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대화
2) 가끔은 어둠이 빛의 역할을 하기도
Main. 소고기미역죽, 검은깨죽
sub. 홍시
한동안은 일없이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이런 일상의 장점은 내가 평소에는 누리지 못할 희귀한 것이지만, 반대로 단점 또한 명확하다. 이 꿈같은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지는 것. 그래도 첫눈이 온다고 즐거워하는 너를 보니 아주 조금만 더 안주해보기로 한다. 두껍게 입으라고 말해도 말 안 듣고 얇은 점퍼 하나만 걸치고 나온 네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잠깐 보다 들어갈 테니 상관없겠지. 신나서 움직이는 입술이 애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릴 때 기억을 이야기하며 들뜬 네게 맞장구를 쳐주며 제 추억도 이야기해본다. 그렇게 있으니 시간은 순식간에 흐르고, 이제는 추운 듯 덜덜 떨며 들어가자고 말하는 너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온다. 두 명분의 찬공기가 집안을 감싸고 도는 듯하다. 얼른 간단하게 씻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금방 나른해져 졸음이 밀려든다. 옆에 누운 너도 마찬가지인지, 벌써 고른 숨소리가 들리기에 그 숨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눈을 감아본다.
*
아침은 언제나 순식간에 찾아온다. 두껍지 않은 커튼 사이로 드는 빛에 눈을 뜨면 며칠간 머물며 익숙해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옆에 잠든 너를 깨우려 손을 뻗으니 제법 열감이 느껴져서, 네 이마에 손을 올려 온도를 확인한다. 제법 뜨겁다. 아무래도 몸살이구나 싶어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러니 어제 나갈 때 옷을 제대로 챙겨 입었으면 좋으련만. 안 그래도 감기기운이 있는 듯 기침을 자꾸 하더니. 일단 약을 먼저 찾아봐야겠다 싶어 찾아보지만 웬일로 약도 상비되어 있지 않다. 평소같으면 떨어지기 전에 미리 사다뒀을 텐데. 결국 임시방편으로 차가운 물에 수건을 적셔 네 머리에 먼저 올려준 뒤,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선다. 근처 약국에서 감기약과 다 쓴 상비약 몇 가지를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문을 연 죽집이 보여 소고기 미역죽을 하나 포장하고, 슈퍼에 제철이라고 들어온 홍시도 몇 개 사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 가까이 다가가 깨우려 하니 네가 ‘두일아……’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플 때 찾는 사람이 나라니. 너도 참. 묘한 얼굴로 너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흔들어 깨운다.
“아야, 일어나봐라. 죽이랑 약 사왔응께 먹고 자라.”
정신을 못 차리는가 싶던 네가 겨우 정신이 든듯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면 상을 가져와 네 앞에 펴고 사온 소고기 미역죽을 꺼내 덜어낸 그릇과 수저를 네게 건넨다. 아직 뜨끈한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죽에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난다. ‘좀 먹어라. 먹어야 약도 먹지 않겄냐.’ 내 말에 겨우 한 술 뜨기 시작하는 널 가만히 지켜보다 제 몫으로 사온 검은깨죽도 한 술 뜬다. 고소하면서 달짝지근한 맛이 꽤 나쁘지 않다. 종종 아플 때가 많은 너이니, 오늘 사온 죽집을 자주 드나들게 되겠구나 생각하며 평소보다 조용히 식사를 이어간다. 몇 술 못 뜨고 내려놓은 네가 누우려 하기에 약은 먹고 자라며 먹다말고 일어나 감기약과 해열제를 챙겨먹인다. 쓰다며 인상을 찌푸리는 네게 홍시는 먹을 수 있겠냐 묻자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껍질을 까 접시를 받쳐 숟가락과 함께 쥐어준다. 죽을 먹던 것과 달리 홍시는 제법 잘 먹는다. 사오길 잘했네. 비틀거리는가 싶다가도 중심을 잡는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도 마저 식사를 하고, 네가 다 먹고 옆으로 밀어둔 홍시 그릇과 함께 뒷정리를 한 후 약기운에 다시 잠든 너를 지켜본다. 역시, 눈을 감고 있으나 뜨고 있으나 다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불을 고쳐 덮어준 뒤 방의 온도를 조금 더 올린다. 자고 일어나면 제법 괜찮아져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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