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따라 악몽을 자주 꾼다. 아무리 자주 꿔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집에 나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가 하면, 언제는 얼굴을 반쯤 그을려진 나진이 나에게 정말 복수할 생각이 있긴 한거냐며 질책하고 저주했다. 나는 그래 마땅했다. 아직 이 손으로 내 숨통을 끊지 않은 이유는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복수. 그것 하나뿐이다. 이번 꿈에도 나
"이번 달 분은 여기 있다." 책 세 권이 눈앞에 내밀어졌다. 소설책 두 권과 여행 수기 한 권이다. 살짝 헤진 책의 모서리가 다른 사람들이 여럿 빌렸음을 짐작하게 했다. 나견은 익숙하다는 듯 양손으로 책들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 책 보따리를 친히 가져다준 건 기사, 담청색 기린 지우스다. 큰 사건들이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아직 한창 바쁠 텐데. 그
"나진, 여기 앉아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니 마르샤가 바로 옆에 우뚝 서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지만 기대고 있던 나무의 녹음 덕에 눈부시지 않았다. "무슨 할 얘기라도 있어?" "아, 뭐, 음..." 모처럼의 휴식 시간이라서 혼자 있고 싶었다. 다른 애들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서 숨 좀 돌리나 했는데. 말동무라도 필요했던
불덩이처럼 뜨겁고도 새빨간 모래가 뱃속에서 역류한다. 흐트러졌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모래는 화약이 되어 머릿속을 달구고 헤집어놓는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 그것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저 남자의 모든 것을 부순다. 그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런 나를 보고 그가 넌지시 제안해온다. 우리는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아도 된다. 네 소원대로 죽어주겠다
삶의 아주 오랜, 어떤 것이 먼저인지도 모를 기억들. 그 뿌리부터 우린 언제나 함께였다. 둘이서 손을 맞잡고 어디든 갔고, 무엇이든 함께 했다. 배고프면 산에 올라 식물의 뿌리를 캐 먹다가 물가를 찾아 목을 축였다. 날이 추워지면 땔감을 찾아 불을 피웠고, 심심하면 나무 사이를 쏘다니며 서로를 쫓아서 놀았다. 넓은 산중을 뛰놀면서도 가는 발걸음이 같아 마
*아래는 쓰면서 들은 음악 링크 https://youtu.be/AsKETdR9UZ4?si=3g5waLqj52fwRk1X 나견은 지금 동대륙의 한 작은 마을에 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벚꽃나무가 만개하여 절경이었다. 밤이 어둑해졌지만 마을은 조명 축제가 한창이었다. 동대륙 풍의 등 안에 촛불을 키면 그 빛이 주변을 밝히며 아른거렸다
나견이 죽었다. 나진이 견습 기사가 되어 떠난 날, 나견은 마을 사람의 손에 죽었다. 모험가를 꿈꾸던 그가 짐을 모두 챙기고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을 열었을 때, 평소 쌍둥이에게 불만이 많던 덩치 큰 사내가 그를 덮쳤고, 나견은 저항할 틈도 없이 당하고 말았다. 타인에게 쌀쌀맞게 구는 주제에 특출나게 강한 동생과 화재 사건의 범인인 형. 특히 나진에게 심한
「사랑은 정의에 미친다」 그는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푸른빛을 응시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속도에 맞춰 문장이 새겨졌다. 사살을 허가한다. 그 말인즉슨, 필히 사살하라는 소리였다. 그의 입에서 같은 문장이 나왔다. 몇 보 떨어지지 않은 정면에 서있던 청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끄덕였다. 청년은 제대로 된 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