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친애하는 나의 불량배에게
러브레터란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그 무엇보다도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고백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쯤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지금 막 신발장 안에서 꺼낸 편지를 손에 쥐고 있는 소년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러브레터는 꾸깃꾸깃 구겨져서 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게 정녕 러브레터이기는 한가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쓰레기통에서 막 꺼낸 것 같은 종이 뭉치로 보였다. 물론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소년 자신이었다. 안경을 가볍게 추켜세우곤 제 손안에 있던 종이 뭉치를 가볍게 가방 속으로 집어넣은 소년은 망설임 없이 학교 밖으로 나왔다. 그가 갈 곳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 편지에 적혀 있던 장소였다.
러브레터의 수신인, 키사키 텟타는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의 인생을 통틀어 봐도 이렇게까지 이성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제가 그리는 미래 계획안에서 그런 일들은 시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별일도 아니었고, 이러한 변수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는데도 가볍게 무시하고 넘기기에는 지독하게 끈질겼다. 편지는 이미 원래 형태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나, 내용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방과 후, 체육 창고 뒤쪽으로 나와달라는 이야기.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고백 장소로 고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매번 불려 나간 그곳은 그 시간대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홈룸이 끝나면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기에 굳이 들를 일은 없는 곳이라는 이야기다. 몇 번을 그곳에 불려 나갔는지 이제는 편지 봉투를 열어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대로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로 나가보면 그곳에는 늘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색 반다나를 리본으로 묶어 장식한, 갈색 머리 숏컷을 한 소녀가 말이다.
금발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키사키 텟타의 모습은 멀리서도 눈에 띄기도 했고, 이 시간에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그 말고는 없기도 해서 러브레터를 보낸 소녀는 키사키 텟타의 모습을 보자마자 얼굴 가득 미소를 띤 반가움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순정 만화 같은 장르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서브 캐릭터가 나타나 여자 주인공과 친한 모습을 보고 질투하게 된 남자 주인공이 제 마음을 깨달아서 여주인공과 이어지는 전개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제법 인기 있는 소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고, 단순하지도 않으며, 애석하게도 이 이야기 역시 그런 이야기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지겹지도 않나, 아리스가와.”
“그래도 나와줬잖아요..”
“나오지 않았으면….”
“그야, 당연히… 키사키 군의 반에 찾아가서 고백하려고 했죠!”
“…….”
그의 첫 번째 고백은 장난인 줄 알았다. 벌칙 게임이라든가 아니면 저를 깔보기에 저지른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때는 봄, 활짝 피던 벚꽃이 지고 새 학기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이고 태닝을 해서 피부를 까맣게 태우고 누가 봐도 불량배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꾸며낸 소년, 키사키 텟타는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불량배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것을 의도하고서 꾸며낸 모습이지만, 모범생, 전교 1등, 수석 입학의 타이틀은 키사키 텟타의 행보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키사키에게 주의를 준다거나 질책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엇나간 학생을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 못한 탓이다.
그럴 바엔 더 나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가치가 있는 학생에게 관심을 쏟는 게 낫다고 생각할 터였다.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키사키 텟타는 전교 1등의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없었고, 이는 학교에서 그의 행보를 묵인해 주는 면죄부가 되었다. 바라든 바라지 않았든 말이다. 자연히 학생들은 그를 피하게 되고 반에서는 그와 어울려 다니려 하는 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보통 그렇게 되면 ‘왕따’라고 보는 게 당연하겠지만 키사키 텟타에게는 아니었다.
따돌림은 ‘왕따’의 기본 조건이었으나, 그는 애초에 학교에서 교우관계를 넓힐 생각도 없었으며, 그들과 어울려 다닐 마음 역시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붕 뜬다 한들 신경 쓸 리 만무했다. 그로서는 오히려 딱 좋은 일이었다. 덕분에 그들 가운데에서도 같이 폭주족 무리에 가담하는 이들만이 그의 옆에 모여들었다.
