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후

Who Are You

닥터후 카닥+클라라

연전 by 연전

※2021년 발간 회지 60주년 기념 전문 무료 공개※

[카닥+클라라] Who Are You

w. 연전 & 잉울(공동작업)

※시즌 9 이후 시점입니다.※

※2인 공동 1권 작업. 트윈지가 아닙니다. 하나의 본문만을 다룹니다.※

※전개를 위한 원작 미등장 - 회지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열람에 유의해주세요.※

“너 누구야? (Who are you?)”

“전 닥터예요. (I’m the Doctor.)”

본인을 사칭하는 존재에 대한 소문을 들은 닥터.

추적 끝에 만난 '그녀'에게서는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지고,

함께 들어간 마을에서는 미지의 사건에 얽히는데…


차례

01. 누구에게 달려가다

02. 약속했죠

03. 똑똑한 팀

04. 함정에 빠진 남자

05. 그리고 할 수 없었다

06. 기억해

07. 에필로그

--. 후기

01. 누구에게 달려가다 Run to who

 

부산스러운 분위기가 닥터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기 중에 부유하는 옅은 쇠 냄새하며 산으로 물러 질척거리는 바닥까지 성한 데가 없었다. 사이킥 페이퍼를 쥐고 타디스를 나서자 구두에 진흙이 튀었다. 묽은 농도래도 오래 두면 상하게 할 게 뻔할 터, 미간에 주름을 깊게 패며 인파에 섞여들었다. 낯선 차림의 외부인, 정확히는 생김새부터 이질적인 닥터를 향해 그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을 만큼 이곳은 바빠 보였다.

[어디예요, 닥터?]

은은한 글자가 사이킥 페이퍼의 표면을 떠나갈 듯 유영했다. 발신인 불명의 짧은 메시지는 얼핏 도움을 요청하는 글 같기도,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어리광 같기도 했다. 이게 뭐냐고 고스란히 내팽개친 걸 다시 주워든 게 십 분 전 일이었다. 이대로 무시할 거냐는 목소리도 모를 꾸지람이 들려온 것만 같아서였다.

고작해야 허리에서 무릎까지 오는 사람들이 닥터를 피해 서둘러 움직였다. 아무리 마을마다 특성이 다르다고 한대도 느긋하기만 했던 이 종족의 모습이라기엔 명백히 이상했다.

“이봐요, 이 근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계속 꾸물대다간 하루가 꼬박 지나버릴 게 선했으니 누구라도 얻어걸리라며 바닥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이쪽 은하계에서는 조용한 이들만 뭉쳐 산다는 상식과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퍽 꺼림칙했다.

암만 부르짖어도 듣는 자 없으니 화가 담긴 음색이 한 톤 올라갔다. 보다 못해 마을과 주민들에게 소닉을 들이대도 스캔 결과는 ‘이상 없음’ 만 뜨는 통에 괜히 열을 올려 찡그린 눈으로 쪼아댔다.

“당신도 우리 마을 먹어 치울 외계인이에요?”

애꿎은 스크류 드라이버를 손가락으로 툭툭 쳐대며 소인국의 걸리버처럼 전진할 때였다. 범상치 않은 대사에 뒤를 돌아보니 말똥한 시선 하나가 허리춤께에서 닥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작아지는 키를 생각하면 꽤 어린 꼬마였다.

먹어 치울 외계인이라니 무슨 소리냐, 닥터가 물으니 아이는 한 줌 다르지 않은 평온한 태도로 갸웃거렸다. 아이가 움켜잡고 있는 인형이 시간과 공간, 어느 조건도 부합하지 않는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자꾸만 닥터의 눈길이 가닿았다.

“외계인이 쳐들어와서 우리 마을 먹으려 했잖아요. 닥터는 어딨어요? 닥터가 보냈어요?”

“닥터?”

닥터 누구? (Doctor Who?)

이 상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까 귀 기울이던 닥터는 곧 머릿속에 물음표만 그득그득 쌓았다.

“내가 바로 닥터인데 누굴 찾는 거야?”

“당신이 닥터라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가 우리 마을 구해준 분 얼굴도 모를까 봐요?”

닥터를 마주한 아이에게는 또렷한 확신이 가득했다. 마을을 구했다면, 아이의 말마따나 ‘외계인이 마을을 먹어 치우려던 사건’이 해결된 후의 수습 기간이라면 이 이상한 분위기도 말이 됐다. 그렇담 아이가 찾는 이가 평범한 의사라는 가능성은 지워졌다.

이 우주에 뒤치다꺼리를 맡는 ‘닥터’라는 존재가 또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혹 미래의 자신이 왔다 간 걸까, 까끌까끌한 의심이 입안을 굴렀다.

“너는 닥터를 왜 찾으려 하는데?”

“아직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했으니까요. 편지, 친구들 다 같이 모여 적었는데. 모두 꼭 전하고 싶어 했는데 닥터가 안 보이지 뭐예요.”

아이가 품 안에 넣었다 뺀 손에 편지가 들렸다. 손때 묻은 종이는 오랫동안 품고 있었을 텐데도 구김살 하나 없이 반듯했다.

“매일 닥터 꿈을 꿔요. 무서워서 울고 있으면 신기한 사람이 우릴 달래주는걸요. 자기 우주선이라며 ‘레스토랑’을 타고 날아온 닥터….”

“‘레스토랑’? 파란 경찰 전화박스가 아니라?”

아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닥터는 반사적으로 편지를 낚아챘다. 아이가 뺏긴 걸 되찾으려 팔을 뻗어봤자 턱없이 부족했다. 뭐 하는 거냐고, 내놓으라는 외침은 귓등에도 닿지 않았다. 닥터의 주의는 오직 ‘레스토랑’에 쏠려 있었다. 타디스의 외관을 바꿀 만큼 미래의 취향이 특이해진 걸까, 당연하게도 그럴 리 없었다.

“사이킥 페이퍼에 메시지를 보낸 건 너와 네 친구들일 거야. 그치? 이 행성에서는 정신력이 강한 아이들이 자라니까. 꼬마들이란, 염원이 너무 강해서 우주도 가른다니까.”

과장된 몸짓으로 뒤를 돌자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반 박자 늦게 따라온 천 조각이 닥터를 때리며 책망함에도 닥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내저었다. 몸을 움츠린 아이의 눈가가 촉촉해짐도 알지 못한 채였다.

“너희는 사이킥 페이퍼에 링크하면서까지 편지를 전해주고 싶었는데, 수신인 ‘닥터’가 진짜 ‘닥터’, 바로 나에게 와버린 거지.”

속사포로 뱉어낸 말이 급히 수그러들었다. 불만투성이 눈썹이 사납게 휘어졌다.

“그럼 나를 사칭하는 게 누구야?”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닥터의 이름을 사칭하는 한 꿍꿍이가 있을 게 분명했다.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꿰뚫어버릴 듯한 닥터의 매서운 눈길이 아이를 옭아맸다. 네가 아는 닥터가 누구고, 어디로 갔느냐는 집요한 심문은 아이에겐 고역이었다. 기어이 눈물을 터트린 아이에게 당황한 닥터는 도리어 성을 내고 말았다.

“왜 울어!”

“편지 돌려줘요!”

아무래도 이 아이에게서 정보를 더 얻기란 힘들어 보였다. 손으로 얼굴을 쓸자 주변에 하나둘씩 울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아, 정신 링크를 잊고 있었다. 점점 음역대가 높아져 가는 난장판에 휘말려버릴까 닥터는 허겁지겁 자리를 도망쳐 나왔다.

“편지는 꼭 전해줄 거다!”

“거짓말! 편지 돌려줘!”

마지막 말만 고개 내밀어 외치고 닫아버린 타디스 문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바닥으로 꺼트린 시선 끝에 진흙으로 죄 뒤덮인 구두가 들어왔다. 그대로 눈동자를 치켜올리면 수신인 ‘닥터’ 글자가 또박또박하게 닥터를 이끌었다.

이걸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좋은가 하는 짧은 고민을 흙덩어리와 함께 털어냈다. 그거야 지금부터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타디스 조종간으로 걸어가 텔레파시 회로를 연결했다. 아이들의 염원이 녹은 편지라면 진짜 수신인을 찾기 충분할 터였다.

누군지 모를 존재를 찾아 셀 수 없을 만큼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고작 종이 쪼가리 하나라도 단서가 있는 게 어딘가, 목표가 있는 시작이라면 두려울 게 없으며 한 번쯤은 기분 전환도 괜찮았다. 수상한 만남을 새로이 마주하며 조종간의 레버를 힘껏 당겼다.

 

*

 

타디스가 착륙했음에도 모래바람 한 점 일지 않는 숨죽인 땅 위, 고작 열 걸음 채 되지 않는 거리에 마을 입구가 놓여 있었다. 타디스의 목적지가 이곳인가 하면 아니었다. 닥터가 보고 있는 곳은 그보다 바깥이었다.

건물이 서기에는 이질적인 위치였다. 저 경계선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왜 목전에 있는 걸까, 하는 닥터의 질문은 낯선 기시감이 비웃었다. 저 형태는 이곳에만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닥터는 알고 있었다. 이 ‘레스토랑’은─.

“아, 지금은 영업을 안 하는데요.”

문가 경칩의 단말마가 끼익거리며 뒤늦게 여운을 남겼다. 얼이 빠진 닥터가 예? 하며 반문하자 상대는 닥터의 손끝을 가리켜 일렀다.

“거기, 문에 팻말 달아놨잖아요. ‘닫힘’.”

지문이 수두룩한 유리문 밖으로 닥터가 글자를 확인했다. 안쪽에 뻗은 팔로 짤따란 팻말을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아무리 만지셔도 지금은 영업을 안 한답니다. 가게를 열었다면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라고 물어봤겠죠!”

발랄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닥터가 손아귀 힘을 풀었다. 홀리기라도 한 듯 무의식적으로 가게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몽롱한 기분이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감각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여유로이 앞주머니에 손을 넣는 그녀를 닥터는 빤히 바라보았다. 행성 지구, 미국식 식당의 인테리어 하며 한데 얌전히 묶은 갈색 포니테일에 흰 포인트로 꾸며진 파란 원피스까지, 모든 것이 과거의 잔상과 겹쳐졌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

“만나자마자 수작 거는 거예요?”

머릿속 깊숙이 점거한 혼란은 모순이라는 꼬투리에 꽁무니를 뺐다. 경계심은커녕 기묘한 안도감이 물밀듯 밀려옴을 깨달은 닥터가 되레 날을 세워 칼을 뽑듯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를 꺼내 들었다.

“너 누구야? (Who are you?)”

“전 닥터예요. (I’m the Doctor.)”

소닉의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나무 소재의 볼펜이 머리를 맞댔다. 긴장에 전 이에게 달각이는 마찰음은 효과적인 환기책이었다. 튀어나온 펜 심을 따라 닥터가 움찔대는 잠깐의 틈을 파고든 그녀가 미소지었다. 1963년산 지구 나무로 만든 펜이라는 둥, 투박하지만 심플한 게 되게 쓰기 편하다는 둥 시답잖은 농담이 늘어졌다. 아무래도 뜬금없는 대사였기에 닥터의 눈초리가 물음표로 무뎌졌다.

“닫은 가게에 들어와서 다짜고짜 스캔이라니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요. 진정했어요?”

“닥터는 나야. 너는 누군데 나를 사칭하는 거지? 이게 스캔 기능이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고?”

“예의가 없다는 데도 아랑곳 않고 또 물어오는 것 좀 봐. 내가 만약 정말로 당신을 사칭하는 사람이라면 그걸 모르기가 더 힘들 텐데요.”

그녀가 펜 심을 넣으며 가볍게 가리켰다. 둔탁한 음색의 끝은 닥터에게 매달려 덜렁거리는 막대기를 향하고 있었다. 못 말린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그녀에게 닥터는 왠지 모를 반항심을 내세웠다.

“그렇다고 사칭이 맞다고 보면 곤란해요. 내가 여기저길 얼마나 다녔는데, 그거 하나 못 알아볼까 봐요?”

나무가 통하지 않는다는 유일한 약점도 그래서 알고 있는 걸까, 앞주머니에 단단한 방패를 원래대로 꽂은 그녀가 카운터에 턱을 괬다.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예요? 이 마을의 사건을 알아보러 온 건가? 고작 나 찾자고 여기까지 왔을 린 없잖아요.”

“타디스가 데려왔지. 항상 내가 필요한 장소로 데려다주니까.”

미묘한 진실이었다. 닥터의 말이 끝나도 그녀의 빤한 시선은 몇 초간 지속됐다. 뭐 잘못되기라도 했나, 닥터가 눈치를 살피니 그녀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허리를 펴 보였다.

“닥터가 필요한 장소, 저 마을이 당신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단 거죠? 그럼 여기는 당신에게 맡기고 난 이만 가볼게요.”

담백한 어투에 닥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갈 채비로 카운터를 나서는 그녀에게 허둥대며 다가갔다.

“자, 잠깐.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밖은 허허벌판인데.”

“설마 내 몸만 덜렁 이곳으로 떨어졌으려고요? 당신도 알 거 아니에요. 이게 우주선이라는 거.”

그녀가 둘러보라는 듯 양팔을 활짝 폈다. 건물 바깥쪽 통유리에 반사된 반투명한 인영이 그녀의 접근마다 몸집을 불렸다. 그녀가 문을 열어젖히자 ‘닫힘’ 팻말이 관성에 부딪혀 소음을 내며 흔들렸다.

“한 장소에 닥터가 두 명씩이나, 행성 하나 통째로 멸망시킬 일 있어요?”

“나는 그쪽이 닥터일 거라고 생각 안 하는데.”

그녀를 등진 닥터가 카운터 바 스툴에 자리 잡고는 빙글 돌아 팔짱을 꼈다. 이미 저 마을에 무슨 짓을 하고 튀는 거면 어떡하냐는 말투에서는 절대로 보내지 않을 거란 의지가 엿보였다.

“사칭이 아니라면 굳이 내 이름을 쓰고 다니는 이유는 뭐고. 나를 어떻게 아는 건지 알 때까지 난 못 가.”

아무렇게나 손을 내두르는 닥터에게 그녀가 반격의 팔짱을 꼈다. 달래기 힘든 아이를 보는 것만 같은 눈빛을 본 닥터가 발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눈빛은 무슨 뜻이야?”

“어떻게 대응하든 당신은 포기하지 않겠죠. 그렇게까지 날 붙잡아 두고 싶다면, 그래. 그렇게 해요. 대신 난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당신이 진실을 알든, 저 마을의 만행을 막든 난 방관만 한다고요. 알겠죠?”

긴긴 설교를 한 귀로 흘려보낸 닥터의 대꾸는 차례를 내주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가 먹어버렸다. 입을 열었음에도 아무런 단어도 뱉지 못한 닥터의 꼴이 우습기도 했다.

“오늘 하루만이에요.”

선심 쓰듯 던지는 말에 닥터는 고집이 생겼다. 그렇게 놓이던 마음에 거짓말처럼 불퉁한 태도가 비집고 쏟아졌다. 반박하고 따지려 보면 그녀는 벌써 열어둔 문밖으로 몸을 빼고 있었다.

“얼른 나와요, 하루는 가고 있으니까.”

슬쩍 고개 돌려 건네는 통보에 닥터는 그녀가 시야에서 벗어나기라도 할까 서둘러 뒤를 따랐다.

02. 약속했죠 You promised

 

마을의 경계선을 넘자 한층 무거워진 공기가 발에 채였다. 매연이라기엔 깔끔했고 안개라기엔 건조한 기류가 희뿌옇게 시야를 방해했다. 눈에 문제라도 있나 싶어 두어 번 깜빡여봐도 변함이 없어, 먼지라도 낀 것만 같은 불쾌한 느낌에 미간 주름을 구겼다. 앞을 보는 데에 큰 불편이 없다는 점이 더욱 짜증을 부추겼다.

“어이, 가짜!”

돌연 길을 멈춘 닥터가 붙박이처럼 우뚝 섰다. 단 한 사람도 없이 한적한 주변 따위는 어째도 좋다는 듯 시선은 오롯이 저 사칭범만을 향해 있었다. 앞서가던 그녀가 돌아보는 간의 공백이 마을 안쪽에서 전해지는 활기로 메워졌다. 여기까지 들려오는 걸 보면 삭막한 곳은 아니었다.

“내가 너를 뭐라고 불러야 좋지?”

“사람 이름을 두고 가짜라고 부르면 좋아요? 전 닥터라니까요.”

무감정한 가면이 닥터의 시신경을 자극했다. 무심하고 간결한 대답, 그 안에 약간의 재미가 감지되는 건 착각이었는지 진실이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난 그쪽을 닥터라고 생각 안 한다니까. 내가 부르니 돌아봤잖아. 그럼― 가짜라고 스스로 인정한 거 아닌가?”

농담조의 톤에 서슬 갈아 내밀자 ‘진심이에요?’라는 듯한 눈매가 모로 기울여졌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튄담. 이거 중요한 문제예요? 정 별칭이 필요하다면, 글쎄. 스미스라고 부르시든가요.”

“스미스? 인간이야? 지구?”

어깨를 으쓱이며 적당히 둘러댄 허언에 닥터가 희번덕거리며 두 걸음 앞으로 나왔다. 습관처럼 품 안에서 소닉을 꺼내려 들자 그녀도 앞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그를 쪼듯 가리켰다. 닥터가 주춤거리며 빈손을 내렸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녀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비틀었던 몸을 원래대로 돌렸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저 시계탑이 중심부에서 마을을 받치고 있는 모양새였다. 저곳을 목표로 가다 보면 구체적인 이상도 나타날 터였다.

