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일

가쿠텐 89

89EUN10N by 팥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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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겨울 밤. 발 밑으로 하얗게 눈이 쌓인다. 낡은 포스터 한 장이 오래도록 한 자리에 붙어 있다. 가쿠는 단번에 한 편의 기억이 되어 버린 극을 떠올렸다. 그도 그럴 게 너무도 뚜렷한 파편으로 기억 한 켠에 붙어 있는 작품이었다. 어깨에 걸쳐 둔 검은 코트를 다시 꿰어 입는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포스터를 눈에 담았다. 

뮤지컬 ‘제로’. 트리거가 주연이 되었던 극이다. 절묘하게도 세 사람. 우리는 과거가 되어 버린 오랜 이야기 속 세 사람이 되었다.

찰나 혜성이 되어 사라진 우상. 제로가 찬란히 빛나는 별로 존재하던 시절의 이야기. 마지막 무대를 끝으로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살아는 있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다. 최측근이었던 어느 두 사람마저. 본래 이야기에는 세 사람이 존재했다. 우리처럼. 처음 배역을 전달 받았을 때 어떤 감흥에 놓였는지 이제는 당시만큼 뚜렷하지 않다. 단지 하늘에서 잘게 흩어지는 이 눈처럼, 이 눈이 닿으면 차갑다는 감각을 깨우치듯 어렴풋한 감상이 떠오를 뿐이다. 놀람과 당황스러운 마음 언저리에 놓여 있던 듯싶다. 허나 아주 동떨어진 역할을 부여 받지는 않았구나 배역을 몸에 익히며 인정하고 말았다.

이 녀석은 제로가 아니라며 목을 울렸던 적이 있다. 그럼에도 참으로 간단히 오래된 껍데기에 쿠죠 텐을 겹쳐 보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했다. 어디론가 가지 마. 사라지지 마. 너를 위한 스포트라이트가 빈 무대 위를 쓸쓸히 비추도록 내버려 두지 마. 어디부터 제가 가진 감정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몰아치듯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이 극이 끝났을 때 말도 없이 사라지지 않겠지. 불안을 고스란히 입 밖으로 내고 말았을 뿐이다.

모든 일에는 끝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두 사람에게도 끝나지 않기를 바라던 시절이 있을 테다. 그럼에도 속절없이 종점에 닿아 버린 시간에 그들은 하염없이 길을 헤매다 시기를 놓쳤다. 

야오토메 가쿠에게도 단 하나,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극이 있다. 또한 끝맺지 않은 채 끝나 버린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현대에 존재하는 음성이 몸소 그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이야기에 마침표를 건네었다. 그렇다면 언제인가 우리가 이어가고 있는 극 또한 다른 이들이 내는 목소리로 하여금 끝나 버릴지 모른다. 적어도 곡이 끝나는 마지막 음표까지 스스로 새기고자 한다. 아니, 누군가 끝나 버린 시절이라 여겼던 꿈이 여전히 이어졌듯 찰나로 끝나 버리지 않을 테다. 끝나게 두지 않아. 속으로 부단히 외친다.

그 순간, 등 뒤를 두드리는 손짓이 느껴진다. 등을 돌리니 텐이 손에 쥔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인다. 얼핏 사이로 보이는 생크림 위로 딸기가 놓여 있다. 붉은 색채에 시선을 빼앗긴 채 무서운 시선이 꽂혀 든다. 텐은 구태여 행동에 말을 얹지 않고 대신에 이름을 호명하며 간단히 의식을 가져온다.

“가쿠, 이걸로 내 볼일은 끝났는데. 돌아가자.”

“아아, 그래.”

상자는 제가 들겠다는 듯 가쿠가 손을 내민다. 사양하는 기색 없이 익숙하게 상자를 넘겨준다.

