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잡는 이방인

원신 2차 창작

나를 구해 줬던 건 작은 소년이었어. 너네들이 그렇게 찬양하는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호기심에 마물들이 서식하는 숲으로 들어갔던 건 내 잘못이 맞아. 하지만 신에게는 신도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부모도 때로는 강하게 아이를 훈육해야 해. 나는 숲으로 가기 전에 수많은 어른에게 기대감에 부풀어서 숲에 다녀오겠다고 말했어. 광장으로 가서 바르바토스 신상에도 속삭였지. 아무도 내게 숲으로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그때 나는 자유로웠어.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았어. 그 소년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흙으로 되돌아갔을 거야.

지금 몬드를 통치하는 사람은 누구지? 페보니우스 기사단이야. 다른 나라는 기사단 위에 통치자가 있어. 웬만해서는 신이나 대리인이 나라를 다스리지. 기사단은 국경을 지키기도 바쁜데 언제 국무까지 보고 앉아 있어? 현임 기사단장이 서류 업무 보기 싫어서 출정 나갔다는 낭설까지 돌아다녀. 옆나라인 리월만 해도 신과 내무부와 군부 균형이 얼마나 잘 잡혀 있는데. 리월은 최고 통치자가 일곱 명이야. 과로사하지 말라고. 몬드의 기사단장은 일곱 명이 분담해도 힘든 일을 혼자서 도맡고 있어. 아니면 조금 먼 나라를 살펴볼까? 스네즈나야는 경치 좋은 설국으로 유명하지. 스네즈나야의 신은 여왕으로서 군림하고 있어. 눈처럼 차가워서 온정을 베푸는 일은 없고, 백성을 사랑하지는 않아도, 통치를 게을리하지는 않아. 신은 인간과 육체부터 달라서 과로로 죽을 일도 없지. 몬드도 원래는 신이 다스리는 국가였어. 바르바토스가 기사단장에게 통치권을 떠넘기고 홀연히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바르바토스가 왜 그랬는지 알아?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대. 그래서 전 대륙을 통틀어서 몬드에만 신이 살지 않아. 너네들이 봐도 뭔가 잘못된 것 같지 않니? 바르바토스는 책임감 없이 방임했을 뿐이야. 자유는 무슨.

그걸 깨닫자마자 나는 수메르로 갔어. 수메르의 아카데미아는 대륙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자랑해.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몬드로 돌아와서 빌어먹게도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몬드 체제와 백성의 가치관을 고치려고 했지. 성공했을 것 같아?

아니. 체제를 바꾸려면 기사단장이 되어야 한다네. 현임 기사단장 대행은 기병대장이랑 대련을 해서 한 번이라도 공격에 성공하면 기사단장 대행 직책을 넘겨 주겠다고 했어. 기병대장 케이아는 어릴 적에 가족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끝내는 몬드에 버려진 사람이야. 살아남으려고 검술을 익혔다고. 상식적으로 유년기 때부터 악바리로 문무를 익힌 사람이랑 대련하면 누가 이길지 뻔하지 않니?

나는 졌어. 그래서 지금 너희에게 수업을 해 주는 걸로 어쩔 수 없이 만족하고 있는 거야.

여기서 질문. 자유란 무엇일까?


바람 잡는 이방인


수메르의 천재들조차 옳은 답변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수메르에서 나고 자랐더라면 지금보다 더 이성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때때로 후회하던 아메는 허공 단말기를 만지작거리며 힘겹게 답을 ‘검색’하는 학부의 수석을 보면서 자신의 출생이 어디였든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별개로 허공 단말기는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수메르의 신 룩카데바타가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허공 단말기를 만들었다. 수메르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허공 단말기에 검색하기만 하면 되었다. 언제나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지만, 단점은 있다.

“이상하다…. 답이 안 나오는데?”

생각해야 하는 주관적인 질문에는 영 깡통이라는 것.

룩카데바타는 수메르 백성의 편의를 위해 기술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룩카데바타의 안배가 너무 강했는지, 수메르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기술에 삶을 빼앗겼다. 룩카데바타가 죽고 오백 년 동안 사람들은 허공 단말기를 보완했다. 허공 단말기의 위력은 점점 더 강해졌고, 사람들은 이제 생각하는 법도 잊은 채 바보처럼 허공 단말기에 검색밖에 못했다. 하지만 룩카데바타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후임을 보냈다. 수메르에서는 지금 이대 신 나히다가 사람들이 삶을 되찾도록 노력하고 있다.

