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후

What Am I

닥터후 카닥+도나

연전 by 연전

※2021년 발간 회지 60주년 기념 전문 무료 공개※

[카닥+도나] What Am I

w. 연전

※닥터는 시즌 9 이후, 도나는 시즌 4 이후 시점입니다.※

※전개를 위한 원작 미등장 - 회지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열람에 유의해주세요.※

“오, 도나. 진정해. 중요한 건 하나씩 짚어야지. 이를테면, 그래. 마지막 질문을 다시 정리해보는 거야. ‘나는 무엇인가?’”

런던, 치즈윅에서 느껴진 이상 반응을 따라온 닥터는

도나 그리고… 드림로드와 마주한다.

비상식적인 사건의 연속에 도나의 기억이 흔들리는데…


01.

한바탕 소란이었다. 건물이 떨릴 만큼 쩌렁쩌렁 고함을 치는 여인이 바닥 타일을 짓밟으며 나아갔다. 또박또박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분에 못 이겨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닥터!”

화로 가득한 낯빛이 붉은 머리마저 기가 눌릴 정도로 붉으락푸르락했다. 볼이 긁혔는지 작은 생채기를 남기고, 멋 나게 챙겨입은 옷마저 검은 먼지로 그을려 있었다. 불에 탄 흔적이라기보다는 오다가 땅바닥에 굴렀다는 쪽이 딱 맞았다.

건장한 남성 둘이 제지하고 나섰음에도 맥을 못 추린 채 길이 뚫렸다. 경고하건대, 저리 비켜요! 비키지 않는다면 험한 꼴을 당할 거라는 뜻으로 눈을 찔렀다. 시늉에 그쳤음에도 효과적인 위협이었다.

“닥터 스코필드!”

‘닥터-The Doctor-’가 아닌 의사-A doctor-. 처방받은 약 봉투를 꼭 쥐고 접수처를 통과해 거침없이 진찰실로 돌진했다. 런던, 치즈윅에 위치한 병원 시설은 오늘 한 여인에 의해 발칵 뒤집힐 예정이었다. 담당 간호사가 종종대며 따라붙었다. 이 안쓰러운 간호사가 흘리는 땀은 어찌나 많은지 조금 있으면 지나온 복도를 촉촉하게 적실 것만 같았다.

“템플-노블 씨, 닥터 스코필드는 오늘 비번이세요.”

“허, 나한테 이런 약을 팔아놓고 태평하게 쉬고 있다고요? 택도 없는 소리!”

목적지에 다다라 벌컥 문을 열자 씩씩대는 숨이 기어코 목표물을 쑤셔댔다. 간호사의 낭패와 의사의 당황이 교차하는 숨막히는 상황 속, 덤으로 얹힌 환자는 여인과 의사를 번갈아 돌아보며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어이쿠, 비번이라던 분이 여기 계시네? 간호사! 여기 이분은 누구셔요?”

의사에게 삿대질을 하자 간호사는 새파랗게 질려 눈치만을 살폈다. 쩔쩔매며 방황하는 눈동자를 마주한 여인이 당신에게는 일없다며 중앙 책상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도나? 이게 어떻게 된─.”

“홉킨스 부인, 정말 죄송해요. 이건 따져야겠어서.”

“그래, 그래….”

홉킨스 부인이 말을 얼버무리며 동글이 의자를 빙글 돌리자 ‘도나’라는 여인이 들고 온 약 봉투를 의사 앞에 보란 듯이 내던졌다. 의사가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봉투에서 삐져나온 약을 내려다봤다.

“이게 뭐게요? 당신이 나한테 판 약이야. 나한테 이딴 걸 팔아 놓고 숨어서 멀쩡히 진료를 하고 앉았어? 양심이 있어야지!”

눈꺼풀을 껌뻑이던 의사가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마우스를 달칵였다.

“템플-노블 씨, 분명 불면증으로….”

“잘 알고 계시네! 이건 알아? 나 이거 먹고 죽을 뻔했고, 증인도 다 있어.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니 좋디? 고소할 줄 알아요!”

법정 공방에서 유효한 증거가 될 약 봉투를 다시 집어 든 도나가 고개를 쳐들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고고하게 통보하려 일부러 꺼내입은 옷이 흐트러졌음을 일이 끝난 뒤에야 깨달은 탓이었다. 뻘쭘함을 숨기려 목을 가다듬은 도나가 홉킨스 부인을 문밖으로 이끌었다. 간호사와 의사만이 남은 진찰실에는 싸한 분위기만이 나돌았다.

 

*

 

도나의 죽다 살아난 무용담, 일명 약 부작용과의 사투를 들은 홉킨스 부인이 얼떨떨하게 작별을 고했다. 실력 좋고 착한 사람이었기에 믿기지 않는다느니, 사람 바뀌기 한순간이라느니 하는 대화를 나눈 뒤였다. 대기실을 꽉 채웠던 환자는 일련의 사건을 듣고는 우르르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나선 도나가 홉킨스 부인에게 또 뵙자며 손을 흔들었다.

병원에서 고소장을 날린대도 도나는 떳떳했다. 손해배상 청구를 하면 했지, 눈 떡하니 뜨고 당할 심산은 코빼기도 없었다. 걱정되는 건 먹었던 약을 끊었음에도 몸에 부작용이 남아 있으면 어쩌나 싶은 점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길바닥에서 정신을 잃어 차에 치일 뻔하지 않았던가. 다른 의사를 찾아봐야 하는 걸까, 근심에 찬 도나가 시내로 발 도장을 찍었다.

“오, 안 돼, 안 돼, 안 돼!”

순탄한 길이었을 터였다. 다급해 보이는 남자가 도나를 향해 달려오기 전까지는. 멈칫한 도나가 제 옆을 스치듯 지나치는 백발 듬성한 남자를 보며 몇 초를 굳어 있었다. 날 향했다는 건 착각이었나? 찰나의 얼떨떨함에서 겨우 빠져나와 전진을 위해 다리를 들어올린 순간이었다.

“어… 어?”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꽁꽁 얼어붙은 하늘은 금이 갔고 아스팔트 깔린 도로는 아지랑이처럼 흘러내렸다. 눈이 잘못된 것인지, 머리가 잘못된 것인지.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

 

까마득한 정신 끄트머리를 붙잡고 감은 눈을 찡그렸다. 아야야, 가벼운 두통 속에 의도치 않은 신음이 목구멍에서 솟았다. 닫혀 있던 눈꺼풀을 열었음에도 도나는 흐릿한 시야에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었다. 정신이 드냐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을 스쳐지나갔다.

“저기요!”

“뭐, 뭐야? 무슨 일, 콜록!”

웅웅 울리는 머리통은 좀 더 큰 자극이 고막을 때려서야 현실을 수용했다. 자신을 향한 말임을 인지한 도나가 번뜩 상체를 일으키다 침을 잘못 삼켜 사레가 들렸다. 폐를 뱉어낼 기세로 기침을 쏟아내는 도나에게 곁에 있던 여자가 물을 떠다 건넸다. 정신없이 컵을 건네받은 도나가 단숨에 내용물을 비워냈다.

“어우, 고마워요. 죽을 뻔했네.”

“진짜 돌아가실 뻔했어요. 길 한복판에 쓰러져 계셨다던데.”

대충 내려놓으려던 빈 잔이 그대로 가슴께로 들어올려졌다. 도나의 떡 벌어진 입 사이에서 물 대신 물음표가 콸콸 쏟아져 내렸다. 곁의 여자가 컵을 수거하느라 도나에게 닿아서야 도나의 ‘얼음’은 ‘땡’으로 풀려났다.

“그 빌어먹을 약이 또!”

도나가 상황을 되짚어 봤다. 닥터 스코필드를 만나 따지고, 홉킨스 부인을 배웅하고… 무슨 일이 있었더라. 길거리를 걷고 있었고, 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었다. 그러고 쓰러졌던 걸까? 이마를 짚으려던 손에서 따끔따끔한 통증이 올라왔다. 불길한 느낌에 고개를 천천히 돌리자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이 도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맙소사, 또 병원이라고? 나한테 또 뭘 놓은 거야? 닥터 스코필드!”

“진정, 진정하세요. 닥터 스코필드라면 케이K 병원의 의사 맞죠? 여긴 로열 호프 병원이에요. 맞고 계신 건 안정제고요.”

손등부터 이어진 링거 호스는 침대 머리 위에 매달린 수액까지 죽 이어졌다. 똑똑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투명한 액체는 반절 정도 줄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꽤 긴 시간 누워있었던 모양이었다. 뒤늦게 후각을 찌르는 약품 냄새에 코를 찡긋거렸다.

“보호자 동의는 받은 거예요?”

“응급 환자셨으니까요. 선 조치 후 연락 드렸습니다.”

“그럼 누가 여기로 날. 잠깐, 여기가 케이K 병원이 아니라고 했죠. 오!”

도나가 황급히 몸을 뒤적거렸다. 어쩌면 닥터 스코필드가 처방한 약의 진짜 정체를 이 병원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지만 척 봐도 작은 건물은 아니었으니 정보를 캐기에 좋은 기회였다.

“제가 이상한 약을 먹었는데, 쓰러진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서요.”

“이상한 약이요? 드신 후 어떤 증상이 있으셨고, 혹시 갖고 계신가요?”

“네, 불면증 때문에 먹기 시작했었는데…. 어, 갖고 있었는데, 왜 없지?”

아무리 있는 주머니를 다 털고 침대 밑과 이불까지 들썩여봐도 보여야 할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든 도나의 표정이 다소 절박했다.

“제가 쓰러졌을 때 주변에 약 봉투가 떨어져 있었다는 말은 없었나요?”

“그런 보고가 있었다면 진작 살펴봤을 거예요. 진정하시고, 집에 두고 오셨을 수도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내일 진료 예약해드릴게요.”

이렇게 된 이상 집에 빼놓은 약이 있길 바라야 했다. 도나가 체념하며 머리를 젓자 의사로 보이는 여자가 갈 채비를 하며 수액을 살폈다. 여자가 쥔 진료 차트에서 어렴풋이 도나의 이름을 본 것 같았다. 지갑에서 신분증을 확인했겠지.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저런 조치도 불가했을 터였다.

“스트레스도 복합적으로 원인이 됐을 수도 있으니 우선 푹 쉬시고, 수액 다 맞으시면 카운터에 수납하고 가세요. 내일 오실 때 약 발견하면 들고 오시고요.”

수납은 즉 강제 지출. 이건 부당했다. 스트레스를 줄이라고 들은 직후건만 도나의 마음속은 잠잠해질 기미에서 정반대였다. 내가 닥터 스코필드 그 양반한테 반드시 뜯어내고야 만다. 속으로 중얼거린 다짐을 끝으로 여자는 자리를 떠나갔다. 의사 가운에 적혀 있기를 ‘마사 존스’라는 이름이었다.

“닥터 존스, 라.”

이름의 주인은 일찍이 시야 밖으로 나간 참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봐도 좀처럼 풀릴 기색이 안 보였다. 병원 안에서라도 왔다갔다하는 게 나을 성싶어 침대 맡에 걸린 수액 팩을 뽑아 이동식 링거대에 걸었다.

그나저나 수액이 저렇게 닳을 동안에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았다는 건 이곳이 어지간히도 집에서 먼 곳이라는 뜻이었다. 병원 이름도 처음 들었잖는가. 귀가까지의 과정이 꽤 험난할 듯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아무나 관계자를 만나면 물어봐야지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정처 없이 사람이 나올 때까지 걸었다. 정신을 빼놓고 걷다 보니 이상을 감지하는 타이밍은 늦었다. 하필 이곳으로 오기 전에 빈 병원을 걸었던 탓도 있을 게 분명했다.

어느 곳에도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있다면 이렇게까지 정적을 느끼기란 힘들었다. 환자는커녕 아까 돌보고 갔던 여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임원 일체, 심지어 간호사조차 눈에 안 띄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밝은 창밖을 보면 문을 닫을 시간도 아니었다. 하물며 그렇다 해도 경비라도 있어야 이치에 맞는 일이었다. 삑, 삑…. 맥박을 재는 것만 같은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도나의 걸음걸이가 절로 빨라졌다.

도나가 다가가는 것보다 소리가 빠르게 다가오는 걸 보아 상대도 도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원초적인 공포감이 도나를 아릿하게 감싸 돌았으나 그보다도 철저한 ‘혼자’라는 점이 더 무서웠다. 이내 근접한 거리까지 다가오자 도나는 본인도 모르게 벽 뒤로 숨었다. 호흡이 가빠오는 것이 느껴져 되도록 숨을 크게 쉬려 노력했다.

“거기, 사람이에요?”

목소리를 쥐어짜내 소리쳤다.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사람일 것이고, 아니면…. 사실, 아닐 리가 없었으나 이미 이성은 미량 마비된 상태였다.

“사람이라니?”

오, 다행이다. 도나의 마음에 순식간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단어 하나가 이렇게나 고마운 줄은 처음 알았다. 한결 녹아내린 긴장에 도나가 링거대를 끌고 벽 뒤에서 나왔다. 이윽고, 상대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맙소사.”

‘삑삑’대는 기계를 든 상대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고개를 기울이는 도나를 보고는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서 있는 사람은 여전했다. 여기서 가장 마주치면 안 될 상대를 떡하니 마주하고 있다니. 닥터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

 

전략적 후퇴였다. 우선 타디스로 가서 도나의 주의를 끊어낼 필요가 있었다. 기계로 검출해낸 성분의 중심지가 도나라는 걸 알아낸 이상 좀 더 면밀히 검토하고 은밀히 움직여야 했다.

닥터는 본인의 ‘꽁지에 불붙은 펭귄의 뜀박질’ 자세가 ‘은밀’과는 상당히 큰 거리감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냅다 달렸다. 결과, 도나를 따돌리겠답시고 돌고 돌아 다다른 출입구에서 기다리는 도나를 만났다. 도나가 팔짱을 끼느라 놓은 링거대 바퀴가 바닥을 굴렀다.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패턴으로 따돌렸는데!”

“출입구를 중심으로 빙빙 도는데 어디로 갈지 퍽이나 모르겠어요. 인간이라뇨? 누군 인간이 아니신가 봐.”

닥터의 입이 다물렸다. 저 여자 앞에서는 닥터도 외계인일 수 없었다. 콜 힐 스쿨에서 관리인으로 취직했던 때처럼 인간 행세를 하는 것쯤, 닥터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도나가 말이 없어진 닥터더러 기가 눌린 거라고 착각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내 주의가 흐트러질 줄 알았어요? 천만의 말씀! 당신 누구야? 왜 도망쳐,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니. 초면이요.”

닥터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누구냐고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물은 직후 아는 사람이냐고 되물었다. 꽤 양호하지 못한 신호였으나 즉시 받아쳤으니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도나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아니, 정말로. 낯이 익은데.”

“그럴 리.”

낯이 익을 리가 없어야 했다. 그야 새로운 얼굴이었으니까. 도나가 기억을 잃은 뒤 접근 한번 한 적이 없으니 도나는…. 하던 생각은 거기서 그쳤다. 알 리가 없어야 하는데. 무언가를 깨달은 닥터가 이마를 손에 묻었다.

“왜 하필, 골라도 이 얼굴을 골라서!”

“이봐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난 닥터야! 사람들을 구하지.’ 아쉴다를 살릴 때까지만 해도, 다른 수많은 이들을 위기에서 꺼내줬을 때만 해도 좋은 깨달음이었다. 과거의 닥터가 닥터에게 보낸 메시지에 함께했던 이가 바로 도나였지 않은가. 만일 도나가 이를 낯익어한다면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방증일 테니 상황은 매우 나빴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택했던 얼굴이 사람을 죽일 판이라, 닥터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맹세컨대 우리는 만난 적 없습니다. 오늘이 처음이에요.”

“아, 그래. 그렇군. 이제 알겠어.”

닥터가 덜컥 눈동자를 굴렸다. 도나가 알아챈 게 그 무엇이 됐든 닥터에게, 또 도나에게 좋지 못할 것이 뻔했다. 도나의 링거대는 여전히 그의 손아귀를 떠나 자유롭게 부유했다. 여차하면 저걸 밀고 튀자. 링거 호스에 해가 가지 않을 만큼 밀면 도나는 반사적으로 붙잡느라 시간이 지체될 것이다. 혹여 다친다 한들 최대 출혈, 여기서 눈을 감는 것보다는 나았다.

“당신 정체, 닥터 스코필드의 첩자지… 아악!”

“뭐?”

도나의 말보다 닥터의 행동이 빨랐고, 닥터의 지각보다 도나의 눈이 빨랐다. 도나가 말문을 열자 닥터는 링거대를 병원 안쪽으로 밀며 출입구로 튀어 나갔다. 링거 호스가 당겨지며 도나가 물러선 순간─ 도나의 눈에는 얼빠진 닥터의 정면이 비치고 있었다. ‘뒤돌아’ 튀어간 닥터가 도나와 ‘마주보고’ 있는 판국이었다.

“뭐!”

“뭐?”