하얗게 덮인 길은 고요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마스크 한 장으로 눈치 보지 않고 길을 걷는다. 트리거라는 이름 아래 서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사람들 사이로 자유롭게 거닐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평범하게 나나세 텐과 야오토메 가쿠로 살아가며 서로가 가진 시간을 얽히지 않은 채 지나왔다면 그 삶은 진정 행복할까?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정해 본다. 물론 가쿠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든 야오토메 가쿠에게 주어진 삶을 온 힘을 다해, 제대로 살아갔을 테다. 그럼에도 느낀다. 단언한다. 트리거라는 조각을 제한 삶은 상상 이상으로 고독하며 지루했을 거라고.

그러니까 너도……. 채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문장이 입 안에서 응어리지다 사라진다. 무엇도 대신하지 말라 말했던 주제에 무얼 덧씌우려 했던 걸까 자조한다. 앞장서 걷는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걸음을 놀리던 가쿠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텐. 갑작스럽지만 다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제법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네.”

빙글 돌아본 텐이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가벼운 주제리라 단정지어 그리 답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 무게 있는 물음일 줄은 몰랐다. 좀처럼 보기 힘든 굳은 얼굴에 놀란 눈을 뜬 텐이 다시 물었다.

……어라, 정말 심각한 주제야? 별일이네. 좋아. 무얼 물어보든 진지하게 임할게.”

어느새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가쿠에게 멀어져 있는 거리만큼 다가선다. 타박타박, 걸음마다 쌓이는 눈길이 부스러진다. 가게 바깥에 어스름히 켜진 전등만이 두 사람을 드러낸다.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모르는 시간이라 해 봤자 케이크를 사고 있던 잠깐뿐이다. 찰나에 어떤 일이 있든 가쿠가 쉬이 휘말릴 인물은 아니었기에 텐 역시 드물게도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대화에 응한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라면 텐 역시 평소처럼 응수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평소처럼 대할 상태는 아니라 여긴다. 또 어떤 이를 대할 떄 이렇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더라. 리쿠인가. 글쎄. 그 아이 역시 조심히 대해야 할 상대는 맞았으나 그 아이를 대하는 방식은 약간 다르다. 쌍둥이이자 처음으로 나를 별로 바라봐 준 존재. 하지만 이제는 마주 보아야 할 상대이지 마냥 안에 두고 보살펴야 하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생각을 갈무리한 텐은 어렵지 않게 한 사람을 떠올린다. 아. 그렇구나.

물음이 있다고 말한 주제에 한참이나 입 다문 그대로 텐을 눈에 담던 가쿠가 간신히 입술을 벌린다.

……너 말야. 멋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지.”

“그럴 리가. 나를 봐, 가쿠. 내가 누구야?”

“쿠죠, 텐…….”

쿠죠 타카마사. 그 사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너는 그 사람과 달라.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물어보지 못한 말을 목 너머로 삼킨다. 대신 의미 없는 말을 뱉는다. 가쿠는 정말 생긴 대로 손이 차갑네. 고작 한 걸음, 농담처럼 지금 당장 사라질 수도 없는 거리에 선 텐이 비어 있는 손을 끌어 양 손으로 쥔다. 

눈을 들어 곧게 바라보며, 무엇 하나 피하는 기색 없이 입을 연다. 맞아. 제대로 대답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그리며 고개 끄덕인 텐이 다시 말한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트리거가 끝나게 두지 않을 거잖아. ……말해 줘. 뭘 봤어?”

……’제로’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어. 예전에 한 이야기가 떠올라서…….”

“그랬구나.”

꼭 제로를 잃고 오랜 세월 방황 속에 서 있던 그 사람이 떠오른다. 어느 무대, 어느 배역에 겹쳐진다.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그 사람을 대하듯 듣고자 하는 문장만을 오롯이 들려주어야 할까? 아마도 아닐 테다. 쿠죠 텐은 제로가 아니고, 야오토메 가쿠는 쿠죠 타카마사가 아니다. 제로는 과거에 존재하며 쿠죠 타카마사는 과거를 긁어내던 인물. 현재에 있는 쿠죠 텐과 야오토메 가쿠는 달라야 했다. 우리는 앞으로를 노래해야 하는 이들이니까.