반면 바르바토스는 몬드를 버렸나 싶을 정도로 방임만 하고 있다. 나히다가 수메르의 새로운 신으로 추대받는 동안 바르바토스는 어디서 풍류나 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몬드의 기술은 칠백 년 전 수메르의 수준이었다.

자유란 무엇인가. 일단 바르바토스가 몬드에 내린 것은 자유가 아니다.

나뭇잎 사부작거리는 소리만 들리던 어릴 적의 어느 날, 거대한 그림자를 부리며 도끼를 휘두루던 달밤의 츄츄족을 기억한다. 아메는 가방만 붙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츄츄족은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아메에게 달려들었다. 아메는 몇 번 헛잡다가 가방을 츄츄족에게 던졌다. 그리고 기어가듯이 달렸다. 신발을 신고 있는지 발이 다 헤졌는지 눈치챌 틈도 없이 달렸다. 조금 멀어졌다 싶어서 속도를 죽이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코앞에 츄츄족이 서 있었다. 츄츄족의 가면을 뚫고 콧김이 닿았다. 침 다시는 소리가 났다. 아메는 무릎이 휘어지며 바닥에 쓰러진 채로 울었다.

그때 바람 소리가 들렸다. 폭풍처럼 몰아닥친 바람은 츄츄족을 들어올리고는 저 멀리로 사라졌다. 아메는 가방을 껴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메의 뒤에 열여섯은 되었을까 싶은 소년이 활을 휘두르며 서 있었다.

“요. 안녕, 친구?”

아메는 소년을 보자마자 울음이 뚝 그쳤다. 아메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소년은 이슬처럼 청량하게 웃으며 어쩌다 여기까지 들어왔냐고 물었다. 아메는 답하는 대신 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소년은 밤길 숲을 거니는 동안 자신의 이름이 벤티이고 음유시인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성벽을 지키는 기사들이 보이자 아메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했다.

“바람이 너와 함께하기를.”

몬드 성 내부에서는 한창 윈드블룸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불빛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는 벤티를 보자마자 아메는 처음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아메를 살린 이는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한낱 음유시인이었다.

아메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어린 시절의 이야기까지 해 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몬드에 주어진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아메는 십 년 동안 몬드를 철저히 무너뜨리는 준비를 해 왔다. 그러나 자유는 몬드라고 당연하게 알고만 있는 아이들의 머릿속을 뒤집어엎는 것은 까다로웠다.

“바르바토스 님은 우리를 지켜 주세요. 그분께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해요. 선생님은 그런 기본도 모르시나요?”

“바르바토스가 우리한테 준 건 자유가 아니야. 오히려 이만한 억압이 따로 없지.”

“바르바토스 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우리는 오랫동안 만족하며 살아 왔어요. 우리는 안전해요.”

“너희 부모님은 태풍에 휘말려 돌아가셨지?”

바르바토스는 바람을 다루는 신인데, 어째서 몬드 사람이 바람에 숨을 빼앗겼을까?

아메는 학생들에게 손짓을 해서 머리를 맞대고 숙이게 했다. 옹기종기 모이고 나서 아메는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사실 말이야, 바르바토스는….”

이미 우리를 버렸어.

마지막은 너무 작게 말해서 그런지 한 학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메가 입을 열려던 찰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르바토스는? 뭐야, 나 몰래 재밌는 얘기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

지나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지금쯤이면 변성기를 거쳐 탁해졌을 텐데도, 여전히 초롱했다. 아메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아직도 소년으로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바람에라도 홀렸을까?

아메는 입을 움직였다.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소년은 선수를 쳤다.

“맞아. 아메가 십 년 동안 한 번도 찾지 않은 벤티야.”

아메는 뒤를 돌아보았다. 벤티는 세월에서 홀로 자유로운 듯이, 상큼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벤티에게서는 여름과 가을 사이의 씁쓸하지만 포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수메르의 우림에 있는 것처럼 몸이 서늘해졌다. 마수에게 둘러싸였던 그때가 떠오르는데도 어째서 편안하기만 할까. 무력하게 긴장이 풀렸다.

“세상에. 아메, 너 선생이 된 거야? 멋진걸? 하지만 꼬마 친구들, 오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네.”

학생들은 군말없이 떠났다. 애초에 아메가 억지로 잡아 둔 아이들이었다. 벤티는 아메의 옆에 앉았다. 발이 움직이며 물을 튀겼다.

“친구, 그동안 어디 있었어?”

“수메르. 아카데미아 바후마나 학부에서 공부했어.”

“어쩌다가 아카데미아에 갈 결심을 한 거야? 교육은 뭐, 훌륭하기는 하지만 수메르에서 그렇게 자랑하는 허공 단말기만 있으면 장땡 아닌가?”

