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대화

1) 식탁만큼은 빛이 드는 구역

빛과 어둠 by 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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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소불고기와 메추리알 조림

Sub, 아욱국

한동안 방문이 뜸하던 두일이 오랜만에, 그것도 환한 대낮에 찾아왔다. 두일은 기약을 정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이기에 두일이 나타나기 전까지 휑하던 민준의 냉장고는 요근래 언제나 두일을 대접할 수 있도록 가득 차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온 두일과 마주친 덕분에 민준은 아주 신이 난 상태로 장 본 것들 사이에서 당장 쓸 재료들을 꺼내놓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중이었다. 두일은 그런 민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매번 느끼지만 제 발걸음 하나에 저리 신나 하는 사람은 민준이 유일할 거라고 생각했다. 금세 냉장고 정리를 마친 민준은 옷도 안 갈아입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먼저 메추리알부터 삶아야겠다는 생각에 물을 올리고, 끓기를 기다렸다가 아직 날 것인 메추리알과 굵은소금을 약간 넣는다. 이제 메추리알이 삶아지길 기다리면 된다. 보글보글 끓는 물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메추리알을 보고 있자니 꼭 두일을 보고 있을 때의 제 마음 같기도 했다. 들떴다가도 푹 꺼지고, 언제나 요동치는...... 생각이 길어진다. 고개를 휘휘 젓는다. 오늘 본 장에서 소불고기용 목심살과 제육볶음용 삼겹살을 끊어 온 민준은 고민도 않고 삼겹살을 고이 신선실에 넣어둔 터였다. 두일에게는 언제나 더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게 민준의 마음이었다. 물론 고기를 먹으면 형들에게는 늘 좋은 부위, 맛있는 부위가 갔고 맛이 덜한 부위를 받아먹던 자신의 옛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그러는 면도 있었다. 소불고기용 양념부터 만든다. 간장, 후추, 설탕, 물엿, 매실액, 참기름까지 각종 양념을 넣고 핏물을 빼 손질한 고기를 재운다. 그 상태로 냉장고로 직행. 다음은 소불고기에 들어갈 야채를 손질한다. 양파, 당근, 팽이버섯, 양배추 등을 깨끗한 물에 씻어 척척 썰어나간다. 그러는 사이 다 삶아진 메추리알을 찬물에 씻어 그대로 두일에게 빈 그릇과 함께 건넨다.

"두일아, 이거 좀 까줘."

"뭘 허길래 이렇게 분주허냐."

"별거 없어. 이것만 좀 부탁해."

아무것도 아닌 척 미소 지어 보이고는 아욱을 손질한다. 아욱국은 간단하다. 억센 줄기를 잘라내고 초록색 진물이 나올 때까지 굵은소금으로 아욱을 손질한 후 된장을 풀어 끓이기만 하면 된다. 아까 냉장고 정리를 마친 후 밥 먼저 안치며 받아둔 쌀뜨물을 냄비에 붓고 끓이는 동안 아욱을 손질해 물기를 뺀다. 이 과정은 제법 스트레스가 풀리는 과정이다. 손빨래를 하듯 아욱을 신나게 손질하고 나면 어느새 끓기 시작한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물기를 뺀 아욱을 넣는다. 또다시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재워놓은 고기를 꺼내 달궈진 프라이팬에 손질한 야채와 함께 올린다. 지글지글 익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리면 두일이 와 뽀얗게 깐 메추리알을 건넨다. 그러면 웃으며 집게를 두일에게 넘겨두고 잘 뒤집어 주라고 말하면 된다. 군말 없이 받아 드는 게 조금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이런 생각은 혼자만의 것이었지만. 메추리알을 한 번 더 씻어 껍질을 완전히 제거한 후에 간장, 물, 설탕을 넣은 냄비에 넣고 뽈뽈 끓여주기만 하면 된다. 아욱국에 된장을 풀고, 조금 더 끓이다 간을 보고 싱겁다 싶으면 간장을 살짝 푼 뒤 마지막으로 끓이는 동안 두일이 열심히 뒤집던 소불고기가 양념이 적당히 배어 완성된다. 그 프라이팬은 그대로 빼 냄비 받침 위에 올려놓고, 메추리알을 삶는다. 집안에 고소한 냄새와 적당한 습기가 가득 차는 기분이 오랜만이라 민준은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마무리를 짓는 동안 다 된 밥을 확인하고 주걱으로 뒤적인 뒤 두일에게 상을 펴고 수저를 놓으라고 한다. 밥그릇에 예쁘게 밥을 담아 상위에 올려두고 이미 완성된 소불고기 먼저 접시에 보기 좋게 덜어낸 뒤 다 끓은 국과 갈색빛으로 예쁘게 물든 메추리알 조림을 각각에 맞는 그릇에 덜어 상에 낸다. 미리 해뒀던 다른 반찬들, 김치와 시금치나물을 약간 덜어 함께 내면 제법 풍성한 식탁이 된다. 그렇게 마주 보고 앉으면, 오늘의 식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일상적인 대화가 오간다. 학교에서 과제를 너무 많이 내준다며 우는소리도 해본다. 그러면 언제나 그렇듯 두일이 민준을 잘 달래주고, 민준은 오지 않았던 동안에도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녔는지 묻는 것이 두 사람의 일상이었다. 이 식사가 끝날 때엔 또 빛이 옅어질 두 사람일지도 모르겠으나 이 밥상 앞에서만큼은 일상을 사는 것이다. 이 규칙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암묵적인 약속인 셈이었다. 맛있다던가, 그런 말은 없었지만 잘 먹는 것으로 두일은 인사를 대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일이 먹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민준도 식사를 이어간다.

만드는 데엔 늘 긴 시간이 필요한데 먹는 데엔 늘 짧은 시간이면 된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자연스레 두일과 함께 치우고, 개수대 앞에 서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는 두일을 바라본다. 이런 모습도 다른 사람은 절대로 볼일이 없겠지, 생각이 들어 늘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다 두일이 돌아볼 즈음 고개를 돌려 TV에만 관심 있는 척 군다. 그러면 두일은 갸웃거리며 설거지를 마저 하고 자신은 끝날 때까지 흐뭇하게 바라보면 되었다. 이번주엔 며칠 더 머물다 갈 것이라고 했다. 내일은 또 두일에게 무엇을 해줄까, 민준의 즐거운 고민이 막 시작되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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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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