이제 쿠죠 텐 하나로는 온전히 빛나지 않는다. 빛난다 한들 한 사람만이 간직해 있던 오래된 빛을 흉내 낼 뿐이다. 이제 곧 꺼질지 모르는 그런 빛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는 건 그만 두라고 했지만 너희를 소중히 하고 싶다. 지키고 싶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너희를 소중히 하는 건 스스로를 위한 일이 아닐까? 나나세를 버리고 트리거를 얻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그야 트리거라는 별이 영원히 반짝이기를 바라게 되었으니까. 멤버이자 가장 앞선 팬이 되어 트리거라는 존재를 간직한다. 가능하다면 영원토록.

차게 식은 손을 주무르며 해묵은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 어느새 그 위로 수많은 이야기가 쌓였다.

“있잖아. 꽤 예전에…… 전설이 되겠다면, 하고 해 준 말 있지.” 

……그래.”

“전설이 된 트리거를 상상하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지만, 나는 트리거를 단지 찰나로 남기지 않을 거야.”

잠자코 흘러 드는 목소리를 듣던 가쿠가 두 눈을 크게 뜬다.

고스란히 단어로 뱉지 않았으나 영원을 염원하는 말이었다. 영원을 바란 대가를 우리 모두 알고 있음에도 반발하지 않았다. 영원은 단지 한 가지 형태로 국한되지 않는다. 오래도록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누군가 계속 우리가 남긴 목소리를 전해줄 수 있다면 이 또한 영원이라 말할 수 있을 테다. 우리들은 순간에 박제되어 헤매지 않는다.

“될 거라고 생각해. 너희가 함께하니까. 가쿠, 네 생각은?”

“하하……. 대답이 정해져 있는 걸 빙 돌려 묻지 말라고.”

마른 웃음을 뱉은 가쿠가 예의 얼굴로 텐을 바라보며 답한다. 건방지다는 듯 웃는 얼굴을 말갛게 바라보았다. 역시 너는 이 얼굴이 더 잘 어울려. 그리 감상하며 텐은 까마득한 어둠 위로 고개 든다. 눈발 사이로 초승달이 비친다. 밤이 지나고 아침에 드리울 햇살은 배신 없이 도래함을 알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다. 달이 머금은 기억도, 해가 가지고 있는 애정도. 순간으로 끝내지 않는다. 오래 전 약속한 밤은 지금도 여전히 뚜렷하다. 같은 순간에 난 나나세조차 이 감상을 공유할 수는 없다. 모든 찰나를 나눈 네가 함께하는 영원이 아니라 홀로 추상을 품게 될 리 없다. 단언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래서, 가쿠.”

“엉?”

“무서웠어?”

……하!?”

아하하. 높은 웃음 소리가 음악처럼 저 높은 하늘까지 닿을 듯 오른다.

낡은 포스터가 벽에서 떨어져 나른다. 높이. 또 멀리.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그러나 어딘가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혹자는 이렇게 물을 테다. ‘제로’가 누구야? 그리고 눈을 마주한 채 다른 누군가는 대답할 테다. 이제는 먼 과거가 되어 버린 전설을 아주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할 테다.

제로에게 얹어진 이야기 속 우리들은 찬란히 빛나며 사랑 받던 해를 달 뒤편으로 인도한 현재. 끝맺음. 새로운 시작. 반복. 모든 과정에 누구도 사라지지 않은 미래를 이토록 쉬이 상상할 수 있다. 

부족함 없을 정도로 노래하며 언제인가 만족스레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 말할 수 있다. 행복했다고. 행복하다고. 우리의 이야기는 타인으로 인해 끝맺지 않는다. 여전히 내리는 눈발 사이로 아주 쉬이 미래를 그려 본다. 의심하는 불안은 실체하지 않을 테다. 

우리가 마주했던 시작의 자리에서 변함없는 목소리로 찬란한 시절을 고한다. 깨지 않는 꿈을 함께 해 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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