전보다 햇볕이 따스해진 느낌에, 순영이 입춘축을 핑계로 서당을 나섰다. 지훈도 함께였다. 아직 개나리도 안 피는 이른 봄에 나가서 무얼 할 거냐고 주절대면서도 순영을 위해 볼끼 하나를 챙겨 나섰다. "아직 동백이 다 지지도 않았는데 봄이라니." "...그러니까. 설 지나고 와도 됐을 것 같은데." "그래도 제주에는 수선화랑 복
해오름달 열아흐레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청룡 침소의 창문이 열렸다. 밤새 맺어진 이슬이 그새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적당히 시원하기만 할 정도로 틈을 내어 열어두고 찬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헝클이려다가, 시험을 준비하느라 인시가 다 되어 잠들었을 것이 뻔하여 도로 거두었다. 대신 바로 옆에 있는 예비 수문장에게로 방향을 바꾸었
민규에 대한 소식은 삽시간에 홍월천으로 퍼져나갔다. 민규가 고심하며 쓴 간찰의 먹이 마르기도 전에 독각의 것이 날아왔다. 용궁에 갈 때 저를 데리고 가라는 내용이 적힌 것을 보고, 함께 용궁에 가기로 했던 지수와 준휘에게 양해를 구하러 갔다. 민규처럼 서당에서 서찰을 받고 일을 행하러 가는 생원이 생기면 항상 황룡과 무예학도를 하나씩 끼워서 가야 했다.
해오름달 이틀 김민규는 행운이 따라다닌다. 원우는 항상 그리 생각했다. 수문장을 입 밖으로 낸 지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운명적으로 온 용왕의 서찰이 이를 증명했다. 열어본 서찰에는, 용궁의 수장을 선출할 시기가 되었으니 적절히 조건에 부합하는 생원을 하나 뽑아 데리고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각 서당에서 데려온 세 생원끼리 대결을 하여 최종
매듭달 스무이틀 아세亞歲다. 낮이 가장 짧은 날이라,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참이었다. 황룡으로서 생원들의 출입을 지도해야 했던 승철은 맡은 일을 지수에게 넘기기로 했다. 완전히 제외되지는 못하고 아침잠이 많은 지수를 위해 묘시까지만 승철이 하고 그 후에는 전부 다른 황룡들이 하기로 했다. 준휘는 가만히 마루에 앉아 그런 승철을 기다렸다. 꽁꽁 언 눈조차
기구한 백정이었다. 태어나 말을 하기도 전에 집을 떠나버린 어머니가 시작이었고, 열 살이 넘게 차이 나는 형이 키울 동안 아버지가 품삯을 벌어오는 것이 과정이었다. 승철이 두 발로 걸어 다닐 시점에 형은 비역질에 빠졌다는 소문과 함께 집에서 사라졌다. 이 소문은 승철이 다섯 살이 되고 나서부터 꾸준히 들은 내용이었다. 말을 할 수 있는 다섯 살 승철은 아
눈이 많이 내렸다. 침소의 디딤돌이 겨우 보일 정도로 내려, 강의는 대부분이 취소되었다. 나비 중 황룡인 사형들은 잠시 단체로 사유서를 내고 영묘산으로 간다고 했다. 대외적으로는 많은 황룡이 자리를 비운다는 공고를 해야 하니 그리 알린 것이고, 서당에 남은 나비들은 이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홀로 백호에서 남은 한솔은 찬이 지냈던 사월촌에는 눈
마름달 스무하루 첫눈이 내렸다. 그런데도 아직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탓에 눈이 소복하게 쌓이지는 않았다. 청룡 침소는 햇빛이 가장 빠르고 깊게 들어온다. 정한이 창문을 열어둔 채로 결계를 둔 덕에 따스한 햇살만 침소 내로 들어오고, 찬 바람은 빗겨나갔다. 창에는 민규가 야무지게 걸어둔 건시乾枾가 있었다. 겉에 눈이 묻어 반짝였으나 눈에 비치는 것이 작아
2년 전, 춘분 음양이 반씩 나누어지는 날, 서당에는 1년 생원들이 새로 들어온다. 시끌벅적한 서당의 한가운데에서 원우와 지훈은 겨우 눈을 붙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위로 따스한 손길이 닿았다. 겨우 굳어가는 몸을 일으켰다. “황룡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리 퍼져.” 승철과 정한이었다. “안 내려갈 거야?” “가야죠…….” 원우가 주섬