세 뼘 뒤에서 따라오는 닥터도 그쯤이면 달라지리라. 내내 그녀만을 따르는 눈빛을 무시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닥터에게서 떠난 추궁용 질문들은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내 말 듣고는 있는 건가? 계속 그렇게 아무 말도….”

“여봐요, 앞 좀 보고 다녀요! 다 쏟을 뻔했네.”

주민 한두 사람에서 인산인해가 되기까지는 고작 몇 발짝 차이였다. 삽시간에 몰려든 인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꽁무니만 쫓던 닥터는 결국 접촉 사고를 일으켰다. 인상을 박박 쓴 상대에게 덩달아 맞서려던 닥터를 막는 건 당연하게도 동행인의 몫이었다. 상대의 바구니를 짚으며 사과하는 덕에 조심하라는 주의로 처분을 면했다.

상대는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과장된 몸짓으로 떨어진 물건들을 챙겼다. 헛손질까지 해가며 닥터를 약 올리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 상대, 그 뒤로 덩그러니 남겨진 닥터는 지탄의 눈길을 직통으로 받았다.

“왜 굳이 저렇게 행동했어야 했지? 너는 뭘 하든 신경 안 쓴다며?”

“신경 안 쓰게 행동하는 게 먼저 아닐까요?”

닥터의 적반하장을 능숙하게 넘긴 그녀가 옆길로 새버리자, 닥터의 빈 시야에 겨우 뒷배경이 담겼다. 초입서부터 느껴지던 활발한 기운의 정체가 이곳에 있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 하나당 구경하는 손님 여럿, 저쪽에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 같은 식료품 배달 기사도 눈에 띄었다. 전시하듯 물건이 진열된 가판대가 객인들 사이사이 줄지어 선 것이 시장이라 짐작게 했다.

저마다 함박웃음을 짓고 호탕하게 손뼉을 치며 큰 목소리로 대결하듯 대화했다. 살아 있는 이 분위기에 멈춰선 자는 초행객 둘 뿐, 장소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왁자지껄해야 마땅했다. 구석구석 점거한 희뿌연 대기층을 제외하면 이상한 점이라곤 없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예요? 끝까지 이렇게 돌아다니나?”

“돌아다니지 않으면 뭐, 수소문이라도 해볼까? 거기 너, 으. 왜 이렇게들 무시를 좋아해?”

지나던 객인 아무나 붙잡고 물음을 툭 던졌다. 바삐 흘러가던 흐름 속에서 고개를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 행성에서부터 이어진 수모에 닥터가 오늘 일진 별로라며 입을 비죽였다.

“누가 닥터를 또 무시했었나 보죠? 배짱이 두둑하네.”

“이봐, 뭐 하나만 묻지. 이 마을에 이상한 점이 있나?”

저를 향한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낸 닥터가 앞을 지나던 사람을 가로막고 섰다. 이번엔 그나마 눈높이가 맞으니 다행이었다. 앞이 가로막힌 상대는 귀를 쫑긋대며 제 앞의 낯선 이를 마주했다.

“다짜고짜 앞을 가로막더니 이상한 일이라니? 다들 멈춰 봐. 이 마을에 이상한 일이 있었나?”

그와 똑 닮은 일행 세 명이 차례로 죽 멈춰서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나섰다. 이상한 일? 이상한 일이라니, 이상한 일이 어떤 이상한 일인데? 그들이 멈춘 자리를 기점으로 시장의 흐름이 막혀갔다.

“됐어, 됐어! 다들 가 봐, 해산!”

“뭐야, 그럴 거면 앞은 왜 가로막았는데? 가자, 얘들아.”

그건 그렇고, 내가 이번에 산 거 봤어? 어머, 뭘 샀는데? 시답잖은 얘기를 꺼내며 그들이 움직이자 장터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몰래 한숨을 내쉰 닥터 옆으로 못마땅한 시선 하나가 그를 옥죄니, 이번은 찔려서는 슬쩍 피해버렸다. 그녀가 흠, 하고 가볍게 숨을 내보냈다.

“저 뒤의 저 식료품 기사는 외부인인 거 같은데, 저 사람이라면 뭔가 알지 않을까요?”

“마을 사람들도 모르는 걸 외부인이 어떻게 알아?”

“마을 사람이니까 모르는 것도 있겠죠. 멀리서 봐야 아는 일도 많잖아요.”

어디까지 툴툴댈 심산인지 잠깐의 눈싸움에서 밀리지 않자 닥터는 노려보는 쪽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어쩔 수 없이 져준 그녀가 방관 자세로 복귀하고, 상대하던 적군이 사라졌음에도 부동자세로 승리를 만끽하던 닥터는 그녀의 에스코트에 마지못해 구두 굽을 질질 끌었다.

“잠깐 실례하지. 외부인처럼 보이는데, 이전에도 이 마을에 들렀던 적이 있었나?”

거래 명부를 보던 식료품 기사가 제게 들려온 심문에 어리둥절했다. 눈동자를 데룩 굴리다 그녀가 곁에 와서야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펴 반문했다. 제게 말한 것이 맞느냐는 부정적인 태도를 간단히 긍정했음에도 멀뚱히 쳐다만 보는 기사를 닥터는 답답해했다. 당신에게 건넨 질문이 맞다고, 말로 확인 사살해서야 돌아온 답문은 퍽 멋쩍기도 했다.

“이 마을에야 자주 들르죠. 달에 한 번씩 식료품 납품하러요. 그쪽도 외부인 같은데, 그런 건 왜요?”

“하루 다 가게 생겼어. 빨리빨리 좀 진행하자고! 이 근방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는 신고가 들어왔어.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라진 점은 없나?”

사이킥 페이퍼를 내밀자 눈을 찌푸려 본 기사는 으쓱이며 의심을 거뒀다. 그녀가 슬며시 들여다본바 조사 담당 명찰이 그려져 있었다. 들고 있던 명부에 코를 박으며 검토를 마친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뚫어져라 쳐다봐도 나오는 답은 없었다.

“지난달과의 차이점은 없는 거 같은데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카멜레온같이 두 눈꺼풀을 번갈아 감았다 뜬 기사가 제 혀를 빼물고 동그라미 표시를 덧댔다. 이상 없음을 알리는 빨간 색연필 뒤로 가게 안쪽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새어 나왔다. 외부인들을 바라보는 가게 주인의 머리에 대고 기사가 손을 휘저었다.

“다 확인했나? 지난달과 다른 점은 없지?”

“다른 점은 뭔 다른 점. 그런 거 없어요. 그보다 저녁이나 먹고 가지?”

“오, 저녁 좋지!”

가게 주인이 메뉴를 말하자 기사가 저번에 먹었던 거 아니냐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가? 의문을 품으면서도 맛있으니 됐다는 말에 상황은 종결되었다. 또다시 두 닥터만 남은 자리가 휑했다. 내가 뭐라 했냐는 닥터의 비소가 의기양양했다.

“그래요. 당신이 옳았다고 해요. 겉으로 이상한 점은 없나 보죠.”

“그렇다니까. 애초에 마을이 이상했으면 마을 사람들이 제일 먼저 눈치채지.”

미심쩍은 구석들을 노려보는 그녀의 근심이 여간 펴지지 않았다. 오직 그녀만을 주시하며 다른 곳은 살필 생각 않는 닥터의 모습에는 속이 쓰라린 것도 같았다. 저 사람 계속 저럴 거 같은데, 하는 사념을 좀처럼 떨칠 수 없는 와중 시장이 점차 끝물로 달려감이 느껴졌다. 장사와는 한 끗 차이로 판이한 어수선함이 지배하는 현장, 그 한가운데에 선 그녀는 닥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줄곧 여기 서 있을 건가요?”

“어디 얌전히 앉아서 네 정체를 캐본다거나?”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벌써 어둑어둑한 해를 고개 들어 쳐다봤다. 희끄무레한 시야가 명도를 내렸다. 하얀 장막을 덮어쓴 것만 같이 흐릿한 시계탑을 향해 걸음을 떼자 닥터가 또 어딜 말도 없이 가냐며 곧장 따라붙었다.

 

*

 

끄물대는 공기가 익숙해질 참이었다. 조사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마을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녀를 노린 닥터의 종알종알 재촉은 시장통에 파묻혔을 때에야 안 들리는 척도 쉬웠지,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외곽의 한산함이 살아나 귀가 닳을 지경이었다. 왁왁 내지르는 혼잣말에 묻어 닥터가 소닉을 꺼내 들 때면 그녀 또한 귀신같이 알아채는 것도 세 번째, 보다 못한 그녀가 닥터에게서 소닉을 압수한 게 방금이었다.

“소닉도 없이 어떻게 조사하라는 거야?”

“지혜와 말재주로? 내가 들었던 당신은 그거면 됐던데요.”

어이없음을 내포한 경고 끝에 발을 멈췄다. 내 얘길 어디서 들었다고 그래, 하던 닥터가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거대한, 그러나 이 동네를 담은 아담한 시간이 굴러가고 있었다.

“당신이 얘기해줬었잖아요. 모험담.”

“내가 언제?”

“그 엄청난 광경을 제 눈으로도 보게 해달라고요. 그러니까, 이 시계탑부터 시작할까요!”

호시탐탐 그녀와 소닉을 쫓는 무책임한 집중력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강렬한 발색으로 이목을 끄는 붉은색의 피조물은 닥터의 눈에 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중한 단서마저 외면하기 일쑤인 오만의 극치였다.

“시계탑이 어떠냐고? 지은 지 얼마 안 됐고, 튼튼하군. 아주 착실히 돌아가고 있어.”

“정말 그럴 거예요?”

“내가 뭘?”

마치 무한 동력인 것처럼 힘차게 시곗바늘이 내달리는 상부는 벽돌로 두껍게 메여 있었다. 눈높이보다 조금 아래, 사람이 더듬을 수 있는 구역까지 모든 면은 기이할 만큼 틈이 없었다. 티끌 하나 없이 번쩍번쩍함은 때로는 독이었다.

‘완벽할 정도로’ 깔끔하면 흠을 내고 싶은 게 보통의 심리랬던가, 그녀가 매만진 곳마다 도끼로 패려 시도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 위로 빨간 도료가 덕지덕지 발린 것도 금을 막으려 애를 쓰다 실패한 꼴이었다.

“누가 튼튼하게 세운 걸 굳이 굳이 무너뜨리려 하겠어요?”

“마을에서 의견 차이가 있었나 보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한 거겠죠.”

잔잔한 수면에 한탄이 파문을 퍼뜨렸다. 냉랭한 그녀의 낯빛에 맞서 닥터가 잘못을 부정하며 눈썹을 실룩였다.

“사건 해결하라고 타디스가 데리고 왔다면서요. 조사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녜요? 눈 닫고 귀 닫고 나만….”

“그래, 맞아. 해결해야지. 이전에 이것도 깨닫는 게 어때. 나한테 있어 가장 수상한 존재는 너라는 걸 말이야. 인지는 하고 있나, ‘닥터’?”

“찾았, 오늘!”

시계탑을 중앙으로 팽팽히 늘어서던 긴장감이 끊긴 고무줄처럼 두 닥터를 때렸다. 건물 숲을 뚫고 난데없이 난입한 주인공에게 두 쌍의 눈이 동시에 퍼뜩 튀었다.

“오, 헤엑. 오늘, 며칠, 이에요! 하아, 아이고야.”

극적으로 등장한 제삼자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반사적인 방어 태세로 그를 향해 돌아선 두 사람이 서로를 흘긋거렸다. 미심쩍게 갸웃거리던 그녀가 엎어진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괜찮아요? 당신, 아까 식료품 배달하던 기사분이죠?”

“예에, 예. 그것보다, 허억. 급해요. 오늘이 며칠이냐니까요?”

“갑자기 튀어나와서 한다는 소리가.”

빈정대는 닥터에게 조용히 하라는 일갈이 처방되었다. 레스토랑에서 확인한 바로는 현지 시각으로 마지막 주 엿새하고도 하루째. 그녀가 겨우 일어선 기사에게 오늘 날짜를 고하니 엎어지기 일보 직전 자세로 되돌아갔다. 그가 벽을 짚으며 내민 납품 일지로부터 이틀이 지난 일자였다.

몇 줄이고 붉은 펜으로 덧그려진 종잇조각에선 광기마저 느껴졌다. ‘도망쳐’라는 간절한 세 글자가 이 기사의 심리 상태를 대변했다.

“‘도망쳐’라! 여태 숨어있던 위협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이제 용의자의 정체를 들어보실까?”

닥터가 그녀를 주시하자 그녀에게 기대고 있던 기사가 슬금슬금 떨어졌다. 질식할 것만 분위기에 도망을 치고 싶은 심정이건만 도주로는 닥터에 의해 막혀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는 까딱거렸다.

“뭐 하는 거예요?”

“용의자가 너밖에 더 있어? 얼른 불라고.”

미뤄뒀던 언쟁의 재발이었다. 차디차기만 한 안색으로 그녀는 검지를 들어 올렸다. 마을 입구를 가리키는 간의 정적이 칼날만 같이 베일 듯 날카로웠다. 닥터가 턱을 내밀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가요. 아니면 내가 나갈까요? 당신이 사건을 해결할 때까지 마을 입구에서 쇠고랑이라도 차고 있을까요? 뭐가 됐든 문제 고치고 나면 어울려 드릴 테니까!”

숨 차는 기색 하나 없이 차분한 호흡이었다. 시계탑 하부를 둘러싼 이들에게 살을 에는 냉기가 휘몰아쳤다. 흔들림 없이 곧은 손가락은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 기사가 제 입술을 물어뜯었다. 상처가 남은 자국 위로 피가 배어 나왔다.

“못 나가요.”

두 번이나 두 닥터의 이목을 집중시킨 기사가 두려움에 잠겨 자조했다. 부서지던 조소의 맥은 금방 끊겼다. 닥터가 기사에게 다가가려 발을 디디자 거기서 얘기하라는 그녀의 제지가 떨어졌다. 더 접근했다간 기사가 달아날 태세였기에 닥터는 못마땅하게 멈춰 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을에서 나갈 수가 없어요. 못 나가면 미쳐버린다고요!”

이 이상 서로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온종일 다툼으로 번질 게 분명했다. 일시 휴전이었다. 못 나간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그를 몰랐으니 이 사건과 관련해 더 물고 늘어질 수 없었다. 닥터도 억지라는 걸 알았다. 지금은 이동해야 할 때였다.

진실을 직접 확인하려 찾아온 마을 입구는 처음과 같은 풍경이었다. 선처럼 생긴 경계면 하나만 넘으면 그 뒤로 타디스와 레스토랑에 들어갈 수 있을 듯싶었다.

“저, 저건 또 뭐야!”

기사의 눈이 튀어나올 기세였다. 네 개의 손가락으로 열심히 삿대질하는 끝에는 두 닥터의 우주선들이 있을 뿐이었다. 살려달라고 악을 쓰는 통에 달래는 데에 진땀을 빼야 했다.

“워낙 황무지라 인지 필터도 먹히지 않는 모양이군.”

“진정했죠? 우리 우주선이라는 거 이해할 수 있겠어요?”

“설명이 아주 번지르르해. 지구에서 직업이 선생이기라도 했나 봐.”

무슨 말을 했는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그녀가 닥터를 입구 코앞으로 끌었다. 불안하게 숨을 내쉬던 기사가 공중을 건드리자 투명한 장막이 울렁댔다.

바깥이 괴기스럽게 어그러지는 풍광에 기사는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웅덩이에 기름을 풀고 휘휘 저으면 이렇게 뒤틀릴까, 뒤따라 닥터가 물결을 어지럽혔다. 그녀 또한 가담하더니 깜짝 주춤하고 주먹을 쥐었다.

“이것 봐요. 다, 당신들도 못 나가잖아. 나는 이제 틀렸어!”

“아까까지만 해도 뭔 이상이 있는 줄 모르겠다고 했었으면서.”

“말했잖아요, 미이쳐버린다고요! 지금 이것도 언제 정신이 나갈지 모르는데.”

말을 늘이면서 강조하던 기사는 제 머리털을 뽑아버릴 듯 꽁꽁 싸맸다. 진정시키는 건 다시금 그녀의 몫으로, 찬찬히 어르고는 소닉으로 닥터의 옆구리를 찔렀다.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려왔다.

“제발 시비 좀 그만 걸고 사건 해결에 집중해요. 소닉 줄 테니까. 나 스캔할 생각 추호도 말고요.”

불만을 중얼거린 닥터가 소닉을 낚아채듯 앗아갔다. 어느 틈에 꺼내 들린 나무 펜이 지휘봉처럼 닥터를 감시하니, 지휘자의 얼굴도 못 본 소닉 악기가 하늘로 지이잉 연주를 쏘아냈다. 잔 통증을 쓱쓱 문지르던 닥터가 푸른 빛이 거둬진 자리를 따라가다 눈썹을 실컷 이지러뜨렸다.

“이게 뭐야?”

심각한 기류를 느낀 그녀가 입술을 찡긋거렸다. 스크류 드라이버가 지나는 파동마다 보이지 않는 벽과 기사가 울었다. 험상궂은 막대의 머리가 제게 향하자 울상이던 기사는 두 팔 들어 항복을 외쳤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젠장. 이거 타임 필드야. 저 푸딩 뇌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으! 거기 너. 네가 아는 걸 모두 토해내야겠다!”

“무슨 타임 필드라는 거예요? 어떤 종류. 이분 얘기 듣고 싶으면 진정하고 어디 들어가서 말해요.”