너는 왜 지혜의 신을 찾아갔어?

어쩐지 그런 질문 같았다.

“나는 지혜를 원했거든.”

모두와 자유를 되찾고 싶었어.

“이야, 멋있는걸? 완전 똑똑해졌겠네.”

“부족하지만, 몬드에서만 살 적보다는.”

“그래? 타국에서 하는 경험은 견문을 넓혀 주지.”

벤티는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리라를 꺼냈다.

“하지만 몬드의 역사를 가장 잘 아는 건, 몬드야. 어때. 바람이 노래하는 대서사시, 들어보지 않겠어?”

아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벤티는 부드럽게 웃으며 리라 줄을 쓸었다. 음유시인의 성대에서는 희망이 가득한 소년의 목소리가 나왔다. 목소리에 사람을 끄는 힘은 없었지만 진솔했고, 우연히 지나치던 사람들을 문득 멈추어 서게 할 정도는 되었다. 새들이 광장에 쪼르르 내려앉았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려쬐는 가운데 아이들이 물에서 첨벙첨벙 뛰노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광장을 채웠다. 아메는 미소를 짓고 벤티의 노래를 감상했다.

몬드는 여전히 평화롭다.


몬드의 첫 번째 신은 데카라비안이었다. 데카라비안이 통치하던 시절, 몬드는 설국보다 더 춥고 혹독한 환경이었다. 데카라비안은 몬드 백성이 얼어 죽지 않게 힘을 써 주었지만 독재자로서 군림했다. 백성은 반기를 들었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바람은 바르바토스를 불렀다. 바르바토스는 백성을 도와 데카라비안을 무찌르고 겨울을 몬드의 맨 끝으로 쫓아냈다.

몬드의 남쪽에는 설산이 하나 있다. 그곳은 사시사철 눈보라가 내리고 사나운 마물이 그득해서 전문가도 시체가 되어 빠져나온다. 아메는 데카라비안이 통치하던 시절, 영원할 것만 같았던 겨울을 이야기했다.

봄을 부른 불씨는 혁명단이었다. 바르바토스가 나타나기 전부터 혁명은 수차례 있었고 진압되어 잔불처럼 설원에 엉겨붙었다. 바르바토스의 바람은 불을 키워 설원을 뒤덮었다. 수백 년 동안 견고했던 얼음이 녹고 열풍이 가셨을 때 몬드의 수많은 사람은 자유를 되찾았다.

불씨가 지펴지지 않았더라면 봄은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약하다는 이유로 신문만 보도하기 급급했을 것 같은데, 그분들은 직접 맞서 싸우셨어.”

혁명단의 공로를 말해야 하는 찰나, 아메는 입을 열기 꺼렸다.

한 기사가 있었다. 기사는 이름도 소속도 밝히지 않은 채 검만 휘둘렀다. 무력이 부족했던 혁명단에 기사는 귀중한 전력이 되어 주었고, 설화를 통해 계속 구전되던 그는 끝내 여명의 기사라는 이름으로 몬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그러나 아메는 기사의 성을 알았다. 라겐펜더였다.

아메는 라겐펜더의 방계였다. 가문에서는 항상 여명의 기사가 핏속에 남아 있다고 강조하여 가르쳤다. 직계이자 소가주인 다이루크가 기사 훈련을 받을 때 아메도 함께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메는 대련에서 다이루크를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평가받지 않더라도 명확했다. 기사는 못 되는 재능이었다.

아메는 기사와 연을 끊고 살았다. 다이루크가 페보니우스 기사단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여전히 기사는 멀게 느껴졌다. 데카라비안을 물리치던 혁명 때 이차 성징도 제대로 못 겪은 아이들마저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데, 오히려 그 아이들에게 동질감이 들었다. 아메는 혁명단의 공로 대신 전사한 소년 음유시인이 지었던 시를 소개했다.

한 아이가 질문했다.

“왜 새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데카바리안은 백성을 사랑했거든. 당시 몬드는 태풍과 눈보라가 끊이지 않았는데, 데카라비안이 장벽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 있게 해 줬어. 하지만 지금 하늘을 봐 볼까?”

아메가 가리키자 아이들이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몇 점 없는 구름이 햇빛에 하얗게 빛났다. 하늘은 호수처럼 맑아 흐릿하게 별이 보이는 듯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성벽 안이 바로 데카라비안이 만들었던 장벽의 범위야. 이 안에서는 항상 하늘이 일그러진 바람과 구름에 가려져 있어서, 해 따위는 볼 수도 없었어. 바람이 사나우니 새도 날갯짓을 하지 못했지.”