휘둥그레한 두 쌍의 눈알이 서로를 삼킬 듯 바라봤다. 닥터의 물음표가 일전의 현상에서 도나에게로 옮겨갔다. 중요한 단서가 스쳐지나간 탓이었다. 도나는 그저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도나의 입이 경악으로 떡 벌어졌다. 방금 뭐라고 한 거냐니! 지금 궁금한 게 정말 그거여야겠냐며, 현실을 좀 보라고 양손을 펼치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방금 어떻게 한 거냐고!”

“그거 말고 그 전에.”

“뭐!”

“그거 말고!”

닥터가 복슬복슬한 자신의 머리털을 헤집었다. 그래, 이 여자는 이런 사람이었지!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말을 아꼈다. 도나는 그저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당신이 닥터 스코필드의 첩자라고! 지금 이게 중요해? 내가 또 정신을 잃고 꿈이라도 꾸는 건가!”

“당연히 중요하지! 내가 왜 첩자야? 정신은 또 왜 잃고?”

이제는 링거대부터 꼭 붙든 도나가 닥터의 행색 하나하나를 꼬집듯 짚어냈다. 링거대에 매달린 수액이 팔랑팔랑 맥을 못 추리고 흔들렸다.

“당신을 좀 봐! 뽀글뽀글한 머리 하며 잔뜩 화난 눈썹 하며, 수더분한 옷차림까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인상으로 초면이라면 답은 하나지. 나 같은 사람이 나뿐만이 아닌 거야.”

“이상한 약을 먹고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 말이로군.”

“이상한 약을 먹고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 말이야.”

닥터와 도나의 말이 동시에 터졌다. 닥터는 회상했다. 휴온 미립자를 먹고 타디스에 불려왔던 도나…. 어쩜 이렇게 변한 게 없을까. 진심으로, 닥터는 도나가 ‘준다고 아무거나 받아먹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일한 대사가 겹친 통에 도나의 얼굴은 불쾌감으로 번져갔다.

“그래! 잘 알고 있네. 당신은 똑같은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감시하라고 닥터 스코필드가 고용한 첩자야.”

“그래?”

“난 케이K 병원에서 당신을 봤기에 낯이 익은 거고. 얼굴 사진만 보고 엉큼하게도 날 택한 거지?”

“무슨.”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난 유부녀고, 댁한테는 관심이 쥐뿔도 없고, 그 뻔뻔스러운 낯짝에 고소장을 날리기 전에 방금 그게 무슨 상황인지.”

“도나, 안 돼!”

“알고 싶, 우아악!”

끼어들 틈 안 주던 도나의 속사포는 강제로 끊겼다. 도나가 출입구로 다가섰기 때문이었다. 바깥 배경은 근접해온 도나를 집어삼키더니 도로 뱉어냈다. 도나가 본 닥터와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도나가 눈을 부라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것만 같은 도나를 뒤로한 채 닥터가 출입구로 팔을 내밀었다. 활짝 열린 유리문은 너무도 투명하여 마치 바깥바람이 손끝에 새어 나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차가운 기운은 전연 뇌의 농간이었음을 닥터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범한 풍경이 닥터의 손가락을 물자 제 몸뚱이를 우그러뜨렸다. 닥터의 전신을 먹어 치울 기세로 빨아들인 ‘풍경’은 이윽고 못 먹을 거라도 먹은 양 닥터의 상을 그대로 토해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한 파문도 남기지 않은 채였다.

“또 그러네! 대체 뭐하는 거야?”

“출입구가 막혔어. 흥미롭군. 좋지 않은데.”

“출입구가 막혔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무슨, 특수 효과나 그런 거겠지. 다 당신이 꾸민.”

닥터가 답답함에 몇 발짝 물러나 양팔을 죽 뻗었다. 할 수 있는 말도 거의 없으니 한스러운 마음만 겉으로 드러났다.

“생각해 봐. 난 너에게서 도망치고 있었어. 그 와중에 이런 걸 준비해서 어디다 쓰겠냐고. 당장 나부터 못 나가고 있는데.”

“그거야 당신이 알겠지. 닥터 스코필드의 첩자 양반.”

평소 같으면 펄쩍 뛰고도 남았을 닥터였다. 가뜩이나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거늘, 장기전이 돼봤자 좋을 거 하나 없었다. 참는 것만이 유일한 타파책임을 곱씹으며 ‘참을 인’자 한번을 더 속내에 새겼다.

“그래. 나 첩자 맞아. 정답이야. 축하해! 근데 여기 유감인 소식이 도착해있어. 아니. 이건 내가 준비한 일이 아니야.”

도나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닥터와 출입구를 번갈아 보는 눈빛이 불안하게 떨려왔다. 장난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순간 두통이 엄습해왔다. 머리를 손바닥으로 그러쥐었다.

“그럼 대체 누가 벌인 일이라는 거야…?”

닥터의 얼굴에도 핏기가 가셨다. 도나의 반응이 이상했다. 너무 강한 자극이었던 건가. 닥터가 안절부절못하며 도나에게 다가섰다. 선뜻 건드리지도 못하는 양손이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댔다. ‘도나’하고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아직도 눈치를 못 챈 건가? 지금쯤 잘난 체를 할 타이밍이잖아. 감이 죽었네, 닥터. 실망스러워.”

뻔뻔하고도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닥터의 귀퉁이를 때렸다. 그래,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었다. 이 기이할 정도로 현실적인 감각과 벗어날 수 없는 위기를 닥터는 이미 겪은 적이 있었다. 골때렸던 경험이 서서히 보따리를 풀었다. 닥터의 시선이 느리게 돌았다.

“설마 나도 잊어버린 건 아니지? 하긴, 그랬으면 내가 여기 어떻게 서 있겠니. 맞아. 반가워. 정확히 맞혔어.”

딱 닥터 본인만큼이나 말이 많은 존재가 닥터를 보며 싱글 웃었다.

“이곳이─ 꿈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두 번 다시 볼 줄 몰랐던 존재가 손을 흔들었다. 자신만만하고 여유 넘치는 자태로 사락 보타이를 풀어헤치는 남자. 드림로드가 그곳에 서 있었다.

 

02.

닥터의 눈썹이 험하게 휘었다. 눈앞의 존재를 경계하며 부리부리하게 치켜뜬 눈에 드림로드가 양손을 어깨선으로 들어 올렸다. 리듬체조의 리본처럼 풀어 헤친 보타이가 하늘하늘 흘러내렸다.

“눈빛으로 사람 죽이겠어. 너무 그렇게 보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드림로드의 시선이 도나에게로 기울었다. 강한 두통에 휩싸여 숨을 몰아쉬는 모습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양 위태로워 보였다. 닥터가 도나 앞으로 걸어 나오며 드림로드를 가로막고 섰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 보고 싶었어?”

“도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얄밉게 귓가에 손바닥 한 짝 걸쳤던 드림로드가 쯧하고 혀를 찼다. 들고 있던 것을 옆으로 던지자 천조각은 몸에서 떨어진 찰나 사라져버렸다. 이 세상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타이는 촌스럽잖아. 이제 졸업해야지. 안 그래?”

“무슨 수작을 부리는…!”

“오, 진정해! 저 여자가 겪고 있는 건 나하고는 무관해. 난 아무 힘도 없다니까.”

드림로드가 결백하다는 듯 자신의 양쪽 가슴을 콕콕 찔렀다. 두 심장을 걸고. 닥터를 비롯한 타임로드가 쓰는 맹세 표현이었다.

“물론 나한텐 심장이 없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내가 그걸 믿을 거 같아?”

“믿고 자시고, 직접 물어봐. 저 여자는 나를 보지도 못할걸. 나는 그동안 심심하니 기타라도 치고 있을게.”

눈 깜짝한 순간 드림로드의 품에는 일렉 기타가 안겨 있었다. 신경쓰지 말고 볼일 보라며 휘젓는 팔에 잔뜩 인상을 구긴 닥터가 뒤를 돌았다. 고통이 다소 잦아들어 보이는 도나가 힘겹게 닥터를 향해 머리를 들었다.

“대체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 거야? 아우, 머리 아파 죽을 뻔했네.”

변화 일절 없이 멀쩡하게 말을 한다니. 폭주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닥터가 발걸음을 잘근잘근 떼어 내며 도나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죽다 살아난 것치곤 괜찮은 거 같은데. 아아, 흠. 이제 안 아프네.”

도나를 멍청하게 바라보던 닥터가 얼굴께에 손을 댔다. 왜 괜찮지? 어쩌면 도나를 완전히 깨우기에는 자극이 부족했던 걸지도. 좋진 않았으나 최악은 면했다. ‘멀쩡’하다는 부분이 걸리긴 해도 역시 이대로 눈을 감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저기요? 누구랑 얘기하고 계셨냐니까?”

그러니, 다음 문제는 이쪽이었다. 닥터가 검지를 꼿꼿이 들어 드림로드에게 삿대질했다.

“저게 안 보여?”

드림로드가 메고 있던 일렉 기타의 현을 쩡 내리쳤다. 연주의 의도가 전혀 없는 불협화음에 닥터가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도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닥터의 뒤쪽을 흘끗거렸다.

“어이! 저‘거’라니. 저 ‘사람’이라고 해야지.”

“마약을 할 것처럼은 안 보였는데.”

“뭐?”

드림로드의 말 따위는 무시하면 되었으나, 도나가 닥터를 훑는 눈빛에 측은함이 어렸다. 닥터는 방금 들은 말에 본인의 귀를 의심했다.

“하긴, 사람은 겉보기만으로는 모르니까.”

“아니.”

“충고하자면 그거 몸에 좋은 거 하나도 없어. 당신도 정신과를 좀 다녀야겠네.”

닥터가 표정으로 어이없음을 뚝뚝 떨구는 동안 드림로드가 자지러질 듯 웃어 재꼈다. 잠시 정색하더니 ‘거기 마약 단속반이죠?’ 하며 전화하는 시늉을 한 건 덤이었다. 이내 눈가를 훔친 드림로드가 잽싸게 입을 열었다.

“소용없을 거라고 했잖아. 나한테는 아무런 힘도 없다고.”

“하지만 말이 안 돼.”

“생각해 봐. 여긴 크리스마스의 북극이 아니야. 이 자리에 산타가 서 있을 순 없지 않겠어?”

“도나가 왜 너를 못 보는데?”

“여긴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세계니까. 저 여자의 기억 속에 내가 있나? 없지. 그러니 못 보는 거야.”

드림로드가 팔을 으쓱였다. 도나의 시점으로는 여전히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는 닥터였다. 도나가 절로 낭패가 곱씹었다. 이 병원을 탈출하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이 유일한 단서임에 한숨마저 나왔다.

“이봐요, 첩자 양반. 환상은 그만 보고 현실 좀 직시하시지. 약에 취해 있을 시간 없거든?”

“오, 맞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 타임로드 씨. 저 여자에게서 얼른 떨어져야지. 계속 붙어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드림로드를 믿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전 경험에서는 두 번이나 죽어서 손아귀를 벗어났으니 유의미할 가능성이 있었다. 행하지 못함은 교묘하게 끼어 있는 진실이 닥터의 판단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닥터가 드림로드를 똑바로 바라봤다.

“계속 말해 봐.”

“내 뒤에 오는 인간을 잘 활용해 보도록!”

“저기요…, 허?”

드림로드가 모습을 감추자 가늘게 뜬 도나의 눈 가장자리에 새로운 인간 한 명이 들어왔다. 복도 끄트머리에서 걸어 나오는 인영을 인식한 닥터는 초 단위로 뇌 회전을 마치고는 한 손을 번쩍 들었다.

“어이! 이봐!”

링거를 끌지 않을 뿐 입원 중인지 환자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고함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성은 닥터와 도나를 발견하고는 전신을 틀었다.

“저요?”

“그래, 너! 방금까지 나랑 무전으로 얘기한 거, 너잖아!”

“제가요?”

상황이 퍽 우스운지 여성이 입매를 실룩였다. 여성이 뚜벅뚜벅 다가오는 만큼 뒤뚱거리며 다가가는 닥터를 도나는 꾸준히 미심쩍게 지켜보았다.

“너, 닥터 스쿠비 두가 보내서 온 거잖아.”

“스코필드.”

“그거나 그거나. 어쨌든, 나야. 디스코.”

“디스코 뭐?”

마디마디마다 딴지를 걸던 도나가 무척 어이가 없다는 눈초리로 닥터를 흘겼다. 꼬박꼬박 돌아오는 맞장구가 웃겼는지 제삼자 여성이 또다시 히죽 웃었다.

“당신네 둘 되게 웃기네요. 닥터 스코필드라면 잘 알죠.”

“진짜로?”

“뭐요?”

드디어 여성의 대답을 귀담아듣는 도나였다. 목표물을 변경한 이채가 번뜩이며 상대를 잡아먹을 듯 점화했다. 타이밍을 잡은 닥터가 슬금슬금 발을 뒤로 뺐다.

“이 남자 말이 사실이었어?”

“디스코 어쩌고는 모르겠는데, 닥터 스코필드가 보낸 건 맞죠?”

“첩자가 하나가 아니었다니!”

도나 내면의 불길이 장대하게 타올랐다. 이것들 전부 한통속으로 쇼하는 거구만! 도나가 출입구를 향해 삿대질하는 동안 닥터가 천천히 사각지대로 몸을 숨겼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숨죽여 눈동자만 움직이는 것마저 들킬까 조심스러웠다.

“그럼 저 출입구에 무슨 장치를 해둔…, 야!”

닥터가 필사적으로 뛰었다. 잡히면 끝장이라도 날라 내빼는 행동이 추격해오는 사람을 살리려는 짓이라는 아이러니함도 뒤로하고는 내달렸다. 도나의 링거대 바퀴가 드르륵 끌려오는 소리가 살벌하기도 했다.

“야! 이, 첩자 디스코 자식아─!”

모퉁이를 돌아 아무 문이나 밀고 들어가자 도나의 절규가 뚝 그쳤다. 스스로 끊었다기에는 너무나 깔끔한 단절이었기에 닥터가 허겁지겁 들어온 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방향을 꺾자마자 들어왔으니 뒤따라 보여야 할 도나가 온데간데없었다.

“도나?”

“그 여자는 여기 없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닥터의 머리통 뒤에서 똑같이 허리를 숙인 드림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자세를 고친 닥터가 두 걸음 물러섰다.

“네가 아는 건 나도 알고, 내가 아는 건 너도 아니까. 그나저나 도망쳐놓고 찾다니. 참 바보 같은 짓이야.”

“도나는 어디로 갔지?”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겠냐, 멍청아!”

두 번이나 들은 멍청이 인증은 깨끗하게 무시한 닥터가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로 문틈을 훑었다. 푸른 빛이 진 흔적을 살펴보자 이번 수수께끼는 쉽게 풀려버린 듯했다.

“공간이 이동됐어. 여전히 병원 안이지만. 도나도 다른 곳으로 갔겠군.”

“다행이네. 이것도 이번 일의 배후가 한 걸까?”

빠르게 방안을 살폈다. 평범한 치료제의 이름을 한 약물들, 의료용 주삿바늘과 붕대 가위 등이 선반에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생명을 살리는 데에 쓰는 도구들은 모두 악용한다면 그를 끊는 데에도 무리가 없을 성싶었다.

“괜한 생각은 하지 마. 그러다 이번엔 진짜로 가는 수가 있어.”

“어떻게 확신하지?”

“네가 바로 나야. 네가 죽으면 나도 사라져. 그걸 누가 반기겠냐?”

못 미덥다는 기색을 온몸으로 풀풀 풍겨대는 닥터였다. 드림로드가 지친다는 듯 입을 비죽이고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럼.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 봐.”

“이봐!”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건 일도 아니었다. 덩그러니 남은 닥터가 ‘어이!’하고 힘껏 소리쳐도 나오는 이 없었다.

 

*

 

모퉁이를 도는 것까지는 똑똑히 봤는데 도통 어디 갔는지 희한할 노릇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주요한 단서가 됐을지도 모를 인물을 놓쳐버린 데다 길까지 잃어버렸다. 왔던 그대로 돌아왔다고 생각한 자리는 생판 초면인 공간이었다. 그 생김새가 병원을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면 좀 나았을까, 바람이 무색하게도 도나의 세상은 하나도 변치 않은 정경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람.”

링거대의 바퀴가 아주 시끄럽게 울기도 했다. 거슬린다는 감상과는 다른 것이, 저 돌돌거리는 소리마저 동행하지 않았다면 적막 때문에 숨이 막혔을 터였다.

“이것 봐, 나 이제 혼잣말까지 하네.”

비상식적인 상황에 홀로 남아버리니 머리가 식어 차분해졌다고 생각했었다. 혼잣말을 하는 걸 보면 그건 아니었나 보다고 도나가 푸념했다. 사람 아무나 한 명이라도 찾는 게 급선무겠다고 판단을 내린 계기였다.

“이러다 정말 이상해지겠…는데, 잠깐.”

도나가 청각을 곤두세우고 걸음을 빨리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여러 명이 참여한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링거대 바퀴의 비명도 뚫고 들려오는 희망은 도나가 다가갈수록 더 크고 뚜렷해졌다.