잔뜩 움츠러든 이에게 다그침은 매서운 위협이었기에 달려드는 닥터와 기사 사이를 그녀가 중재했다. 어떤 종류인지 들어보려 이러는 거 아니냐고 항의도 제기됐으나 기사의 권유로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시장 내 거래처라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세 이방인이 시내로 들어갔다.

“이것들도 다 한패면 어떡해?”

“이 사람들은 아니에요. 이상해진 건 맞지만….”

“자네는 또 왔나 했더니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집주인에게 둘러대는 본새가 축 처졌다. 곁눈질로 서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집주인과 닥터의 눈싸움 한 판은 다 벌게진 흰자를 그녀가 찔러 닥터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테이블을 데굴데굴 구르는 패배자가 꼭 제 남편 같노라고 톡 쏜 집주인이 방을 나갔다.

“자, 이제 보는 눈도 없으니 얘기를 들어볼까요? 당신의 이름부터 들려줄래요? 전 닥터예요.”

“어이! 닥터는 나야.”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혼란스러워하는 기사에게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덧붙여주자 닥터는 내가 닥터라고 다시 한번 똑똑히 새겨주었다.

“아, 알았어요. 닥터. 이름…, 저는 존이라고 부르면 돼요. 직업은….”

“식료품 기사겠지. 다른 건 알 거 없고, 이 마을에 언제, 왜 들어왔어?”

저 이름이 여기서도 먹힌다고 남몰래 중얼거린 그녀가 새침하게 답변을 기다렸다. 무슨 말 했느냐는 부담스럽게 치켜뜬 시선은 시치미 뚝 떼고 피했다.

“납품 일자가 지났는데도 새 주문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한 달 간격으로 들어오거든요. 연락이 닿지 않아도 식료품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이틀 전에 끌고 왔더니.”

“마을이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처음엔 못 느꼈어요.”

기사가 호흡을 고르고 양손 깍지를 꼈다. 겁이 붙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기억을 바로 정렬하기도 힘든 듯 마른 침을 몇 번이나 삼키고 나서야 더듬더듬 이어갔다.

식료품 기사 존의 요약은 이러했다.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왁자지껄하게 평온했고 가게에 도착해보니 당연하게도 재고가 동나있어서 거래를 진행했다. 왜 주문하지 않았느냐 물어보니 주문 날짜가 아니랬다. 벌써 떨어진 걸 보면 평소보다 장사가 잘됐나 하고 가게 주인이 곰곰이 되짚는 걸 본 순간 잘못됐음을 알아챘다.

다시 보니 이들을 비롯한 마을 전체가 먹거리가 바닥나 말라 있었고 그걸 느끼는 자는 없었다. 자신도 꼼짝없이 갇혀 버렸다.

“다음 날부터 제 정신도 이상해지기 시작했고요….”

기사가 앓는 소릴 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녀가 안타까운 맘을 전하며 말을 골랐다. 끼어들려는 닥터에게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검지를 들어 올렸다.

“어떻게 이상해지기 시작했죠? 마을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던 것과 관계가?”

“들어왔을 때 한 행동을 그대로 반복해요. 나가야 한다는 자각은 옅어지고요. 그러니까 저 사람들도 이 현상의 첫날을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저도 똑같아지고 있, 다고요.”

기사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내일이면 완전히 못 깨어나는 게 아닐까, 자각이 점점 늦어진다며 두려워했다. 닥터는 인상을 박박 쓰며 저 혼자 팔짱을 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이상한 점은.”

“또요…? 음. 그, 그러고 보니 시계탑. 이번에 처음 보는 거였어요. 저번에 배달 들어왔을 땐 없었어요.”

역시 실마리는 그곳에 있나,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초조함, 조바심이 비집고 나왔다.

“웃긴 건, 이틀 전은 제 생일이었어요. 얼른 돌아가서 생일 파티 해야지. 이게 나가야 한다고 깨달은 이유예요.”

실성한 듯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기사가 헛웃음만 흘렸다. 이젠 이것도 안 먹힐 거 같다고, 이 집에서 생일 파티를 해주겠다고, 거절하기 힘들어진다고 터놓는 대목마다 눈물이 고여갔다. 정신을 꼭 차리게 해달라는 부탁에 그녀가 노력해보겠다 다독여주었다.

“닥터. 당신, 아니 우리도 마을을 못 나갔었잖아요.”

“그래. 이게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면 안전하다고는 못 하지. 외계인에게는 안 먹히길 바라야겠군.”

“만약 먹힌다면 우리도.”

“이 마을에 휘말린다는 소리지.”

댕, 온 마을을 울리는 종소리가 세상을 때렸다. 자정이었다.

닥터가 사라졌다.

03. 똑똑한 팀 Clever team

 

마을의 경계선을 넘자 한층 무거워진 공기가 발에 채였다. 매연이라기엔 깔끔했고 안개라기엔 건조한 기류가 희뿌옇게 시야를 방해했다. 눈에 문제라도 있나 싶어 한두 번 깜빡여봐도 변함이 없어, 먼지라도 낀 것만 같은 불쾌한 느낌에 미간 주름을 구겼다. 앞을 보는 데에 큰 불편이 없다는 점이 더욱 짜증을 부추겼다.

“어이, 가짜!”

돌연 길을 멈춘 닥터가 붙박이처럼 우뚝 섰다. 단 한 사람도 없이 한적한 주변 따위는 어째도 좋다는 듯 시선은 오롯이 저 사칭범만을 향해 있었다. 앞서 멈춰 있던 그녀의 얼굴에 충격이 드리웠다. 안쪽에서 전해지는 활기와 대비되어 보다 삭막해 보이는 몰골이었다.

“잠깐, 뭐?”

“괜찮, 정신이 좀 들어요?”

당혹스러운 안면이 닥터의 시신경을 자극했다. 정신없는 다급한 질문, 마치 오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걱정이 묻어나오는 착각이 들 법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여기 어디야?”

“어제 일 기억해요? 존, 그 식료품 기사가 말해줬던 것들이요. 몸에 어디 이상은 없고요?”

“그래. 어제… 마을로 들어온 게 어제였지. 여기까진 어떻게 돌아온 거야?”

주먹을 쥐었다 펴는 손길이 꿈결에서 허우적댔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습에 그녀가 닥터의 이마에 열을 쟀다. 이래서는 걱정이 착각이 아닌 것 같지 않은가, 닥터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피해냈다.

“뭐 하는 거야?”

“보아하니 몸에 이상은 없나 봐요. 나도 당신처럼 눈 떠보니 여기였고, 어떻게 이동한 건지는 몰라요.”

그녀가 손을 거두며 마을 내부로 눈길을 뒀다. 사납게 요동치던 닥터의 눈썹이 그 뒤를 따라갔다. 일직선으로 보이는 시계탑이 위풍당당하게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몸 괜찮으면 얼른 움직이죠. 우리 시간 없어요.”

곧 해가 중천을 넘어 땅을 기웃거릴 시간이었다. 반사적으로 마지막 말을 반박하려던 닥터가 그쳤다. 이번만큼은 정말 내 시간을 못 쓰게 될 수도 있겠군, 중얼거림을 신호로 시선을 주고받은 두 닥터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마을에 들어선 시점을 기점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그럼… 억!”

“여봐요, 앞 좀 보고 다녀요! 다 쏟을 뻔했네.”

인파를 갈라 재촉하던 걸음이 접촉 사고로 정체됐다. 익숙한 대사를 좇아보니 상대는 헛손질까지 해가며 떨어진 물건을 주워 담고 있었다. 그녀가 바구니를 짚으며 사과를 건넸다. 닥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미안해요.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그랬으니 망정이지. 앞으론 조심하슈!”

허겁지겁 소지품을 채워 넣은 상대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져갔다. 옷자락마저 확인할 수 없게 된 시장통에서 닥터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제보다 떨군 물건의 양이 줄어 있었어.”

“나만 느낀 게 아닌…, 잠깐. 이거 들려요?”

쉿, 하며 그녀의 손가락이 입가에 얹어졌다. 선의의 경쟁을 다투며 과열된 호객 행위, 호탕한 박수 속에 들어봤던 내용의 대화가 섞여 들어왔다. 내가 이번에 산 거 봤어? 어머, 뭘 샀는데? 닥터가 생각을 정리하며 눈동자를 느릿하게 굴렸다. 그녀의 검지가 입매와 작별했다.

초입에까지 닿을 만큼 활발한 북새통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 시장통이 원인이었다. 얼마나 단편적인 정보만을 취급했기에 이걸 이제 알았나, 시야 구석구석 온갖 곳을 메운 가판대가 텅 비어있음을 깨달은 닥터가 머리를 쓸었다. 귓구멍을 터뜨릴 요량으로 온 힘을 끌어다 쓰는 홍보용 외침과 이렇게까지 모순될 수 없었다. 판매할 거리가 없는데 무엇을 판촉한단 말인가.

“왜 이걸 진작 안 말했어?”

“뭘요, 시장이 텅 비었단 거요? 말하면 들었을까.”

“그만. 거기까지.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거야. 질문, 저 사람들은 그럼 뭘 산 걸까?”

눈짓으로 닥터를 쓰다듬은 그녀가 삿대질을 까딱였다. ‘그렇죠, 참 잘했어요’ 하는 의미가 숨은 몸짓이었다. ‘무슨 뜻이야?’ 의 뜻으로 닥터는 턱을 당겨 위협했다. 자기는 아무 말도 안 했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녀까지 만담의 완성이었다.

“암튼, 텅텅 빈 시장이 이렇게 잘 돌아가는 데엔 이유가 있을 거예요.”

“물건이 없다는 걸 무의식적으로는 인지해도 의식은 못 하고 있어. 그런 분간도 안 됐으면 저 바구니에 담긴 물건 수도 같았어야지.”

“혹시 모르죠, 저 물건이 마침 동난 거일 수도?”

“헛손질은 폼으로 했나? 그건 어제부터 했어. 처음 수량은 더 많았다는 증거지. 멍청하긴.”

알고 있나 떠본 거라는 그녀의 말이 코웃음으로 기각됐다. 유통은 멈추고 판매는 제값에 지속되니 장사꾼들은 배부르겠다는 아는 체는 그녀가 무시할 차례였다. 뚱해지려는 닥터를 접어두고 옆을 가로질렀다. 식료품점에 주차된 커다란 트럭 한 대 옆에 명부에 코를 박은 외부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존! 존 맞죠? 저 닥터예요. 어제 일 기억해요?”

“제가 존이 맞긴 한데…. 닥터 누구요?”

“그냥 닥터야. 닥터는 나고 쟤는 사칭범이지. 그래서, 어제 일은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럼 시간 낭비겠군.”

뒤돌아 떠나려던 닥터를 붙잡은 그녀가 기사의 명부를 뺏어 들었다. 선명하게 각인된 ‘도망쳐’라는 붉은 글씨로 마지막 희망을 쥐어짜냈다.

“이 글자, 당신이 쓴 거예요. 오늘은 당신 생일이 아니에요. 벌써 사흘이나 지났다고요. 기억 안 나요?”

그녀의 지칭 끝을 유심히 바라보던 기사가 곰곰이 숨을 내쉬었다. 소동을 감지한 가게 주인이 호기심 가득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 있어, 거기? 다들 아는 사람?”

“아니, 아닐세. 모르는 사람들이야.”

특기할 점을 감지해내지 못한 기사는 그녀에게서 제 것을 도로 앗아갔다. 남의 소유물을 함부로 채간 데에 대한 분노는 덤이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기분 나쁘네요. 아무것도 없구만.”

“싸움이야? 구경하면 되나? 그건 그렇고, 자네는 오늘 생일?”

생일 파티를 준비해야겠다고, 저녁 같이 들자고 이르는 가게 주인의 목소리가 들썩였다. 남편이 차려뒀다는 식사는 어제 들었던 메뉴와 같았다. 기쁘게 받아들이는 기사는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노력했어요.”

이미 안으로 들어간 기사와 가게 주인 뒤로 쓸쓸한 혼잣말이 그녀를 떠났다. 닥터는 그럴 줄 알았다며 새로 알아낸 사실을 추가로 정리했다.

“마을에서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건 최대 사흘이라. 우리는 특히 활동할 수 있는 시간도 적은 것 같은데, 이제 움직일 맘은 좀 들었나?”

“그럼요. 안 움직이고 뭐 해요?”

그새 깔끔하게 심정을 삭인 그녀가 먼저 선수 쳤다. 서서히 정리되어가는 장사 소란을 뒤로하고 시계탑을 향했다. 뭐가 저리 재빠르냐는 푸념을 등에 업고 땅거미를 동료 삼아 걸어 나갔다.

수상쩍음을 인지한 이상 암만 완벽하대도 흠집이 가장 먼저 보이는 법이었다. 수많은 잔상처 틈에 꾸역꾸역 박아 넣은 도끼 자국이 애처로웠다. 핏빛과 같은 빨간 페인트는 그를 비웃듯 상처를 기워냈다. 시계탑이 나는 아무 이상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콧대를 드높였다.

“이 페인트칠은 누가 한 걸까요? 여긴 아무도 접근해오지 않는데.”

“이 짓을 꾸민 작자가 왔다 간 거일지도 모르지.”

소닉을 꺼내든 닥터가 벽돌부터 하늘까지 궤적을 그렸다. 그녀가 중앙에 딱 붙어 한 바퀴 감촉을 살피는 동안 스캔 결과가 도출되었다.

“타임 필드 생성은 여기서 되고 있어. 이 시계탑의 역할은 그것 뿐인가 본데.”

“타임 필드의 역할은 주민들로 하여금 특정한 하루를 반복하게 만드는 거고요.”

“행동 반복으로 인한 단순 노동 착취라기엔 너무 복잡한 방법이야. 실제로 저들은 평범한 일상을 보낼 뿐 뭔갈 하고 있지도 않고.”

이런 짓을 하는 이유, 그로 인해 얻는 이득이 논리 중에 비어 있었다. 저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탐문은 무의미했다. 지금 상황에서 도출 가능한 결론이란? 닥터가 푸른 막대기로 제 머릴 툭툭 치다 인상을 구겼다. 생각 하나가 막혀있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으. 닥터! 생각, 생각해…. 반복이 의미하는 바가 뭐지? 특정 행동을 노리는 게 아니라면.”

“아니라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 잘못된 포인트를 짚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녀의 펜이 소닉을 밀어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바깥 방향으로 완전히 비켜 내서야 그녀는 미소 지었다. 긴장 좀 풀라는 상냥한 인상은 금방 골치 아픈 수수께끼로 덧씌워졌다.

“특정 행동이 목표가 아니라면 그렇잖아요. 하루하루만 산다는 건 오늘만 산다는 뜻이고. 오늘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글쎄. 내일이 없나?”

“내일이 없다는 게 무슨. 오… 잠깐, 쉿. 조용.”

닥터의 왼손 검지와 새끼손가락이 고집을 세웠다. 다른 소음을 죄다 죽이는 새 코트 자락을 들친 오른손은 안주머니에 소닉을 꽂아 넣었다. 깨달음의 순간엔 이도 저도 방해일 뿐이었다.

“행동력이 목표가 아니라면, 네 말은 즉 내일을─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게 되는데. 아까도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정답을 목전에 두고 놓쳤군. 아니, 아니야! 내가 방금 정답이라고 했나? 방금 건 잊어버려. 정답일 리가 없잖아. 시간 그 자체는 빼앗을 수 없어.”

두 닥터의 숨이 맞물렸다. 두 쌍의 동공이 흥분으로 넘실거렸다.

“시간 에너지!”

같은 결론이 동시에 내리꽂혔다. 격양된 잔걸음과 신난 호흡이 끊김 없이 내달렸다.

“이 마을 자체가 우는 천사의 시간 공장과 비슷해. 숨만 붙여 놓고 시간 에너지를 빨아먹는 거지.”

“하지만 장기간에 소규모로 발생하는 우는 천사의 수법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요. 단시간에 대규모로 벌어지고 있으니까.”

“이 시계탑은 에너지 수집까지는 맡고 있지 않아. 그건 다른 곳이야. 그게 어딜지 알아내야 해. 흩어져서 찾아보자고.”

흩어지자는 제의에 따라 그녀의 안색에 그늘이 스쳤다. 그 찰나를 잡아챈 닥터가 비아냥을 장착했다.

“혼자 조사하려니 걱정이 앞서나 보지?”

“내가 할 말이에요. 혼자 조사할 수 있겠어요?”

“뭐? 이번만큼은 제법이라고 인정했더니만, 그걸로 날 얕잡아 보는 건가?”

근심이 그녀에게서 새 나왔다. 물론 평소의 닥터라면 문제 될 만한 게 없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조심하는 거 아니겠냐는 고민을 저 양반이 알기나 할까. 그녀가 입을 비죽이고 있으려니 닥터가 방법 하나를 고안해냈다.

“연락 수단 아무거나 가진 거 있나?”

“휴대전화라면 갖고 있는데요. 엄, 혹시….”

성큼성큼 다가온 닥터가 그녀의 앞치마 주머니를 들쳤다. 나무 펜이 꽂힌 안감에 스마트폰 하나가 들어 있었다. 허락 따위는 쓸데없었다.

“이거 말하는 거 맞지? 좀 빌린다.”

다그침이 미처 소리로 맺어지기도 전에 모든 일이 진행됐다. 스마트폰을 꺼내든 닥터는 코트 안으로 숨겨뒀던 소닉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두 장치를 연결했다. 경쾌한 연결음이 그녀의 눈썹을 황당으로 구겨뜨렸다. 소닉을 한 번 더 쐬자 신호는 영구 저장되었다. 이걸로 거리가 멀어져도 끊길 걱정에서 안심이었다.

“소닉 선글라스, 그리고 블루투스. 참 편해, 그치?”