복도를 지나는 키사키 텟타와 그의 무리를 보며 수군거리는 학생들은 제멋대로 만들어진 망상으로 그를 평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아홉은 근거 없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불량배란 본디 그런 것이었으므로. 그런 양아치 같은 놈에게 러브레터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소녀는 그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고 밖에 할 수가 없었다.
키사키 텟타가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인기가 있어 보이는 유형과는 거리가 멀다고 봐야 할 터이다. 모두가 꺼리는 불량배이기도 했고, 특출나게 눈에 띌만한 외모도 아니었으니 딱히 인기가 있을 만한 요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같은 불량배여도 여자애들한테만큼은 사근사근하게 군다거나 문제가 있어도 눈감아줄 만한 외모라도 있다면 또 모를까. 그에게는 연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그에게도 바라지 않던 봄이 찾아왔다.
키사키 텟타에게 쓰인 러브레터는 그의 신발장 안에 들어있었다. 러브레터를 마주하고 그는 꽤 당혹스러워 보였다. 정체 모를 편지가 신발장 안에 들어있다고 하면 열에 다섯은 그런 반응일지도 모른다. 편지 봉투에는 ‘키사키 텟타 군에게’라는 말만 적혀 있었다. 작고 귀여운 스티커로 봉인된 편지는 뜯어보기조차 아까울 정도였으나 그에게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편지 봉투를 북, 소리가 나게 찢어서 내용물을 보니 그의 미간은 순식간에 좁혀졌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키사키 군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방과 후에 체육 창고 뒤쪽으로 나와달라는 이야기였다. 아까 그 체육 창고의 뒤쪽 말이다.
순순히 편지에 따라줘야 할 필요도 없었지만, 키사키 텟타는 그날 인생 최대의 실수를 해 버리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이 장단에 맞춰봐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별 볼 일 없는 녀석의 시시한 장난이겠지만, 한 번쯤은 상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내린 그 결정은 거대한 골칫덩어리라는 결과로 돌아오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처음 마주했던 그날과 같이 머리에는 붉은 리본 장식을 달고 단정한 교복 차림에 로퍼를 신고 스쿨백을 두 손으로 쥐고 있는 모습이 누가 봐도 평범해 보이는 여학생. 그는 키사키 텟타에게 몇 번이고 고백하고 차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시 서두로 돌아와서,
“키사키 군, 좋아해요. 사귀어 주세요.”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고 있을 텐데.”
“그러면 제 대답도 잘 알고 있겠네요.”
“하아—.”
키사키 텟타의 한숨과는 반대로 소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아리스가와 소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몇 번이고 키사키 텟타에게 고백을 해 왔던 이 소녀는 포기하는 법을 몰랐다. 지치지도 않는지 4월의 봄부터 시작된 소녀의 고백은 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될 때까지 이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블레이저의 긴 소매가 반소매의 세라복으로 바뀌어도 그의 고백은 바뀌는 법이 없었다. 패턴이 항상 똑같았다. 신발장에 러브레터를 넣고 체육 창고 뒤쪽에서 키사키 텟타를 기다리면 어김없이 그가 나와주었기 때문이다. 불량배치고는 그 역시 이상하리만치 성실했다.
물론, 그도 나가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을 반복하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었고,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이 일어날 리도 없다고 여겼다. 그렇게 딱 한 번 소라의 편지를 무시하고 그대로 집에 돌아가고 난 다음 날, 소라는 교실 안에서 그것도 수업하기 직전 모두가 자리에 있을 그 시간에 공개적으로 고백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낯부끄러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대담함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수치를 모르는 사람만큼 무서운 게 없으리라. 이는 선전포고에 가까웠다. 고백을 거절하는 것과 무시하는 것 어느 쪽의 리스크가 큰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이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눈치챘을 테지만, 방과 후에는 늘 소라의 고백과 키사키의 거절이 반복되고 있었다.
고백은 매번 거절로 끝났지만, 그것을 계기로 키사키 텟타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소라는 하굣길도 그와 함께하곤 했다. 키사키 텟타가 아무리 떨어뜨려 놓으려고 해도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졸졸 뒤쫓아 오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 촌극을 계속할 셈이지.”