“거기 누구 있어요?”

도착한 곳은 입원 환자들이 묵는 병실이었다. 기묘한 북적거림은 단연 이 안에서 새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도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밀어젖혔다.

“우와! 새로운 사람이 또 왔네.”

“어서 와요. 고생 많았죠. 환영해요.”

도나를 인지하기까지 흐른 잠깐의 정적 후, 단체로 환자복을 입은 이들이 환영 인사를 건넸다. 여덟 개 남짓한 침대보다 두어 배는 많은 인원이 한데 모여 있었다. 세 명 정도 침대에 누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가장자리에 걸터앉거나 자리 잡고 있던 각각은 새 동료를 맞는 것이 익숙한지 한결같이 웃는 얼굴이었다.

“다들, 여기서 뭐해요? 이 병원이 이상한 건 알아요?”

“뭘 하긴요. 살아있는 거죠. 이해해요. 처음엔 혼란스럽겠지.”

“차차 괜찮아져요. 우리도 다 당신 같았어요. 그냥 즐겨요.”

단독으로 동떨어진 것만 같은 도나가 주춤거리는 동안에도 모두는 전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병실 자체로 관심을 환기한 도나가 눈꺼풀을 깜빡였다. 분명 방의 면적보다 훨씬 넘치는 인구가 들어차 있었음에도 미어터지는 느낌 없이, 오히려 널널하기까지 했다.

“어라, 아까 그분이시네. 여길 찾은 걸 보면 역시 당신도 우리 일원이었던 거죠?”

도나가 뒤쪽에서 들려온 화두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방문을 가로막던 도나가 비켜선 덕에 들어온 환자는 출입구에서 마주쳤던 여성이었다.

“웬! 화장실은 잘 다녀왔니?”

“날 뭐로 보는 거예요? 유. 손 뽀득뽀득 잘 씻고 왔죠. 게다가 빨리 갔다 오기까지 한 것 같은데?”

‘웬’이라고 불린 여성이 손을 자랑하듯 반짝반짝 흔들었다. 아까 봤던 외출이 손을 씻기 위함이었던 듯했다.

“웬 신기록 달성했대!”

“슬슬 패턴을 알 것 같거든. 고마워, 웨이크. 오늘은 축제를 벌여야겠네.”

“예이, 축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부터 대여섯 살이나 될까 싶은 아이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였다. ‘웨이크’라는 아이가 제 옆의 꼬마를 ‘유피’라고 부르며 양손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청년 ‘윌’이 중년 ‘다이’와 축포를 나누며 박수를 쳤다. 도나만을 빼놓고 돌아가는 판에 도나가 갈피를 못 잡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신, 아까 닥터 스코필드가 보낸 첩자라면서요.”

‘웬’이 도나를 보며 웃었다. 가만 보니 저것 이외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어딘가 섬찟한 면이 있어 도나가 상대와의 거리를 벌렸다.

“첩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닥터 스코필드가 보낸 건 맞죠. 우리는.”

“닥터 스코필드의 환자들이니까요.”

도나를 제외한 병실 인원 모두가 입 맞춰 운을 뗐다. 뒤따른 침묵, 그 중심에서 하나둘 웃음소리가 피어올랐다. 하하, 호호. 마치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바이러스가 전원을 감염시킨 것만 같았다. 텅 빈 포복절도가 공간을 장악했다. 더는 소통이 불가능할 수준의 나사 빠진 광기였다. 링거대를 쥔 도나가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긴장으로 젖어 미끌거리는 느낌이었다.

“이곳에 올 수 있는 사람은 닥터 스코필드의 환자뿐이에요.”

“‘문’을 통과할 때마다 길을 잃지만, 걱정 말아요. 우리는 언제나 이곳으로 돌아와요.”

“이곳에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아요. 오직 행복뿐.”

“오직 행복뿐.”

하하하하! 폭소를 신호탄으로 도나가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이루 버티기 힘든 기괴함. 호흡조차 잊고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거세게 벌떡대는 심장만큼 링거대 바퀴가 맹렬히 울부짖었다.

도저히 뛸 수 없을 정도가 돼서야 겨우 멈춰 섰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숙인 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들이었다. 그런 소굴에 제 발로 들어간 게 원망스러웠다. 그에 비하면 처음에 만났던 ‘디스코’라는 양반은 그야말로 ‘양반’이었다며 그리운 마음이 샘솟았다.

그러한 도나의 심정은 도무지 수긍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를 이끌었다.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끊어서 내는 음절 하나당 돌연 땅에 지진이 일었다. 정확히는, 지진으로 착각할 만한 충격파가 온 지천을 울리며 도나에게 가까워졌다. 전신에서 불을 내뿜는 거대한 돌무더기였다. 화산에 팔다리가 달려 움직인다면 꼭 저렇게 생겼을 거라고 도나는 생각했다.

도저히 뛸 수 없을 정도라고 했던가. 뛰어 보니 뛰어졌다.

 

*

 

드림로드의 부재로 닥터 혼자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는 중이었다. 도나와 마주치지 않겠답시고 신경을 곤두서랴, 단서 찾으랴 고군분투했건만 유의미한 성과가 없어 짜증만 배가되던 참이었다.

“도망쳐어어!”

갈라지기 직전에 들었던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격양된 외침과 함께 큰 진동이 느껴졌다. 진원지를 향해 몸을 틀자 수액 팩만을 머리 위로 들고 ‘날 살려라’ 달리고 있는 도나와, 폼페이와 동시에 멸망했던 파일로바일의 보병이 열심히 발을 구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럴….”

‘그럴 리가’라는 감탄사를 채 내뱉을 짬도 없었다. 다 외쳤다간 저 발바닥에 깔렸다. 지금에 와 생사의 기로에 설 바에는 드림로드의 찝찝한 조언을 듣기 전에 일을 끝내놓았을 테다. 도나와 나란히 합류한 닥터가 전력으로 뛰었다.

“대체 저런 건 어디서 붙여온 거야! 꼴은 왜 그 모양이고?”

“낸들 아나! 링거대를 계속 끌고 다니기엔, 그거 들고 계단은 어떻게 올라가게?”

저 보병 또한 도나의 기억 속 존재였다. 이 세계가 꿈이라 하여 드림로드를 비롯해 저 존재마저 환상이라 치부하기에는 복도에 즐비한 의자가 불에 그슬려 상처 입거나 큰 몸뚱이에 치여 날아다니는 현상을 어찌 설명할까. 물리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면 물도 없는 마당에 도망만이 상책이었다.

“잠깐, 물이라고?”

“물은 무슨 물! 누가 뭐라 했어?”

이 병원은 그리 작은 시설은 아니었다. 거기다 입원 환자까지 수용한다면 병동 어딘가에는 반드시 샤워실이 존재했다. 실제로 닥터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시야 가장자리로 샤워기가 그려진 간판을 봤었다.

“물! 물이 필요해. 샤워실을 찾아!”

“샤워기로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할 셈이야?”

“쟨 불이잖아. 물로 끌 수 있으니까, 얼른!”

도나가 ‘뭐 이런 정신 나간 이론이 다 있나’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딱 맞춰 시선에 들어온 샤워기 그림에 도나가 눈을 크게 떴으나 반가움은 사치라는 듯 예비 방책은 저 뒤편으로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닥터와 도나가 달리던 탓에 바로 옆에 있던 목적지를 놓친 경우였다.

“미치겠네.”

“왜 그런 소릴…, 오.”

도나가 급브레이크를 밟자 닥터도 따라 멈춘 반동으로 뒤를 돌았다. 샤워기 그림이 처량하게 보병의 대가리 뒤로 삼켜지는 걸 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찌해볼 새도 없이 닥터와 도나는 목숨을 건 경주를 재개했다.

“이제 어떡해?”

“한 바퀴 돌아서 들어갈 수밖에 없어. 한 명이 놈의 주의를 끌 동안 다른 한 명이 한 층을 돌아서….”

“좋아.”

작전을 듣자마자 도나가 측면 계단으로 튀었다. 다시금 혼자 덜렁 남겨진 닥터를 보며 보병이 ‘끼에엑’ 하며 악다구니를 썼다.

“왜 다들 이 모양이야?”

복도는 곧 막다른 곳이었다. 급히 대책이 필요한 가운데 닥터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를 손에 쥐었다. 끝자락에 보이는 휴게실이라는 글자를 믿어보는 거다. 칸막이를 넘어오자마자 칼을 뽑듯 소닉을 꺼내 들고는 내질렀다. 곁에 구비된 식수대 수도꼭지가 펑 터지며 물줄기를 내뿜었다. 조그마한 수도라 위력은 약해도 잠깐의 도움은 바랄 수 있었다.

보병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치는 틈을 파고들어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더 황포해진 울음소리를 추진력 삼아 달음박질하다 보니 끝 쪽에서 도나가 마주 달려오는 모습이 포착됐다. 여전히 수액 팩을 머리 위로 든 채였다.

“바로 샤워실로 들어가!”

“나도 알고 있거든!”

이번에는 공간이 이동하지 않길 바라며 샤워실에 동시에 진입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 염원만은 성사되어 비좁은 무대에 닥터와 도나, 보병 모두가 들어찼다.

“샤워기! 이게 정말로 먹힐 거라고?”

“잔말 말고 저거나 겨눠!”

허겁지겁 샤워기를 집은 도나가 보병을 겨누자 닥터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도나 몰래 소닉을 쬐어 샤워기의 수압을 최대로 올리니 물대포를 맞은 보병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더불어, 비명을 지른 건 도나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먹히…! 꺄악!”

들고 있던 걸 놓치는 바람에 자아를 가진 것처럼 휘날리는 샤워기는 보병뿐 아니라 애먼 도나와 닥터마저도 전부 물리칠 기세였다.

“뭐하는 거야!”

“한 손으로 버티기에는 수압이 너무 셌다고! 댁이 들어보든가!”

정신없이 수도꼭지를 잠갔을 땐 이미 파일로바일의 보병은 바위가 되어 무너졌고, 닥터와 도나는 흠뻑 샤워를 마친 지 오래였다. 졸지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봤다.

“잘 들고 있었으면 깔끔하게 끝냈을 텐데.”

“한 손이었다고! 수액 팩이라도 들어주든가! 지금 저 괴물보다 우리가 젖은 게 중요하다는 거야!”

도나가 바윗덩이를 삿대질하다 말고 기함했다.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보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이거 물에 닿아도 돼? 감염되면 어떡해?”

“이제 나보다 네가 더 신경 쓰는 것 같은데.”

어차피 꿈에서 벌어지는 일이야 현실에서 영향을 끼치지 못할 테다. 그리 판단한 닥터는 대충 괜찮을 거라고 팔을 휘저었다. 그보다 저 돌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얼마나 진짜와 유사한지 확인해볼 필요가…, 그런 생각을 일삼던 닥터의 안일한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도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링거를 놓아준 건 누구, 도나?”

“아…!”

머리를 감싸쥐는 도나를 보며 닥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물줄기가 뚝뚝 떨어지는 닥터, 물을 뿌리니 돌로 돌아간 괴물. 더없이 익숙한 장면들이 아닌가. 찌르는 듯한 격통이 다시금 도나를 엄습했다. 닥터의 존재 자체가, 의도치 않게 재현한 상황이 도나를 최악으로 자극했다. 그를 목도하면서도 당장 걸음을 물리지 않는 건 수중의 정보가 터무니없이 적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어…? 이게, 이게 다 뭐야!”

기억을 다시 수면 밑으로 끌어내리고 싶었으나 정신이 불안정할 때 함부로 간섭했다간 더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도나 뒤쪽으로 이동한 닥터가 마을의 이상을 잡아냈던 스캐너와 소닉을 꺼내 들었다.

“거대한 거미 괴물에다, 허억! 폼페이…!”

웅웅거리는 스캐너는 집요할 정도로 도나에게 모든 반응을 쏟아냈다. 소닉으로 도나를 훑어봐도 동일한 결과만이 나올 뿐이었다. 기억을 지우는 약, 레트콘과 비슷하나 레트콘은 아닌 성분이 도나에게서 감지됐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지. 뭔가 놓친 게 있잖아.”

조용히 곁에 나타난 드림로드의 언질이었다. 닥터가 드림로드를 흘기다 시선을 내렸다. 스캐너에는 별다른 이변이 없었다. 남은 소닉으로 도나를 한 번 더 스캔했다. 변함없는 반응 가운데 딱 하나 다른 부분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도나에게 들린 수액에 소닉이 닿자 도출된 결괏값이었다. 처음부터 의심해야 했었을지도 몰랐다. 그저 ‘도나’를 마주쳤다는 위기의식에 묻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던 거다.

“오, 흥미롭기도 하지. 음, 바보 같은 거겠군. 도나는 왜 쓸모도 없는 걸 달고 다녔을까?”

도나의 손을 끌어 올린 닥터가 조심스레 링거 바늘을 뽑아봤으나 피 한 방울 새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아무것도 맞지 않았기 때문에 바늘이 꽂혔던 자리에도 생채기조차 없었다. 타일에 떨궈진 수액이 화산재를 씻어내리는 물과 섞여 하수구로 흘러 들어갔다.

“이게, 무슨. 아까 의사가 분명.”

“무슨 의사, 닥터 스쿠비 두?”

“아니, 잠, 아…! 이건, 이건 또 뭐야. 아트모스에서 왜, 손, 손트런? 이 물고기같이 생긴 건 대체…?”

이 이상 닥터는 도나와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질문 하나 더했다고 가속화라니, 얼마나 더 악영향을 끼칠지 장담하지 못했다. 아마 닥터와 떨어지면 아주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가 가능할 터였다. 희망사항에 불과하더라도 행동하는 쪽이 나았다. 닥터가 도망치듯 장소를 벗어나자 도나의 호흡이 차츰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죽지 마.”

지금 해볼 수 있는 건 도나가 언급한 ‘의사’를 찾는 일이었다. 도나가 이쪽 세계에서 실제로 본 게 맞는다면 예상컨대 이 일을 꾸민 배후일 가능성이 컸다. 닥터가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멀리 달아났다.

가만 도나를 바라보던 드림로드도 뒤이어 모습을 감췄다.

 

*

 

병원 복도에 감정이 실린 구두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공간 이동이 일어나는 알고리즘은 ‘문을 통과하여 방에 진입했을 때 방의 위치가 변경됨’인 듯하였는데, 그 타이밍이란 것이 아직 의문이었다. 처음 도나와 갈라졌을 때와 샤워실에 들어갔을 때의 간극이 무엇일까, 닥터는 그 수수께끼를 풀어내야 했다.

“의사 양반 말이야, 찾아야 하지 않겠어? 내내 복도만 빙빙 돌다가 마주치는 걸 기대하기에는 확률이 너무 낮은데.”

“네가 나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텐데.”

드림로드가 우스워하며 한쪽 입꼬리만 샐쭉 올렸다.

“병원 구조부터 파악하고 배후의 퇴로를 막으려는 거잖아. 내 말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위치가 계속 바뀌니까.”

“위치가 계속 바뀌는걸. 흠, 잘 알고 있네.”

두 사람의 말이 겹친 까닭에 드림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닥터보다 여유로운 보폭으로 따라옴에도 속도 차이는 별반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는?”

“그것도 맞혀보지 그래?”

닥터가 드림로드를 따돌리려는 듯 돌연 방 안으로 몸을 던졌으나 드림로드는 가뿐하게 본인의 상을 지우고는 번쩍하고 순간 이동 해왔다.

“내가 맞혀도 되겠어?”

도발하려는 듯한 말투는 귓등으로도 안 들은 닥터가 이번에는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어김없이 구성이 변동된 주변 구조가 닥터를 맞이했다. 잠깐 떼어 냈나 싶었던 드림로드는 벌써 닥터의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네 도주로를 마련하려는 거지. 방이 이동하는 패턴을 패턴화해서.”

“언제까지 나불거릴 셈이야?”

정답 선언도 없었으나 이미 다 맞혀버린 양 드림로드가 승리의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뒷짐을 지고는 상체만 살짝 숙여 몰래 언질 주는 시늉이 이어졌다.

“생각을 정리하기 쉽잖아. 놓치지 않게 상기시켜줄 수도 있고.”

“방해만 돼.”

“솔직하지 못하기는.”

‘문’을 통과해야 공간 이동이 이루어진다는 원리는 ‘문’만 통과하지 않으면 전체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이 건물에는 닥터 외에도 인간이 존재했으나 이 정도로 안 보인다는 건 끽해야 소수 인원이 활동을 최소화하고 있다는 것일 테니 별문제가 아니었다. 고로, 이론을 따지면 닥터의 눈앞에 있는 이곳이 닥터를 피해 숨어온 병원의 마지막 보루였다.

“정말로, 나는 네 편이라니까.”

“네가 내 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

닥터가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스스럼없이 열리는 문을 밀고 들어간 한편에는 ‘병원장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인기척이 없던 만큼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몸을 숨길만 한 틈새도 딱히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의사는 닥터가 확인하지 않은 수많은 방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 난 내 편이야. 그리고 여기 속보도 배달 왔네. 나는 말야, 죽기 싫어!”

