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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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 나 오늘 좀 늦게 끝나니까 먼저 집에 들어가." "어? 어, 그래." 오전 10시. 나견은 가방을 챙겨 현관문을 나갔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인사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띠릭, 하고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요즘 따라 견이가 늦게 들어오네. 견이 오후 수업은 늦어봤자 5시에 끝날 텐데.' 우리는 같은 대학을 다녔고, 시간표도 공유하
그것은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었다. 견습 기사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 훈련을 끝내고 땀과 먼지를 씻어내고 있었다. 드물게 목욕 시설이 갖추어진 이곳은 어느 버려진 저택으로, 오래도록 사용되지 않아 이제는 견습 기사의 훈련장으로 쓰이게 되었다. 실외의 넓은 정원 터는 마음껏 날뛰기에 좋았고 실내는 다수의 인원이 식사, 목욕, 수면을 취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빨리 온다고 온 거였는데." "충분히 일찍 오셨어요." 카멜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인간과의 대화가 낯설지는 않았으나, 나견과는 특별한 인연이었기에 쉽게 말을 고를 수 없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읽어낸 나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찾아오셨네요." "용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지." "하긴 그렇겠군요." 카멜시아는 힘
1. 비밀 "몸 상태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담청색 기린은 작게 한숨 쉰다. "그런데 전 왜 누워있는 건가요?" "그건......네가 어제 갑자기 쓰러졌다." "제가요?" "그래. 아마 몸이 피로했던 거겠지. 그러니 오늘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말고 그냥 쉬어." "...감사합니다." "아, 차를 끓였는데. 가지고 오지." 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은 맑다. 요 며칠간 비가 내려서 어서 그치길 바랬는데, 막상 그치니 너무 습했다. 약간 긴 머리가 옆얼굴에 닿을 때마다 거슬렸지만, 자르려니 아까워서 관뒀다. 마을 애들이 자꾸 시비를 걸고 때린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신경쓰지 말자. 별로 싸울 마음이 들지도 않고, 이길만한 힘도 없었다. 그 애를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대꾸하지
덜컹거리는 마차가 둘레길을 달린다. 나견은 작게 난 차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둘레길의 양옆에는 맑은 하늘 아래 노란 들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옆에 앉은 지우스는 잠들지 않고 눈만 붙이고 있다가 몰래 나견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장시간 좁은 마차에 앉아있느라 불편할 법도 한데 나견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원래 좀처럼 불평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이
"진아, 너는 왜 기사가 되고 싶은 거야?" 나견이 나진에게 물었다. 나진은 가만히 천장을 응시하다 운을 띄웠다. "...멋있잖아. 지킬 수 있는 강한 힘이 있다는 게." "명예에 죽고 사는 기사가 되려면 네 말투랑 태도부터 교정해야겠는데." "뭣." 나견이 키득거렸다. 나견은 나진에게 짓궂은 농담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물론 이번 건 농담 반 진담 반이
요즘 따라 나견이 유난히 마음에 걸린다. 하도 단독행동을 많이 해서 그러느냐 하면, 부정하진 않겠다. 시작은 며칠 전의 임무에서 복귀한 후부터였다. 며칠 전의 임무란, 동서쪽의 마을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일이었다. 사건을 일으킨 조직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첩보가 있어 기사를 파견한 것이었다. 이런 일에 보통 기사급을 보내는 경우는 없지만
*움짤 트레틀 사용
저 칙칙한 모자에 풀빛 머리카락. 아주 익숙한 윤곽이다. "어, 벌써 와 있었네." "별로 안 기다렸습니다." 커피를 두 손에 들고 기다리던 시간은 길었는지 짧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네자 자연스럽게 받는 투박한 손이 더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을 그리 열심히 하는지 곳곳에 굳은 살이 보인다. "그럼 갈까." "네." 이
요즘따라 악몽을 자주 꾼다. 아무리 자주 꿔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집에 나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가 하면, 언제는 얼굴을 반쯤 그을려진 나진이 나에게 정말 복수할 생각이 있긴 한거냐며 질책하고 저주했다. 나는 그래 마땅했다. 아직 이 손으로 내 숨통을 끊지 않은 이유는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복수. 그것 하나뿐이다. 이번 꿈에도 나
"이번 달 분은 여기 있다." 책 세 권이 눈앞에 내밀어졌다. 소설책 두 권과 여행 수기 한 권이다. 살짝 헤진 책의 모서리가 다른 사람들이 여럿 빌렸음을 짐작하게 했다. 나견은 익숙하다는 듯 양손으로 책들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 책 보따리를 친히 가져다준 건 기사, 담청색 기린 지우스다. 큰 사건들이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아직 한창 바쁠 텐데. 그
"나진, 여기 앉아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니 마르샤가 바로 옆에 우뚝 서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지만 기대고 있던 나무의 녹음 덕에 눈부시지 않았다. "무슨 할 얘기라도 있어?" "아, 뭐, 음..." 모처럼의 휴식 시간이라서 혼자 있고 싶었다. 다른 애들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서 숨 좀 돌리나 했는데. 말동무라도 필요했던
불덩이처럼 뜨겁고도 새빨간 모래가 뱃속에서 역류한다. 흐트러졌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모래는 화약이 되어 머릿속을 달구고 헤집어놓는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 그것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저 남자의 모든 것을 부순다. 그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런 나를 보고 그가 넌지시 제안해온다. 우리는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아도 된다. 네 소원대로 죽어주겠다
삶의 아주 오랜, 어떤 것이 먼저인지도 모를 기억들. 그 뿌리부터 우린 언제나 함께였다. 둘이서 손을 맞잡고 어디든 갔고, 무엇이든 함께 했다. 배고프면 산에 올라 식물의 뿌리를 캐 먹다가 물가를 찾아 목을 축였다. 날이 추워지면 땔감을 찾아 불을 피웠고, 심심하면 나무 사이를 쏘다니며 서로를 쫓아서 놀았다. 넓은 산중을 뛰놀면서도 가는 발걸음이 같아 마
*아래는 쓰면서 들은 음악 링크 https://youtu.be/AsKETdR9UZ4?si=3g5waLqj52fwRk1X 나견은 지금 동대륙의 한 작은 마을에 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벚꽃나무가 만개하여 절경이었다. 밤이 어둑해졌지만 마을은 조명 축제가 한창이었다. 동대륙 풍의 등 안에 촛불을 키면 그 빛이 주변을 밝히며 아른거렸다
나견이 죽었다. 나진이 견습 기사가 되어 떠난 날, 나견은 마을 사람의 손에 죽었다. 모험가를 꿈꾸던 그가 짐을 모두 챙기고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을 열었을 때, 평소 쌍둥이에게 불만이 많던 덩치 큰 사내가 그를 덮쳤고, 나견은 저항할 틈도 없이 당하고 말았다. 타인에게 쌀쌀맞게 구는 주제에 특출나게 강한 동생과 화재 사건의 범인인 형. 특히 나진에게 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