“예절 교육도 다시 받아야겠어요. 그쵸?”

“자신을 먼저 돌아보지 그래? 이걸로 연락 주고 받자고. 정신 놓지 말고.”

표정 굳은 그녀를 옷걸이로 두고 설정이 끝난 두 도구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산뜻한 몸짓으로 그녀 옷의 먼지까지 털어준 닥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인을 그녀에게 넘겼다. 제스처에 사용된 검지와 중지가 그대로 붙어 외곽 지역을 가리켰다.

“넌 외곽 쪽으로 한 바퀴 돌아 봐. 난 마을 내부를 맡지. 이따 보자고.”

이의는 사양하겠단 듯 닥터는 먼저 발길을 옮겼다. 시야에 아무도 남지 않을 무렵에야 얼어붙었던 그녀가 녹아내렸다. 소닉 선글라스라니, 실은 반가워 설렌 마음이 비실비실 쏟아져 내렸다.

 

*

 

저녁놀 다 넘어 짙은 쪽빛이 하늘을 덮었다. 눈에 낀 렌즈 같은 불투명하고도 얇은 장막이 어둠에 힘을 덧댔다. 이 어긋나는 초점 때문일까, 건물 벽은 짚은 닥터의 인상이 멍했다. 방금까지 누군가를 쫓고 있었던지 긴장한 폐가 공기를 내뿜어냈다. 상의 앞섶으로 옮겨 끼운 선글라스가 그를 따라 덜렁거렸다.

좋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도 이게 좋지 않다는 감은 느꼈다. 제 머리를 문지르던 손을 입가로 옮겼다.

“여기, 여기 아무도 없나?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코앞에서 닥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은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봐도 부를 만한 이는 없었다.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것을 미루어 주택가로 보였다. 닥터 뒤로 창문이 삐그덕대며 열렸다.

“형씨 방금까지 저어 사람 쫓고 있던 거 아니요? 지금 저, 골목 뒤로 사라지더만.”

닥터가 몸을 돌려 정보의 진원지를 찾았다. 창밖으로 반신을 내민 주민이 방향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주변에서 맞다는 동조가 심심찮게 터져 나왔다. 닥터의 이름 또한 그 틈을 타 불려왔다.

“내 이름이 닥터인데, 누가 자꾸 날 부르나? 어쨌든 저 골목 뒤로 간 양반을 내가 쫓고 있었단 말이지. 고맙군.”

“별 말씀을.”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안 고마워. 나한테 엉뚱한 정보를 준 거면 어떡해?”

자기가 뭣 하러 그러겠냐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엑스트라는 안중에도 없었다. 들리지 않느냐고 자신을 찾는 부름이 아무래도 착각이 아닌지라, 닥터의 신경은 온통 그곳에 쏠린 지 오래였다. 분명 가까운 곳이었다. 이를테면 신체에 장착해둔 액세서리 정도의 근거리였다. 닥터가 제 몸으로 주의를 돌렸다.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선글라스? 오, 맞다!”

이마를 친 닥터가 선글라스를 냉큼 집어 착용했다. 안 그래도 침침한 거리가 한밤중이 된 착시가 일었다. 그래도 멋있으니까, 하는 생각을 끝내자마자 고막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닥터!

“아야! 꼭 그렇게 크게 소리 질러야 했어?”

─당신이 안 나오니까 그렇죠!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얼얼한 귀가 나을 때까지 살살 달래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잠깐 정신을 놓았던 거 같다고 이르기엔 닥터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여기선 발뺌이 답이었다.

“무슨 일? 너야말로 무슨 일이길래 연락한 건데?”

건너편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일지 선했으나 제쳐두고 답만을 종용했다. 시한 폭탄 같이 삑삑대는 효과음이 어렴풋이 넘어왔다.

─여기 마을 북서쪽 외곽에서 기계를 하나 발견했는데요. 동그랗게 생겨서….

“크고 빨간 버튼의 작은 버전처럼 생겨서 폭탄같이 삑삑대는 녀석?”

─네. 뭐 발견한 거 있어요?

닥터가 뜀박질을 그쳤다. 가쁜 숨을 최대한 죽이고 기척 줄여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닥터가 쫓고 있던 ‘골목 뒤로 간 양반’은 진실이었다. 손에 들린 조막만 한 기계가 존재감을 떨쳐댔다.

“물론 있지. 한번 대화해볼까? 이봐, 거기 너!”

앞서가던 ‘골목 뒤로 간 양반’이 주위를 살피더니 저를 향한 말임을 인지했다. 시계태엽을 감는 듯 도르륵대는 눈알에다 오래된 경칩이 내지르는 비명만큼 끼긱거리는 금속음이 벌어지는 입에서 갈려 나왔다. 서늘한 첫인상은 근처 공기마저 얼게 했으니, 이윽고 그가 말꼬를 트는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죠?”

경쾌한 목소리 톤을 소화 못 한 사방이 정적을 뱉어냈다. 막힘없이 운동하는 그를 닥터가 따라잡았다. 나란히 나아가는 두 사람 사이에 어이없음을 내포한 설명 요구가 끼어들었다.

─뭐예요?

“로봇? 드로이드? 확실한 건 맛이 갔단 거야. 내가 이름도 지어줬어. 스튜!”

“오늘 밥은 맛있게 먹었나요?”

할 말을 고르는지 잠시 응답이 없던 그녀가 닥터의 위치를 물었다. 여길 말해봤자 로봇으로 추정되는 저것은 멈추지 않을 게 뻔했다. 저 여자는 북서쪽 외곽이랬나, 판단을 내린 닥터가 로봇의 목적지를 추론했다.

“시계탑 동쪽 방면 마을 외곽으로 와. 거기서 보자고. 서둘러.”

이제 남은 건 저것과의 싸움에서 최대한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크게 심호흡한 들숨과 날숨에 각오를 다졌다.

 

*

 

그녀가 도착해서 가장 먼저 본 광경은 낯선 인물과 힘을 겨루고 있는 닥터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두 선수가 팽팽히 맞선 가운데 싸움판이 뒤집혔다. 갑자기 사라진 상대 선수 탓에 닥터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어, 뭐 하는 거예요?”

“보면 몰라? 네가 올 때까지 최대한 저거 막고 있었잖아. 저놈이 빌어먹을 텔레포트 하는 탓에 넘어졌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를 턴 닥터가 앞주머니에서 동그란 버튼 모양 기계를 꺼냈다. 버리기라도 하듯 그녀에게 던지고는 반칙패 선수 바로 곁으로 따라붙어 손짓했다. 바지런히 이끌린 그녀는 양손 가지런히 수확물을 늘어놓았다.

“텔레포트요? 이건 뭐 하는 거고요? 오는 길에 세 개는 더 봤는데.”

“앞길이 막히면 텔레포트 해. 그건 나도 모르지! 저기다 버리고 오는 거 주웠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전진만이 가능한지 정지할 줄을 모르는 이 로봇은 일직선을 향했다. 수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야 말로 이상할 정도로 무작정 앞만 보는 게 적의 실수였다. 암만 거대한 인파에 파고들었대도 부자연스러움은 튐이 당연했다. 시계탑을 중심으로 외곽을 바라보는 일자 진로, 소지했던 물품 등으로 의심을 굳힌 건 그다음 이야기였다.

“아까 아무 말이든 반응했던 거는요. 이름이 스튜라고?”

“냄비 같은 쇳덩이 안에서 아무 생각 안 하고 돌기만 하잖아. 스튜 젓는 것처럼! 또 멍청이(Stupid)가 생각나는 발음이기도 하고. 스튜! 안 들리나? 잘만 떠들어댔었잖아.”

“안녕하세요? 잘 지냈나요?”

‘봤지?’하는 의미로 닥터가 고개를 까딱였다. 소닉 선글라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은 구석마다 홀로그램이 벗겨져 고철 쇳덩이 내부가 드러났다. 평범한 마을 주민과는 섞일 수 없는 이질감이었다. 거죽을 벗긴 게 최대인지 세우진 못한다며 닥터가 혀를 찼다.

“정해진 일, 정해진 대사만 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 위해를 가할 수도 없더군. 텔레포트를 하니까.”

그녀가 로봇 팔 부위의 철근을 끌었다. 미세한 이동으로 손아귀를 벗어난 로봇은 원래대로 가면을 덮어썼다. 차가운 냉기가 소름을 단단히 쌓아 올렸다. 로봇과 닿은 제 살을 문지른 그녀가 접근 방식을 변경했다.

“안녕, 스튜 씨. 목적이 뭐예요?”

“좋은 하루 보내요!”

쓸데없는 짓이라며 전원을 내릴 방법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닥터의 아집이 로봇의 전신을 두 번 깜박이게 했다. 이렇다 할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땅만 냅다 차버리기까지 걸린 시간 삼 분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선글라스를 벗어냈다.

“그 기계도 분명 하는 일이 있을 거란 말이야. 아무 이유 없이 갖다 버렸을 린 없잖아? 저 멍청이 스튜한테 물어도 바보 같은 답만 돌아오고!”

스캔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고 화를 토해냈다.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닥터의 사고 회로를 어지럽혔다. 분에 못 이긴 앓는 소리가 밤바람을 갈랐다. 그녀가 제 손에 얹힌 두 애물단지를 바라봤다.

“이걸 스튜가 버렸다고 했죠.”

“그래. 저 비어있는 왼손에!”

그녀가 둘 중 하나를 닥터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낸 닥터가 물음표를 띄워댔다. 캐치볼 준비운동처럼 나머지 것을 위로 띄우고 잡아낸 그녀가 로봇의 왼손을 조준했다.

“그럼 다시 쥐여보죠.”

정확히 들어간 타구에 두 닥터가 쥐 죽은 듯 경과를 지켜봤다. 믿지 않는다는 닥터의 눈빛에도 일말의 기대감이 깃들었건만, 그에 무색하게 홀로그램 피부를 스친 기계는 하릴없이 추락해 땅 위를 뒹굴었다. 묵묵히 갈 길 가는 로봇의 뒤통수에 순식간에 김이 빠져버렸다. 닥터가 괜히 긴장했지 않느냐며 힘을 꽉 준 주먹을 꿈틀거릴 참이었다.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뭐?”

“음, 아무런 소득도 없진 않았네요. 다행이다.”

무안해질 뻔한 그녀가 땅을 쓸었다. 기계를 집어 챈 손톱 밑에 모래가 끼었다. 이제 어떡한다. 얼마 남지 않은 여유를 보며 기계 밑판을 톡톡 두드렸다. 손톱 밑 모래가 빠지는 새 닥터가 질문을 파고들었다.

“그럼 접근 권한이 있는 건 누구야?”

“질문 권한이 없습니다.”

“이건 소닉으로 어떻게 해볼 만하지 않아요?”

수중 각각 선글라스와 그녀와의 커플 단서를 쥔 닥터가 왜 그 말이 안 나오나 했다며 안경대를 내둘렀다.

“다들 소닉이 만능인 줄 알지. 이게 만약 금속제 문고리였다면? 짜잔! 활짝 열렸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깡통은 뒷사람이 걸어둔 보안을 해제해야 해. 해킹이 무슨 주파수 맞추면 먹히는 줄 아는데. 잘 보라고. 현실은 말이지, 먹히잖아?”

소닉을 눈 위에 얹은 닥터가 입을 떡 벌렸다. 어처구니없기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선글라스를 위로 올렸다 내리는 손길에 반발심마저 올라타 있었다. 주파수가 변경된 로봇은 문고리를 머리핀으로 따는 과정처럼 버벅거렸다.

“푸딩 뇌 수준도 아니고 이건, 푸딩도 이거 보단 뇌가 차 있겠다! 차라리 얘가 닥터라는 게 더 신빙성 있겠어. 보안을 주파수로 걸어두는 얼간이가 이 우주에 어디 있냐고?”

“여기 있네요. 전 닥터 맞고요. 어서 맞춰 봐요!”

로봇의 움직임은 계속됐기에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눈앞이 시커먼 양반이 팔과 다리가 같이 나가는 로봇을 따라 게걸음 하는 광경이었다. 진기한 코미디의 유일한 청중이 고개를 돌리고 얼굴 가려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여자에게 맡기고 비웃는 자리에 서고 싶다고 닥터는 생각했다.

“지─질문 궈언, 질문 권한자를 재설정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드디어.”

“닥터.”

한숨 돌리는 푸념과 그녀의 이름이 겹쳤다. 싸한 감을 부여잡은 닥터가 희번득하게 눈꺼풀을 까뒤집으며 반박을 쏟아냈다. 로봇을 가리키는 삿대질은 본인을 향한 현실 부정에 가까웠다. 선글라스를 접어 코트 앞섶에 끼우고는 제 가슴팍을 쳐댔다.

“들어 봐. 저 여자가 아니라 내가 닥터고, 내 첫 마디는 네 재설정을 위한 게 아니었거든?”

“드디어, 닥터. 설정 완료되었습니다.”

“이 고물 같으니라고!”

드디어 씨에게 닥터 씨의 안타까운 시선이 가 닿았다. ‘저런….’ 하는 심정을 읽은 드디어 씨는 괜히 의미불명의 기계만 닥터 씨에게 팽개쳤다.

“유치한 태도 그만 보이고요. 자, 스튜 씨. 이 기계는 뭐 하는 용도지?”

로봇이 그녀가 펼친 두 물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큰 눈알이 튀어나올 모양새인 게 홀로그램 뒤에서는 스캔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타임 필드 범위를 설정합니다. 직접 지정된 좌표에 설치함으로써 오차값을 최소화합니다. 초기 설정에 유효합니다.”

“초기 설정에 유효하단 건 그 이후에는 쓸모없단 뜻이잖아. 그러니 우리가 주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군. 다음 질문. 마을에서 빼앗은 시간 에너지로 뭘 할 셈이지?”

“시간 에너지는 주인님에게 갑니다아.”

닥터의 전신을 확인한 로봇이 끝음절을 늘어뜨렸다. 닥터를 놀리는 듯도, 오류의 전조증상 같기도 했다. 낌새를 눈치챈 두 닥터가 사인을 교환했다.

“주인이라는 작자가 누군데? 에너지는 어떻게 수집하고?”

“위치, 주인의 위치는?”

“주인, 주, 주이, 주우─.”

급한 마음에 쏘아붙인 게 패인이었던 걸까. 급히 소닉으로 돌려보려 해봤자 무용지물이었다. 단어 하나 완성 맺지 못하는 고철을 보고 두 닥터가 낭패를 씹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버퍼링을 따라 로봇의 사지의 신경이 끊겼다. 축 늘어진 몸뚱이는 톡 건들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다.

“주인이라는 자가 알아챈 거겠죠?”

“그런 거겠지. 그런데…, 무슨 소리 들리지 않나?”

기묘한 소란이 밤중을 거닐었다. 코를 킁킁대면 땅 먼지 냄새가 폐부를 두드렸다. 뿌연 공기는 분명 맑았을 터, 이 바람은 인위적인 발생이었다. 이를테면 서부극에서 말에 올라타 추격전을 벌이는 경우와 비슷한 격렬한 반응이었다. 사태 파악을 끝낸 그녀가 동공 크기를 키웠다.

“뛰어요!”

닥터와 로봇의 술래잡기의 배경이었던 주택가에서 자욱한 황사가 몰려왔다. 폭동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주민들의 폭주는 착각할 여지 없이 두 닥터를 쫓고 있었다. 저 군중에게 깔아뭉개지지 않으려면 전력으로 도망쳐야 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마을 외곽 방면이었다.

“저놈, 도둑놈 잡아라!”

“내가 저거 못 믿는다고 했지!”

“뭐라고요?”

우르르 몰려드는 군단의 선두에는 골목에서 닥터에게 길을 일러준 주민이 있었다. 그녀가 뒤돌아보니 식료품 기사 존과 식료품 가게 주인도 함께였다. 그녀가 못 볼 걸 봤다는 듯 입술을 이지러뜨렸다.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 전부가 쫓아오는 것 같은데요.”

“골목으로 꺾어!”

바로 다음 갈림길에서 샛길로 새 들어갔다. 한 번 더 꺾어 들어가 찾은 잠깐의 평화는 안심할 틈도 주지 않고 깨져버렸다.

“젠장, 무슨 위치 추적이라도 하나?”

“그러고 보니 아까 우리 보고 도둑놈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그녀가 소지한 유일한 적의 물건에 두 쌍의 눈길이 몰렸다. 로봇이, 또 닥터가 그랬듯 주민들을 노리고 그녀가 기계를 버리듯 투척했다. 자세는 꼭 폭탄이라도 던지는 것 같았으나 다행히 두 쪽 모두 그런 기능이 없는 불발탄이었다.

누군가의 신체에 적중했는지 고저 다른 목소리 한 쌍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더 이상의 뜀박질은 느껴지지 않았다. 터덜터덜 속도를 줄인 닥터가 벅찬 숨을 골랐다. 그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호흡도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허억, 헉….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주인이라는 작자가 꾸민 일 아닐까요?”

“아까 그 스튜는 그 자리에 있나?”

지친 다리를 끌고 출발지로 돌아가려는 닥터를 그녀가 제지했다. 움직일 생각도 없거니와 지나치게 침착한 그녀에게 닥터는 의구심을 갈았다.

“그 전에, 닥터…. 시간 다 됐어요.”

깜깜한 어둠 속 한 줌 빛이라고는 주택 창가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등불뿐이었다. 공중을 뒤덮은 검은 하늘을 찢을 듯 솟은 시계탑이 하루의 종료를 촉구했다. 세상에 혼자 군림하겠다는 욕심을 가감 없이 들추며 끝을 향해 가삐 전진해갔다.

