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IF 조금 더 어릴 때 두 사람이 마주쳤더라면?

빛과 어둠 by 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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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보단 가을에 가까워진 날씨,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하교할 시간이 되어서도 내리고 있어 살짝 마른 우산을 펴 진흙밭인 운동장을 조심스레 헤치고 걸어갔다. 오늘은 야간자율학습도 없었고, 애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미 하교한 상태라 고요한 교정을 걷고 있으니 으슬으슬 춥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날엔 기사님이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을 괜히 거절했나 후회도 들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물웅덩이를 피해 가며 조심스레 운동장을 벗어난 내가 정문을 나와 학교 앞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옆에 선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검은 구두, 검은 정장 위로 흐르는 피. 비틀거리는 몸. 놀라 그대로 굳어버려 우산으로 얼굴을 감추고 어떡하지, 생각한다. 꽤 많은 피가 흐르는 거 같은데, 비를 온몸으로 맞고 있다. 주변엔 아무도 없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럼, 자신이 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우산을 씌워준다.

“그렇게… 아니지, 아무튼 비 맞으면 감기 걸려요. 어디로 가셔야 돼요? 거기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우산으로 가리면 덜 보이니까 제법 유용하실 거예요.”

남자는 병원 이름을 댄다. 다행히 이 근처에 있는 병원이라 거기까지라면 데려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 병원 꽤 수상한 소문이 도는 병원이던데. 귀신이 출몰한다던가, 팔에 문신을 두른 남자들이 드나든다든가 하는 소문 말이다. 이 남자의 정체가 뭘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입으로 내뱉진 않는다. 고개를 숙여 살핀 남자의 눈은 정신을 붙잡고 있는 듯 보이긴 했지만 그닥 좋지는 않은 상태로 보여서 제 어깨에 남자의 팔을 걸쳐 우산을 남자의 손에 쥐여준 뒤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자가 부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만 잘 버텨주기를 바라며. 사실 우산만 쥐어주고 보낼 수도 있었지만 다친 사람을 모른 척 지나친다는 게 제 양심에 찔려 돕고자 한 것이었다. 오늘따라 길에 사람도 없다. 하긴, 이렇게 비가 쏟아지니 없을 만도 했다. 어느새 제 옷이며 가방도 다 젖은 게 느껴졌다. 오늘 마침 체육복을 제외하고 가방 안 내용물을 사물함에 모두 비우고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골목으로 들어선다.

이따금 지나가던 아주머니들과 눈이 마주치면 혹여나 싶어 교복 마크와 명찰을 가려가며 이제는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인 남자를 겨우 힘을 주어 일으켰다. 이따금 말을 걸기도 했다.

“저기요, 기절하시면 안 돼요. 저 진짜 무서우니까, 정신 바로 차리셔야 돼요.”

남자의 얼굴을 겨우 확인해 가며 골목 사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원 문을 열려고 했으나 잠겨있는 듯 꿈쩍도 하지 않기에 똑똑, 문을 두드리며 제발 열어달라 읍소한다.

“여기, 사람이 죽어가거든요. 빨리요, 제발!”

다행히 제 읍소가 들렸는지 안에서 빼꼼 누군가가 고개를 내민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가리키자 아는 인물인지 남자를 끌고 들어가기 위해 여성 몇 명이 나와 남자를 데리고 들어가며 인사를 한다. 저도 따라 인사하고 닫힌 문 앞에 앉아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다 일어난다. 이미 우산이 필요 없을 만큼 다 젖은 것도 문제였지만 남자의 피 일부가 물들어 흰 교복이 붉은색이 된 것도 큰일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가방 속에서 다행히 많이 젖지 않은 체육복 집업을 꺼내입고 집으로 향한다. 교복 바지가 검은색이라 다행이었다. 옷은 지금 돌아가면 집에 아무도 없을 테니 2층 화장실에서 빨면 되겠지 생각하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스스로 부축해 일어나 집으로 향한다.

*

“저기요, 괜찮으세요? 저 보이세요?”

야작을 끝내고 돌아오니 웬 남자가 담벼락에 기대 쓰러져있다. 문신이 가득한 팔이며 흘리는 피의 양을 보니 영 심상찮은 사람인 것도 있었지만 이러다 죽겠다 싶어 일단 안으로 들이고자 남자를 일으켜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라 사람들 눈에 띠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는 사람을 본 것도 처음이었지만 붕대를 감는 것도 처음이었다. 심호흡을 깊게 뱉어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다. 사람은 피를 보면 흥분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당황, 초조, 불안 등 여러 감정이 뒤엉켜 생각을 만들어 내려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이내 이불을 펴고 남자를 벽에 기대도록 만든 뒤 덜덜 떨며 붕대를 감았지만 서툰 솜씨 탓에 자꾸 풀리기에 초조하게 한 번만, 한 번만을 연신 외쳐가며 붕대를 겨우 감아내는 데 성공한다. 남자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물수건으로 잘 닦아준 뒤 바깥에 묻은 피까지 지워내고 나서야 한숨을 돌린다.

남자는 고통스러운 건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식은땀을 흘린다. 수건으로 잘 닦아내고 이따금, 남자가 숨을 쉬나 코에 손을 가져다 대고 확인해보며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싶으면 병원으로 달려가려 밤새 옷도 갈아입지 않고 기다렸다. 남자가 무사히 깨어나기만을 민준은 바랐다. 이런 감정은 고등학생 때 만났던 그 검은정장의 남자를 본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때 병원으로 보냈으니 그남자는 살았겠지. 이남자는 제 그릇된 판단 때문에  그렇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하다 문득 이 남자의 검은정장이 익숙하다는 생각을 한다. 피에 젖은 정장을 매만져본다.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그날의 감각은 다시 떠올려도 아주 생생한 기억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런 정장은 어디서든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하며 애써 겹쳐보이려는 것을 무시한다.

유독 기나긴 새벽이 지나가고 다행히 남자는 무사히 깨어났다. 자신을 경계하는 듯 입조차 열지 않는 남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먹을만한 것 좀 사 오겠다고 한 뒤 피 묻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하고 나와 미음과 생수를 사 가지고 오니 남자는 언제 왔었냐는 듯 사라져 있어서 허망한 얼굴로 신발을 벗는다. 남자가 흘린 피에 잔뜩 젖은 이불만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밥은 좀 먹고 가지. 성치도 않은 몸으로 어딜 간다고. 말없이 떠난 남자가 미워져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사 온 미음은 자신이 먹는다.

맛이 없어. 

흰 미음에 간장을 풀어 봤자였다. 여전히 미음은 맛이 없었고, 민준도 혼자였다. 환자이긴 했어도 처음 집에 들인 손님이었는데. 물론 남자는 그런 사실 따위 알지도 못했겠지만, 민준은 서운했다. 어쩌면 사람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민준은 탁해진 미음을 모두 먹어 치웠다.

그게 두일과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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