데카라비안은 몬드의 백성을 사랑했지만 역대 최악의 군주로 평가받았다. 당시 백성은 폭정과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진정한 정의와 자유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르바토스가 오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몬드를 떠난 지 오래인 신에게 열렬히 기도하는 신도만 한가득이다. 성벽 안의 가장 높은 곳에는 페보니우스 대성당이 있다. 사람들은 매일 위를 우러러보며 바르바토스에게 기도한다.

바르바토스에게는 과분한 충성이라고 비판하니 벤티는 몬드 사람들에게 장벽 밖의 풍경을 보여 주었던 바르바토스의 마음을 노래했다.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전해 주는 음유시인들이 있기에 몬드는 여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몬드는 언제나 자유를 갈망했어.”

벤티는 바르바토스가 몬드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말했다. 바르바토스는 몬드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고,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자유를 갈망했는지 기억하기에 더욱더 바르바토스를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살이 흘러가듯이 당연하게만 들렸다. 아메는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허공에 맴도는 벤티의 말을 곱씹었다.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시야를 붉게 가렸다. 앞머리를 잘라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 아메는 전날에도 같은 일을 겪었던 것을 떠올렸다. 왼쪽 머리카락은 항상 오른눈을 가렸다.

아메는 벤티를 보았다.

바람마저 항상 일정한 각도로 불어 오는데. 어떻게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까.


아메가 몬드로 돌아온 지 삼 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라겐펜더가 몬드 주류업 시장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당시에는 무척 놀랐는데, 막상 그 가문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삼 개월을 생활하니 아메도 라겐펜더의 재력에 무던해졌다. 몬드의 복식을 한 자신을 거울에 한번 비춰 보고는 머리카락을 높게 하나로 묶었다. 몸을 움직이는 각도에 따라 옷감의 무늬가 다른 색으로 빛났다. 반짝임이 과하지 않고 적당히 은은하여 고급스러웠다.

아메는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평소처럼 화창한 햇살에 눈이 아리는 일은 없었다. 먹구름이 낀 듯 거리에 긴 그림자가 져 있었다. 아메는 고개를 들었다.

수메르에서 생론파와 지론파 수업을 이수하며 고대 용의 모습을 배웠다. 신에게는 용의 모습을 한 권속이 있다. 허공 단말기가 그려 주었던 상세도에는 몬드의 수호룡이자 바르바토스의 권속인 드발린의 모습도 있었다. 그림으로는 온화해 보였다.

그런데 실제로 마주하니 포악했다. 몬드에서 머리카락이 잘릴 정도로 거센 바람을 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휘날리던 옆머리가 짧게 잘린 채 이마를 덮었다.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났다. 서쪽에서 기사단이 달려왔다. 선봉에 서 있던 기사가 검을 빼들자 아메는 소리쳤다.

“멈추어라!”

기사는 아메를 힐끗 보고는 눈꼬리를 휘며 드발린에게 달려들었다. 드발린은 흉폭하게 날갯짓을 하여 몬드에 역풍을 내리꽂고 있었다. 하지만 아메는 수업에서 배웠던 드발린의 업적을 떠올렸다. 바르바토스가 사라졌어도 드발린은 여전히 몬드를 지켰다. 숭고한 수호룡에게는 수준 낮은 행동으로도 가릴 수 없는 품격과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다. 아메가 기사를 노려보며 검집에서 검을 빼들자 기사는 사근사근 웃었다.

“오랜만이야.”

기사의 뒤로 비슷한 복장을 한 소녀가 활을 드발린에게 겨누었다. 아메가 발을 내딛은 방향으로 기사가 몸을 살짝 기울여 시야를 가렸다.

“보다시피 풍마룡은 위험해. 공무 집행을 방해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아메, 그렇게 해 줄 거지?”

“풍마룡이라니? 저건 드발린이다. 페보니우스 기사단이 되어서 수호룡의 이름도 제대로 몰라?”

기사는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었다. 기사는 어릴 적에 라겐펜더 가문에 입양되어 아메와 함께 자랐다. 그때는 두 눈이 오묘한 은하수 같아서 들판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우주는 사람 눈을 본뜬 것인지 망상도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남아 있는 눈 하나마저 탁해졌다.

케이아.

기사가 되더니 사람이 이상해졌다. 이야기만 해도 즐거워하던 아이는 속이 곯을 대로 곯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무언가가 튀어올라 아메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아메와 케이아의 사이에 얼음 덩어리가 굳건하게 자리잡았다.

아메가 가려고 하는 방향마다 얼음 덩어리가 솟았다. 아메가 검을 박아 넣었지만 깨진 얼음 조각 사이로 새 얼음이 솟을 뿐이었다.