“내일 사흘째예요. 정신 차릴 수 있겠어요? 아까도.”

닥터의 심상찮은 분위기 탓에 그녀가 멈췄다. 말실수를 자각하는 건 늦었다. 아차 한 그녀가 뒤늦게 입을 가리려다 말고 주먹을 쥐었다. 동요를 들키면 안 됐다.

“정신 차릴 수 있겠느냐. 이상한 말 아닌가? 보통은 정신 차릴 수 있을까, 라고 하겠지. 왜? 영향을 받는 건 내가 아니라 우리니까.”

“잘못 말한 거예요.”

“아니, 그런 실수는 있을 수 없어. 확신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가설을 하나 세워보지. 정말 나만 영향을 받는 거라면 어때? 네가 이 영향권 바깥에 있다면?”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반응이 확신을 돋우는 행위임을 알면서도 찍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게 네가 멀쩡한 이유라는 가설을 한번 세워보자고. 그럼 봐, 놀랍게도 네 말에 대한 근거가 생긴다니까.”

닥터의 눈빛에 그녀를 갈기갈기 쪼아버릴 통찰력이 스몄다. 그녀가 남은 시간을 흘긋 쳐다보고는 입술을 앙 물었다. 이럴 시간이 없단 걸 닥터는 무시했다. 그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정신 차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요.”

“네가 멀쩡한 이유를 물었어. 그 이유를 알면 나도 안전할 거 아냐. 그런데…. 너, 숨은 쉬고 있나?”

긴장감에 숨을 잊고 있었던가. 부쩍 굳은 전신을 애써 움직이도록 독촉한 그녀가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거리를 벌릴 생각이 없던 닥터는 곧장 따라잡았다.

“호흡도 시간도 필요 없는 존재. 너─.”

닥터가 뻗은 손은 그녀를, 잊고 있던 호흡을 붙잡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자정이었다.

04. 함정에 빠진 남자 Boy who trapped

마을의 경계선을 넘자 한층 무거워진 공기가 발에 채였다. 매연이라기엔 깔끔했고 안개라기엔 건조한 기류가 희뿌옇게 시야를 방해했다. 눈에 문제라도 있나 싶어 한두 번 깜빡여봐도 변함이 없어, 먼지라도 낀 것만 같은 불쾌한 느낌에 미간 주름을 구겼다. 앞을 보는 데에 큰 불편이 없다는 점이 더욱 짜증을 부추겼다.

“어이, 가짜!”

돌연 길을 멈춘 닥터가 붙박이처럼 우뚝 섰다. 단 한 사람도 없이 한적한 주변 따위는 어째도 좋다는 듯 시선은 오롯이 저 사칭범만을 향해 있었다. 앞서 멈춰 있던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죄 산발로 흐트러진 머리칼이 물에 빠진 사자 갈기를 빼닮아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하며 채 정돈하지 못한 옷차림마저 퀭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너를 뭐라고 불러야 좋지?”

“닥터.”

자신의 꼴을 좀 보라는 몸짓이 그녀에게서 튀어 나갔다.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느냐고 피력하는 행동이었다.

“난 그쪽을 닥터라고 생각 안 한다니까. 내가 부르니 돌아…보진 않았지만, 어쨌든 봤잖아. 그럼 가짜라고 인정한 거 아닌가? 추가로, 너 뭐 달라지지 않았어?”

숨은그림찾기의 모델인 양 팔을 벌리고 마냥 서 있던 그녀였다. 노리는 바에 일보 근접한 닥터에게 조금 더 들어오라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녀와의 거리 사이에 일선을 그은 닥터는 움직이는 대신 갸웃거리며 눈가 주름 개수를 늘렸다.

“타임 볼텍스에 맨몸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했나? 아니면, 아하. 피터 팬의 바다에서 나노─벨에게 쏘인 거구나. 너 꼴이 꼭.”

엉망이라며 제스처를 휘적였다. 앞으로 한 발짝, 그녀가 홉뜬 눈빛으로 다음 대사를 재촉했다. 연신 끄덕여대는 통에 보는 것만으로도 뒷목이 결릴 무렵에야 닥터의 입이 열렸다.

“내내 지켜보고 있었는데. 언제 갔다 온 거야?”

“이 마을에서 나가고 싶어요?”

“아니. 나갔다 온 건 네 쪽….”

말을 흐린 닥터가 방금 낸 일을 곱씹었다. 빤한 눈동자가 스쳐 지나간 모순을 감지했다. ‘아니’ 음절을 입 모양으로 따라 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네 정체를 알기 전까지 아니라고. 방금 들어왔잖아.”

“분명히 해요. 마을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고요?”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두뇌에 출처 불명의 지렛대가 박혀 방해 공작을 펼쳤다. 그녀의 탓이 아닌 외부 요인이었다. 닥터의 자신감이 한풀 꺾였다. 타디스에서 클로이스터 벨이 울리는 환청이 일었다. 이건 위험했다. 화가 난 눈썹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우리가 이 마을에 들어온 건 방금이 아니라 이틀 전이고, 추측하건대 오늘이 우리 기억의 한계점이라는 말부터 하고 시작하죠. 이거 중요하거든요.”

그녀의 설명으로 닥터가 이야기의 조각들을 맞춰갔다. 첫날과 둘째 날, 최대한 핵심을 요약한 수업이 이어졌다.

“어제 시간이 다하기 직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쫓겼고요. 그 탓에 내 꼴이 이렇죠. 내 기억은 몸이 지켜준 셈이네요. 눈 딱 떴을 땐 이게 무슨 봉변인가 했다니까.”

“그래, 맞아. 들어온 건 이틀 전이었지. 기억났어. 그래, 그래! 마을 사람들 모두가 우리에게 달려들었어. 이거, 뭐 좀 닮지 않았나? 시키는 대로 따르는 거 말이야.”

“닮았다니. 얘기했던 거 중에 생각해보자면, 로봇이요?”

“스튜!”

닥터가 정답을 골랐다는 듯 그녀 쪽 허공을 찔렀다. 닥터에게 발표 순번을 넘긴 그녀는 그제야 축축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손가락 빗질이 엉킨 머리카락 타래 중간에 걸려 끊어졌다.

“온갖 재료들이. 한꺼번에 냄비에 담겨 저어지는 거야. 주인이 원하는 대로, 정확히 시킨 대로만 돌아가는 거지. 이 마을은 일종의 시뮬레이션 시스템이야. 마을에 들어온 모두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묶어버렸어. 욱여넣은 거야! 냄비 안으로. 그러니 로봇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체스 말로 끌어다 쓸 수 있었던 거지.”

닥터의 스튜 조리하는 시늉이 열정적이었다. 큰 국자로 몸체만 한 냄비를 젓는 닥터에게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그녀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느다란 눈매가 향신료만큼의 긴장감을 끓여냈다.

“모든 기억이 돌아온 거예요?”

“아니. 전부는 아니야. 그래도 네가 나한테 사건 해결 안 할 거면 나가라고 윽박질렀던 건 떠올랐으니 믿도록 하지.”

어느 정도 풀린 머리카락을 뒤로 한데 모아 질끈 동여맨 그녀가 즐겁게 으쓱였다. 출격 준비 완료라는 사인을 닥터는 수용했다.

“임시 동맹이야.”

“아무럼요.”

“우선 해야 할 건?”

“스튜 찾기.”

두 닥터가 각각의 통신 도구를 쥐었다. 소닉 선글라스와 스마트폰을 장착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해산했다. 시작부터 무전을 연결한 분담 수사였다.

─무전 잘 들려요?

“마을 단위를 집어삼키려면 거대한 장치의 힘을 빌려야 해.”

─그래요. 잘 들리네요. 확인 고마워요.

한 마디 교류 없이 주고받은 작전이란 두 닥터가 타임 필드 내부를 반씩 나눠 서로 역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는 거였다. 로봇의 진로는 한정적이었다. 일자로 뻗은 길목마다 들여다보면 금방 소재를 파악할 터였다.

“보통 거대한 사이즈가 아니지. 모르긴 몰라도 저 시계탑보다 클걸! 숨기는 건 불가능해.”

─지금까지 발견이 안 된 걸 보면 외부와의 링크를 찾아야 할 거고요. 스튜가 해답의 열쇠일 거예요.

우측 둘레를 맡은 닥터는 투명한 벽을 따라 끝을 달렸다. 비눗방울처럼 생긴 둥근 구가 닿으면 터트릴 것만 같은 첨탑의 보호 아래에 있단 게 아이러니했다. 깨질 걱정 없단 면이 스노우볼 같기도 했다.

“단순무식한 하등 기술이야. 한 가지만 처리하는 만큼 성능은 강하지. 시간이라면 뭐든 빨아먹어. 프로그램은 부가적인 거고.”

─그런 짓은 불법이잖아요. 파렴치하기도 하지!

“너는 한 번도 법을 어겨본 적이 없나? 길에 쓰레기 버려본 적? 다들 한 번쯤은 있잖아.”

범인을 두둔하는 거냐는 꾸지람이 교신 채널을 탔다. 목소리 음색은 변함없었으나 저건 혼내는 거라고 닥터는 생각했다.

“너, 사칭범이 청렴한 척하니까 그랬지. 물론 범인은 궤가 다른 범죄자야.”

─워어우. 청렴과 가장 먼 사람이 그런 말을 하네. 범죄 자랑 대회로 넘어가기 전에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하등 기술이라 스튜도 멍청했던 걸까에 대해?

“아니. 그건 그냥 주인이 얼간이인 거야. 말했잖아. 프로그램은 부가적인 거라니까. 그리고, 적어도 너보다는 내가 떳떳하거든.”

살포시 웃음 짓던 그녀가 기척을 죽였다. 심상찮음을 느낀 닥터도 덩달아 다리를 멈춰 세웠다. 숨마저 조용히 고르는 공간에 태엽 감는 소리가 침범해왔다.

─멍청이 스튜. 북쪽이요. 시계탑으로 가요.

“금방 가.”

즉석 합동 작전은 성공이었다. 예상보다 대폭 시간을 아낀 닥터가 한 계단 신뢰를 쌓았다. 연속 뜀박질도 피로하지 않았다. 마을 반지름을 가로질러 두 닥터와 로봇의 재회였다.

한결같은 시계탑의 벽돌이 거울 같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속으로 야유하는 닥터의 움직임새가 벽에 부딪혀 메아리로 돌아왔다.

“나 이제 여기가 지겨워지려고 해.”

“어쩔 수 없어요. 뭐가 됐든 여기서 시작된 거 같으니.”

이미 반환점을 돌았는지 로봇은 북동쪽 바깥으로 방향을 바꿔 진행하고 있었다. 어제 로봇을 만난 지점은 동쪽 방면이었다. 여기까지 오며 확인한바 기계는 보이지 않았다. 안 오고 뭐 하냐는 그녀의 인도에 닥터가 이끌렸다.

“중앙 찍고 돌아서 북동쪽으로 가고 있는 거랑 아무래도 마을을 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는 것 같단 거 외에 추가 브리핑 있나?”

“중앙 찍고 방향 바꾸는 데에 텔레포트를 이용했단 거랑 그러면서 저 기계도 새로 생겼다는 것 정도?”

“오.”

반절이나 빈칸으로 제출한 오답지를 받아든 닥터는 좋은 포인트라고 모르는 척 넘어갔다. 가운데 낀 로봇이 둘 사이의 중재자 같았다. 덕택에 그녀도 이번에는 눈을 감기로 했다.

“기계가 새로 생긴 걸 보면 지금껏 일어났던 것과는 결이 다른 텔레포트였을 거예요. 다른 장소로 갔다 온 거죠. 이를테면.”

“주인이 있는 곳.”

“맞아요.”

“직접 물어보자고. 거기, 스튜! 나 기억하나? 오늘 컨디션은 어때?”

로봇보다 한 발짝 앞서간 닥터가 뒤를 돌아 질문했다. 앞길이 막힌 로봇이 텔레포트로 닥터를 뚫고 지나갔다. 닥터의 얼굴이 색다른 오싹함을 즐긴 본새로 물들었다.

“날이 참 맑아요!”

“맑긴 무슨. 뿌옇기만 하구만. 이봐, 멍청이 스튜. 우리가, 아니지. 정확히는 ‘내가’ 어제 네 질문 권한을 재설정했거든? 기록 안 남아있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음이 적나라했다. 로그를 어떻게 살피는 건지 작동 방식이 궁금할 정도로 요란했다. 그녀가 귀를 막으며 얼굴을 구겨뜨렸다.

“홀로그램이 다 무슨 소용이람. 로봇한테 기름칠이나 해줄 것이지?”

“로그 확인. 질문 권한 접속을 진행해주십시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녀의 드문 투정에 이어 닥터의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흥미진진한 경광을 예감한 관중의 시선이 닥터에게 닿았다. 답이 정해진 퀴즈 쇼를 향한 팝콘 타임이었다.

“주인이 멍청한 건 그대로라 다행이긴 한데, 내 입에서 그 단어를 다시 내는 일은 없을 거야. 난 안 해. 싫─.”

“접속 실패했습니다.”

“아. 그래. 알았다고. 하겠다고. 접속 재시도, 드디어!”

웃음꽃을 피운 닥터 씨도 동시에 이름을 외쳤다. 심기가 불편해진 드디어 씨를 배려해 그가 보기 전에 얼른 찡그렸으나 눈길 한번 안 준 드디어 씨가 다 봤다고 지적해왔다. 발뺌하려 머리를 굴리던 중 타이밍 좋게 로봇이 조리 끝난 토스터 알람을 울렸다. 설정 완료의 신호였다.

“드디어, 닥터. 설정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신경 안 써. 여기 질문. 시계탑에서 네 주인 있는 곳으로 갔다 온 건가?”

닥터가 과거의 수치를 떨치려 손을 휘저었다. 그녀는 일부러 구긴 표정 그대로 질의응답을 따라갔다.

“맞습니다. 마을에서 모은 시간 에너지를 전송하는 과정입니다. 타임 필드 설정용 버튼의 공급도 이루어집니다.”

“하나를 물으면 열을 알려주는군. 참 잘했어요, 스튜 학생!”

원리는 부정확해도 로봇 자체가 시간 에너지 수집기라는 정보 수확이었다. 기계의 정체가 버튼이라는 것도 활성화 방법만 캐내면 쓸 일이 있었다. 그녀의 엄중한 톤의 우스갯말 칭찬을 닥터는 미심쩍어했다. 그녀가 싱글벙글하게 태세를 전환했다.

“우등생 스튜에게 다음 문제야. 주인이 있는 곳으로 우리도 함께 이동할 수 있나?”

“텔레포트는 제 내장 기능으로 다인 운반은 불가능합니다.”

“운반이라, 특이한 단어 선정인데. 그럼 그곳의 좌표는? 우주선이겠지? 우주선일 거야.”

로봇의 답변 행진이 그치고 그녀의 원우먼쇼가 막을 내렸다. 공백을 맞은 그녀는 웬일로 얌전하던 닥터를 흘끔거렸다. 의심에 형체가 있다면 저렇게 생겼을 거라고 확신할만한 계기였다.

“어엄, 무슨 문제라도?”

“아주 신났던데. 아까도 그랬지만 선생질이 굉장히 익숙해.”

“그거 칭찬이죠? 그나저나 스튜가, 왜 멈췄을까요? 걷는 건 안 멈추면서.”

의문을 제기하기 전 그녀가 로봇의 머리를 노크했다. 홀로그램이 반짝이며 뒷모습이 옅게 투영됐다. 경쾌한 바깥 분위기와는 달리 철골은 냉랭하기만 했다.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뭐야, 이제 와서?”

검은 안경 뒤로 눈길을 숨기며 그녀만을 살피던 닥터가 겨우 로봇을 바라봤다. 소닉을 걸치고 있음에도 입으로만 닦달하지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안 할 거냐는 눈짓을 건넸다.

“뭐! 게걸음으로 주파수 맞추는 짓을 또 하라고? 네가 하든가!”

“하기 싫다면 생각 좀 해보고요. 어쨌든 이 로봇 자체에는 좌표가 연결돼있는 거죠?”

백번 생각해도 할 마음은 코빼기도 안 비칠 태도였다. 조롱거리가 되는 건 사양이라니, 닥터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코웃음 쳤다. 하기 싫다고 고작 말을 돌리는 게 더 빈정댈 만한 소재였다.

“그렇겠지. 그렇다고 텔레포트 하는 깡통을 타디스로 끌고 갈 수도 없잖아?”

“깡통이 약간 고장나도 타디스는 내장 정보 뽑아낼 수 있죠?”

닥터의 비아냥을 그녀는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어이없는 탓에 중간에 삽입된 수상한 단어마저 모르고 넘길 뻔했다.

“하드웨어에 새겨진 정보라면 어느 정도 빼낼 수야 있겠지. 고장이 왜 나?”

“당신이 보기에 이 스튜, 방수 같아요?”

“고장이 왜 나냐니까? 방수는 뭐, 우물에서 물이라도 퍼오려고?”

“고물이니까 방수 처리가 됐었어도 다 벗겨졌겠죠? 좋아요.”

돌아오는 온점 없는 물음표 릴레이가 자문자답으로 맺어졌다. 그녀가 닥터를 붙들고 로봇에게서 버튼을 뺏어 들었다. 지면에서 기묘한 진동이 솟아올랐다. 인위적인 약진이 닥터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너 설마.”

“로봇 뒤로 잘 숨어요. 도망치지 말고.”

팔이 연결된 두 닥터가 일사불란하게 합을 맞춰봤자 어린이 우산 하나 공유한 어른 둘이었다. 어느 한 곳 제대로 가려질 리 없었으니 자리 쟁탈전이 개막됐다. 효과용 이산화탄소 역할로 흙먼지가 무대를 장식했다.