“키사키 군이 제 고백을 받아줄 때까지요!”
”평생 이 짓을 계속할 셈인가.“
”그 말은 평생 옆에 있어도 된다는 건가요?“
”그 말이 아니잖아.“
세상을 한없이 긍정적으로 보는지 천상이 긍정적인 사람인 탓인지 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자기 멋대로 좋은 쪽으로 해석해 버리는 소라에게 키사키 텟타는 두손 두발 다 들고 항복하기로 했다. 당해낼 재간이 없던 탓이다. 원래 바보를 상대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 법이다. 말이 통해야 상대가 될 텐데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입씨름을 해 봤자 제 쪽이 손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키사키 텟타였다.
불량배가 고작 이런 일로 휘둘려서는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지만, 여자를 상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꼴사나운 일은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키사키 텟타는 그러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런 일로 힘을 빼고 싶지 않기도 했고, 계속해서 부딪혀 오는 일방적인 호의가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는지, 그냥 내버려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그 때문에 파란 깃에 붉은 리본을 묶어 내린 세라복을 입은 소라는 늘 키사키 옆에 붙어 다녔고, 학교 안에서는 두 사람의 사이를 오해하는 사람들과 근거 없는 소문이 난무했다.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정정해 줄 만큼 친절하지 않은 키사키와 소문에는 영 관심이 없는 소라 덕분에 소문은 천천히 제 몸집을 불리는 중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러브레터는 신발장 안에 들어 있었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키사키 텟타의 발걸음은 당연하게 창고 뒤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그를 보자마자 활짝 웃는 얼굴로 기뻐하는 소라가 있었다. 제 앞에 키사키 텟타가 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라는 고개를 숙이며 예의 그 말, ‘좋아해요, 키사키 군. 저랑 사귀어 주세요!’를 외쳤다. 일과처럼 정해진 그 고백에 대한 그의 답은 늘 똑같았다. 말은 다르지만 ’싫다‘라는 의사 표현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내일도… 네?”
”착각하지 말고 잘 들어. 고백에 좋다고 한 게 아니야.“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란 것도 잠시 소라는 제가 바라던 ‘좋아’가 아니라는 말에 금세 풀이 죽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이렇게까지 알기 쉬운 사람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던 키사키 텟타가 한숨을 내쉬고 이어서 말했다.
“거절해도 계속해서 귀찮게 할 거라는 것은 잘 알았어.”
이는 이미 경험해 본 바 있는 그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아무리 떼어놓으려고 해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소라의 존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탓이다. 지금도 눈을 빛내며 저를 바라보는 시선마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키사키 텟타가 내건 조건은 단 하나.
“내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옆에 있어도 좋다는 이야기다.”
“물론이죠!”
소라는 대답 하나만큼은 아주 잘했다. 그의 말을 이해했는지조차 의문인 해맑기 그지없는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있던 투쟁심도 사그라들 정도였다. 키사키 텟타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바보를 상대로 그렇게 해 봤자 시간 낭비였고, 제게 중요한 일은 그게 아니었으므로.
“키사키 군이 저를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요.”
“뭐?”
“자신 있어요. 저한테 맡겨만 주세요!”
정말이지 성가신 녀석이 아닐 수가 없었다. 고백에 Yes도 No도 아닌 애매한 답을 내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건은 일어나고 말았다. 키사키 텟타가 조건을 내건 만큼 소라도 본인 나름대로 지키고자 했고, 그날 이후로 러브레터가 딱 끊겼다. 신발장 안에는 매번 들어 있던 편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렇다.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겠다고 마음대로 선전포고까지 한 소라는 점심시간만 되면 그의 교실로 찾아왔다. 같이 점심을 먹자며 멋대로 그를 이끌고 가서는 결국 단둘이서 나란히 식사하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키사키로서는 쉬는 시간을 방해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 *
“내가 말했을 텐데, 방해하지 말라고.”
“제, 제가 뭐, 뭘 했다고요.”
“키, 키사키 군이 옆에 있어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게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그렇지만….”
“학교 밖에서까지 아는 척해도 좋다고 한 적은 없었을 텐데.”