드림로드가 지친 듯한 울분을 내비쳤다. 닥터가 눈길 한번 흘끗하더니 그대로 지나쳤다. 마지막으로 발견하기까지 꼭꼭 감춰 뒀던 방치고는 특별히 눈에 띄는 장치는 없었다. 으레 어느 병원에서나 볼 수 있을 책상과 책장, 사무용품과 서류들이 깔끔하게 비치되어 있었다. 닥터가 책상으로 다가서자 드림로드가 냉큼 의자에 앉은 자세로 나타났다. 감정은 그 새 갈무리한 듯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았다.

“이것 봐. 환자 기록 명부야.”

어느새 안경을 쓴 채 눈을 찌푸려 서류를 보는 드림로드를 피해 닥터가 명부를 들췄다. 스무 명은 족히 돼 보이는 이름들 맨 밑에 ‘도나 템플-노블’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말기 암에, 급성 백혈병, 교통 및 추락 사고까지. 으, 많이들 아팠겠는데.”

언뜻 봐도 중환자실에서나 볼 법한 병명들이 각 환자 옆에 기재되어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황급히 도나의 항목을 확인해보자 ‘불면증’이라는 증세만이 붙어 있었다. 닥터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나가 왜 이 목록에 적혀 있을까? 오, 잠깐만. 이 인간은 이름이 특이한데?”

드림로드가 손가락으로 몇몇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성과 이름을 갖춘 글자들 사이에 특정 단어만 적힌 이들이 있었다.

“웬, 유, 웨이크, 업, 윌, 다이.”

“네가 깨어날 때에, 넌 죽을 것이다.-When you wake up, you will die.-”

메시지, 배후가 보내온 예고이자 경고, 또한 닥터의 분노를 돋우기에 제격인 행패. 닥터의 기세에 눈을 동그랗게 뜬 드림로드가 손을 놓고 항복 제스처를 취하자 닥터가 명부를 가로채 왔다. 낱장을 넘겨 두 번째 장을 펼치자 이어진 목록에서는 모두 불면증, 우울증을 비롯하여 기억 관련 정신 질환을 겪고 있었으며 주치의는 닥터 스코필드였다. 그리고….

“이 이름이 왜 여기 있어.”

담당의 자리에 적힌 이름은, ‘마사 존스’였다.

“도나!”

닥터가 바닥을 박차고 나갔다. 이 사건은 더는 ‘기억’이 문제가 아니었다. 키는 ‘기억이 불러올 파급력’에 있었다. 이 세계는 철저하게 ‘도나가 기억을 찾기 위해’ 준비된 영역이었다. 그로써 노리는 건 높은 확률로 도나에게 잠재된 타임로드 에너지. 그 사용처는 알 수 없어도 배후는 도나를 연료로써 갈아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도나는 죽었다.

“잠깐, 닥터.”

“지금 너한테 맞춰줄 시간 없어.”

“주변이 좀 어두워진 것 같지 않아?”

드림로드의 언급에 닥터의 뜀박질이 그쳤다. 드림로드의 말대로 복도는 이전보다 어두워진 상태였다. 혹시 싶은 마음에 소닉을 꺼내 들어 전등을 비춰봐도 이상이 없었고, 최대로 높인 밝기도 효과가 미미했다. 이러한 특수성을 빌려 도나와 관계됐던 종족은 하나뿐이었다.

“바쉬타 너라다로군.”

“그림자를 세, 닥터.”

닥터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드림로드는 아예 권외라는 듯 그림자가 지지 않았다. 닥터를 둘러싼 사위에 어둠이 몰려왔다. 가장 가까운 비상구가 될 ‘문’도 이미 암흑에 잠식됐다. 옴짝달싹 못 하게 갇혀버린 형편에 초조하게 시간만 흘러갔다. 닥터가 자신의 그림자를 저 안쪽에 닿게 하지 않으려 몸을 움츠렸다.

“이 이상은 안 다가오나 본데.”

닥터가 모든 움직임을 거두자 바쉬타 너라다의 활동도 중단됐다. 마치 닥터를 포위하고 잡아두며 버틸 요량으로 보였다.

“뭐하는 거야?”

“이렇게 가만히만 있으면 목숨만은 부지해주겠다는 협박?”

“바쉬타 너라다에게 무슨 득이 있다고. 이건 놈들 방식이 아니야.”

본질을 따지자면 이곳은 바쉬타 너라다의 서식지로도 부적격했으며, 애초 파일로바일의 보병도 나타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 모든 게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꿈이었기 때문에 나타나 활개 쳤던 거였다.

꿈에서 깰 생각은 아니었다. 꿈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해본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추측할 뿐이었다. 거대한 돌덩이라면 형체를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그만한 물리력의 행사가 가능했다 치지만, 실제 바쉬타 너라다도 아닌 것들이 실제를 어디까지 따라 할 것인가. 시험해볼 가치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닭 다리가 없었으니 닥터의 몸뚱이가 담보였다.

“허튼 생각하지 마. 먹힐 거라는 확신도 없어.”

“확신이라면 있어.”

“어떻게?”

닥터가 드림로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결연한 눈빛이 곧게 상대를 죄어들었다.

“너.”

이윽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

 

잠깐 링거를 꽂고 있었다고 허전한 손등을 매만졌다. 바늘구멍 하나 남지 않은 감촉에 이질감이 들었다. 이 병원에서 깨어나고부터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가볍게 머리를 넘겨 봤다. 손가락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의 질감은 너무나도 진짜 같으면서도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아마 말끔하게 사라진 두통 탓이라고 짐작하는 게 도나로서는 최선이었다.

“닥터….”

꿈속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본 듯한데, 필름이 끊기듯 그친 격통 끝에는 어스름한 몽롱함만 잔류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꿈을 꾼 기분에 사로잡힌 와중에도 혀끝에는 ‘닥터’라는 말이 줄곧 맴돌았다. 이내 그 단어를 입 밖에 내면 따끔한 고통이 뇌리를 찔러오곤 했다.

“닥터 누구?-Doctor Who?-”

흐릿한 이미지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뭔가 중요한 것 같긴 한데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답답할 따름이었다. 샤워실에 죽치고 앉아있을 수도 없고, 움직이면 이 심정이 좀 나을까 하여 무작정 움직여보고는 있었는데 그다지 도움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인기척이 느껴지는 병실에 가까워지면 식겁하며 걸음을 물리기를 몇 차례였다.

하염없이 발을 끌다 팔에 닿는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갔다. 병실이겠거니, 침대에라도 퍼지려 들어와 봤건만 펼쳐진 광경은 약 제조실인 듯 쓴 냄새가 알싸하게 공기를 지배했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쉬기는 글렀다. 요즘 불면증을 겪느라 정신적으로 지친 마당에 신체까지 혹사하니 피로도가 장난이 아니었거늘. 당장이라면 복권 일등보다 침대가 더 절실, 아니다. 역시 복권은 당첨되는 게 좋겠다. 그 돈으로 침대를 사면 해결될 일이었다. 시답잖은 상상에 실없는 웃음이 새 나왔다. 덕분에 천근 같던 다리가 조금은 가벼워진 듯도 같았다.

“혼합물 비 육칠-B67-.”

흠, 봐도 뭔지를 알아야지. 도나가 고개를 으쓱였다. 선반에 붙은 전표를 닥치는 대로 읽어 봐도 모르는 걸 알게 되진 않았다. 괜히 간이 카운터에 놓인 약절구 공이를 들어 약 빻는 시늉이라도 해보려던 참, 도나의 눈에 익숙한 약물이 비쳤다. 처음에 닥터 존스에게 보여주려 했던 약 봉투가 절구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지쳤던 마음에 즉각 기름이 부어졌다. 알 수 없는 사건만이 반복되느라 잊었던 현실 감각이 느리게 불타올랐다. 시작부터 돌이켜보자. 상황이 암만 괴상하게 돌아가더라도 본질적으로 도나는 이 막대한 사기극에 있어 피해자였다!

“닥터 존스!”

닥터 스코필드는 몰라도 눈 뜨자마자 곁에 있었던 ‘마사 존스’라는 의사는 병원 내에 있을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안정제라던 링거마저도 정체불명의 성분이라 하지 않았던가! 목표를 잡은 도나의 눈빛이 오 분 전에 비해 홧홧했다. 약을 챙겨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성큼성큼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고리를 돌리려던 찰나. 지직거리는 굉음이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실내임이 명백했음에도 사납게 불어오는 바람과 번쩍이는 광채에 도나가 뒤를 돌았다.

“도나?”

문고리를 잡았던 도나의 손이 떨어졌다. 방금까지 아무도 없던 공간에 처음 보는 사람이 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가죽 재킷을 걸친, 어깨 선보다 조금 긴 금발을 가진 여인. 읽기 복잡한 슬픔이 새겨진 그 낯에 도나는 숨이 턱 막혔다. 여인은 말을 전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닌 듯 머뭇거리면서도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도나, 시간이 얼마 없어요. 뭔가 잘못됐는데. 이래선 안 되는데…. 정말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한없이 진지한 눈빛에 도나가 머리를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이 풍경은 기이할 정도로 기시감이 들었다.

“왜, 당신은 누군데요?”

평소였다면 손쉽게 떨쳐내고 지나쳤을 갑작스러움이었건만 기어오르는 동화력이, 강력한 몰입감이 도나를 사로잡았다. 혼란스러워 뒷걸음질 쳐보려 해도 막다른 데에 다다른 신체는 더 갈 곳이 없었다.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받고 싶지 않았다.

“도나….”

“잠깐. 아무 말도 말아요.”

“내가 누구인지 반드시 떠올려야만 해요. 그때면, 정말 미안해요.”

도나가 반사적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다음 대꾸를 듣지도 않아놓고도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도나가 들어서는 안 될 선언이었다.

“미안하면 하지 말아요. 오, 정말로. 그만두라고요.”

“그때면, 도나…. 당신은 죽어야 해요.”

“도나!”

쿵, 커다란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도나가 그 원인을 돌아보자 문에 달린 작은 창 너머로 허둥대는 닥터가 보였다. 아차 하고 도나가 급히 안쪽을 향했으나 여인이 있던 자리에는 공백만이 존재했다. 버거웠던 마음에 찬물이 끼얹어지기라도 한 듯 맥이 풀렸다. 찜찜함만을 그러쥐고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닥터는 여전히 우스꽝스럽게 창밖에 매달려 있었다. 정황을 수용하기까지 필요한 간격, 삼 초였다.

“문고리 붙들고 뭐하는 거람?”

“제길, 이게 안 열린다고!”

창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대화라는 부분에서도 도나는 익숙함을 느꼈다. 도나가 만져봐도 잠금장치도 없는 민자 문고리는 당연하다는 양 돌아가지 않았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도나의 눈치를 살핀 닥터가 소닉을 꺼내려 했다. 심정을 가다듬은 도나가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뒤로 물러서, 이 양반아.”

언행일치 제스처를 대충 휘두른 도나가 문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심상찮음을 읽은 닥터가 황급히 옆으로 대피한 직후, 도나는 발길질 한 방으로 막혔던 장애물을 날려 버렸다. 문짝이 종잇장처럼 너덜너덜하게 나부꼈다.

“실력 아직 안 녹슬었네.”

박살난 잠금쇠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던 닥터가 이 여자는 도대체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03.

옆에 자빠져 앉은 닥터를 보며 도나가 한 손을 허리에 올렸다. 슬쩍 기울어뜨린 고개에서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도망갈 땐 언제고.”

약 제조실 안쪽을 흘끔 곁눈질했다. 누군가 있었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먼지 한 톨 없는 말끔한 정경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 몸을 턴 닥터가 도나의 시선을 뒤따랐다.

“이 병원은 위험해. 안에는 누가 있었지? 출입구에서 봤던 푸딩 뇌?”

닥터의 구절마다 도나의 인상이 한심에서 놀람으로 펴지다가, 또 원점으로 되돌아가 찌푸려졌다. 잠깐의 의외성에 기대했던 게 바보 같았다는 심정이 고스란히 내비쳐졌다.

“각 방 위치가 바뀌는 병원에 갇혀서, 이게 현실이 맞나 싶은 괴물에게 쫓기고, 이상한 사람들까지 봤는데 새삼 이제 와서 ‘위험해’? 안에 사람이 있었단 건 어떻게 알고. 푸딩 뇌는 또 그게 무슨 단어고.”

“이상한 사람‘들’? 병원을 전부 돌아도 인기척은 없던데.”

도나의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닥터가 제 할 말만 나불거렸다. 무시당한 장본인이 기분 나쁜 체를 질질 쏟아내며 닥터 앞으로 몇 발짝 걸어 나왔다.

“얼마 안 가서도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오곤 하던데. 내 말도 못 들을 정도로 귀가 아주 어두워서 놓쳤나 보지.”

“그냥도 아니고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했어. 너만 본 이유가 뭐지? 그들은 실재하는 건가? 왜 이상하다고 생각한 거야? 안에 있던 인물과 관련이 있나?”

“뭐 이딴 사람이 다 있대?”

백 번이고 도나만 열 낼 것 같은 낌새에 도나가 두 손을 들었다. 불필요한 소모전에 기력을 빼기 전에 취한 일 보 후퇴였다.

“일단, 입원한 것처럼 보이는 환자들이었는데. 스무 명 남짓 돼 보였고 다들 닥터 스코필드의 환자라고 했어. 내가 뭐 유령이라도 본 게 아니면 실재겠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오직 행복뿐이라느니, 이곳에 올 수 있는 건 닥터 스코필드의 환자뿐이라느니 하는 말 때문이었고. 이 안에 있던 사람하고는 별 연관 없어 보였어.”

닥터 스코필드의 환자. 닥터의 뇌리에 병원장실에서 봤던 명부가 스쳐지나갔다. 스무 명 남짓이라면 인원수도 정확했다.

“그 환자들, 어디 아파 보이진 않았나? 거기 의사는 없었고?”

“고통이 없는 곳 운운한 건 있었지만 딱히 아파 보이진 않던데. 의사는 없었고. 따로 만난 사람이라면 있었네. 그리고 제발 질문은 하나씩 해.”

꿈을 꾸는 중병 환자라. 고통이 언급된 걸 봐서는 명부 첫 장에 적힌 이들일 확률이 높았다.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던 닥터의 눈동자가 허공을 쪼았다.

“정말 유령일 수도 있겠군.”

“뭐라고?”

“우선 마사부터 찾아야겠어.”

닥터가 출발한 길을 도나가 잰걸음으로 쫓았다. ‘마사’라는 이름을 들었더니 약 제조실에서 품었던 목표가 다시금 상기되었다. 잠깐 주춤했던 열의가 활활 타올랐다.

“닥터 존스 말하는 거야? 당신도 만났어?”

“반응 보니 만났다던 의사가 마사가 맞나 봐.”

“말본새가 아는 사람인가 본데.”

닥터가 언뜻 도나를 흘긋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가 반가웠다. 마사에 대한 기억까지는 아직 지켜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봐야 알겠지. 병원장실에 있던 환자 명부에 담당의라고 적힌 걸 봤을 뿐이야.”

흐음. 도나가 전혀 수긍하지 못한 내색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얕게 끄덕이는 걸 보아 문제를 그저 넘기기로 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눈빛과 수신호를 주고받더니 복도의 문을 보이는 족족 다 열어젖혔다.

“그럼 유령이라는 건 무슨 얘기야. 환자들보다는 방 안에서 나타났다 사라진 여자 쪽이 더 유령 같지 않나?”

순간 흠칫한 닥터의 손끝을 도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성별이 특정되기 전까지는 그다지 걸리지 않았으나 ‘나타났다 사라진 여자’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사건이 있었다. 도나에 이어 마사까지 등장했다면.

“그 여자, 이름을 밝히던가? 남긴 말이라든가.”

“아니. 이름은 모르겠는데. 전한 말은.”

도나의 안색이 어둑해졌다. 애써 의식 저편으로 보내버렸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전언이 눈앞을 스쳤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네.”

아이러니하게도 도나의 반응에 닥터는 안심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주먹에 땀이 뱄다. 도나가 들은 게 ‘그 단어’라면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괜히 양손을 비빈 닥터가 화제를 돌렸다.

“환자들은 ‘닥터 스쿠비 두의 환자만 이곳에 올 수 있다’라고 언급했어. 여기서 말하는 ‘이곳’은 이 병원이 아닌 그들이 있던 병실일 거야. 내가 환자들과 다른 게 뭐지? 내가 너와 다른 게 뭐냐고.”

“사람 참 한결같네. 정말로 하나하나 나열해 줘?”

입 닫으라는 뜻으로 닥터가 검지를 들어 도나에게 들이밀었다. 그를 탁구공처럼 손바닥으로 쳐 넘긴 도나가 코웃음을 쳤다. 닥터가 동그랗게 부릅뜬 눈에 도나의 검지와 중지가 찌를 듯이 엄습해왔다.

“어이!”