앙상블에 심취한 주민들이 열과 성을 다해 극으로 뛰어들었다. 개중에는 물 양동이를 한가득 짊어진 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물벼락 조심해요!”

대포알 같은 액체가 조준되는 찰나 그녀는 지뢰 같은 위치 추적기를 옆 구석으로 투척했다. 취약한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로봇은 홀로그램도 끄고 바닥과 깊은 교감을 나눴다. 달려오던 모두는 길을 잃어 갈팡질팡하다 흩어졌다. 흠뻑 젖은 두 주연만이 일시 정지를 누르고 있었다. 이야기를 재생하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로봇은 확보했고 마을 사람들도 돌아갔어요. 이제 타디스만 있으면 되겠다.”

“정신 나갔어! 제정신이 아니야!”

“파란 박스 타고 다니면서 제정신을 찾아요?”

그녀가 흙을 털며 일어나 쓰러진 로봇을 정면으로 돌려 눕혔다. 빈 깡통을 찰 때나 들릴 소음을 로봇은 흐느꼈다. 완전히 의식이 지워진 고철의 머리통을 그녀가 뽑아 들었다. 스파크가 불똥을 튀겨내자 그녀가 입술을 당기며 싫은 티를 보였다. 넌더리를 내고는 주변을 돌자 안전하게 버려진 버튼이 멀지 않게 떨어져 있었다.

“혹시 저 기계, 버튼이랬나? 저기 걸린 프로세스도 해제할 수 있어요?”

“마을 사람들이 쫓아오는 걸 끌 수 있냐고? 또 무슨 정신 나간 짓을 하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사람 섭하게! 그런 일은 더 없을 거란 거 알잖아요.”

지금껏 쌓아온 신용이 뒤틀린 느낌이었다. 어딘가 무엇 하나가 꺼림칙했다. 알고 있는데 떠오르지 않는 불쾌한 이물감이 닥터의 신경을 긁어댔다. 짜증으로 가득 찬 눈을 까만 가림막으로 재차 가렸다. 그녀를 쫓은 소닉이 나무 펜에 가로막혔다.

“나 말고 저 버튼이요.”

얕게 두드려진 안경테에서 실없는 타격음이 났다. 지긋이 눈꺼풀을 닫았다 연 닥터가 나무 지시봉을 따랐다.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주파수를 흘려보냈다.

“주파수 보안. 얼간이.”

“우리한텐 고맙죠.”

고쳐 쓴 보람 없이 그녀가 닥터의 액세서리를 앗아갔다. 로봇 머리를 옆구리에 낀 채 눈 깜짝할 새 착용까지 마치고는 폼이 나냐며 테를 치켜올렸다. 뭐 하는 거냐는 도끼눈의 닥터를 요리조리 피하며 버튼을 주워냈다.

“나도 멋 한번 부려보고 싶어서요. 이게 타임 필드 범위를 설정한댔죠?”

“버튼에 소닉을 아무리 쐐도 범위 수정은 불가능해. 값을 입력하는 건 메인 컴퓨터가 필요하단 말이야. 타디스도 없는 지금은 네가 들고 있는 깡통의 몸통을 분해해서 텔레포트 장치를 개조할 수 있는지 봐야 하거든? 그러니.”

닥터의 손바닥에 물방울이 내려앉았다. 어서 내놓으라는 강요가 그쳤다. 비가 내릴 낌새는 없었다. 닥터의 앞머리에서 미끄러진 수분 덩어리였다.

“소닉이라면 하나 더 있고 여기 내 스마트폰도 줄 테니 쩨쩨하게 굴지 말고…요?”

그녀는 로봇 몸통을 보며 앞치마 주머니에서 펜과 스마트폰을 교환하고 있었다. 닥터를 보는 게 한 박자 늦었기로서니 왜 저러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닥터가 펼치고 있던 손가락을 그러모아 주먹을 쥐었다. 물기를 문지르는 엄지 너머 시야 초점이 불명확했다.

“어제 마을 사람들에게 쫓겼던 게 오늘과 같았다면 나는 왜 물에 젖어있지 않았지?”

“그건.”

“닥쳐. 대답하라고 말한 거 아니야.”

신발 밑창을 달싹이던 그녀가 그만 마음을 다잡았다. 잘게 건드리던 로봇 머리도 편안히 내버려 두고 차분하게 호흡을 잇는 그녀를 닥터는 가늘게 바라봤다.

“호흡….”

놓쳤던 단서를 거머쥔 닥터의 눈동자에 분노가 눌러 담겼다. 안경 뒤 맨얼굴을 드러낸 그녀가 닥터에게 붙잡혔다. 상체를 구속한 자세였기에 소지했던 모든 것이 바닥을 뒹굴었다. 고통이 남아 있었다면 아파했다.

“기억났어. 호흡도 시간도 필요 없는 존재. 이 영향권 밖에 있어서… 처음부터 이 마을에서 나가는 것도 가능했겠지, 그치? 텔레포트 따위 찾을 필요도 없을 거야. 내 우주선이든 네 거든 걸어 나가서 타면 될 테니까. 다 젖어있던 것도 혼자 돌아다니다 꼴 좋게 물벼락 맞은 거겠지.”

심장이 뛰었더라면 멍 자국이 남았을 테다. 닥터의 손아귀 힘이 점점 거세졌다. 닥터의 허탈한 웃음은 까닭 모르게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대한 반발 심리였다. 열 뻗친 맥박이 서글프게 두방망이질 쳤다.

“재밌던가? 오, 얼마나 재밌었겠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으면서, 휩쓸리는 날 보며 연기하는 게. 한 편의 코미디 쇼를 멋지게 연출해냈군.”

“닥터.”

“네 정체가 대체 뭐야! 이 우주의 법칙을 완전히 거스르고 있다고. 내 이름을 쓰는 것도 그렇고. 마치, 마치….”

닥터의 눈덩이가 끝내 붉게 올라 있었다. 마치, 뭘? 누군가가 떠오르기라도 한다고 할 작정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닥터의 손등을 그녀가 감쌌다.

“거기까지, 닥터.”

닥터 눈가에 맺힌 갈 길 없는 슬픔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두려움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가로막혀, 닥터는 그녀의 전언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이유는 여전히 닥터의 편이 아니었다.

“지금은 이 마을, 그리고 당신을 구하는 게 우선이에요. 내가 당신을 놀리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나요?”

흔들리는 눈빛이 거짓 분별을 위해 그녀의 맥박을 찾았다. 심장 박동마저 허용하지 않은 이 우주에게서 닥터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저것이 진실이라 외쳐대는 건 겪은 적도 없을 경험의 발버둥이었다.

“갔다 와서 모든 걸 얘기해줄게요. 갔다 와서요.”

그녀를 가둬둘 역량은 닥터에게서 사라졌다. 풀려난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다녀올게요.”

재회의 약속이었다.

05. 그리고 할 수 없었다 And can’t

파란 공중전화 박스 문밖으로 선글라스 쓴 얼굴 하나가 삐져나왔다.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살피니 대기 중인 위협은 없었다. 자기 우주선이 침략당할 위기인 것도 모르는 걸까, 얼간이 주인이 어떤 작자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안전을 확보한 그녀가 타디스에게 손을 흔들고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그녀에게 화를 내는 듯 출입구가 거세게 닫혔다.

“오랜만인데 반겨주면 좀 좋아!”

옆구리에 로봇 머리통을 끼고 손을 내둘렀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얼마나 타일러서 왔는지 몰랐다. 닥터와의 작별 이후 앙금이 쌓였나 보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화해하기 참 쉽지 않다는 반가움의 푸념을 내쉬고는 소닉을 활성화했다. 아, 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여기는 닥터. 여기는 닥터. 닥터 디스코 나와라, 오버!”

검은 칠 범벅인 선내는 로봇이 그랬던 것처럼 낡은 부품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엔진도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지 밟고 있는 지면의 진동이 적나라하게 전해져왔다. 보면 볼수록 눈살만 찌푸려지는 터라 그녀는 무전에 집중했다. 지금쯤 응답이 들려올 때였다.

─지금 날 닥터 디스코라고 부른 거야?

“네, 닥터 디스코. 화면은 잘 보여요? 소닉 설정을 시야 공유로 바꿨는데. 스마트폰 액정에 뜨고 있을 거예요.”

컴퓨터 연산 처리음 같이 삑삑대는 잡신호가 울렸다. 어디서 나는 음향인고 둘러보자 로봇 머리가 은은하게 눈을 밝히는 걸 발견해낼 수 있었다. 그녀가 고철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소리는 잘 들리는 거 같고.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내가 그쪽을 보진 못하거든요. 얘는 왜 이런담?”

고장 난 탓에 타디스에서도 신호를 겨우 잡아 추적할 수 있었다. 물로 푹 절인 회로는 내부가 다 타들어 가 두 번 다시 작동할 일이 없어야 했다. 그녀가 로봇 머리를 쉐이커 보틀 잡듯 흔들었다.

“비상 프로토콜로 재부팅 합니다. 비상 대책 매뉴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현재 상황이 추락, 침수, 기체 결함, 테러, 조종사 실종 중에 있나요?”

─스튜, 너 승무원(stewardess)이었구나!

로봇이 긍정의 불빛을 깜박거렸다. 닥터의 만족스러워하는 너털웃음을 보아하니 시야 공유에도 문제없었다. 모선에 돌아와 정신을 차린 승무원이라, 로봇 설계자는 직업 정신 하나는 투철했다. 예비 동력이 켜진 로봇은 모든 설정이 초기화된 듯했다.

“승무원 일련번호 이영육사오입니다. 현재 상황이 추락, 침수….”

“테러, 테러라고 해두자. 뭐, 기폭 장치 닮은 크고 빨간 버튼 작은 버전 들고 쳐들어온 건 맞으니까.”

그녀가 주머니에서 버튼을 꺼내 동전인 양 던졌다 받아냈다. 잡아내면서 볼록한 윗면이 눌졌으나 아무런 효력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해한 퍼포먼스를 지켜본 로봇이 무미건조하게 질문을 건넸다.

“당신은 테러범입니까?”

“오, 그럴 리가. 난 그것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걸. 그러니까 날 이 우주선의 메인 컴퓨터까지 안내해 줄래?”

로봇을 향한 그녀의 발랄한 협박을 닥터는 묵묵부답으로 받아들었다. 평소라면 딴지 걸고 넘어가야 할 포인트였거늘, 잠잠한 태도에 그녀가 악동 같은 목소리를 냈다.

“드디어 내 무시무시함이 닥터에게 찍소리도 못 낼 정도로 전해졌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메인 컴퓨터까지의 경로를 설정합니다.”

여전히 닥터는 말을 잇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그녀가 로봇의 안내에 따라 달려 나갔다. 착하기도 하다는 칭찬은 덤이었다. 로봇마저 대답 없는 고요한 갑판에 뜀박질하는 발소리만 메아리쳤다.

“내가 대체 얼마나 무서운 거예요?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닌데.”

“직전과 모순되는 발언입니다.”

“스튜, 여기서는 가만히 있는 거야. 착한 우등생 취소.”

일부러 시답잖은 농담이나 주고받는 호흡이 평온했다. 뛰고 있다기엔 기이한 생체 반응을 그녀는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벌려진 닥터와의 거리감은 달갑지 않았기에, 스튜와 눈높이를 재차 맞댄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자, 스튜 학생. 내 말을 똑같이 따라 해. ‘이미 뺏어간 시간 에너지에 대해선 되돌리지 못할 거예요. 그쵸?’”

“이미 뺏어간 시간 에너지에 대해선 되돌리지 못할 거예요. 그쵸?”

최소한의 프로토콜만이 작동하는 기계를 마음대로 이끌기란 간단했다. 녹이 슨 로봇의 얼굴 사이사이로 소닉 선글라스를 착용한 그녀가 반사되어 비쳤다. 모두 닥터에게도 보일 풍경이었다.

─뭐 하는 거야?

“나랑 얘기하기 무서우면 스튜랑 얘기해요.”

닥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몰랐다. 다만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었다. 그때까지 쭉 저 상태면 곤란했으니 그녀는 분위기를 푸는 쪽을 선택했다. 말 없는 닥터만큼 못 견딜만한 건 없었다.

“대답은?”

─에너지를 수급하는 형태를 보면 판매용으로 돌리는 거일 텐데, 얼간이임을 미루어 보면 뽑는 족족 다 팔아넘겼을걸. 재고 같은 게 있을 리 없어.

“그렇죠. 스튜, 따라 해.”

로봇이 그녀를 따라 하자 닥터가 그만하라 일러왔다. 대답할 테니 멍청한 짓 좀 그만 하라니, 내가 아는 닥터가 돌아왔다며 그녀가 환대했다. 전방 오십 미터 앞에서 좌회전이라는 로봇 내비게이션을 따라 왼쪽으로 꺾었다. 역시 아무도 없는 살풍경이 피부를 스쳤다.

“그나저나 생긴 건 잠수함처럼 생겨서 선원이 아무도 없는 것 같네요.”

“이 우주선 내 생명 반응은….”

“아아─.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리네. 아무튼 이 우주선에는 네 주인 혼자라는 걸로 됐지?”

그녀가 큰 소리로 로봇의 발언을 막았다. 로봇이 고개를 끄덕이는지 목 부위의 톱니바퀴가 굴렀다. 녹슨 철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던 그녀는 유감스럽게도 두 손 모두 사용 중이었다.

“우리 다음부턴 말로만 하자.”

“목적지 부근입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판단을 내릴 지능이 남아 있지도 않으면서 일부러 곤란을 회피한 것 같았다. 목적지 부근이라고 해봐야 당연할 게 막다른 길이었으니, 문이 세 개 놓인 삼면을 그녀가 제자리에서 돌아봤다. 옆마다 달린 스위치가 출입을 관장하는 모양이었다.

─시끄러운 건 끝났나?

“소리 끄고 있는 건 반칙이잖아요.”

─얼간이 만나면 스튜 기름칠부터 시켜.

지금껏 달려오며 봤던 출입구라곤 이 세 개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셋 모두 외부로 통하는 길은 아닌 듯 보였으므로 전부 다른 방으로 이어질 거라 추측됐다. 감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이 중에 주인 또는 메인 컴퓨터 또는 주인과 메인 컴퓨터가 있었다.

“어디, 다 열어볼까?”

한 발 물러나 세 군데 골고루 소닉을 뿌리자 낡은 우주선은 속속들이 속내를 드러냈다. 동시에 민낯을 개방한 실내 중 우측 기계실에서 괴상망측한 감탄사가 고막을 습격했다.

“으흐어아라악!”

“그래. 누가 봐도 네 주인이다, 스튜.”

주인은 멀대같이 길면서 꼭 모래시계를 연상시키는 체형의 소유자였다. 텔레포트 수신기로 추정되는 투명한 관을 손보던 주인은 그녀가 스위치를 때려 폐문할 때까지 목구멍 빼고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얼간이 수준 어디 안 간다며 내심 박수를 보낸 그녀가 정면의 메인 컴퓨터실로 들어갔다.

“여기 시설 죄다 노후화됐는데 방음 하나는 끝내준다. 맘에 들어.”

자동으로 닫힌 문을 뒤로한 그녀가 초라한 키보드 한 대를 향해 다가갔다. 방을 통째로 사용해 설치된 컴퓨터 본체에 비교해서 어찌나 간소한지 껍데기를 이고 다니는 소라게 몸체도 이것보단 높은 비율을 차지할 것 같았다. 물건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책상 위로 로봇 머리를 끼워 놓고 안경을 올려 썼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올라타 반쯤 돌자 뒤에서 출입구 개폐음이 들려왔다.

“브가라아오엑!”

그녀가 선글라스 뒤로 찡긋거렸다. 주인에게 보일 리 없는 윙크로 문을 닫고 책상 쪽으로 돌아왔다.

“이것 봐. 하나도 안 들리잖아. 맘에 들어.”

─저 얼간이한테 스튜 기름칠이나 맡기라니까?

“쓸만한 구석이 있는지부터 확인하고요!”

키보드 ‘엔터’쯤 위치로 보이는 기다란 자판을 연타하자 벽에 걸린 구식 텔레비전 모니터에 불빛이 떠올랐다. 텅 빈 액정 한가운데에 비밀번호 입력창이 최소한의 디자인으로 놓여 있었다. 주파수로 해결해보려던 그녀가 이거 안 먹힌다며 혀를 찼다. 딱 필요한 순간에 이차 침입을 시도한 주인을 그녀는 달가워했다.

“아, 마침 잘 열었어. 이 컴퓨터 비밀번호 좀 알려줄래?”

“알려 줄까 보냐악!”

“유감이네. 그럼 안녕.”

이제는 정말 안녕이었다. 주인의 쓸모는 다했으니 소닉 잠금을 걸었다. 방해꾼이 사라진 평화로운 공간에서 그녀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도닥였다. 기밀 사항을 적어둔 메모 같은 건 어디에도 붙어있지 않았다. 저 얼간이도 기억할 수 있는 암호라면 분명 생활 속에 깊이 녹아든 하나의 문자열 또는 수열일 터였다.

─단서가 아무것도 없어?

“그러게요. 스튜, 아는 거 있어?”

“비상 대책 매뉴얼을 불러옵니다. 현재 상황이….”

“테러고, 나 테러범 맞아. 감 오는 거 없어요, 닥…? 왜, 무슨 일이에요!”

급작스레 닥터의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격이라도 받았는지 괴로움에 젖은 음색이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닥터를 불렀다. 닥터가 황급히 헐떡이며 외쳤다.