드발린이 울부짖었다. 꼬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메는 부러진 검을 내던지고 허공 단말기를 켜서 꼬리를 확대해 보았다. 비늘과 비늘 사이를 뚫고 화살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페보니우스 문양이 화살대에 양각되어 있었다.

드발린은 먹구름을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몬드를 뒤덮었던 그림자가 사라지자 얼음은 물도 남기지 않고 녹았다. 아메는 케이아의 멱살을 잡았다. 기사단이 아메에게 달려들었다. 아메는 주먹으로 케이아의 뺨을 후려쳤다.

한 줄 흐르고 마는 눈물 같은 비가 내렸다.


다음 날이 밝자 몬드 사람들은 페보니우스 대성당에 가서 경전을 읽었고, 어딘가에 있을 바르바토스에게 기도를 올렸고, 따스한 햇살과 서풍에 감사해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를 증명하는 것은 아메의 머리카락밖에 없었다.

아메는 거울을 보았다. 처진 눈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앞머리와 묶은 머리카락, 영락없는 다이루크였다. 다이루크도 기사였을 시절에는 머리카락을 높게 묶고 다녔는데 요즘은 귀 아래로 내려 묶고 다녔다. 집 안이라 느슨하게 묶어 두었던 아메는 머뭇거리다가 높게 조여 묶었다.

전 라겐펜더 가주는 몸이 약하고 재능이 없어서 검을 잡지는 못했지만, 다이루크는 달랐다. 그는 다이루크에게 반드시 라겐펜더의 기사도를 이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이루크는 약자를 구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활활 타오르는 청년이었다. 어린 나이에 기사단에 입단했고 라겐펜더의 새로운 기사를 응원하며 다이루크의 성인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이루크는 전 가주를 지키지는 못했다. 성인식이 끝나기 직전, 그는 불의의 사고에 휘말려 사망했다.

스네즈나야의 사절단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기사단은 스네즈나야의 무력과 국제 장악력 때문에 사건을 덮는 데 급급했고, 다이루크는 기사의 낭만을 우상시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기사단을 탈퇴했다. 그리고 한동안 실종되었다. 다시 발견했을 때 다이루크는 반주검이 되어 있었다. 스네즈나야의 사절단이 막 몬드를 떠나던 날이었다.

스네즈나야의 여왕은 강력한 군사를 바탕으로 대륙을 정복하려 하고 있다. 수메르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아메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치부했다. 이제 아메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 맞았다. 돌아온 이후 다이루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류업에만 집중했다.

이 모든 소식은 벤티가 알려 주었다. 벤티는 가끔 아메에게 스네즈나야의 이야기도 해 주었다.

신이 사랑하지 않은 설국. 스네즈나야의 신은 온정이 많고 백성을 아끼지만 이제 더는 사랑을 할 수 없었다. 몬드가 다시 겨울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처럼.

몬드는 겨울을 지워 봄이 되었고, 스네즈나야는 서릿발 내리는 추위를 자랑스러워한다. 양국의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기에 너무 큰 차이가 생겼다. 여왕의 독재에 익숙해진 스네즈나야 백성은 몬드의 방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메도 마찬가지였다. 수메르에 익숙해진 아메는 몬드 사람이 바르바토스를 경외하는 것을 존중하지 않는다.

사고방식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고 하던 시도는 어제의 일로 끊겼다. 아메는 끝까지 몬드를 지킨 바르바토스의 권속이 어째서 배척받는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몬드 사람은 여전히 바르바토스를 숭상했다.

—바르바토스 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페보니우스 기사단의 단장 대행 진 군힐드가 말했다.

—드발린이라니요? 자매님, 저건 풍마룡이에요. 하지만 기사단이 곧 있으면 풍마룡을 무찌를 테니 걱정 마세요! 바르바토스 님의 가호가 함께할 거예요.

페보니우스 대성당의 사제 바바라 페그가 말했다.

—풍마룡이 기승이어서 농작물이 영 못 써먹게 돼 버렸지 뭐예요. 바르바토스 님이 얼른 저걸 치워 주셨으면 좋겠네.

몬드의 소작농 에이미가 말했다.

—비둘기들이 전부 날아가 버렸잖아! 하여간 다 풍마룡 때문이야.

몬드 성 앞 다리를 수호하는 티미가 말했다.

바르바토스는 여전히 몬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의 권속이 마물 취급을 받아도 내버려 두는 것이 자유라면, 바르바토스는 그저 자유를 명목으로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평화를 조작하고 위험 분자를 제거하기만 하는 것이 바르바토스가 몬드에 내리는 사랑인 듯했다. 역겨운 진실이었다. 과거 몬드 백성은 그것을 독재라고 했다.