“오이! 내 입을 막을 생각일랑 곱게 접어 두라고, 첩자 디스코 양반!”

“다른 놈들은 대체 널 어떻게 상대하는 거지?”

예전에 어떻게 함께 여행 다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닥터의 머릿속에 과거의 자신이 굉장히 나약해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데리고 다닌 거라는 합리화까지 고개를 들었다가 고이 접혔다.

“질문에 답변 안 하는 수가 있어!”

“그랬다간 평생 여길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게 될걸!”

“당신이랑? 끔찍한 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도나가 소름 돋는다며 양팔을 양손으로 감쌌다. 닥터의 안면을 보고는 어깨를 살짝 떨더니 으으 하고 싫은 소리까지 냈다. 닥터는 차라리 과거 자신의 취급이 더 나았던 것 같다고, 지금하고 뭐가 달라서 이 꼴이냐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제 알았지. 그러기는 너도, 나도 싫으니 우리 협력이란 걸 좀 하자고. 처음 병원에는 왜 갔던 거야?”

한껏 못마땅하다는 듯 문고리에 힘을 실어 밀던 도나가 잠잠해졌다. 요 며칠 워낙 난장판에다 뒤죽박죽이었기에 정리할 겨를이 필요했다.

“불면증 때문에.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잠들기가 힘들어져서.”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그걸 기억하면 ‘어느 날부턴가’라는 표현을 썼겠어? 대충 한두 달 전부터인가.”

처음 타디스가 치즈윅에 착륙했을 때, 마을 대기에서 감지했던 이상 현상을 추적해보니 시작 신호가 석 달쯤 거슬러 올라갔었다. 한 달은 준비 기간으로 보고, 남은 시간 동안 천천히 물밑 작업을 해냈다고 보면 시기가 맞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왜 닥터 스쿠비 두를 찾아갔어?”

“불면증 관련으로 잘 보는 의사라고 해서. 뭐, 기억 장애나 우울증, 건망증 같은 증상도 잘 다룬다고 엄마가….”

“됐어. 거기까지.”

“가는 김에 상담 좀 받아 보라고 성화여서 다녀왔었지. 내 입 막을 생각 하지 말랬다.”

성질대로 안 풀리는 까닭에 닥터가 팔을 휘두르다가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있어 봤자 풀리는 건 뭣도 없었으니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상담받고, 약을 처방받았나?”

도나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건들려다 철회했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매만지며 얼버무린 손길을 닥터는 모르고 넘어간 듯했다.

“그랬지. 수면 유도제. 일주일 치.”

“평범한 수면 유도제가 아니었을 텐데. 어디서 구할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주머니를 건들 적기는 바로 다음 차례에 찾아왔다. 아까 약 조제실에서 꿍쳐뒀던 것이 도나의 수중에 있었다. 닥터의 눈길을 피해 슬그머니 꺼내든 도나가 걸음을 멈추고 유유히 약 봉투를 흔들었다. 종이 바스락대는 소리에 닥터가 눈썹을 찡그렸다.

“어디서 이렇게 거슬리는…, 오.”

“그래.”

“오, 도나! 잘했어!”

닥터가 감탄하며 손을 뻗어봤으나 도나의 멋들어진 성과에는 닿지 못했다. 도나가 잽싸게 주먹을 쥐어 숨긴 탓이었다. 왜 그러느냐며 눈을 댕그랗게 뜬 닥터는 도나가 팔을 내지르면 따라왔고, 도나가 그 상태에서 스트레칭하듯 크게 돌리면 똑같이 둥글게 포물선을 그렸다.

“왜 그래?”

“내가 골 빈 사람으로 보여? 이 정신 나간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란 건 알겠는데, 그게 내가 당신을 믿어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아.”

“진심으로? 지금?”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럴까. 이게 현 상황에 대한 유일한 단서잖아. 번번이 도망만 가는 사람을 뭘 보고 덥석 넘겨.”

이럴 시간이 없는데. 닥터의 입이 속절없이 말라갔다. 단서를 코앞에 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신의 신분은 밝힐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한 증명 또한 길이 막혔으니 최고 난관에 봉착한 셈이었다.

“내가 정말로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 이름을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막 부르고, 닥터 스코필드의 첩자라면서 그 정보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심지어 닥터 스코필드를 제대로 부른 적조차 없어! 수상한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첩자라는 건 네가 멋대로.”

“지금 그게 중점이 아니지. 당신 누구야.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

도나가 쥔 주먹 사이로 약 봉투가 비집어 나왔다. 억지로 빼앗았다간 앞으로의 일이 전부 틀어질 뿐이었다. 착잡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도움 필요해?”

이제는 진정 영영 사라진 줄 알았던 얄미운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들려온 쪽을 향했던 닥터가 재차 도나를 살폈다.

“또 그러네. 여긴 아무도 없다니까. 정신 차려.”

“여기 내 제안을 한번 따라 봐. 닥터 스코필드에게 당한 딸이 있다고 해. 껌뻑 죽을걸.”

닥터가 눈알을 한 번 굴리는 동안 수십 개의 변명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어떤 안이 제일 효율적일까. 인간의 관점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알 턱이 없었다.

“나는 과학 심리학자야. 닥터 스쿠비 두, 아니, 스코필드가 내놓은 약의 위험성을 파헤치는 게 내 임무….”

“사람 우습게 보지 말랬지. 방금까지 닥터 스코필드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던데. 과학 심리학자? 머리를 굴릴 거면 번듯이 굴려.”

도나의 말투는 조곤조곤했다. 꽤 뜸을 들이기에 얼마나 대단한 구실을 내세울까 했더니만. 사기를 치려면 그럴듯하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곁에서 드림로드가 ‘과학 심리학자?’라며 닥터를 조롱했다. 체념한 닥터가 오롯이 도나를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 그 의사에게 당했다더군. 여태껏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더는 날 보지 못하는 거야.”

나직한 언성이었다. 이 방법이 먹힐지는 미지수였다. 이마저 거짓으로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의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다. 드림로드가 팔짱을 끼고는 닥터를 지켜봤다.

“뭔가가 잘못된 건 확실한데 원인을 알 수 없었어. 그래서 혼자 조사를 시작했고. 혹여 꼬리라도 밟힐까 봐 내 신분도 감추고 말이지. 네 이름? 그때 안 거야. 같은 피해자로. 닥터 스코필드의 이름을 틀린 거? 내가 제정신으로 그 이름을 들을 수 있었겠어?”

닥터 자신에 대해서는 꼭꼭 숨긴 그대로였으니 실질적으로 바뀐 건 전무했다. 도나가 움직인다면 이유는 ‘자신을 보는 닥터의 눈빛이 너무 진솔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 ‘아는 사람’이 자신인 것만 같은 오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아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굴 말하는 거야. 가족?”

“친구. 옛 친구.”

닥터로서는 가장 이상적이어야 할 이 시나리오에 기대는 게 최선이었다. 도나는 응답이 없었다. 이 수용하기 불쾌한 오묘함을 소화하기도 벅찼다. 애꿎은 약 봉투만이 바스락 고함을 질러댔다. 닥터가 도저히 기다릴 수 없을 무렵에야 도나가 입을 열었다.

“안타까운 사연이긴 한데, 여전히 믿음은 안 가.”

드림로드가 안타까운 듯 탄성을 내질렀다. 아주 흥미진진한지 숨도 죽이고 이어질 장면을 고대하던 것이, 이 갈등이 한 편의 연극이라도 되는 줄 알던 모양이었다.

“그러게 내가 가족이나 내세우라고 했잖아. 직방이었을….”

“근데, 어차피 내가 갖고 있어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을 테니 합격한 셈 칠게.”

내깃돈을 걸었다가 잃은 허망한 작태를 꾸며내는 드림로드를 본 닥터가 진심이 아님을 알면서도 내심 고소해했다. 도나가 건네는 것을 냅다 받아내려 손을 뻗자 도나는 다시 살짝 거리를 벌렸다. 드림로드는 그새 자취를 감춘 이후였다.

“대신 이 약의 정체를 알고 여기서 나갈 방법을 꼭 찾아낼 것. 혼자 토끼지 말고 반드시 나를 데리고 나갈 것.”

“그 정도는 믿어도 돼.”

드디어 닥터에게 떨어진 약 봉투가 단숨에 찢어졌다. 손바닥 위에 후두둑 얹어진 알약은 일종의 정제된 결정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색색깔 빛을 반사하는 이 투명한 구 형태를 닥터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느낌이었다.

“내 옷에 주머니가 달려서 다행이지.”

“주머니?”

“그래. 음.”

도나가 문득 스스로 왜 이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떠오르는 대로 털어놓은 한마디가 자의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내 말은, 주머니 있으면 좋잖아. 웨딩드레스처럼 소지품 아무것도 못 챙기면 곤란하고…?”

닥터와 함께 있으면 도나가 기억을 되찾는 속도가 가속될 거라는 건 아직 유효했다. 이제 와서 갈라지는 쪽이 더 위험했으니 해결 방안은 도나가 모두 되찾기 전에 사건을 끝내는 것뿐이었다.

“내가 왜 이 얘기를 꺼냈지?”

“주머니! 있으면 좋지. 편리하고. 난 예전에 주머니로만 이루어진 옷도 갖고 있었다니까.”

시치미를 뗀 닥터가 코트 안쪽으로 손을 넣어 알약에다 소닉을 썼다. 특유의 잡음이 비잉 울리자 말도 안 된다고 웃던 도나가 귀를 쫑긋거리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

“소리는 무슨 소리?”

어느새 코트 밖으로 양손을 내놓은 닥터가 능청을 떨었다. 타디스가 있었으면 성분을 분석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겠으나 그가 없는 이곳에서는 우회로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소닉으로 스캔한 결과가 레트콘 스캐너로 전송되면 시간을 대가로 값을 도출해낼 터였다.

“무슨 빔이라도 쏘는 것 같은 소리 말야. 어, 또! 이번엔 ‘삑’하고!”

이번에는 스캐너가 분석 과정에서 쓸데없는 효과음을 내질렀다. 근처에 동일한 성분을 감지하고는 진원지를 자동으로 추격한 탓이었다. 오늘 처음 도나와 마주친 이유이자 방법이기도 했다.

“쥐라도 있나 보지.”

이 꿈이라는 공간에 그런 생명체까지 구현됐을 확률은 없으니 허풍이었다. 겉으로는 전혀 티 내지 않는 닥터는 속으로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수상해.”

“난 무관해.”

두 팔을 들고 무력 자세를 취했다. 만약 더 가까이 와서 몸을 뒤져본다면 차안으로 스캐너까지는 꺼낼 요량이었다. 도나가 멈춰선 건 모퉁이 건너편에서 선명하게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도나가 도끼눈으로 닥터를 흘겼다.

“저건 진짜로 나 아닌데.”

아기 웃음소리만 같은 천진한 환호였다. 저곳으로 돌지 않아도 닥터로서는 저 정체를 가늠하기 어렵지 않았다. 저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강하게 작용하는 사유이기도 했다.

“나머지는 당신 맞다는 거지. 나 기억했어.”

“아니, 아니, 아니야. 도나. 그쪽으로 가지 마.”

예나 지금이나 도나가 닥터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천천히 자신을 지나쳐가는 도나 앞을 닥터가 헐레벌떡 가로막았다.

“진심으로, 가지 않는 게 좋을걸. 안 돼.”

“당신이 준비한 것도 아니라며 어떻게 확신해? 판단은 내가 해.”

이윽고 닥터를 가로지른 도나가 모퉁이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닥터가 도나 곁에 딱 붙어 막아봤자 도나 이길 닥터는 열세 번 재생성해도 없었다. 괴성의 실체를 찾아 바닥으로 눈길을 둔 도나의 눈매가 혼란스럽게 누그러졌다.

“어머, 안녕? 얘 좀 봐. 귀엽기도 하지…. 근데 이게 뭘까?”

말랑말랑한 젤리같이 생긴 작은 생명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방긋방긋 반기는 아디포스를 만난 도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항상 방심은 금물이거늘, 순간이나마 모든 경계심을 허물어뜨린 인간은 급습에 취약하기 마련이었다.

“허억… 흐읍! 자, 잠깐… 이게 왜 이러지?”

도나가 아니었다. 처음 듣는 불길한 경고음이 머리 위에서 딸랑댔다. 오늘 중으로 몇 번 겪어왔던 경험, 아무도 없던 장소에 낯빛이 좋지 않아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외출 약속이라도 잡은 양 보라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는 자신의 배를 움켜쥐고 식은땀을 들이부었다.

“대체 어디서. 아니지, 그보다도… 어디 안 좋아요? 배가 아픈 거예요?”

“도나. 그 여자는.”

“도, 도와주세요!”

닥터가 붙잡을 틈도 없었다. 도나가 허둥대며 다가가자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정확히는, 여자의 신체 전체가 이질적인 종족으로 재탄생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에서 도나를 이 앞으로 인도한 살덩어리들이 삐죽 기어나왔다. 개중 도나를 발견한 아이들은 방싯방싯 웃으며 인사하고는 했다.

“어?”

도나의 상황 파악은 늦었다. 다른 반응을 할 타이밍도 놓쳐 짧은 의문만을 내뱉은 도나의 동공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이내 닥터가 도나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길목을 벗어났다.

“잠깐, 잠깐 놔 봐.”

“놓으면 더 좋은 방법이 있나?”

“그치만, 이건…! 방금 사람이 죽었어!”

“아니. 방금 죽지 않았어.”

방금 죽지 않았다. 오래전에 꺼진 생명의 그림자가 지천에 재현됐을 뿐이었다. 배후가 갑자기 공격적인 방식으로 전환했다면 주어진 여유는 더 촉박했고, 여건은 더 나빴다. 그를 알 턱 없는 도나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내가 봤다고!”

도나가 닥터를 강제로 뿌리치며 멈춰 섰다. 눈꺼풀에 손을 얹고는 떼어내는 매 발자국에 충격이 뚝뚝 묻어났다. 제때 따라오지 못한 후폭풍이 도나를 휘감았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어!”

“그 여자는 방금 죽은 게 아니니까. 도나, 내 말을 들어. 날 믿어.”

두 눈 부릅뜬 도나가 닥터를 직시했다. 억지로 억누른 호흡에서, 헝클어진 머리칼에서 미처 못 다듬은 분노가 넘쳐흘렀다.

“내게 명령하지 마. 난 당신 소유물이 아니야. 당신이 대체 뭔데.”

“난….”

닥터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 정체를 밝히고 반 인간 반 타임로드였던 시절을 불러오면 이 처지를 가장 쉽게 타파할 수 있었다. 동시에 닥터는 알았다. 가장 쉬운 선택지는 언제나 가장 나쁜 선택지라는 것을. 궁지에 몰린 일순, 닥터의 코트 주머니에서 ‘삑삑’하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스캐너가 정보 분석을 끝냈다는 신호였다.

“아까 이 소리가 뭔지 궁금해했었지.”

“말 돌리지 마.”

“너한테 받았던 약의 성분 분석이 끝났어.”

닥터의 호소에 도나가 움찔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도나는 저 남자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을 터놓고 있었다. 정황이 불신을 조장했음을 도나가 문득 깨달았다. 누군가 짜놓은 것처럼 딱딱 떨어지는 전개였다. 의구심은 찰나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사람이 죽은 걸 보고 정말 저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가 있나?

그 여자는 정말로 죽은 게 아닌가?

“약의 성분, 궁금하지 않아? 이 상황을 유발한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닥터가 조심스럽게 스캐너를 꺼내 들었다.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 기계는 투박한 생김새를 한 채 주기적으로 삑삑대고 있었다. 눈동자만 돌려 결괏값을 흘끔거리던 닥터가 돌연 스캐너를 뚫어버릴 듯 노려봤다.

“기억 벌레에 심령화분 결정까지 검출됐어. 아! 그럼 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래서 레트콘과 비슷하다고 계속 뜨던 거였어!”

“사람 말이야, 그게?”

도나가 닥터의 곁에 접근해 똑같이 들여다봐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약 제조실에서 느꼈던 것만 같이 무지에 의한 심사가 슬금슬금 꼬아졌다.

“레트콘. 기억을 지우는 약이야. 원재료로 기억 벌레가 쓰이지. 배후는 이걸 너한테 먹여서. 오, 그래서였어!”

도나의 기억을 완전히 깨우기에 자극이 모자랐던 것 따위가 아니었다. 약이 인위적으로 한계치에 다다른 도나의 두뇌에 브레이크를 건 셈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도나는 이미 숨을 거뒀을 테니까. 배후는 계산적으로 도나에게 걸린 안전장치를 풀어 나가는 중이었다. 제일 중요한 건 이 부분이었다. 배후의 작전을 저지할 수 있다면 이를 역이용해서 현재 겪은 모든 사항을 도나의 수면 밑에 묻어두는 게 가능했다. 혼자만의 깨달음을 신나게 삼키는 닥터를 도나는 딴 세상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약이라고? 그걸 내가 먹었단 말이야?”