─스튜 좀 막아! 몸통이 나를 테러범으로 인식해서 공격하고 있다고!

“스튜, 공격 중지! 명령이다. 그 사람은 비무장한 민간인이야!”

로봇이 명령을 받들었는지 잠잠해진 건너편에서 바닥에 주저앉는 한숨이 들려왔다. 안심하며 의자에 풀어진 그녀가 로봇을 골칫덩이 보듯 쳐다봤다. 혹시나 싶어 남겨뒀건만 역시 주인에게 넘기는 게 답이었다.

“거기 괜찮아요?”

─이영육사오.

“네? 이영육사오, 스튜 일련번호요?”

“승무원 일련번호 이영육사오입니다.”

경황없을 이 시점에 말해올 건 하나밖에 없었다. 타디스 언어 체계로 번역된 자판으로 숫자 이영육사오를 차례로 입력했다. 눈치채고 보니 유독 그 근방의 글자가 미세하게 닳아 지워져 있었다. 값을 입력받은 화면은 절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무전 건너편에서 닥터 근처에서 물체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음이 섞여왔다.

─주파수 보안을 걸어둔 것도 전부 이영육사오 채널이었어.

“이영육사오에 대단한 집착을 갖고 있네요.”

─테러라는 말은 왜 괜히 해서 그래?

미안하다 전하는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안전을 확보하니 해프닝이 웃긴 탓이었다. 이런저런 수모를 참 많이 겪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시끄럽고 일에나 집중하라는 닥터의 시비를 그녀는 손가락을 풀며 건성으로 넘겼다. 현란한 기기 조작으로 실력을 뽐낼 때였다.

마치 댄스파티의 스텝을 밟듯 타자를 두들겨 갔다. 무도회장에 깔린 배경음악은 소닉 선글라스에게 맡겼다. 하나뿐인 암호를 남발하는 정열적인 작업은 사교 클럽의 곡조 하나가 잦아들 때쯤 착실히 마무리 지어졌다.

“마을 사람들에게 걸어둔 프로세스 해제, 스튜에게 맡긴 임무 해제. 스튜가 다시 활동할 일은 없겠지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타임 필드 범위 해제는 왜 안 해? 객체 단위로 범위 재지정한 거, 그 우주선 대상 아니야?

“맞아요. 이건 보험. 어쨌든 재범은 막아야죠. 마지막으로 보안 프로그램 재설치까지 완료!”

모니터가 두어 번 깜박이다 까맣게 꺼졌다. 다시 시작되는 본체에 따라 우주선 자체에 짤막한 정전이 일었다. 선내 모든 장치가 일제히 재가동되며 걸어 잠갔던 컴퓨터실 문에서 불똥이 튀었다. 맥없이 옆으로 밀려 나간 자리에 만신창이가 된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이영육사오?”

“네가 내 이름을 어떻게!”

“그게 네 이름이었어? 어쩜. 네 이름마저 잊어버릴까 봐 온갖 곳에 도배를 해둔 거구나. 자, 스튜 받아.”

─저딴 얼간이 때문에 이렇게까지 애를 먹다니.

그녀가 로봇 머리를 아무렇게나 들어 올려 주인에게 던졌다. 무성의한 조준점이 주인과 멀리 떨어졌음에도 기가 막히게 잘도 받아냈다. 의외의 재능을 발견한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영육사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주 야구 경기 포수나 하면 딱 맞을 거 같은데. 아, 그리고 걔 기름칠 좀 하는 게 좋겠어.”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저 사람들한테 해를 끼친 것도 없잖아!”

아무런 반박도 꺼내지 않는 그녀에게서 심상찮은 기운이 풍겨왔다. 싸한 공기가 주인의 숨통을 조여왔다. 침을 넘기는 주인의 다리 관절이 오그라들고 피부가 빳빳하게 펴졌다.

“너는 건들면 안 될 이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어.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할 거라면 시작조차 말았어야지.”

어느 때보다 가라앉은 목청이었다. 동그란 눈동자가 살벌하게 상대를 응시했다. 닥터에게 또한 처음 내보이는 행색이었기에 잠자코 지켜보길 택한 것 같았다. 목전에 대치한 주인은 어떡해야 이 곤란을 타개할 수 있을지 끙끙댔다.

“기회를 줄게. 이 우주선을 버리고 떠나든가 아니면 이 우주선과 함께 저세상으로 떠나든가.”

그녀가 재설정을 마친 버튼을 끄집어냈다. 주인을 회유하려는 듯 살랑이는 손짓의 실체는 너그러운 협박이었다. 말만 ‘기회’지 금방이라도 누를 의지가 그득했다.

“이게 뭔 줄 알아? 내가 범위를 재설정했거든. 저 마을에서 이 우주선으로. 버튼만 누르면 적용될 거야.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게?”

“이영육사오가 이 우주선을 돈다…?”

“잔류 에너지만 빨아들이고 빨아들이길 반복해서 과부하가 걸리겠지. 그러면? 펑. 대폭발이야. 이 우주선의 모든 게 산산조각 나는 거라고. 자, 슬슬 어떡할지 결심이 섰니?”

허둥지둥하던 주인이 팔을 들어 숫자를 셌다. 무슨 소용일까 싶은 행동은 저것이 진실인지 헤아리는 용도였다. 재촉하려 주의를 끌려던 그녀에게 닥터가 침묵을 깨고 다가섰다.

─너, 왜 그렇게 날이 서 있어? 거기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개인 사정이 있어서요.”

‘금방이라도 누를’ 것 같단 건 다시 말해 자기 자신마저도 폭발에 휩쓸릴 위기였다. 그렇게까지 열을 내야만 하는 이유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건들면 안 될 이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이란. 계산을 마친 주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가 그런 거짓말을 믿을 것 같아! 그 버튼은 이제 쓸모없는 거고, 어차피 내가 재설정하면 저 밑에 남은 네 친구는!”

“그럼 해 봐. 해 보라고.”

옴짝달싹 안 하는 주인을 이끌어 내는 데에는 한 마디가 추가로 필요했다. 내가 비켜줘야 엄두가 나겠냐는 그녀의 도발성 진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야 낯짝을 본 이래로 처음 발바닥을 떼어냈다. 그녀가 물러난 자리에 앉은 주인이 아무리 키보드를 만지작거려도 무엇 하나 꿈쩍 않았다. 품에 떨궈둔 로봇과 주인의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이게 어떻게 된.”

“무식하면 겁이 없다지. 드디어 겁이 좀 나?”

마지막 단추를 끼우는 그녀의 손길이 사뿐했다. 오히려 윽박지르는 쪽이 덜 겁났다. 주인의 몸이 비로소 진동을 울렸다. 책상에 기댄 그녀에게까지 전달되는 강도였다. 그녀가 자세를 고쳐 두 다리로 바로 섰다.

“너 대체 뭐야. 정체가 뭐냐고! 시간….”

“아아─. 그런 말은 다음부턴 예고하고 해줄래?”

“시간에 영향받지 않는 생명체란 있을 수 없다고!”

“거참, 예고하고 해달라니까.”

그녀가 주인의 언동과 동시에 무전을 끊었다. 시간이라는 단어가 나온 시점부터 닥터는 이 대화를 듣지 못할 터였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고 주인을 마주했다. 자비 없는 미소가 안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주인이 근처에 나뒹굴던 꼬챙이를 챙겨 자기 보호에 들어갔다. 애착 인형 같은 폼으로 로봇 머리를 안고는 퇴로를 확보해나갔다.

“네가 이영육사오한테 저장했던 닥터라는 이름, 데이터 뱅크에 검색해봤었어. 네 친구의 이름 아냐? 네 이름은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아!”

“해킹 지원은 어디서 받았는지 몰라. 도망은 좋은 선택인데 말이야.”

“시간뿐만 아니야. 생체 반응이 어떤 것도 없어. 컴퓨터가 뭣도 감지해내지 못했다고. 존재할 수 없단 말야. 불가능하단 말야. 말해! 너 대체 뭐야?”

팔짱을 낀 그녀는 무덤덤해 보였다. 존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소녀’라는 부분만은 맘에 들었다.

 

*

 

이상하리만치 날이 선 그녀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무슨 개인 사정이 있길래, 건들면 안 될 이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이 무엇이길래 저러는 건지 닥터로선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닥터 자신을 향한 지칭일 거란 점이 제일 큰 질문거리였다.

─너 대체 뭐야. 정체가 뭐냐고! 시간….

돌연 단어가 끊기고 통화 종료 수신호가 났다. 들여다보고 있던 스마트폰 액정이 해가 진 하늘만큼 검게 변해 닥터를 비췄다. 단말기가 갑자기 꺼져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노인의 얼굴이었다.

“이봐, 이봐? 무슨 일이야?”

화면을 몇 번이고 터치하고 블루투스를 재연결해도 통신이 닿을 일은 없었다. 연락망 기능이 없는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를 꺼내서 쫴도 똑같았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 방해 전파가 있거나 저쪽에서 스스로 끊은 거였다. 주파수를 워낙 사랑하던 작자였단 명목으로 닥터는 전자를 믿고 싶었다. 쓰러진 로봇 몸통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닥터가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혹여 또 습격이나 해올까 싶어 취한 얄팍한 방비였다.

결국 도착한 곳은 시계탑이었다. 아무도 접근해오지 않는 걸 보니 타임 필드와 연결된 알고리즘은 풀리지 않았다. 모든 종결은 버튼 하나에 달린 셈이었다. 범위가 재설정되면 시계탑도 우주선에 전송되어 폭발을 위해 힘을 쏟을 예정이었다.

“시간이라.”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는 건 체질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결할 짬이 마련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떠나가기 전 떠맡긴 스마트폰은 아까 조사해본 바 건질 수 있는 성과는 없었다. 또 쥐고 있는 단서가 있을까 골라보던 차에 이전 행성에서 아이에게 뺏어온 편지가 뇌리를 스쳤다.

“여태껏 잊고 있었군.”

수신인 ‘닥터’ 글자만을 확인했던 종잇조각을 코트 안자락에서 끄집어냈다. 그녀가 본다면 남의 걸 뺏어왔냐는 둥, 훔쳐보는 거냐는 둥 할 게 뻔했기에 지금 열어보는 게 최적이었다. 그녀가 꼬집을 미래에 대해 딱히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질감이 뻣뻣한 편지지가 주름을 펴며 구김살을 노래했다.

 

닥터에게.

안녕 닥터? 아직 감사 인사도 못 드렸는데 아무 데도 안 보이는 건 너무해요. 우리 마을을 구해주tj(이거 잘못 썼는데 안 지워져요)셔서 고마워요. 우리 마을 애들 전부 모여서 편지 쓰고 있어요.

우리 마을…

 

어린아이 여럿이 모여서 썼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는 삐뚤빼뚤한 글씨체였다. 마을에 언제 괴물이 들어왔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괴물처럼 갑자기 나타난 닥터가 어떻게 이들을 구해내고 평화를 가져왔는지까지 상세한 구절마다 감사가 빼곡히 배어 나왔다. 닥터라는 영웅에 대한 찬사였다.

 

닥터가 그랬잖아요. 나는 닥터고 사람을 구한다고. 그렇기 때문에 닥터라고. 완전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뒤에 닥터가 또다시 위험한 일이 있으면 진짜 닥터를 부르라고 한 거는 이해가 안 됐어요. 우리한테 닥터는 닥터 하나뿐인걸요?

 

문장을 씹어 삼키던 속독의 독주가 멈췄다. 구원자를 위한 신뢰로 두터웠던 아이의 곧은 시선을 닥터는 떠올렸다. 단순한 사칭범에게 누가 그런 신용을 내비칠까. ‘구원’이라는 단어에 눌러 담긴 책임은 무엇보다 무거움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닥터였다. 편지 속 그녀에게도, 닥터와 사흘간 동행했던 그녀에게도 꿍꿍이 따윈 없음을 닥터는 놓치고 있었다.

이름이라는 보잘것없는 색안경으로 허상만 좇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녀는 어엿한 ‘닥터’였다고 닥터는 깨달았다. 개인의 사사로운 명성보다 ‘닥터’라는 호칭의 본분을 중요시한 그녀는 닥터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또 신뢰하고 있는 위인이었다.

─닥터?

그녀의 목소리가 놓고 있던 스마트폰에서 재차 들려왔다. 편지 속 마을에서 현실로 불려온 닥터가 종이를 접어 넣고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까맣던 액정은 그녀가 보는 눈앞을 따라 비추고 있었다. 텅 빈 선내에 그녀만이 떠돌고 있었다.

“왜 갑자기 끊어졌던 거야.”

─방해 전파가 있었나 봐요. 이제 다 끝났어요. 이영육사오는 도망갔어요.

“그거 잘됐네! 시간도 남았어. 얼른 이쪽으로 넘어와서 버튼 누르고 정리하자고.”

방해 전파라는 정답을 선언 당한 닥터는 안심했다. 등을 대고 있던 시계탑이 다하지 않은 하루를 밝혔다. 질 법함에도 꺼지지 않은 오늘이라는 등불이 가장 열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끊임없는 기억의 소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음을 닥터와 나란히 경축했다.

─오 분 정도 남았나요?

“그래. 충분한 시간이지.”

─그러게요. 정말 넉넉해요.

마치 소실을 각오하고 떠나버릴 이가 낼 만한 적적한 말투였다. 불안한 낌새를 잡아챈 닥터가 붉은 벽돌을 등지고 일어서 걷기 시작했다. 홀린 듯한 걸음걸이에서 이내 달려가기까지 몇 초나 허비했을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곧 떠날 사람 같잖아.”

─오 분 후면 지금껏 있었던 일을 모조리 잊어버리겠죠?

“갔다 와서, 갔다 와서 모든 걸 말해준다면서.”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멈추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 도달하기엔 어림도 없음을 외면하던 닥터가 먼발치에서 가로막혔다. 타임 필드는 야속하게도 허공을 휘어뜨릴 뿐 굳건히 출입을 차단했다. 희미한 시야 안 레스토랑 옆쪽으로 점만 하게라도 보여야 할 타디스는 돌아올 조짐이 어디에도 없었다.

─수플레도 안 만든 지 오래됐네. 수플레 좋아해요? 나 수플레 잘 만드는데.

“무슨 소리야. 돌아와서 말해.”

─모든 이야기, 지금 해요.

뒤돌아 달렸다.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지막 희망은 로봇의 몸뚱이에 남은 텔레포트 장치였다. 소닉이라면 하나 더 있으니 뜯어낼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주먹을 쥐었다. 그녀를 다시 볼 유일한 방법이었다.

─뭘 그렇게 힘을 빼는 거예요? 나는 더 대화하고 싶은데.

“닥터.”

─방금 날 닥터라고 불렀어요? 워허우, 무슨 심경의 변화래? 사칭범 탈피 축하 파티라도 준비해야겠어요.

너저분한 고철 잔해가 저만치에서 어둡게 반짝였다. 가파른 언덕길 위에 목적지가 있는 기분이었다. 가까워질수록 시계 침은 내리막길을 가속해 굴러갔다.

─대화 좀 해보자니까요? 달리고 있는 거 같아 말하자면, 나 정말 저엉말 열심히 뛰었어요. 아마 당장 당신이 뛰고 있는 것보다 더 열심히. 눈에 드는 곳은 어디든 닥치는 대로, 온 우주를요.

“네가, 오지…, 헉, 허억…. 않는다면, 내가… 내가 가.”

─숨 차는 것 봐요. 이 순간 만큼은 안 뛰어도 되잖아요.

자잘한 흙이 찬 바람을 타고 발치에서 풀썩거렸다. 아등바등 기어오르는 꼴이 먼지를 일으키는 장본인과 똑 닮아 있었다. ‘스스로 수십억 년을 반복했을 때처럼’ 멈출 수 없었다.

“닥터, 제발….”

─그 단어요, 당신이 말하는 청렴만큼이나 안 어울려요.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 양반이 ‘제발’이라뇨. 부탁은 내 몫이잖아요. 닥터, 제발 멈추고 나와 대화해줘요. 당신의 목적지가 어디든 도달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두 개의 심장이 터질 듯이 쥐어짜내졌다. 움직임의 원동력은 두려움이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고철 잔해까지 고작 다섯 발짝이었다. 그 다섯 발짝을 못 떼는 건 그녀를 거스르는 게 ‘불가능’해서였다.

─이거 하나는 알아줘요. 난 지금 웃고 있단 거. 그러니, 당신도 나를 위해 웃어 줘요.

입꼬리를 끌어당기려던 닥터의 노력은 무참히 추락했다. 인제야 닥터의 편을 들어준 이유가 원망스러웠다. 닥터에게 불가능한 소녀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웃어?”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 마지막 부탁만 기억해요.

그녀의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담담한 감정이 아쉬움과 맞닿아 있었다. 토할 것 같은 호흡을 꾸역꾸역 참아낸 닥터가 눈꺼풀을 닫았다. 꿈틀거리는 눈썹이 슬픔에 적셔졌다.

―닥터가 되어 주세요. (BE A DOCTOR.)

마음속 타디스에서 그녀의 모습을 맞추던 닥터가 눈을 번뜩 떴다. ‘클’ 발음을 그리던 다급한 입술, 미처 내지 못한 작별.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는 종언만을 남겼다.

 

─Run you clever boy,

and forget me.

06. 기억해 Remember


투명한 막 너머 희뿌연 대기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레스토랑 옆으로 내려앉은 파란 공중전화 박스가 조용했다. 그저 빤히 바라보기를 몇 시간, 버튼을 쥔 그녀가 닥터 앞에 마주 섰다. 밀랍 인형만 같이 차게 굳은 닥터의 눈동자에 그녀가 비쳤다.

