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샤Aronsha

웃지 못할 농담

오래 살겠다고 다짐했다.

Garden by 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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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데론이 언젠가 술을 내주면서 말했다. 차라리 한번 시원하게 울어버리고 털지 그러나. 이러고 있는 걸 보니 내가 다 속상하다네.

눈물을…흘린 것이 마지막으로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우는 모습을 보이면 안 돼, 아니, 넌 울 자격도 없어. 지금까지 널 영웅으로 남겨두기 위해 몇 명이나 죽었는데 이제 와서 우는 소리를 하다니 뻔뻔한 데에도 정도가 있어…. 그래서 우는 대신 주정뱅이 행세를 하는 것이다. 매일, 머리 끝까지 취해서 잠들어버리거나 적어도 맑은 정신이 아니려고 했다. 깨어버리면 늘 머릿속이 가장 괴로운 순간으로 끌려가니까. 그렇다고 어디서 소식 없이 죽어버릴 배짱도 없었다. 다 그만뒀다지만, 사실 아샤 그레이는 정말 다 그만둘만큼 대담하지도 않으니까.

—누군가 맞은편에 앉는다. 힘든 의뢰를 끝내고, 시끌시끌하게 축하하는 모험가 파티와 동떨어진 구석 자리까지 와서…누구지.

“왜 구석에서 혼자 마시고 있어?”

아, 그 밀밭 같은 머리카락의……이 사람, 지난번에 나랑 싸웠잖아? 날 싫어하지 않던가. 그냥 내버려두면 될 텐데. 뭐 하러 노력해. 나 같은 것에게 네 호의를 소모하지 말지……. 아샤 그레이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아론 리즈는 테이블에 팔을 척 걸쳐놓고 술을 몇 병씩 같이 비워 줬다. 다음번이나 그 다음번에도 같은 식이었다. 뭐, 그게 사실 그렇게 좋기만 한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맘때 의뢰를 함께 다니던 모험가들 사이에선 대표격인 인물이니 분위기를 중재할 필요가 있었을 테지. 그땐 그런 사이였으니까. 그래도…그는 맞은편에 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여기다. 자의로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아샤와 오랜 시간 함께 다녔다. 전투에서의 합을 맞추는 것 이상으로 서로가 어떤 인간인지 알 만큼. 못마땅한 파티원에서 신뢰하는 동료가, 그리고 그 이상이 될 때까지. 빛을 토한 밤 제일 먼저 달려와서 저를 안아들고, 그만두라는 말을 해 준다. 그리고…….

그러면 이건…….

날 좋아한다는 게 되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 오래 기다리는 성격 아니야. 아무리 쑥맥에 바보여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샤도 안다. 두근거리는 제 심장이 뭘 원하는지도 안다. 그래서, 물었을 때 돌아올 말이 두려웠다. 정확히는 그 말에 자신이 제대로 답하지 못할 것이 두려웠다. 난 그냥 모험가보다도 훨씬 위험한 일을 하고 기상천외한 이유로 죽을 위기에 처해. 무슨 일이 생기면 갑자기 또 어디로 떠나선 한참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데 어떻게 감히 너에게 솔직하게 고백하겠어? 그래서 입을 못 열었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서도 고집스럽게 아닌 척 하려고 했다.

…오래 된 종말의 환영이 하늘을 덮은 날 아샤는 그에게 위험해. 유성우를 보지 마. 그 목소리를 듣지 마. 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것이었다.

유성우가 내린 뒤, 저희도 어둠의 전사님처럼 세계를 구하는 여행을 떠날 겁니다! 라며 위병단의 청년이, 공방에서 쇠를 두드리던 장인이, 약초를 캐던 연구자가 빛나는 눈으로 크리스타리움을 나섰다. 떠났다. 가 버렸다. 그들은 다치고 죽을 것이다. 대부분 영영 돌아오지 못하겠지.

너도 가버릴 거야?

안 가면 안돼?

가지 마, 아론.

너까지 가 버리면 난……,

난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우는 법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한번 참지 못하고 나니 강둑을 무너뜨린 것처럼 자꾸 눈물이 나왔다. 손바닥으로, 소맷단으로 닦아내도 자꾸자꾸.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닌데. 이렇게 멋없이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데 정말이지,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어, 아론. 이젠 솔직하게 고하는 것 말고는 너를 붙잡을만한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 어떡하지. 못났다고 생각할까? 매번 이렇게 나쁜 일만 먼저 생각하고 최악의 가능성을 늘어놓고, 질린다고 느끼지 않을까?

“—늙어서 죽을까봐 사랑한다는 말 못한다는 거랑 뭐가 달라 이게?”

그런데 너는 웃어줬다. 평소처럼. 게다가 엄청, 꿈같은 말을 하면서. 혼자 두지 않을 거라고, 좋아한다고.

그래서 아샤는 그만, 어느 밤처럼 얼굴이 붉어져서는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방금 전까지의 수많은 불안과 걱정을 말끔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다음에 아론이 웃을 수 없는 농담을 하는 바람에 다시 입을 꾹 다물게 됐지만.

미안해, 내가 미안…아니, 왜 이래 진짜.

…….

울지 마, 형.

…….

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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