금발 여인의 말이 아른거려 도나가 미간을 구겼다. 되새기고 싶지 않아 눈을 감자 닥터가 도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높이를 맞췄다. 도나가 화들짝 놀라 눈꺼풀을 열었다.

“도나. 이거 하나만 기억해. 이건 꿈이야.”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상하고 괴상한 악몽. 꿈에서 깨면 전부 잊어버릴 테지.”

‘내가 누구인지 반드시 떠올려야 해요.’ 닥터와 금발 여인의 윤곽이 겹쳤다. 다들 내게 뭘 바라는 걸까. 내가 뭔데. 내가 뭐길래? 도나는 갑작스레 온통 낯설어졌다. 세상이 도나의 자의적인 판단을 강제로 배제하고 나섰다.

“싫어.”

또한 세상은 도나의 손을 저버렸다. 벌레의 날갯짓이 웅웅대는 진동에 등골이 오싹해진 도나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거대한 말벌이 도나를 향해 돌진하려 몸을 풀고 있었다.

“악몽이라고?”

지금 벌어지는 현상 일체는 현실과는 너무도 크게 유리됐다. 차라리 악몽이라 치부하면 모두 편해질 것 같았다. ‘같았다’라는 단어는 언제나 ‘그럴 수 없었음’을 내포했다. 병원 복도를 메우는 이 공기가, 낯선 환경이 도나에게는 익숙한 자극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당장의 ‘도나 템플-노블’과는 동떨어진 선득한 존재감이 언제부턴가 도나 곁을 끈질기게 배회했다.

“난 뭐야?-What am I?-”

“도나, 지금은 뛰어야 해.”

배후의 계획에 있어 마지막 조각, 기억을 잃은 반 인간 반 타임로드, 지워진 시간 속 닥터의 친우. 자신을 구성하는 잡다한 수식언을 도나는 외면하고 싶었다. 그 무엇 하나 ‘자기 자신’과는 멀었다.

“도나?”

“런던. 치즈윅 토박이. 평생 임시직을 전전하다가 이제는 정착한… 평범한 사람. 복권 한 번 당첨된 적이야 있지만, 내 말은, 딱 한 번이었어. 그걸로 평범하지 않다고 할 순 없잖아. 난, 나는….”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다. 잊힌 무언가가 도나를 잠식하게 둬서는 안 됐다. 이는 본능적인 반발심,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다. 지워지고 싶지 않았다. 방호벽이 둘러쳐진 제 내면에서 도나는 뒷걸음질쳤다.

“난 도나 템플-노블이야.”

“오늘 이곳에서 살아서 탈출할 사람이지. 자, 어서!”

닥터가 도나를 이끌고 가장 가까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끌려온 도나가 실내에 온전히 진입하자마자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은 거세게 닫혔다. 방의 이동 원리에 따르면 일시적으로나마 저 말벌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닥터의 작전은 성공했는지 매섭던 말벌의 날갯짓은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닥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도나의 차게 질린 호흡이 공중에 흩뿌려졌다.

“달렉…?”

도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에 닥터가 황급히 안을 돌아봤다. 도나의 가슴께까지 오는 키의 철골이 닥터와 도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달렉. 도나가 부른 이름은 그 종족을 이르는 정답이었다.

“닥터─. 달렉의 천적!”

꼿꼿이 선 닥터를 보며 달렉이 선언했다. 닥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문까지 닫아놓은 마당에 또 다른 데로 대피할 겨를은 없었다. 보기 좋게 배후의 술수에 말려든 꼴이었다.

“안 돼.”

“닥터? 닥터 누구, 당신이? 내가 아는 닥터는.”

입술을 틀어막은 도나가 눈시울을 붉혔다. 급박하게 몰아치는 심적 소용돌이의 원인조차 몰랐다.

“내가… 알아?”

들숨과 날숨이 불규칙하게 어긋났다. 부여잡은 머리에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스며들었다. 더는 물러설 곳도, 막을 수단도 남지 않았다. 천천히 회전한 달렉의 눈이 도나를 포착했다.

“도나 노블.”

“그만해!”

“닥터의─ 컴패니언!”

확장된 도나의 동공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무수한 장면, 그뿐. 억압됐던 봉인이 수면 밑에서 떠오르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선율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해방의 노래. 갇혀 있던 우드들이 풀려나며 모두가 화합을 이뤘던 합창이 도나의 뇌리에서 터져 나왔다. ‘닥터-도나 친구!’ 반복했던 외침이 곡조에 뒤섞였다.

“도나. 도나, 정신 차려. 무엇을 떠올리든 그건 가짜….”

도나의 전신에서 금빛의 실타래를 닮은 에너지가 두둥실 부유했다. 연기 같기도, 안개 같기도 한 금빛은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대기 중에 퍼져나갔다. 그의 눈동자마저 옅은 빛을 내뿜었다.

“여태까지 이걸 어떻게 잊고 있었지?”

다리에 힘이 풀린 도나가 주저앉자 닥터가 허겁지겁 다가와 도나를 부축했다. 닥터의 외양을 보고 깜짝 놀란 도나가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이 안에, 누군가가 있었다.

“유쾌하기는. 풀려버렸네.”

이제는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닥터를 우롱했다. 도나의 동공이 정확히 상대를 향했다. 도나는 자신을 볼 수 없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본인, 드림로드가 닥터와 도나를 내려다봤다.

 

04.

돌연 정색한 드림로드가 도나에게 다가섰다. 눈썹이 팔자로 휜 것이 걱정을 흉내라도 내는 듯했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지?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전부 깨운 건 아니거든. 무리는 말라고.”

묻혀 있던 사실들을 되찾은 도나는 이제 이 병원에서 겪었던 사건들이 자신 과거의 재현임을 알았다. 병실의 환자들을 제외하고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나 사람들은 떠올릴 수 있었으나 제 앞의 남자만은 생경했다. 주위를 둘러봤다. 달렉은 여전히 그 위치에 얼어붙어 있었고, ‘닥터’라고 불린 남자는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을 하고서 도나의 경과를 주목했다. 금빛 에너지가 흉흉하게 주변을 떠돌았다.

“닥터? 하지만. 난 달렉의 크루서블에서 타디스째로 떨어졌었어. 그다음에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도나.”

“당신은 폼페이에서 봤던 사람이잖아. 당신도 재현이라면 왜 닥터라고 불려? 닥터는 어딨어! 저 남자는 뭐고?”

“오, 도나. 진정해. 중요한 건 하나씩 짚어야지. 이를테면, 그래. 마지막 질문을 다시 정리해보는 거야. ‘나는 무엇인가?’”

달렉 곁에 선 낯선 이에게 도나의 시선이 고정됐다. ‘도나를 가만 놔둬’ 하는 닥터의 목소리도 도나의 귓구멍에는 닿지 않았다. ‘나는 무엇인가?’ 그 말이 도나에게는 ‘저 남자가 누구인가?’보다도 ‘도나의 정체는 무엇인가?’처럼 들려왔다.

“당신은 뭔데?”

“저 극악무도한 닥터에게서 널 독립시킬 존재지. 부를 이름 정도는 필요하니까, 뭐어, 이 모습으로는 ‘드림로드’라고 불러. 너희가 부르기로는….”

“이 일의 배후.”

닥터가 배후의 말을 가로챘다. 여유로운 미소를 띤 배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도나가 눈꺼풀을 한번 암전한 다음 순간, ‘드림로드’의 형상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흰 의사 가운을 입은 ‘마사’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 놀란 도나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그런 단어보다는 ‘닥터 존스’ 쪽이 듣기 좋은데요.”

“집어치워.”

“놀라지도 않네. 언제부터 알았어요?”

스스로 팔짱을 낀 배후가 흥미로운 듯 닥터를 바라봤다. 타디스를 타고 다니던 여행에서 ‘마사’를 채웠던 환희를 배후는 고스란히 따라 했다. 그럴 리 없다며 잰걸음을 떼는 도나를 그는 재밌어했다.

“처음부터.”

“아닐 텐데요.”

“당신은 마사잖아요. 방금 어떻게…,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둘이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고요. 당신이 모든 일을 꾸몄다고요? 저 남자까지도?”

허탈할 만큼 순진하다. 배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일부만 깨우는 데에 성공하니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었다. 타임로드 에너지는 풀풀 풍겨가며 아무것도 모른다니. 실로 유쾌했다. 나직이 노려보는 닥터의 눈초리마저 간지러울 따름이었다.

“여태까지 봐왔듯, 도나. 마사도 네 기억 속 이미지일 뿐이야.”

“이미지?”

찡그린 한쪽 눈에 불신이 깃들었다. 문제는 기억이었다. 적어도 도나에게 있어서는, 지나간 역사 속 인물보다는 함께 위기를 극복했던 동료에게 신용이 가는 건 당연했다. 비록 직전까지 다른 사람이 저곳에 서 있었다 한들 당장 보이는 것을 믿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마사, 말해봐요. 내가 이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처음 만난 게 당신이었잖아요. 닥터 스코필드를 만난 후에….”

“도나를 이 세계로 불러온 게 나였으니까요. 닥터 스코필드? 걔는 내 꼭두각시고요.”

“이 세계?”

허전한 손등이 시큰거려왔다. ‘마사’의 얼굴을 한 저 존재가 도나에게 이상한 약물을 주입했었다는 점을 잠깐 잊고 있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마주한 도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야 눈치챘어요? 파일로바일부터 달렉까지. 이게 현실이었다면 다들 어떻게 모였겠어요.”

팔을 으쓱인 배후가 쥐죽은듯 굳은 달렉의 대가리를 통통 두드렸다. 단단한 철판이 울자 달렉의 눈이 물 흐르듯 자극을 좇았다.

“통제는 또 어떻게 하고요. 난 그럴 힘 없어요. 이곳이 내 세상이라 가능했던 거죠.”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 따위 불가능해.”

“웃기지도 않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죠? 당신도 이미 겪어 봤잖아요. ‘도나의 세계’. 난 그 초석을 다져둔 거예요.”

도나가 머리를 저었다. 그 거대한 평행세계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가 차례로 희생됐고, 우주는 멸망만을 바라봤다. 도나는 그 중심축이 본인이라는 진상을 못 견뎌 했다. 도나의 타임로드 에너지가 한층 부풀어올랐다.

“유지를 위해서는 타임로드 에너지가 필요했겠고.”

“마침 딱 좋은 재료도 준비돼있고요.”

“왜, 날 보는 건데.”

노골적으로 또는 넌지시 집중되는 이목이 메스꺼웠다. 저들이 원하는 게 이 금색 대기인가 하여 떠나보내려 마구 휘저어봐도 그는 도나만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네 진짜 정체가 뭔데?”

“이 일의 배후. 그보다 더 필요한가요?”

도나의 몸부림은 무의미하단 듯 아랑곳하지 않은 배후가 재차 닥터에게 주목했다. 질문은 질문으로 갚는 게 상대를 놀리는 데에 제일이었다.

“왜 날 목표로 삼지 않았지?”

“미쳤어요? 당신이 우주에서 얼마나 악명이 높은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죠. 언제부터 나란 걸 알았어요?”

“‘죽음’에 집착할 때부터. 드림로드는 그럴 녀석이 아니거든. 날 불러온 이유는?”

“실수죠. 누구는 올 줄 알았나. 일정도 급히 앞당겼다고요. 죽음이라, 다음부턴 참고해야겠네.”

장본인을 앞에 두고 목표니 뭐니 하는 소리가 듣기 좋을 턱이 없었다. 뒤집힐 것 같은 속을 끌어내리며 도나는 억눌린 육성을 내질렀다.

“난 인간이야. 타임로드 에너지 같은 거 난 몰라. 날 두고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날 도나와 떼어놓으려 한 거군. 붙어 있다 보니 도나의 기억 복구가 가속된다는 사실은 얻어걸린 거고. 그 이상 간섭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겠지.”

“게다가 스스로 막다른 길에 몰아주기까지. 축하해요, 닥터. 당신의 오만이 이 여자를 위기 한가운데로 몰아넣었어요.”

씨알도 안 먹힌 도나의 반항성은 끝내 폭발했다. 자신이 부정당하는 감각에는 신물이 났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가 겉으로 드러났다. 배후의 논리에 입이 막힌 닥터가 도나의 기운을 의식하고는 아차 했다.

“난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도나의 에너지가 흉포하게 배어 나왔다. 그 농도와 밀도가 호흡조차 곤란할 정도로 치솟자 배후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도나가 힘겹게 배후를 돌아볼수록 그 빽빽함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로즈도 네가 꾸며낸 거야?”

“아, 그거 말이죠.”

눈꺼풀을 닫았다 올리면 감당할 수 없을 화가 내리칠 것 같아 부릅뜬 노력은 허무한 물거품이 되었다. ‘마사’의 자취는 지워지고 ‘로즈’가 새로 빈틈을 꿰찼다. 도나를 콕콕 찌르는 매혹적인 조소에 닥터의 눈썹이 사납게 꺾였다.

“장난 그만 쳐.”

“우, 무섭긴. 장난치는 거 아니야. 글쎄, 수액 들고 뛰는 건 엄청나게 웃기긴 했어요. 정말로, 하하!”

닥터를 보고는 손을 내젓던 배후가 도나를 향해서는 웃음을 터트렸다. 눈물로 촉촉해진 눈가를 찍고서야 숨을 고를 짬이 생겼는지 겨우 잠잠해지고는, 상쾌한 낯짝으로 싱글거리더니 번들거리는 눈빛에 열의를 불태웠다. 그 거죽이 로즈였기에, 닥터와 도나는 시야가 깜깜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궁금했거든요. 아무것도 아닌 걸 다 주입하면 그 존재는 어떻게 되는 건가.”

“나보고 죽을 거라고 했잖아.”

도나의 음성이 형편없이 떨렸다. 목숨을 붙들고 유흥거리로 소비하는 듯한 모습이 징그럽게도 괴이했다. 솜털만도 못한 죄악감이 검지 끝에서 농락당했다. 배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병원에 있던 환자들 말이에요. 다들 어땠어요? 행복해 보였죠?”

닥터의 안색이 차게 식었다. 배후의 단 한 마디로 알고 싶지 않았던 끔찍한 진실이 닥터를 후려쳤다. 참담함에 입이 벌어졌다.

“설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그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줬을 뿐이야. 제 명을 못 채운 이들에게 두 번째 삶을 하사한 거지.”

“거기다, 오직 행복뿐이라고 했잖아.”

천천히 굴리던 혀를 빼문 배후가 목을 기울였다. 사락 미끄러진 머리카락이 맞닿은 입꼬리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심상찮은 기운에 도나가 걸음을 무르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러면서 쓸데없는 것도 좀 지우고.”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왜 그래? 뭘 지웠다고…. 서, 설마.”

모두의 이목이 달렉에게로 쏠렸다. ‘쓸데없는 것을 지웠다.’ ‘행복만이 남았다.’ 두 가지를 조합하면 단 하나의 무참함만이 답이 될 수 있었다. 그를 깨달은 도나가 팔을 감쌌다. 소름이 끼쳤다.

“저들은 이미 본인의 자아를 잃은 상태야. 인간보다… 사이버맨. 심지어 달렉에 더 가까워. 일종의 함정에 빠진 곤충 군단이지. 다른 점이라면 함정의 의도가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라는 점. 거미줄에 조종당한다고 생각해 봐.”

“먹히지 않고, 개조당한 거구나. 감정은 제거되고 행복만이 남았어.”

“슬픔과 절망이 행복으로 변한다고 생각해보라고. 그걸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나?”

닥터와 도나가 연계하여 배후의 계략을 풀어냈다. 행복이란 단어 자체에는 잘못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 단일 주체만 남는다면 좋기만 할까, 과연 아니었다. 극단적인 예시로, 최측근의 살생마저도 ‘행복’하게 저지르는 병기로 이용된다면. 달렉보다도 더한 괴물이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문 것에 더해서 개조까지. 너는 지금 범해서는 안 될 금기를 두 개나 건드렸어!”

“흠. 좋은 의견 잘 들었어. 다 괜찮은데 하나만 정정하고 싶은걸.”

배후의 태도는 시큰둥했다. 닥터와 도나에게 관심을 주기보다도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발장난이나 치는 게 더 나았다. 달렉에게 기대고 서서는 지루하다는 심정을 온몸으로 역설했다.

“하나, ‘지금’이 아니지. 준비 및 실행 기간은 매우, 매우 오래됐거든. 내가 이 연구를 얼마나 오래 진행했는데. 약 배합법이 우주에서 뚝 떨어질 리도 없잖아. 그리고 둘. 음, 둘이라고 해버렸네. 하여튼. 금기란 건 누가 정한 건데?”

‘로즈’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닥터를 향한 의중이 블랙홀만 같이 강렬했다. 반박을 치고 들어가도 싶어도 상황을 압도하는 공기가 주변을 에워싸는 탓에 도나는 골이 띵할 지경이었다.

“생명은 유한하기에 의미가 있는 거야.”

“오, 닥쳐! 닥터,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너도 명부를 봤잖아. 그 사람들이 생을 다 즐기다 평화롭게 끝을 맞이한 걸로 보여? 내가 오래 사는 건 내 욕심이야. 하지만! 그 욕심으로 인해 행복해진 사람들까지 모두 죄인인가? 네 손으로 처단할 권한이 있어?”