“수십억 년을 날 위해 반복했으면서, 또다시 반복을 겪는 게 어딨어.”

건들면 안 될 이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이란. 닥터에게 더는 그만한 시련을 내밀어선 안 됐다. 베일이 벗겨진 자리에 남은 건 ‘반복’이었다. 그녀가 끊어내야만 하는 연쇄였다. 기억을 대가로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의무는 지켜져야만 했다.

“어떻게 찾아왔는진 모르겠지만, 닥터. 우연 같은 건 없어. 이번에도 당신이 날 찾아온 거잖아. 시치미 떼면 누가 모를 줄 알고?”

그리움을 좇는 그녀의 손이 닥터의 코트 깃을 들췄다. 그녀의 휴대폰은 시계탑 근처에서 주워뒀었기에 안주머니는 헐렁했다. 그 자리에 소닉 선글라스를 원상 복귀시키며 처음 상태 그대로 옷 주름을 매만졌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듯 번듯해진 옷감에 반가움이 서렸다.

“정말 보고 싶었는데, 끝까지 나인 걸 모르더라. 어떻게 내 이름 하나 못 부를 수가 있어. 한눈에 알아보긴 뭘 알아봐? 하여튼 자기가 틀린 줄도 모르고.”

여태껏 눌러 담았던 투정을 부릴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괘념치 않는다 생각했던 마음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붉은 꽃망울을 닮은 눈시울의 뜻은 슬픔이 아니었다. 장난스러운 괘씸함이 말라붙었던 속내를 적셨다. 닥터가 본다면 왜 우느냐고 호들갑을 떨 테였다.

“나, 당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닥터’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어. 왜, 알잖아. 그래야만 닥터니까.”

그녀의 감긴 눈꺼풀이 사르르 떨렸다. 몇 밤을 꼬박 들려주고도 모자랄 모험담이 멈춘 심장을 경탄시켰다. 눈이 부시도록 광활한 초목의 초야, 하룻밤 새 타오르는 찬란한 혜성과 꼬물대는 여명, 깎아지른 절벽 밑에 솟은 영롱한 지옥도…. 생에서 벗어난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동시에 특권은 대가가 따랐으니, 어느 곳이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있었다. 영웅이라는 공석에 ‘닥터’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기꺼운 구호 활동은 그녀만의 새로운 삶이자 이별이었다. 필연을 가장한 예기치 못한 안녕 또한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닥터에겐 이별이 숙명이더라고.”

눈을 뜬 그녀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고백했다. 작별을 소리 낼 수록 미련이 남을까 봐 일부러 하나하나 뜯어보기만 했던 거였는데. 오랫동안 간직했던 시간이 만족스러우면서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계속 살아 줘. 당신이 살아있단 것 자체가 내가 당신을 구했단 증거거든. 그러니 하는 말인데, 당신 하나 구해내지 못하면 닥터가 무슨 소용이겠어?”

성공한 자만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입담이었다. 개구진 미소를 만면에 띄우던 그녀가 닥터의 뺨으로 팔을 뻗었다. 비현실화된 듯 이질적인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쓰다듬는 손길을 닥터는 화난 눈썹으로 대항했다. 몇 분 뒤 풀려나면 저 태도로 그녀를 쪼아볼 게 뻔했다.

“기억이 뭔 대수라고.”

살아있으면 그걸로 됐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먼 발치에라도 찾아갈 수 있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대도 마음가짐이란 게 중요한 거 아니겠는가. 그녀가 고개를 기울여 그토록 실컷 봤던 닥터를 마지막으로 저장했다.

“당신을 위해 웃을게.”

안아오는 상대 없는 일방적인 포옹을 걸었다. 따뜻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였다. 그러고 보면 이 얼굴과의 첫 만남도 이랬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보고 싶을 거야.”

그녀가 닥터에게서 떨어져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이제는 진정 기폭 장치로 둔갑한 버튼을 쥔 채였다.

버튼이 땅바닥을 굴렀다.

07. 에필로그 Epilogue

마을의 경계선을 넘자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간질였다. 모래 냄새가 은은하게 땅에서부터 기어올랐다. 깨끗한 기류가 주름 펴라며 미간을 두드렸다. 누가 뭐래도 아랑곳하지 않을 닥터는 오히려 날이 너무 맑다고 짜증을 내려 하고 있었다. 트인 시야가 꽃밭만 같았다.

“어이, 가짜!”

돌연 길을 멈춘 닥터가 붙박이처럼 우뚝 섰다. 단 한 사람도 없이 한적한 주변 따위는 어째도 좋다는 듯 시선은 오롯이 저 사칭범만을 향해 있었다. 앞서가던 그녀가 돌아보는 간의 공백이 마을 안쪽에서 전해지는 활기로 메워졌다. 여기까지 들리는 게 분위기와 더불어 금상첨화였다.

“내가 너를 뭐라고 불러야 좋지?”

“사람 이름을 두고 ‘가짜’라고 부르면 좋아요? 전 닥터라니까요.”

무감정한 가면이 닥터의 시신경을 자극했다. 무심한 듯 간결한 대답, 그 안에 담긴 저의를 읽을 수 없었다. 그리움이란 말도 안 됐으며 익숙한 장난기는 더더욱 개연성이 없었다. 갸웃하는 시선이 숨은 진심을 좇다 까무룩 뭉개졌다.

“난 그쪽을 닥터라고 생각 안 한다니까. 내가 부르니 돌아봤잖아. 그럼─ 가짜라고 스스로 인정한 거 아닌가?”

농담조의 톤을 서슬 갈아 내밀자 그녀는 여유롭게 눈매를 휘어뜨렸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자신만만함이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괜히 주춤한 닥터가 동공을 굴리는 자신을 낯설어했다.

“미안해요. 이것만큼은 밀리기가 싫네.”

“밀리기 싫단 게 무슨 말이야. 그 자존심, 외관… 인간인가? 지구?”

당당하게 맞서는 적수에게 고집을 부리는 닥터였다. 품 안에서 소닉을 꺼내려는 습관보다 한발 앞선 그녀가 나무 볼펜으로 그를 지적했다. 까딱거리는 감시망이 닥터를 꼬집기까지 하는 기분이었다. 빈손으로 수확을 마친 닥터가 문득 울분에 사로잡혔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녀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비틀었던 몸을 원래대로 향했다. 목적지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눈에 띄는 건축물도 자그마한 이상도 보이지 않는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세 뼘 뒤에서 따라오는 닥터도 위협을 받을 일이 없었다. 내내 그녀만을 따르는 눈빛을 즐기며 흙길을 거닐었다. 간만에 한가로운 산책 시간이었다. 닥터에게서 떠난 추궁용 질문들은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내 말 듣고는 있는 건가? 계속 그렇게 아무 말도….”

“여봐요, 앞 좀 보고 다녀요! 다 쏟을 뻔했네.”

닥터를 살뜰히 끌어당긴 그녀의 기지로 접촉 사고를 피했다. 간발의 차로 엇갈린 탓에 몇 개인가 흘린 물건이 바닥을 굴렀다. 헛손질하려던 상대가 흠칫하고 눈언저리를 비벼댔다. 데면데면 바구니를 굴리는 모습이 아무래도 어리숙한지라 가만 지켜보자니, 이윽고 벌떡 몸을 세워 왔던 땅을 도로 즈려밟았다. 인파를 뚫는 지엄한 걸음걸이였다.

“이상한 사람이군.”

“그런가요? 내 눈엔 지극히 정상인데. 가게 주인이 물건을 덜 팔기라도 했나 보죠.”

“그걸 눈 뜨고 당하면 죄다 얼간이게?”

“얼간이 안 되려고 샀던 가게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어, 저기 봐요!”

백색 소음 속 자기가 산 물품을 자랑하는 객인의 대화를 그녀가 가로질렀다. 도중에 끼어들어 미안하다고, 하던 얘기 마저 하라고 그들에게 선언코는 식료품 가게로 냅다 튀어가 무엇인가 발견해냈다. 해맑게 집어 든 과일은 꼭 지구의 배를 닮아 있었다. 두 닥터의 표정이 삽시간에 찌푸려졌다.

“배는 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싫더라고요.”

“이거 하나는 잘 맞는군.”

그녀가 집어 든 걸 보고 실내에서 달려 나온 가게 주인이 그녀가 도로 내려놓자 꾸역꾸역 다른 상품을 떠넘겼다. 돈이 없다며 거절하려니 가게 주인 옆에 식료품 기사가 유별난 사람들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저희가 유별나긴 해요. 잠깐 명부 좀 확인할게요!”

“뭣, 뭐 하는 거예요!”

“닥터, 사이킥 페이퍼 좀 활용해봐요.”

얼떨결에 휩쓸린 닥터가 사이킥 페이퍼를 꺼내는 동안 그녀가 명부 맨 위 장을 몰래 찢어냈다. ‘도망쳐’라는 절박한 빨간 글자가 영영 자취를 감췄다. 가짜 명함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기사가 두 눈꺼풀을 번갈아 깜박였다. 반박도 없이 그녀를 따라버린 닥터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납품 확인단이 왜 지금 여길 와요?”

“아무것도 안 한다며? 내가 왜 너를 따라?”

“아, 당신네 둘 다한테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아무 이상 없네요. 수고가 많으셔요!”

산뜻하게 명부를 넘긴 그녀가 상황을 갈무리했다. 어리벙벙해진 기사와 닥터를 두고 가게 주인이 유쾌한 손님이라며 한바탕 웃고 나섰다. 처음 그녀가 집어 들었던 배를 서비스로 주겠다며 하나 주워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정말 안 그러셔도 된다는 만류도 먹히지 않았다. 감사 인사를 한 그녀가 으쓱이며 쟁여 두기로 했다.

“레스토랑에서 쓰면 되겠어요. 배 주스 한 잔?”

못마땅한 의구심이 그녀를 꿰뚫었다. 유연하게 넘긴 그녀가 주변을 마저 둘러봤다. 가게 주인의 저녁 제안을 거절하는 기사를 뒤로하고 부쩍 한산해진 북새통을 만끽했다.

“시장도 끝물인가 봐요.”

“이렇게 텅텅 비었으면서 지금까지 이어진 게 특이한 거지.”

“웬일이래. 알고 있었어요?”

“내가 너인 줄 알아?”

나들이도 슬슬 마칠 때였다. 쨍한 해가 점점 가라앉았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를 닥터는 빤히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함께 있다는 데에서 오는 묘한 안도감마저 무의식이 보내는 메아리였다. 잔잔한 파문은 소리 없이 묻히고, 마을 한 바퀴를 통째로 돈 수색은 실패했다. 두 닥터가 중심부의 홀가분한 공터에 멈춰 섰다.

“타디스가 잘못 짚었네요, 이번엔. 특별한 사건 같은 건 보이지 않아요.”

“너를 제외하고 말이지.”

“이거 어쩌죠. 곧 그 영장 만료되는데.”

그녀의 말 대로였다. 붙잡을 만한 명분이 없었다. 만일 헤어진 후 타디스로 쫓아간다 한들 무의미할 것 같았다. 조그마한 쪼가리라도 그녀의 관심을 끌 만한 게 없을까, 고민하던 닥터가 아이에게서 받은 편지를 떠올렸다. 밑져야 본전이란 마음으로 꺼내든 종잇조각은 홀랑 그녀에게 압수되었다.

“이게 뭐예요? 닥터에게. 닥터한테 온 편지? 그런데 왜 내 앞에서 꺼내 드실까.”

“그건.”

“펼쳐본 흔적이 있는데. 설마, 이거 나한테 온 건가? 그래서 나한테 찾아온 거예요? 남의 편지를 까보다니!”

“무슨 말이야? 난 그런 적 없어!”

찾아온 건 맞지만 맹세코 펼쳐본 적은 없었다. 내용 한 줄 모르는 걸 까봤다고 오해받으니 그리 억울할 수가 없었다. 그 속뜻을 이해한 그녀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제게 온 걸 주섬주섬 거둬갔다.

“억울해요? 내가 사칭범으로 몰리는 게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이해하겠네.”

“그거랑 이게 같아?”

“같죠, 그럼. 그것도 그렇지만 꽤 어두워지고 있는데. 계속 서 있는 것도 뭐하고… 이 마을에서 나갈까요?”

그녀가 닥터를 똑바로 마주 봤다. 샐쭉 기울어진 눈매가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코앞에 떨어진 작별의 시간을 닥터는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기엔 남은 밑천이 바닥이었다. 한 마디 사담도 오가지 않는 조용한 귀갓길을 두 닥터가 동행했다.

마을 입구와 바깥의 일선은 허물없이 이용객을 떠나보냈다. 두 닥터의 우주선이 각 주인을 환영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닥터 혼자였다.

“내가 왜 자꾸 네 말에 곧이곧대로 따르는 거지?”

“그걸 나한테 물어요? 당신 마음인 걸.”

레스토랑 입구 손잡이가 그녀에게 붙들렸다. 투명한 유리문 위에 비친 그녀는 아직 못다 한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타디스보다 그녀에게 가까이 선 닥터에게 그녀가 서두를 외쳤다.

“타디스 찾을 수 있을 거랬죠.”

이전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닥터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기억이 흐려지면 이야기가 되어 남는다. 어쩌면 노래가 될 수도. 까마득히 묻혀 있던 한 악곡이 닥터를 휘감았다.

“만약 당신이 찾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소닉부터 들이대지 말고 전에 들려줬던 곡을 연주해주세요.”

종소리가 어렴풋이 닥터의 귓가에 맴돌았다. 클로이스터 벨과는 다른 종류의 경고음이었다. 닥터가 놓친 무언가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유 모를 쓰라림에 사로잡힌 닥터가 마지막 질문을 끄집어냈다.

“너 누구야? (Who are you?)”

그녀는 웃고 있었다. 다만 미소뿐이었다.

잡아 당겨진 문이 팔랑이며 그녀를 삼켰다. 결말을 싫어하는 닥터를 배려하듯 인사 한마디 없이 그녀는 떠나갔다. 스르르 사라지는 레스토랑을 닥터는 멍하니 바라봤다. 이전 만남과 같았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녀는 타디스만 남겨뒀다.

망연한 걸음을 질질 끌어 타디스 문을 열었다. 밖보다 안이 큰 우주선 내부가 차례로 점등했다. 며칠을 방치라도 한 듯 차가웠으며 얼마 전까지 사람의 손길이 닿기라도 한 듯 따뜻한 온기가 머무는 조종간, 그 뒤 시야 일직선으로 칠판이 놓여 있었다. 눈을 뗄 수 없는 글자가 하얗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당신이에요. (I’m you.)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에필로그: 나를 Me


--. 후기

책 구매해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본 회지 작업의 플롯 세부 구성, 집필 전반 및 편집, 회지 작업 총괄을 맡은 연전입니다. 2019년 봄, 잉울 님의 꿈에서 시작해 책이 나오기까지 무려 2년이 넘게 걸렸네요.

10년 이상 붙들고 있던 장르라니 감회가 새로운데, 회지를 낸답시고 집필 내내 수차례 원작을 돌려 보니 또 새로 와닿는 감상이 있었어요.

Run you clever boy...에서, 클라라가 처음 봤던 맷닥에게는 ‘boy’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데, 누가 봐도 ‘boy’가 아닌 카닥에게까지 ‘boy’가 적용된다는 게, 이게 클라라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대사라는 게 정말 좋더라고요. 에서 클라라가 늙든, 젊든, 클라라를 그저 언제나의 ‘클라라’로 바라보는 닥터처럼, 클라라도 닥터를 언제나 변치 않는 ‘닥터’로 본다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상이 있으시다면 이메일 exgnkrj@naver.com 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공동 작업 잉울 님 외 본문 검수 및 스토리 도움에 후비안 실친 미녕, 표지 디자인 검수를 도와준 익명의 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회지에 등장한 ‘이영육사오’의 유래는 잉울 님과 제 생일 날짜를 이어 붙인 수에서 미녕의 생일 날짜를 뺀 수라는 여담을 덧붙여 봐요.

*

 

안녕하세요. 잉울입니다. 이 책과 제가 이야기하는 모든 클라라는 닥터 후 시즌 9: 에피소드 12 이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밤에 제 꿈속에 요란하게 클라라가 찾아왔습니다. 처음 모르는 소녀에 등에 기절해 업혀있는 그녀는 걸음마다 다리가 질질 끌리고 있으며, 소녀는 클라라를 닥터라고 부르고 뺨을 치며 깨우고 있었어요. 이 꿈속 학교에서 벌어지는 대소동에선 진짜 닥터는 등장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클라라가 그의 이름을 걸고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나쁜 에일리언이 그 학교에서 사일런스처럼, 벽에 틈처럼 자신들 존재를 자연스럽게 침투시키며 학생들이 곧 눈앞에 에일리언을 보아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유일하게 기시감이 남아있는 학생 몇몇과 닥터인 클라라가 함께 에일리언과 싸우는 이야기였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모든 일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다음에 또 위급한 일이 생기면 닥터를 불러. 진짜 닥터.”라고 말하곤 그녀의 타디스를 타고 떠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모두 끝난 뒤에야 이곳에 도착한 진짜 닥터는 자신이 아닌 다른 닥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흔적을 쫓아다니는 내용은 이 책의 내용에 중요소재가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클라라에 마지막 대사인 “좀 돌아서 가자고”가 무의식적으로 굉장히 인상 깊었나 봅니다. 꿈까지 꿀 정도라니! 작업 내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컴페니언을 다룰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책을 쓰느라 수고한 연전이와 편집을 도와준 미녕, 익명에 친구에게 정말 고맙고 이 책을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제4회 쩜오 어워드 2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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