지금 몬드 사람들은 바르바토스가 조작한 평화에 안주하기 바빴다. 몬드 사람들은 바르바토스를 추앙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편안하게 지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벌써 축제인지 음악 소리가 들렸다. 아메는 창문을 열었다. 집집마다 풍선을 내걸었고 거리에는 악상과 아이들로 가득했다. 

—하긴 이맘때에 윈드블룸을 하긴 하지. 아메는 까먹었으려나?

페보니우스 기사단의 기병대장 케이아가 말했다. 

아메는 뒤돌았다. 케이아는 집무실 벽에 비스듬히 기대 아메를 훑어보고 있었다. 못 본 사이 키가 훌쩍 커서 아메가 올려다보아야 했다. 케이아는 몬드 사람보다 피부색이 어둡고 이목구비가 섬세했는데, 지금은 눈매가 더 깊어져서 이국적인 느낌이 강해졌다. 아메는 길거리에 버려진 케이아를 라겐펜더 가문에서 양자로 받아들인다 했을 때 반대했다. 케이아는 외양이 낯설었고 눈동자가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험한 생활을 했으니 그 속도 이미 헤져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인품이 좋았던 라겐펜더 가주는 케이아를 양자로 들여 적자인 다이루크와 같은 질의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편의를 봐 주었다. 

케이아는 배움이 빨랐고, 다이루크나 다른 가문의 후계자들과도 잘 지냈다. 아메와는 대련을 할 때마다 투닥거렸기 때문에 사이가 좋기도 힘들었다. 이러나저러나 친구 관계는 맞았다. 사시사철 푸르다가 하루 좀 흐리다고 해서 몬드의 하늘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것처럼. 아메와 케이아는 서로를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의심하지도 않았다.

아메가 수메르로 유학 가기 전까지는 괜찮은 사이였다. 하지만 아카데미아 생활이 바빠서 편지를 하루, 이틀 늦게 보내다가 어느새 한 달이 되고 일 년쯤 지나니 연락하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워졌다. 공유하는 시간은 각자의 기념일 정도. 그마저도 다이루크가 성인식을 치뤘다는 소식을 끝으로 케이아가 편지 자체를 보내지 않으면서 근 칠 년간은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케이아가 몬드 사람 같지 않아서 꺼려지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메는 케이아에게 다시 말했다. 

“지금 몬드는 이상해.”

“풍마룡 때문에 그러는 거야? 전례가 없는 일이 맞긴 해. 아직도 용이 날아다닌다니, 처음 봤을 때는 꿈을 꾸는 줄 알았어.”

“너는 아직 꿈을 꾸고 있지 않아. 드발린이 나타나리라는 걸 이미 알았잖아.”

케이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눈썹을 올렸다.

“윈드블룸 축제가 열릴 때면 멀리서 지켜보다가 사라지기는 했어. 하지만 그래봤자 한 시간 정도야. 이번 일은 나도 놀랐다고.”

“사람들은 놀랐다기보다 혐오하던데.”

풍마룡은 존재만으로도 몬드의 평화에 위협이 되니까.

드발린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몬드의 북쪽에는 드발린을 숭배하던 사원이 있었다. 드발린이 부상을 입고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꺼리자 사원은 차츰 허름해졌고 지금은 이름 없는 폐허가 되었다. 사람들은 바르바토스의 권속이 용이었다는 사실도 잊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메는 애초부터 드발린을 학문적인 지식으로만 받아들였기에 잊지 않았다. 그리고 아메는 케이아가 드발린을 기억할 것이라 확신했다.

팔을 올리니 케이아가 반사적으로 무기를 잡았다. 아메는 웃으며 다른 손으로 검집째 검을 잡았다.

“숨기지 마.”

아메는 케이아의 안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전 라겐펜더 가주가 죽은 이후 케이아는 기사단에 입단했다. 케이아는 두 번 부모를 잃었고, 그때마다 부모의 꿈을 이어 주었다. 그러나 라겐펜더의 유산은 오로지 다이루크에게만 귀속되었다. 케이아의 친부모는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몬드를 찾은 적이 없었다. 외로운 시간을 견디는 동안 케이아는 사랑을 잃어 갔고, 먼 설원에 있는 스네즈나야 신의 눈에 들어 능력을 하사받았다. 몬드에서 가장 강력하게 얼음을 다루는 기사는 케이아였다.

그 후로 케이아의 눈동자는 껍데기만 남아 어쩔 수 없이 반짝거리는 은하수를 담았다.

“너는 신을 안 믿잖아.”

