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 두 마음

AU 같은 배우의 타 필모와 마주한 드림주

빛과 어둠 by 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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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칼국수 먹으러.”

재하는 이곳에 와서 만난 또래였다. 물론 또래라기엔 나보다 대여섯쯤 더 먹은 것 같았지만 형이라 부르라는 말이 없기에 그냥 서로 편하게 부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두일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열 살 많은 두일은 가끔 불편한 티를 내기도 했지만 호칭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으니까. 여기 와서 만나게 된 거다. 호칭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제게 친절한 사람 그리고… 두일과 닮은 사람. 덕분에 이곳에서 조금 더 수월하게 적응하고 있었다.

재하는 담백하고 털털한 사람이었는데, 무심한 척을 잘했다. 그러면서 마을의 누가 무엇이 필요한지 바로바로 눈치채고 알려주거나 가져다주거나 고쳐주거나…… 아무튼 굉장히 선한 사람이었다. 마을에 함께 나고 자란 소꿉친구도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들과는 제 낯가리는 성격 탓에 친해지기 어려웠지만. 두일과는 결이 다른 사람인데도 이따금 닮은 모습이 보였다. 무표정을 하고 저를 바라볼 때나 커다란 듯 느껴지는 뒷모습 같은 것들이 특히나. 그래서 가끔 재하와 술을 마시고 취해서 누우면 두일의 생각이 나 소리 죽여 울기도 했다. 그날 목포에서 그리 뛰쳐나왔던 것이 미안했다. 다 먹는 모습까지는 보고 나올 것을, 그런 생각도 했다. 그리워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두일의 그림자가 제게 너무 짙게 드리워 있었다. 두일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이버릇도 여전히 고치질 못한다. 아무튼 그런 것들을 제외하면 재하와 두일은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연고는 없고 일은 고된 시골 살이가 재하 덕분에 견딜만했다. 재하는 제가 가슴 속에 품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따금 제가 먼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물어보며 화제를 돌려주는 것을 보면. 그러나 그 질문에 결국 대답해 주지 못했다. 말하면 재하에게 쏟아내듯 이야기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세상에 두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두일에게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너를 보면 다른 사람이 생각난다는 말을 하는 것은 크나큰 실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먹을 만했어? 거기 저 아래 감나무 집 아주머니가 하는 곳인데.”

“응, 맛있더라. 육수가 진해서 좋았어.”

칼국수를 먹고 돌아오는 길, 소주 한잔하자는 말에 둘이서 반병정도를 마시고 차는 식당 옆 주차장에 그대로 둔 채 걸어왔다. 여기 와선 부쩍 술이 늘었다. 많이 마시는 건 아니지만 자주 마시는 편이긴 했다. 술을 마시면 두일이 피우던 담배 생각도 났다. 그러나 결국 사서 피워보진 않았다. 왜인지 조금 엄한 얼굴로 안된다고 말할 두일의 모습이 상상이 돼서 그랬다. 봄이 오는지, 날이 제법 따뜻해진 게 느껴졌다. 공기도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봄에는 벚꽃을 같이 보러 가자고 약속했었는데. 못 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하의 입에서도 벚꽃 얘기가 나온다. 곧 꽃이 피겠다, 그땐 도시락이나 싸서 꽃구경을 가는 게 어떻겠느냐 같은. 두일과 했던 약속과 너무나 비슷한 약속. 차마 같이 가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아 조만간 벼 심을 때가 되지 않았냐는 말로 화제를 돌린다. 재하가 우뚝, 걷다 말고 멈춰 선다. 저도 함께 따라 멈춰 섰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생각하는 그 사람이랑 벚꽃 보자고 약속했었어?”

…… 처음으로 단도직입적인 문장이 제 귓가에 웅웅댄다. 재하의 마음을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하는 행동이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이 두일에게 보이던 행동과 유사했으니까. 원래 짝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짝사랑을 제일 먼저 눈치채기 마련이다.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 사람이랑 보기로 했어서, 올해는 못 볼 거 같아.’ 거절을 한다면 확실하게 하는 게 맞았다. 아직, 두일이 제 마음에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으나 속도는 아주 더디었다. 언제 다 지워질지 알 수 없을 만큼. 그러니 재하의 진심을 가지고 장난쳐서는 안 됐다. 재하는 별말 없이 묵묵하게 자신을 집에 데려다주고 더 이상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을 멍들게 만드는 스스로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이상 여지를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두일의 행동도 이해가 됐다.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던 행동들이. …… 모든 생각이 두일로 귀결된다. 보고 싶어. 네 밤은 무사해? 묻고 싶은 것들이 아주 많았다.

몇 주쯤 지났을까, 아저씨가 일 때문에 나무를 타시다 크게 다치셨다. 옆에서 돕던 내가 놀라 당장 아저씨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려가고 있으니 차 한 대가 빵빵거리고는 옆에 선다. 아, 재하다. 얼른 타라며 재촉하는 것을 마다 않고 아저씨를 조수석에 모셔두고 자신은 트럭의 뒤에 올랐다. 한참을 달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재하는 자신이 아저씨를 들쳐업고 간호사를 찾아간다. 아저씨가 치료받고 깨어나길 기다리는 동안 여전히 친절한 재하를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감정의 크기를 덜어내지 못한 게 보여서. 따뜻한 음료를 받아 들고, 고맙다고 인사한다.

“나 아니었음 병원까지 달릴 작정이었어?”

“아마도. 고마워, 도와줘서.”

“다음에 칼국수 한 그릇 사.”

피식, 알았다며 웃고는 보호자를 찾는 소리에 달려가 의사에게 큰 문제는 없지만 정밀검사는 받아보는 게 좋을 거라며 소견서를 써줄 테니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다음날 바로 채비하고 떠나려는 것을 재하가 따라가겠다며 성화였지만 돌아와서 칼국수 사겠다는 말로 거절하곤 길을 나섰다. 서울, 네가 있는 곳. 우연히라도 만나게 될까?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약간의 기대를 품게 했다. 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재하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이 마음이 다 정리될 때까지는 아마 같은 마음으로 응할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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