입동이 되자마자 날이 이렇게 차다니. 한솔이 메마른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영조례라 당연히 침소에 저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순영이 곤히 자고 있었다. 창을 굳게 닫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차서, 조금이라도 새어 들어오면 순영이 깰 것만 같았다. 일찍이 습의를 끝마친 황룡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러 들어온 것이고, 제비뽑기에서 홀로 검
“할망. 할망.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무슨 소릴 하는 게냐. 넌 천성이 고운 것인데.” “이 나이가 되도록 뚜렷이 해낸 것이 없습지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예끼 이것아! 네가 그 위치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널 따르는 아이들은 뭐가 되냐! 버럭 화를 내어도 삼신의 앞에 앉은 자는 말 없이 바닥만 고운 손으로 긁어댔다. “혼인도
하늘연달 스무사흘 지수가 창 앞에 앉아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단풍이 절정에 이른 늦가을의 아침은 언제 느껴도 기분이 좋았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정한이 갑자기 도술을 써서 어딘가 사라지더니, 곧장 병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뭐냐고 물으니 국화주라 답했다. “...아침부터 술이 들어가?” “밤새웠으니까 아침 아니야.” 소매에 잔까지 알차게 담아왔다.
“달맞이꽃이, 폐화…,” “안돼!” “뭐 하는 짓이야!” 지수였다. 굳은 표정으로 준휘의 팔목을 잡은 지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승철에게 들었는데. 지수가 어제 오후에 서당을 나섰다고. “갑자기 왜 이래.” “…….” 준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수가 달맞이꽃을 흘긋 보았다. “돌아가거라. 네 죄는 평생 잊지 말고. ...이 일은, 함구하도록 하
신神은 나무를 타고 다닌다. 타고 다닌다는 것이, 그 위에 올라타 말처럼 나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무 속을 이용하여 이동한다는 의미이다. 연륜年輪이 많을수록 한 번에 여러 신이 움직일 수 있다. 그 권한의 순서는 체계적이다. 순서대로 명命을 다스리는 시왕(염라), 해海를 다스리는 용왕, 혼魂을 다스리는 상제의 권한이 가장 크다. 그 이후에는 천상
해오름달 스무하루 악착같이 1등만 보고 살아오느라 서당 밖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남들이 다 휴가를 받고 반출이라도 써서 가족에게 가는 동안, 순영은 셋과 서당에 묶여 공부만 했다. 올해 황룡이 결정되었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승철의 목소리에, 넷은 곧장 뛰어갔다. ─ 黃龍宣告 玄武 全圓佑 李知勳 朱雀 - 白虎 權順榮 靑龍 無名氏 주작 내에서 수석인
순영은 머리가 좋고 눈치도 빠르다. 날때부터 순영은 어머니를 제외한 세상 모든 것이 경계의 대상이었다. 시도때도 없이 화를 내는 주인 영감이 무서워 주어진 부엌일만 말없이 했고, 기분이 제멋대로 바뀌는 도련님이 두려워 그를 위해 도벽을 밥 먹듯이 했다. 천민출신의 또래 아이들은 죄다 뛰어놀았지만 순영은 혹여나 그마저도 어머니께 누가 될까 싶어 하질 못했다
사시 “동백이 좋긴 하더라.” 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정한은 쿠당탕탕 요란스럽게 움직이는 그를 보고는 픽, 웃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서책 세 권을 그의 책상 위로 얹었다. “...벌써 다녀왔어?” “응. 동백을 대니까 바로 보내주던데.” 동백이, 좋긴 하더라. 꽃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으나 권력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지수도 씁쓸한 표정