케이아는 눈을 한번 굴렸다. 내리깔고서는 아메를 보았다. 가소롭다는 표정이 반쪽짜리 얼굴을 스쳤다.

“이상하네. 아메는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케이아는 손을 아메의 손등에 겹쳤다. 중지와 엄지에 힘을 주어 아메의 손가락을 오므렸다. 그리고 옆으로 밀어냈다. 케이아는 눈이 한쪽밖에 없는 것치고는 동공의 위치가 표준적이었다. 눈동자가 두 개인 사람과 한 개인 사람이 초점을 맞추는 데는 차이가 있는데, 케이아는 안대 너머의 눈까지 사용하는 것처럼 동공의 위치가 십 년 전과 그대로였다.

케이아는 아메의 손을 잡은 채로 내렸다. 아메의 손바닥을 자신의 입술에 대고, 자신은 손을 뒤집어 아메의 입을 가렸다.

케이아는 창밖을 눈짓했다. 드발린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혼비백산하던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주점으로 향했다. 몬드에 두 개 있는 주점 전부 술 취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메와 케이아는 라겐펜더가 운영하는 주점 ‘천사의 몫’으로 갔다. 사람들은 소란을 잊으려는 듯 더 술을 잔에 부었고, 바텐더는 바쁘게 병을 꺼내다가 자꾸만 손을 떨었다. 케이아가 사환을 불러 다이루크를 데려오라고 했다. 페보니우스 기사단 본부에서 진과 대화 중이던 다이루크는 얼결에 불려와 배리어 안쪽으로 넘어갔다. 케이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사과주를 한 잔 주문했다.

다이루크는 인상을 쓰면서도 선반에서 사과주 병을 꺼냈다. 아메와 눈인사를 주고받은 후 케이아에게 거칠게 잔을 내밀었다.

“기사단이 바쁘다고 하던데. 너는 왜 여기 있지?”

“오늘 다친 사람, 찰스의 부인이거든. 그 아저씨 성격에 말도 못하고… 술이나 따를 걸 생각하니, 너무 안됐다 싶어서.”

케이아는 잔을 아메 쪽으로 밀었다.

“나는 이만 갈게. 알다시피 기사단이 좀 바빠서.”

케이아는 눈을 찡긋거리고는 주점을 나갔다. 아메는 풍경종 소리를 들으며 사과주를 홀짝였다.

다이루크와는 나눌 말이 없었다. 또래라고 해서 모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다이루크도 술병을 닦고는 술꾼들의 주문을 받으러 갔다. 아메는 턱을 괴고 잔을 빙글 돌렸다. 그런데 잔에 초록색이 비쳤다. 아메는 고개를 모로 들었다.

“벤티?”

벤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케이아가 앉았던 의자를 뒤로 뺐다. 다이루크에게 사과주 한 병을 주문하고는 아메를 보았다.

“오랜만이네, 친구! 그동안 잘 지냈어?”

몬드의 평화는 술꾼의 망상 같았다.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환호성을 내지르며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다이루크는 제지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도 다시 묵묵히 술병을 정리했다. 드발린이 나타난 날이면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풍마룡’이 언제 몬드 성을 파괴할지 모른다는 공포, 지금까지 일군 것이 날갯짓 한 번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허탈감, 페보니우스 기사단이 제대로 막을 수 있겠느냐는 의심을 잠시나마 잊을 방법은 술밖에 없었다. 그런 날이 날마다 반복되어 일상이 되었다.

한때는 자유도 그런 존재였겠지. 술을 마셔야만 겨우 얻을 수 있는 꿈.


볕이 따스하니 머지않아 이 꿈도 녹을 것이다. 아메는 케이아와 대련 중에 얼어버린 칼을 녹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메르 사람들은 모두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학문을 공부했다.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직급이 높아질수록 학창시절의 패기를 잃어 갔다. 견고한 얼음을 한 번 부숴 본 사람만이 언 강을 뛰어다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를 깨닫는 것처럼, 현자들은 자신들만 아는 진실을 이유로 학생들의 기발한 연구를 방해했다.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길만 잘 갈고닦아 놓으면 자신의 역할은 끝이라는 듯이.

자유에 잠식되어,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평생을 안주하며 바보처럼 진실을 밝힐 생각도 하지 않게 살아가도록 만든 것은 결국 바르바토스이다. 바르바토스는 지금 어디 있는가?

몬드가 이토록 위태로운데 신은 한가하게 농땡이나 부리고 있는가?

아메는 어김없이 대성당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응시하다가 케이아의 집무실로 갔다. 케이아는 서류를 읽고 있었다. 아메는 비틀비틀 걸어가서 서류를 빼앗았다. 케이아가 멀뚱히 아메를 올려다보았다.