‘닥터’라는 호칭은 ‘처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한 번 이름을 버렸던 건 그 까닭이었다. 옳지 않은 이치는 끊어냄이 마땅하나 그로 인한 무고한 희생은 스스로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었다.

“너도 저질렀잖아. 로즈가 캡틴 잭을 되살리는 걸 방조했지. 아쉴다는 어떻고. 네가 직접 숨을 불어넣기까지 했어. 더구나 ‘클라라’는? 세상에, 나한테만 뭐라고 하다니. 양심 없기는.”

‘클라라’라는 이름을 들은 닥터의 기색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로즈’의 눈에 타오르던 불길이 찰나에 스러지고 재미를 감지한 흥분으로 단숨에 차올랐다.

“우와, 너도 기억이 막혀 있구나? 흥미로워! 저 여자는 네가 막아놓고 똑같이 당한 처지라니!”

“시끄러워.”

“내가 그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는데. 어때? 날 도와줘. 거래를 하자.”

닥터가 흔들렸다. 그를 눈치챈 도나의 만면이 차차 붉으락푸르락하게 물들었다. 너울거리던 에너지마저 기가 죽어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 닥터 앞에 선 도나는 금방이라도 닥터의 뺨을 후려칠 태세로 위협적인 삿대질을 메다꽂았다.

“저딴 시답잖은 말에 휘둘리는 거 보니까 닥터 맞네. 오이! 무슨 염치로 고민이나 하고 앉았어? 그럴 짬이 있으면 나한테 설명이나 하라고! 내 기억을 막아? 누가 감히?”

“아이쿠야.”

“그리고 당신!”

다음 순서는 배후였다. ‘아이쿠야’라는 태평한 추임새를 넣던 그의 앞으로 도나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로즈의 얼굴인지라 차마 막 대하기는 힘들었으나 기세만은 등등했다.

“하던 설명은 마저 해야지. 그래서 그 모든 일이 나하고는 무슨 상관인데?”

배후가 웃음기를 거두고 자세를 고쳤다. 여전히 집어삼킬 듯한 눈빛을 하고서 똑바로 마주선 그의 위풍에도 도나는 한껏 꼿꼿하게 맞섰다.

“그 환자들, 당신만 희생하면 살 수 있어요. 세상을 위해 희생하세요.”

직설적으로 날아든 통보는 얼토당토않으면서도 위압감이 깃들어있었다. 반사적으로 움츠린 도나가 순수한 의문을 뱉었다.

“내가 왜?”

“아까 닥터는 ‘유지를 위해서’라고 했죠. 정확히는 그보다 더해요. 당신의 에너지만 있으면 이 세계를 확장할 수 있어요. 병원뿐만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거예요! 육체는 버리고 정신만, 행복만 존재하는 파라다이스에서 영원히 사는 거죠. 당신 하나만 바치면 모든 게 가능해요!”

도나의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도 모를 주장이었다.

“그게 내가 희생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아.”

“대의를 위한 명예로운 죽음이에요. 건세建世 신화로써 영원토록 남게 해줄게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끔찍하지 않을걸요. 난 살고 싶은 거지, ‘우주를 정복하고 싶다’같은 거창한 목표가 있는 게 아니니까.”

상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삶’을 지향하면서도 단단히 비틀린 광기에 도나는 경악만 외웠다. 닥터에게 이채가 서린 건 그때였다. 검지를 올리고 급하게 달려간 닥터가 배후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내가 질문 하나 하지. 너, 육체는 존재하나? 아마 없을 거야. 정신체만 존재하겠지. 네 정체를 말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겠고.”

새초롬하게 닥터를 올려다보는 배후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로즈’의 껍데기를 양껏 즐기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너희 정신에도 쉽게 간섭할 수 있었지. 이 세계에 들어온 이상, 너희가 보고 듣는 것과 관련된 기억은 스쳐지나가는 무의식 속에서도 다 잡아낼 수 있어.”

“그래서 이 세계가 필요한 거야. 넌 우주에 기생하며 사는 존재니까. 온전한 네 보금자리가 필요했겠지. 파라다이스?”

닥터가 코웃음을 쳤다.

“믿어 봐. 너 이전에도 똑같은 꼼수를 부린 놈들이 있었다니까. 그 녀석들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

“어떻게 됐는데?”

맞장구를 쳐주는 것도 배후에게 있어서는 여흥이었다. 창밖으로 팔을 뻗은 닥터가 바깥세상을 가리켰다.

“걔네들은 너랑 달리 육체가 있었고, 행성째로 쳐들어와서 지구를 희생해야 했던 데다가, ‘시간의 종말’을 맞이해 자기들끼리 승천하려고 했었어. 어떻게 되긴? ‘내가’ 저지했지! 안 그랬다면 그보다 훨씬 보잘것없는 네 계획은 구상도 전에 무산됐을 테니까.”

닥터가 두 손바닥을 교차해서 펼쳤다. 무산됐을 거라는 제스처였다. 도나가 믿지 못하는 눈초리로 닥터를 흘겼다.

“정말? 네가?”

“그래. 네 할아버지한테 물어봐.”

“뭐라고!”

당시 갈리프레이 최고 의회를 이긴 건 마스터와의 협공이었으나 이 자리에 없었으니 혼자 해냈다는 날조 정도는 해도 됐다. 배후가 웃음꽃을 터트린 걸 보니 금방 들킨 모양이었으나 닥터가 결정타를 가한 건 사실이었으니 당당했다.

“아, 웃기네. 기분이야. 이번 건 비밀로 해줄게.”

“뭔 비밀? 우리 할아버지를 사건에 끌어들였다고? 그 위험한 곳에? 언제 그랬어? 한두 번이 아니야? 네가 그러고도 닥터야!”

“어쩌다 보니 한 번 그런 거니까 어서 문 열고 뛰기나 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면 도나가 아니었다. 문을 열고 뛰기는 했으나 지옥에서 올라온 말발은 상시 가동 중이었다. 갑자기 도망치는 두 사람을 배후는 그저 놓아주며 입맛을 다셨다.

“저게 뭘 봤길래 비밀이라고 하는 건데? 작전은 있어? 생각했으면 그것도 다 들키는 거 아냐?”

“너네 할아버지 멀쩡하게 살아있으면 그 얘기는 그만해! 작전은 안 들켰어. 이제 생각할 거니까.”

“그걸 자랑이라고 말해?”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낫잖아, 조용히 좀 해 봐!”

“싫다고 했다, 이 우주인 양반아!”

“인간이란!”

“너 성격 되게 이상해졌다?”

어딘가에 숨기란 불가능했다. 세계가 배후의 손아귀에 있는 데다 도나의 에너지가 줄줄 새어 흐르니 추적은 일도 아닐 터였다. 따라오지 않음은 배후의 자만이었다. 노려볼 만한 건 그 작은 방심을 파고드는 거였다. 생각하자. 이 세계의 출입 원리는 뭘까? 배후는 어떻게 드나들지? 닥터가 골머리를 썩였다.

“근데, 우리 아까 베스피폼 피해서 방에 들어갔던 거잖아. 그럼 베스피폼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뭐?”

베스피폼? 닥터가 뜀박질을 그쳤다. 배후는 따라올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위치 파악이 어렵지 않다고 해도 준비해둔 묘수가 있는 것만 같은 행태였다. 그렇다는 건…. 도나의 말 대로였다. 바깥에는 그 거대한 말벌이 있었다. 닥터보다 조금 앞선 채 멈춘 도나가 이마를 짚었다.

“마주치기 전에 해결책을 마련해야겠군.”

“너 얼굴만 늙은 게 아니라 뇌도 늙었구나.”

“어떻게 봐야 그런 소리가 나와? 나보다 네가 더 나이 들었겠지.”

“그래, 진짜 맛 갔네.”

“뭐라고!”

두 사람이 투닥대는 새 멀리서 웅웅대는 날갯짓이 들려왔다.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한번 넘었던 고비였기에 특별히 책략을 쥐어 짜낼 필요는 던 편이었다. 문제라 함은, 필수 인물이 공백이라는 점.

“그때 베스피폼을 이겼던 건 아가사 크리스티였잖아!”

“매개체는 파이어스톤이었지. 이 세계는 현실의 열화판이야. 적당히 흉내만 내는 거라고. 베스피폼을 불러왔다면 근처에 파이어스톤도 연결되어 있을 텐데.”

“그래, 그럼 일단 뛰면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나갔다. 속력을 올리자마자 벽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 베스피폼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닥터와 도나는 그대로 급정거하여 반대편으로 뛰어나갔다. 이럴 때만 손발이 척척 맞았다.

“스쿠비 두가 뚱딴지같은 곳에 파이어스톤을 뒀을 리 없어. 어딘가 중요한 곳이면서 내가 못 찾을만한 데다 뒀겠지.”

“스쿠비 두?”

“그래, 배후 녀석 말이야. 그렇게 부르는 게 편하잖아.”

“어련하시겠어. 그래서, ‘스쿠비 두’가 어딜 골랐는지 짐작 가는 데는?”

‘스쿠비 두’를 굳이 강조한 도나가 닥터를 쳐다봤다. 격렬하게 달리는 와중에도 서로의 눈동자가 부딪쳤다.

“나는 못 가도 너는 갈 수 있는 곳. 환자들이 묵는 병실.”

“어으, 거기만은 너무 싫은데.”

“난 다가갈 수조차 없으니 어쩔 수 없어. 네 몸에 남은 약 성분이 그 방에 접근할 열쇠 작용을 하는 걸 거야. 갈라져서 움직이되, 명심해. 스쿠비 두가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다른 방은 들어가선 안 돼. 파이어스톤을 찾으면 출입구로 와. 내가 저 녀석을 잡고 있을 테니까.”

도나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으니 따를 수밖에 없음은 이해했다. 그와 수용은 다르다는 게 문제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도나는 한껏 싫은 숨을 토해내고는 바로 나타난 계단으로 냅다 빠졌다.

“이봐! 이쪽이다!”

꿀처럼 흐르는 도나의 에너지에 취한 베스피폼이 주둥이를 틀자 닥터가 소닉을 꺼내 들고 쏘았다. 강렬한 음파를 직통으로 쐰 말벌은 충격으로 전신을 비틀다 벌침을 한층 더 빳빳이 세웠다.

“도나가 일을 빨리 해결하면 좋겠는데.”

더욱더 맹렬하게 독기가 오른 말벌이 닥터를 쫓았다.

 

*

 

닥터와 갈라지고 나니 왁자지껄한 북새통은 어렵지 않게 도나에게 포착됐다. 배후가 무슨 장치를 해놓은 건지는 몰라도 출입구를 나갈 수 없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도나는 짐작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도망치기 직전까지 ‘축제’ 얘기가 오갔던 만큼 병실 환자들은 저마다 즐거움에 매달려 있었다.

“오! 아까 그분이잖아! 방황은 끝났어요? 행복을 받아들였나요?”

“아뇨, 난 그런 것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혹시 여기서 빨간 보석이 박힌 목걸이 본 사람 있어요?”

“저런. 이번 분은 좀 늦으시네.”

“목걸이! 본 사람 아무도 없냐고요?”

다급하게 외쳐봐도 진지하게 받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간혹 저들끼리 목걸이를 묻는 사람이 있었으나 본 적이 없다는 말로 흐지부지 무마될 뿐이었다. 사실 그랬다. 이들은 공동생활 기간이 꽤 길었을 테니, 누군가 소지하고 있었다면 즉각 누군가가 호명되고도 남았을 터였다.

“이걸 찾아요?”

도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흰 의사 가운을 입은 ‘마사’가 붉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들고 흔들고 있었다. 주변 환자들이 그를 보고는 반가운 내색을 했다.

“닥터 존스! 요즘은 바쁜가 봐? 닥터 스코필드는 잘 지내요?”

“그럼요, 유. 닥터 스코필드야 잘 지내죠. 이제 바쁜 일도 거의 정리됐어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요?”

“불편하긴. 다시 살아나고서 병균이란 병균은 죄다 내가 혼쭐을 내줬는걸. 아픈 데 하나 없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우리 오늘 파티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뛰어다니는 거 완전 즐거워!”

노인과 아이뿐만 아니라 병실 인원 전원이 진심으로 기쁘게 웃었다. 처음 느꼈던 기괴함보다 부드러워진 온기가 도나의 판단을 흐렸다. 정신 차려야만 했다. 도나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는 목숨이 걸린 사안이었다.

“이걸 보고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말이 나와요?”

“이건 옳지 않아.”

“누구의 판단으로? 이 사람들보다 당신이 더 소중하다고 어떻게 확신하죠?”

모두가 도나와 배후를 호기심 깊게 쳐다봤다. 그렇게 활기 넘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숨막히는 적막은 도나의 숨통만을 옥좼다. 배후의 손길을 따라 파이어스톤이 목걸이 줄과 부딪혀 짤랑거렸다.

“이 사람들 앞에서 ‘나만 희생하면 너희 모두를 살릴 수 있지만 너희보다 내 목숨이 더 중요하다. 나는 희생하지 않을 거다.’라고 선언해 봐요.”

“나는….”

도나의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입 뻥끗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너무나도 잔인한 국면이 도나에게 강제되고 있었다. 닥터라도 있었다면 이 짐을 덜어줬을까. 바람은 무의미하게도 도나는 혼자였다. 도움 없이 헤쳐나가야 했다.

“난 선택할 수 없어.”

“그런 답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닌데요.”

“난 평범한 사람이야. 하지만, 보잘것없지도 않아. 여기 있는 모두도 마찬가지야. 그것 말고는 내가 판단할 수 없어. 내가 뭐라고 판단하겠어? 난 인간이지, 신이 아니야. 인간의 관점에서는 이게 옳지 않다는 것, 그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야.”

겉만 번지르르한 회피성 대답이라고 봐도 좋았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도나의 최선이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못마땅해하는 배후에게서 잽싸게 파이어스톤을 낚아챈 도나가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자신들의 목숨이 재단되는 처지에서도 여전히 웃고 있는 환자들을 뒤로한 채 배후는 나타난 듯 사라졌다.

 

05.

닥터를 부르는 우렁찬 고함이 복도를 메웠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달리기 소리가 그리도 반가웠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닥터는 저 무시무시한 독침에 당할 참이었다. 돋보기를 복도 창문에 갖다 대 코앞에 놓인 고비를 넘긴 닥터가 사력을 다해 뛰었다. 햇빛에 지져져 펄쩍거리던 베스피폼이 금방 회복해서 닥터를 추격했다.

“닥터어!”

“출입구로 가!”

“나도 알고 있대도!”

파이어스톤을 휘날리며 목적지에 도착한 도나에게 닥터와 베스피폼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위협적인 장관에 도나가 팔을 쳐들고는 목청을 드높였다.

“이제 어떻게 해?”

“스쿠비 두! 우리 할 얘기가 있지 않나?”

“그거 설마 날 부른 건가?”

‘로즈’의 모습을 취한 배후가 벽에 붙어 섰다. 그 앞을 스쳐지나간 닥터가 도나의 곁에 서서는 브레이크를 밟고 숨을 몰아쉬었다. 베스피폼은 배후의 손동작을 따라 공중을 유유히 유영했다.

“스쿠비 두? 별론데.”

“지금 저 녀석을 불러서 어쩌자고? 베스피폼을 쓰러뜨리려고 갖고 오라고 한 거 아니었어?”

“그때는 강에 파이어스톤을 던져서 익사시켰지. 여긴 그럴만한 충분한 물이 있지 않아. 결국 쟤하고 정면 승부할 수밖에 없단 거지.”

배후가 벽에서 떨어져 뚜벅뚜벅 걸었다. 뭐가 됐든 마지막 국면이 될 삼자대면이었다. 삐뚜름한 자세로 배후는 닥터가 하는 말에 귀기울였다.

“그래서? 내 할 말은 다 했던 거 같은데.”

“네가 살아남는 데에 꼭 너만의 세계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네가 이 우주에 기생하는 존재라면 내가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 공생을 하자고.”

“닥터?”

“물론, 네가 또다시 허튼짓을 못 하게끔 내가 감시하겠지. 조용히만 살면 내가 간섭할 일도 없을 거야.”

배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닥터의 진의를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직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한 닥터의 머릿속은 훤히 보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너, 진심으로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해?”

“요약하자면 넌 ‘살고 싶을 뿐’인 거 아냐? 나쁘지는 않다고 보는데. 우리를 여기서 꺼내 줘. 내가 방안을 준비해볼 테니까.”

이 세계에서 나가기만 하면 도나의 기억은 다시 묻힐 테고, 닥터도 제안을 지킬 의향이 충분했다. 배후에게는 우주 정복 따위의 목표는 없다고 했었다. 최악은 아니었다. 진심만 통해준다면 평화롭게 사건을 종료할 수 있었다. 닥터가 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을 재촉했다. 불신을 장착한 도나는 목걸이를 세게 쥐며 뒤를 돌아봤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글쎄, 내 대답은… ‘싫어’야. 정말로 먹히길 바란 건 아니지?”