누가 봐도 험악해 보이는 남자들 사이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으면서도 제 옷깃을 잡고 놓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소라를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퇴양난에 빠진 키사키 텟타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쯤. 키사키, 네 이거냐. 라면서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물어보는 제 옆의 남자에게 그는 웃는 얼굴로 ‘그럴 리가요.’라고 대답하고 다시 얼굴을 굳혔다.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해 입맛을 다시던 남자들은 아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러냐, 하고 말았다.
키사키 텟타는 사람을 이용하는 데에는 도가 텄으며, 당연하게도 반대로 이용당해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상황은 꽤 난감한 편에 속했다. 딱히 그가 키사키 텟타에게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마치 제 약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도 불편했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읽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닌 모양인지, 잡힌 옷자락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러서야 하는 때를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는 아무래도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볼일이 생겨서.”
일행으로 보이던 같은 특공복을 입고 있던 남자들한테 키사키 텟타는 이만 가보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그가 ‘볼일’이라고 지칭한 당사자는 그저 멀뚱거리며 서 있다가 제 손이 붙잡히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그대로 그에게 이끌려서 같이 그 자리를 떠났다. 보폭에 큰 차이가 없는 탓에 소라는 끌려가면서도 질질 끌리는 모양새는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키사키 텟타가 갑자기 멈춰 서서 그의 등에 부딪혔다.
부딪혀 얼얼한 제 코를 문지르던 소라가 키사키 텟타를 바라보면, 그는 핸드폰을 열어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모양이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인지 소라의 귀에도 들리는 통화 연결음은 금방 끊기고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분간은 가지 않았지만, 상대가 남자라는 것만큼은 알 수가 있었다. 그러고 나서 전화를 끝낸 키사키 텟타는 소라를 데리고 근처의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드링크 바를 주문해 놓고 음료수를 가져온 소라는 메론 소다를 눈앞에 두고서도 마셔도 되는 건지 잠시 그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힐끔힐끔 한 번은 음료수, 한 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키사키 텟타가 인상을 쓴 채 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셔. 이런 거는 일일이 허락받지 않아도 되잖아.”
“그래도 돼요? 그럼, 사양하지 않고… 키사키 군은 뭐 마실래요?”
“나는 됐어.”
“그러지 말고, 커피는 어때요? 키사키 군하고 왠지 잘 어울리는 이미지?”
그러고 한참을 있으면, 패밀리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눈에 띄는 사람. 키가 큰 탓도 있지만 두 손에 새긴 죄와 벌이라는 문신은 눈에 안 띄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키사키 텟타가 통화를 끝낸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여유로운 모습으로 들어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그를 발견하자마자 테이블로 한걸음에 다가왔다.
“어라, 데이트 중?”
“그럴 리가.”
남자는 키사키 텟타와 소라를 몇 번을 번갈아 보더니 손가락으로 소라를 가리키며 물어보자, 그는 단칼에 아니라고 답했다.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남자에게 앉으라고 하자, 잠시 고민하더니 소라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동시에 두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왜 거기(여기)에 앉는 거지?’
“키사키가 여자애랑 있다니 신기하네~.”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마, 한마.”
자기소개도 없이 끼어든 남자 때문인지 아까부터 말이 없는 소라였다. 풀이 죽은 모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노려보는 눈빛은 적대감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초면인 사람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모습도 볼만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므로 키사키 텟타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너는 이 녀석의 감시역이다.“
”에~, 어째서?“
”왜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키사키 텟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입을 열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불만을 표한 쪽은 소라였다. 강력하게 제 의사를 주장하면서 말이다. 통성명도 하지 않아 ‘한마’가 이름인지 성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는 남자. 손등 가득 문신을 새겨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사람하고는 같이 있을 수 없다며 온갖 이유를 들먹이면서 반대하고 나섰다.
“키사키 군은 좋지만, 이 사람은 싫어요. 결사반대예요.”
“하아?”
“폭력도 반대예요!”
두 손을 크게 엑스자로 그려 보이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치는 소라의 한 마디가 7월의 시작을 알렸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