불을 피우는 것쯤이야 승철과 석민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투를 쓰고 있어서, 일반인들이 보면 불만 둥둥 떠다니는 괴이한 형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준휘와 멀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사부작사부작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준휘도 불은 갖고 있지 않았다. 마구에조차 불을 붙이지 않고도 성큼성큼 길을 헤쳐가며 홍월천에서 오는 그들을 맞
열매달 이레 “원우야. 나 가기 전에 마지막 소원 하나만 말하자.” “나도.” “...뭡니까?” “이십의 끝자락에조차 미치지 못하고 죽는 우리를 친구로 대해줘.” “......무슨..” “사자, 독각 말고. 우리를 염설과 이연으로 불러줘.” “그리고 이제 우리 때문에 울지 마.” 열매달 스무사흘 지훈은 원우의 방에서 잠을 청했다. 일찍이 눈을 뜬 원우가
백호가 된 순영이 궁기와 맞붙자마자 떨어져 나갔다. 객석에 있던 나비들뿐만 아니라 경합장에 있는 셋마저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환각의 숲에서 일부 한양 생원들에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마법 서당 생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호의 형태를 보여준 꼴이 되었다. 궁수가 넘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순영도 중심을 잃고 다시 제 모습으로 변했다. 그의 손에는
열매달 아흐레 “곧 추석이라 제주에 갈 생각에 들떠 있는데, 공부하려 하니 꽤 집중이 안 되는가?” “…….” “이른 아침에 들으려니, 꽤 버거울 만도 하지.” 멍하니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던 석민이 움찔하며 박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뒤에 앉은 민규와 명호도 저와 다를 것 없이 지루함을 느끼던 중이었다. 박사는 펼쳐두었던 두꺼운 서책을 턱 소리가
-망자 이연지李燃知는 수성금화사에서 근무하였다. 모두가 고의로 불을 지른 뒤 이를 수습하여 수당을 얻어가는 것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자들을 위해 기꺼이 제 삯을 깎아 수습해주었다.입사한지 다섯 해가 지난 견우직녀달 열이레에 망자의 하나뿐인 친우 염설원이 동료의 고의적인 방화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한
열매달 이레 지훈이 소리 없이 누각으로 들어와 정한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그의 곁에 서서 입을 달싹였다. 정한은 가만히 지훈을 기다려 주었다. 급할 것도 없으니까. “...원우랑 저....” 지훈이 할 말은 뻔했고. “아, 어어. 다녀와.” “...다녀오겠습니다.” 지훈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정한이 고개를 거세게 끄덕이며 허락을 표했다. 지훈이 누각
타오름달 스물사흘 “다 부쉈어?” “네. 침소 아래에 있던 백호 구슬, 찬이 발견했던 청룡 구슬, 준휘가 활로 쏘아서 깬 무예 무기고 지붕에 주작 구슬.” “응. 잘했어. 현무는 다른 생원이 직접 부쉈대.” “...네.” 순영의 손에 든 사방색의 구슬 껍데기들을 지수가 건네받았다. 작은 보자기에 그들을 감싸고 누각 지붕으로 올려보냈다. 4년 생원이 되면
서둘러 원우를 돌려보내고 침소로 향했다. 얇은 손목을 붙들고 주작 침소 뒷편까지 멈추지 않고 가는데도 준휘는 말 하나 얹지 않고 조용히 따라왔다. “무슨 일 있어요? 이 늦은 시간에 몸도 성치 않은데 돌아다니면 어떡해요. 이제 날도 추운데.” “...침소에는 석민이가 있으니까.” “...” “그..., 너도 봤어?” 준휘가 승철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승철