“그럼 이거나 먹으시지!”

도나가 파이어스톤을 출입구를 향해 힘껏 던졌다. 베스피폼이 배후의 수하에서 벗어날지 아닐지 확률 반반의 도박, 도나의 수는 적중했는지 베스피폼이 출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처음 닥터와 도나가 마주했던 것처럼 바깥 풍경은 거대한 말벌의 상을 집어삼키더니 그대로 뱉어냈다. 세 사람과 출입구까지의 거리는 가까웠다. 촌분을 다투는 상황에 모든 일은 급박하게 진행되어갔다.

작전을 파악한 닥터와 도나가 각각 반대편으로 몸을 빼는 순간 벌침은 배후에게 내리꽂혔다. 번지르르한 독이 복부를 꿰뚫고 번져나갔다. 황급히 말벌의 형체를 치웠으나 직격탄을 맞은 신체는 성치 못했다. 과연 이번 공격은 예상치 못하기라도 한 듯, 목을 조여 숨넘어가는 신음이 꺽꺽하고 떨렸고 홉뜬 눈이 벌겋게 익으며 도나를 째려봤다. 그것이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면 좀 나았을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발악은 ‘로즈’의 앞에 죄책감으로 빛바랬다.

“잠깐, 이거 왜 이렇게까지….”

“도, 나….”

“뭔가 이상해.”

쉰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며 배후가 무릎 꿇었다. 무심코 그에게 손을 뻗은 도나를 닥터가 막아서려던 찰나 모퉁이 너머에서 미세하게 기계음이 새 나왔다. 위이잉… 바닥을 미끄러지는 신호는 전진을 뜻했다. 절망과 파괴만이 뒤따르는 특정 종족의 진격. 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들은 그 지독한 예고를, 닥터는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도나, 안 돼! 도나!”

“말살하라!”

달렉의 데스레이가 도나에게 명중하며 그의 몸뚱이를 바깥쪽으로 날려버렸다.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 도나에게 닥터가 뛰쳐나갔다. 모두와 간격이 벌어지자 배후는 습격의 흔적을 지운 멀끔한 자태로 일어나 옷가지를 털었다. 급습을 마친 달렉은 배후에게 다가가다 손가락 튕김 한 번에 작동을 정지했다.

“도나, 도나! 정신 좀….”

“정말, 멍청하다니까. 이건 내 세계라고 말했을 텐데요. 나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거만하기 짝이 없네.”

도나를 품에 안고 맥을 짚어보던 닥터가 멈칫하더니 몇 번이고 재차 확인했다.

“아직, 숨이 붙어있잖아?”

“출력을 조정했지. 죽으면 곤란하거든. 깨어날 만큼은 아니야. 딱, 숨만 붙어 있어야 에너지를 뽑아먹기도 쉽지.”

배후의 말을 반박하듯 도나의 눈꺼풀 아래로 눈알은 흔들렸다. 손가락이 까딱거리는 반응도 보였으나, 아무도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꼭 이랬어야 했어?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잖아!”

“아니, 닥터. 나만의 세계를 갖는 것보다 더 좋은 게 뭐가 있어? 그보다 물러서는 게 좋을걸.”

도나의 온몸에서 일렁이던 타임로드 에너지가 심상찮게 꾸물거렸다. 그를 깨달은 닥터가 참담한 낯빛을 하고는 도나를 두고 물러섰다. 금빛 에너지가 도나를 감싸자 도나의 신체 활동은 더욱 가려졌다. 곤충의 고치처럼 꽁꽁 싸매진 도나를 보며 배후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깔깔댔다.

“이제 어쩔 셈이야? 원하는 걸 다 이뤘으니, 뭐가 더 남았지?”

“없어. 에너지 다 뽑아먹고 너도 이 세계에서 추방하면 모든 게 끝나.”

닥터는 더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도나의 에너지막에 시선을 고정한 배후가 귀퉁이를 건드렸다. 바늘에 찔려 터지는 풍선을 닮은 폭풍이 별안간 검지 끝에서 폭발했다. 금빛으로 수놓인 벽과 바닥은 병원 복도의 형체마저 흐물흐물하게 먹어 치웠다.

“마침내 내 계획이 전부 실현되는 거야!”

하늘하늘한 비단처럼 생긴 에너지가 서서히 도나에게 흡수되어 들어갔다. 저걸 다시 거두어들일 방편도 마련해놨다. 만족스러움에 홀린 배후의 사태 파악은 지체됐다. 머리를 들었을 때, 기이한 공백감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배후가 당황하며 사위를 헤맸다. 닥터가 보이지 않았다.

“닥터?”

돌아오는 대답은 텅 비었다. 배후와 누워있는 도나, 두 사람만이 공존하는 공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경계심을 높인 배후가 도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건 계산 밖의 일이었다.

“닥터, 무슨 꼼수를 쓰는 거야? 이건 네 권한 밖이라고.”

“닥터, 무슨 꼼수를 쓰는 거야? 이건 네 권한 밖이라고.”

한 박자 늦게 들려온 ‘똑같은’ 응답에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았다. 상체를 일으킨 도나가 배후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배후의 고개가 갸웃 기울자 도나는 그를 복사한 듯 따라 움직였다. 다른 겉껍데기가 씌인 거울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디서 잘못된 거지? 내 계산이 틀렸을 리가 없어.”

“어디서 잘못된 거지? 내 계산이 틀렸을 리가 없어.”

배후가 패닉하는 내내 도나는 한결같이 평온했다. 방금까지도 자신이 완벽하게 주무르던 장기말이 통제를 벗어난 상황은 한 치 앞이 깜깜한 공포와도 같았다.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

“생각을 읽을 수가 없, 뭐?”

“당연하지. 너 따위가 날 읽으려면 나이 이천 살은 더 먹고 와야 하지 않겠니, 꼬맹아!”

기어이 배후를 앞서버린 도나가 옷자락을 훌훌 털고 일어났다. 배후를 골탕 먹이는 기분이 아주 홀가분했다. 막 깨어난 두뇌가 가볍기도 했다.

“어떻게?”

“네가 이해할 수 있을 수준으로 친절하게 얘기해줄게. 인간? 네 주요 분야지. 타임로드? 뭐, 가능했다 쳐. 반 인간 반 타임로드? 두 번이나 꼬인 회로를 네가 감히 따라올 수나 있겠니?”

“하지만.”

“다브로스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어. 신선한 충격파 한 발! 내게 필요했던 거야. 그 자극이 내 기억을 완전히 깨운 거지.”

머나먼 과거가 바로 어제 일만 같이 생생했다. 신난 도나가 혀에 모터를 단 듯 떠들어댔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동작은 그를 보조해주는 수단이었다. 배후의 안색이 어두컴컴하게 질수록 도나는 눈부신 여명만큼 환해졌다. 도나는 웃었다.

“이거 진짜 환상적이다. 다시 느낄 줄은 몰랐는데. 실은, 무서웠거든. 내가 ‘내가’ 아니게 될까 봐. 근데 난 여전히 나야. 닥터-도나 템플-노블!”

“말도 안 돼.”

“미안하지만. 흠, 사실 미안하지도 않지만. 충분히 말이 돼. 이 기억은 처음부터 네가 들여다볼 수 없었을 테니까.”

배후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즈’의 이미지가 흐려졌다. 격분한 배후가 팔을 뻗어 도나를 가리켰다. 달렉에게 내리는 명령에 도나의 낯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이건 피하지 못할 테다. 배후에게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달렉! 말살하라!”

“말살하라!”

데스레이가 도나를 향해 쏘아졌다. 도나가 헉, 하며 숨을 들이마셨고… 곧장 멀쩡하게 돌아왔다. 따끔조차 하지 않았는지 그저 심드렁했다.

“너랑 똑같은 짓을 더 하는 건 재미 없잖아.”

“뭐라고?”

“아까부터 제대로 된 말을 못 하고 있는 건 알고 있니? 슬슬 지겨워지려고 하고 있거든. 달렉, 말살하라!”

도나의 즐거워 보이는 손가락질에 달렉이 몸통을 돌렸다. 뒷걸음질치던 배후가 달렉의 데스레이에 맞고 꼴사납게 굳어버렸다. 더 이상 ‘로즈’의 모습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괴상한 형상이었다.

“걱정 마, 죽을 정도의 위력은 아니니까. 그냥 한 시간쯤 꼼짝 못 하고 있는 게 다야. 내가 기억을 되찾고도 네가 멀쩡할 줄 알았어? 닥터가 말 안 하디? 기억을 되찾으면 닥터보다 내가 더 위험하다고.”

입술 주름 하나 뻥끗하지 못했다. 도나의 모든 발언은 허세가 아니었다. 닥터의 좋은 점만 빼다박은 그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심지어는 실질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니, 배후는 도나를 표적으로 삼은 시점부터 이런 꼴이 예정되어 있었음에 아연실색했다.

“이 세계의 주도권은 ‘내가’ 에너지를 폭발시킨 순간부터 내게 있었어. 그리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닥터 내보내기지. 그 이유가 뭐게?”

배후의 시선만이 묵묵히 땅바닥을 짚었다. 바쉬타 너라다에게 둘러싸였을 때 닥터가 꺼냈던 한 단어. 묻지 못해 묻어뒀던 뜻을 비로소 이해할 것 같았다.

“너. 바로 너야. 왜냐, 출입의 통제권이 네게 있다면 닥터를 ‘실수’로 들여보냈을 때 즉시 내보내거나 죽이면 됐거든. 그렇게 하지 않았단 건 닥터가 필요했다는 거야. 추측해볼까? 닥터가 촉매제 역할을 하는 바람에 내가 이 세계에 일찍 들어와 버렸으니 섣불리 내보낼 수 없었던 거라면 어때? 네 통제권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날 유지하려면 닥터가 필요했던 거지.”

도나의 친절한 설명 시간은 수업 종료 종이 치기만을 앞두고 있었다. 길고 긴 호흡을 내쉰 도나가 마지막 마디를 차근히 끝맺었다.

“그래서, 닥터를 내보냈다. 그 뜻은 뭘까?”

유리에 금이 가듯 쩌적이는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다. 비로소 울린 종소리. 세계에 보이지 않는 틈새가 벌인 상흔이었다.

“이 세계에 날 유지할 개연성이 다했다는 뜻이지. 오십육 분 오십칠 초 남았네. 네 출입권은 내가 막아놨거든? 어디 그럼, 평생 여기서 잘 살아 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살랑이며 도나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후웅, 후웅, 희망을 불러오는 엔진음이 파란 공중전화 부스를 이끌었다.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한 도나가 그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경직된 배후는 꼼짝없이 무성으로 아우성을 질렀다.

 

*

 

타디스의 전등이 도나를 푸르게 물들였다. 모든 것을 파악한 그의 눈동자를 닥터는 지독하게도 티가 나게 피해 다녔다. 고즈넉한 공방이 몇 차례나 오갔을까, 한참 동안 엔진음만 박히던 적막은 도나에 의해 갈라졌다.

“늦었네.”

“최대한 서둘렀어. 네가 일언반구도 없이 날 추방했잖아.”

“네 존재가 날 유지한다는 거 너도 알고 있었으면서 뭘.”

도나가 허리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몇 보 움직이며 단 한 손만으로 타디스를 조작하는 솜씨가 거침없었다. 닥터의 자리까지 슬쩍 뺏어 든 도나를 콘솔은 윙윙거리며 튕겨냈다. 심술부리는 타디스를 보며 누구와 한통속이 됐다며 도나가 싱겁게 싱글거렸다.

“환자들은?”

“세계에 금이 가면서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할 거야. 천천히 늙어가겠지. 우리 우주에서 숨이 끊긴 자들을 내보낼 순 없으니… 행복한 여생을 보내길 바랄 수밖에. 뭐, 배후도 거기 가둬놨으니 꼭두각시였던 닥터 스코필드도 망하든, 다시 일어서든 할 테고.”

조용히 운전만 잇는 닥터를 지긋이 관찰하던 도나가 전경을 둘러봤다. 향수라고는 뭣도 남아있지 않은 디자인 탓에 하나하나 전부 새로웠다.

“그나저나 새단장했네.”

“그 이래로 두 번 바뀌었어.”

“맘에 안 들어.”

“허, 그러시겠지.”

도나가 닥터를 돌아봤다. 가까이 다가가서는 요모조모 뜯어보는 눈길이 점차 뒤로 물러서는 닥터와 함께 깨나 고집스러웠다.

“얼굴도 그렇고. 이게 뭐야.”

“네가 더 늙었다고 했을 텐데.”

“내가 떠난 이후 바른 소리 해주는 컴패니언이 한 명도 없었니?”

닥터가 도나를 피해 몸뚱이를 돌렸다. 겨우 멈춘 듯했던 도나가 반대편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닥터가 신음성을 읊조렸다.

“있었어. 세 명이나.”

“하나같이 제 역할을 수행하진 못한 거 같은걸.”

“너보다 잘했어.”

열심히 외면하더니 무반응을 돌려받자 눈썹을 들어올리는 닥터였다. 콘솔 조작을 그만두고 도나를 대했다. 도나는 회고에 잠긴 듯 한참 동안 눈꺼풀을 닫고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립네.”

작별이 다가오는 신호는 누가 선언하지 않아도 공유하는 법이었다. 도나가 시야를 밝히자 닥터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괜히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 장치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든 게….”

“꿈이 될 거야. 깨자마자 모든 것을 잊어버릴 꿈.”

“그래, 그렇겠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꿈. 내 뇌가 버티는 것도 그 때문인 거 알아. 네가 아는 건 나도 안다고. 말 가로채지 마. 아는 척하는 거 재수없어.”

닥터가 억울함에 눈을 치켜떴다. 진짜로 아는 걸 말할 뿐인데 아는 척이라니. 제법 어이가 없었으나, 그러든 말든 도나의 태도는 착실히 다음 계단을 밟아가는 중이었다. 진심을 담은 농담이 은은한 인사로 갈무리됐다.

“이 세상 창조물 중 가장 중요한 존재로서, 또 한 번 함께해서 영광이었어. 닥터.”

닥터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곧바로 이어진 도나의 말에 닥터의 입은 저절로 다물렸다.

“물론 나는 그런 거창한 수식어 따위 없어도 가장 중요하지만. 도나 템플-노블의 삶은 도나 템플-노블에게밖에 없잖아. 평범한 사람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라고. 나는… 기억이 있든 없든,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나니까.”

타디스 바깥의 삶이 소중해진 도나에게는 더는 미련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도나의 선택이었다. 강제되었던 끝은 먼 길을 돌고 돌아 스스로를 찾아갔다.

“날 감당할 수 있는 우주는 없을걸.”

“없지.”

“오이! 인정할 수 있는 건 나뿐이거든, 화성인 양반!”

누그러졌던 닥터의 표정이 다시금 어그러졌다. 훈훈함은 마지막까지는 지켜지지 못할 성싶었다. 아무렴 타디스 안의 두 사람은 우주에서 제일가는 적수 없는 조합이었다.

“이렇게 사회성이 떨어져서야. 가서 친구 좀 사귀어!”

무언가 얘기하려던 닥터가 멎었다. 친구라면 찾고 있어. 꺼내봤자 딱히 소용없는 문장이었다. 그마저도 도나는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혼자 다니지 말고.”

도나와 닥터가 서로를 마주봤다. 끝은, 시작이었다.

“또 보자.-See ya.-”

후련하게 타디스 밖으로 발을 디딘 도나의 얼굴이 멍해졌다. 평범한 치즈윅의 경치가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몸은 조금 피곤했으나 컨디션만은 좋은 느낌. 오늘 밤은 왠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란 공중전화 부스가 도나를 배웅하며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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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페이지입니다.

책 구매해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연전입니다. <닥터 후> 장르 두 번째 회지를 냈습니다. 닥터-도나의 엔딩과 닥터-클라라의 엔딩이 같은 방식의 정반대 결과라는 게 흥미롭지 않나요?

두 번째 회지지만 개인적으로 첫 번째 회지(카닥+클라라)보다 앞선 시간대를 상정하고 있습니다.(닥터 기준) 하지만 회지는 완전히 별개의 스토리이므로 읽지 않으셔도 무방한 TMI 정도로 받아주세요.

본 회지의 시초는 무려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그때는 회지도 뭣도 아니었고, 후비안 실친 미녕과 오로지 재미로만 약속했던 연성 교환이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테닥+클라라를 주문했고 저는 카닥+도나를 주문받아서 짧게 썼었는데... 그게 4-5년 뒤 살을 덧붙여 회지로 재탄생했네요. 카닥도나는 이렇게 세상 빛을 봤는데 테닥클라라는 영영 엎어진 것 같아요. 회지 스토리 도움 및 본문 검수 도와준 건 사랑하지만 드랍했던 거 주워주면 좋겠다.

사담은 이만 줄여보겠습니다. 감상이 있으시다면 이메일 exgnkrj@naver.com 으로 보내 주시면 제가 기뻐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4회 쩜오 어워드 2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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