마법처럼, 눈을 뜨니 청룡 침소였다. 온통 푸른 빛이 돌았으나 제 침소처럼 드나들어 어색하지 않았다. 식은땀 때문에 몸을 뒤척이려 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곁에 있던 준휘가 말없이 닦아주었다. 고맙다고 할 겨를도 없었다. 기어코 둘 다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 “승철아.” 지수였다. 정한도 삐딱하게 벽에 기대어 있
타오름달 열흘 오방식시 당일이 되면, 황룡들은 축제에 참여하는 생원들을 위해 침소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석민도 마찬가지였다. 침소에 머물러 있는 동안 할 일들을 누각에서 챙겨 돌아오던 길이었다. 때마침 같은 방향으로 내려오는 명호와 마주쳤다. “웬일이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나가려고.” 명호가 사유서를 펄럭였다. 지금 나가서 오방식시가 끝
타오름달 여드레 서운관 앞에 서자 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 나왔던 곳과 일치한다며 나비가 들어간 곳의 문고리를 잡았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찬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고 순영이 찬의 바로 뒤에 승관을 세웠다. “제가 앞에 서도 돼요?” “뒤는 더 위험하니까.” 순영의 말에 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발소리를 없애고 찬을 따라가니 문관
타오름달 이레, 진시辰時 지수가 손바닥을 펼쳤다. 어느덧 진시 辰時였다. 자고 있던 저를 새벽에 깨워 누각에 데리고 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정한은 짓궃은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마법 같은 장면을 보여줄게.” “장난치지 마.” “...진짠데.” 토라지는 듯한 말투를 뱉은 정한이 진청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지수에게 다가갔다. 지수가
매화. 일패기생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월루골에 있는 매화는 내로라하는 꽃을 가진 집안에서도 쉽사리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었다. 기녀마다 각각 한 칸씩 개인 방이 있는 기방은 한양뿐만 아니라 전국을 찾아보아도 매화밖에 없을 터였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매화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 공간이라 불릴 만큼 거센 등불이 달려 있었다. 길을 잃은 나그네들조
견우직녀달 스무이틀 원우가 기지개를 켜며 앓는 소리를 냈다. 시간이 빌 때마다 누각과 꽃밭을 오가며 공부만 했던 터라 온몸이 쑤셨다. “매해 네 번씩 치르는 것인데... 특히 여름이 너무 싫다.” 원우의 말을 들은 순영이 기다렸다는 듯 보던 서책을 퍽 덮었다. “...얼마 전에 천상에 올라가 봤어.” “그랬지. 좋았어? 이제야 말을 하네.” “너랑만 있으
견우직녀달 이레 단옷날 지수의 얼굴에 생긴 생채기는 다행히도 금세 회복되었다. 정한이 틈만 날 때마다 지수의 얼굴을 잡고 확인했고, 정한이 가고 나면 석민이 와서 확인했다. 웃으며 괜찮다고 해도, 진지한 얼굴로 상처를 봐준 덕분이었다. “다 발랐어?” “네. 끝났어요.” 그리고, 끝까지 곁에서 상처에 약을 덧발라주는 순영도 한몫했고. “한솔이는? 공부하러
홍지수는 동백을 품고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홍지호는 집안의 맏딸이었으며, 백호 영수의 신령이었다. 한양에서 나와야 할 오방신의 수하가 제주에서 났다는 이유로, 그는 백발과 벽안, 그리고 그에 걸맞는 마법 능력을 갖췄음에도 신령밖에 되지 못했다. 신령으로 재임하던 중 그는 지수를 가졌으며, 배가 불러오는 탓에 이를 중앙에게 들켜 쫓겨나게 되었다. “...
누리달 스무하루 “뭘 그렇게 많이 들고 와?” “...과제요. 책방에서 가져왔어요.” “단오가 지났으니, 이제 첫 과제겠네?” “네…. 오방신에 대한 걸 조사해서 제출하래요.” “응, 그런 것 같네.” 한솔이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쌓아둔 책 중 오방신五方神 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집어 들자마자 지수는 제가 읽던 서책을 두고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누리달 열나흘 죽음을 모시는 꽃무릇 전가. 원우네 집안은 오래전부터 저승사자를 모셔 왔으며, 원우 또한 영혼을 볼 줄 알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매주 쇠날에 서당 밖으로 나와 그의 사자가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것을 도왔다. 꾸준히 2년 정도 그 일을 하니 그저 일상이 되어버렸다. 항상 피곤함에 찌든 얼굴을 하고서도 악착같이 뒤따라오는 원우를 빤히
누리달 열하루 현무에서 백호로 짐을 옮기는 생원들로 아침부터 침소 밖이 소란스러웠다. 한솔은 도포를 대충 걸쳐 입고 앞길을 여미지도 않은 채로 백호 침소를 나섰다. 그다지 쓸 데도 없을 것 같아 마구도 장롱 안에 넣어두고, 정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무작정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백호에서 주작을 지나 청룡까지 혼자 살랑살랑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맞으
누각 아래 벽보에는 누리달 열사흘부터 열닷새까지 단오제가 열릴 것이라는 공지가 붙었다. 전부터 일했던 황룡들은 물론이고 무예와 회화, 그리고 정악을 하는 생원들마저도 바쁘게 움직였다. 많은 생원이 단오제 준비로 인해 수업에 빠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여러 학년의 생원이 듣는 수업이 취소되기 시작했다. 오로지 황룡의 계획대로 수행되는 단오제였기 때문에 박사들
푸른달 아흐레 여름이 시작되고 보름이 지났다. 조금씩 더워지는 날씨에 침소의 창들은 죄다 활짝 열려 있었고 나무 아래 그늘에는 더위를 피하려는 생원들로 가득했다. 입하에 들어서며 배부되었던 모시 도포마저도 열어젖힌 채로 누워있는 생원들의 꼴을 박사들이 본다면 분명히 한 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생원이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옷고름을 풀
잎새달 그믐날 봄 시험이 끝이 나고, 지훈은 곧바로 침소로 향했다. 널브러져 있는 명호를 데리고 마반촌에 있는 잡상인의 집으로 데려갔다. 명호는 한양에 오기 전부터 죽관으로 된 마구를 사용했다. 느릅나무와 노송나무처럼 단단한 목재를 사용하는 다른 생원들과 달리 얇은 대나무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충격에도 순식간에 금이 생기기 쉬웠다. 손상이
잎새달 열이레 춘분이 지나는 시점부터, 석민은 항상 명륜당과 누각을 돌아다니며 하루를 지냈다. 매 계절이 끝날 때 치르는 시험 준비만으로도 바쁜데, 경주 생원까지 올라오는 단오제까지 준비하려 하니 몸이 열 개가 되어도 모자랄 듯했다. 2년 생원이 될 때, 마법학을 선택한 민규와 명호에 반해 석민은 약초학을 선택했다. 둘이 서당 한구석에서 조각보를 깔고 앉
“저 생원님은 같이 안 가는 겁니까?” “응? 아- 아마 담배 하나 태우고 오려는 것 같아. 그리고 그냥 사형이라 불러. 정한 사형이나 윤 사형이라고.” “아아, 네. 알겠습니다.” 등롱을 따라 걸으니 낮에 보았던 명륜당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침소에서 받은 물품 중에 작은 서당 지도가 있었다. 챙겨서 나오길 잘했다. 종이를 펼쳐 보니 파란 점 하나가
물오름달 열아흐레 푸른 나뭇잎이 넓은 창을 절반 정도 가렸음에도, 풍등의 빛이 사이로 스며든 덕에 답답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경칩이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생명체들이 속삭이는 소리조차도 배경 삼아 듣기 좋은 날이었다. “명호야.” 고요하던 현무 침소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다급한 지훈의 부름에 놀란 명호가 뒤를 돌아보니, 제 사형들이 엉망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