“내게 무기를 줘.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만큼 허술한 걸로.”

케이아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비웃었다.

“다이루크랑 같은 짓을 하네.”

케이아는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느리게 두드렸다.

“무기는 왜, 협박이라도 하고 다니게? 그러면 바르바토스를 그만 믿을 것 같아?”

아메는 다리를 움찔거렸다.

“네가 어떤 식으로 도와주든, 사람들 눈에 너는 다크 히어로가 아니라 범죄자로 비칠 거야.”

케이아는 시선을 돌리며 키득거렸다.

“의형제라는 것들이 다 정의감만 넘쳐서는….”

케이아는 일어나 아메의 앞에 섰다. 문 밖에 대고 활을 가져오라 소리쳤다. 아메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신성 모독을 하려면 제대로 해. 그래야 바르바토스가 우리도 봐 주지.”

케이아는 집무실 문을 열었다. 기사단 소속 꼬마가 화살이 가득 담긴 통과 화살을 들고 서 있었다. 케이아는 아메에게 주라 눈짓하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아메는 멍하니 무기를 받아들었다.

집무실 창문으로 몬드의 광장이 한눈에 보였다. 바르바토스 신상이 한가운데 있었고, 그 주위에 사람들이 잠시 쉬어 가고 있었다. 벤티와 재회했던 곳이었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바르바토스도 언젠가는 자기 신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겠지.

활을 쥔 손가락이 점점 오므라들었다. 아메는 심호흡을 했다. 케이아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일러 준다 한들 몬드 사람들은 이미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아메를 나무라기에 급급할 것이다. 수백 년 동안 독재에 시달리며 바란 평화였으니까. 아메는 화살을 활에 끼우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방법은 애초부터 명확했다. 아메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놔두었다.

몬드 성은 윈드블룸 축제가 한창이었다. 광장은 알록달록한 풍선으로 꾸며져 있었다. 페보니우스 대성당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카드 게임을 하자는 잡상인의 요청을 거절하고서 아메는 신상을 마주 보고 섰다. 신상은 유난히 커다랬다. 고개를 아무리 제껴도 바르바토스의 얼굴은 역광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아메는 활을 하늘로 겨누었다. 바르바토스의 눈이 있을 곳을 어림하여 조준했다.

백성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신은 눈 따위 없어도 괜찮다.

무언가를 어려워하면 방법을 가르쳐 주고 실패하여 좌절하면 위로해 줬어야 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머저리도 만들면 안 되었다. 바르바토스는 몬드를 망치고 버렸다. 이미 떠난 신을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아메는 바르바토스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몬드에서 나고 자란 이상 하나뿐인 신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아메는 계속 기다렸다. 그런데 바르바토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메는 휘청거리다가 이내 넘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전날에 사과주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어지러웠다. 가물가물한 시야를 다잡고 아메는 바르바토스 신상을 보았다.

고요히 날아간 화살은 바르바토스의 오른눈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아메는 몇 번 헛잡다가 다음 화살을 장전했다. 화살촉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아메의 시선은 줄곧 바르바토스를 향했고, 화살은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바람이 돕기라도 하는 듯이 화살촉은 바르바토스의 왼눈에 제대로 박혔다.

올려다보던 아메는 곧 일그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돌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멀어서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신상의 얼굴 상반부가 비스듬하게 미끄러져 있었다.

아메는 통에서 새 화살을 꺼냈다.

광장을 덮던 그림자가 조금 짧아졌다. 대성당에서 막 기도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아메는 활시위를 놓았다.

신상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며 굉음을 냈다. 파편이 아메에게 튀었다. 아메는 먹먹한 귀를 손목으로 한번 누르고서 등 어림을 뒤적거렸다. 다음 화살은 없었다.

아메는 위를 보았다. 바르바토스의 심장에는 아메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아메는 피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쏟아지는 돌조각을 바라보았다.

광장은 바르바토스의 잔해로 어지러웠다. 그러나 변화는 그뿐인 듯 종달새들이 재잘거리며 울퉁불퉁한 조각을 찾아 내려앉았다. 나른한 햇빛이 광장에 퍼질러졌다. 이른 아침부터 축제를 즐기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흙먼지가 벌레처럼 부유했다. 다리만 남은 신상이 매끄럽게 아메의 모습을 반사했다.

아메는 허공 단말기를 켜고 머리카락을 묶었다. 팔이 움직일 때마다 옷이 따라서 흔들렸다. 원단의 무늬는 과하지 않고 은은하여 고급스러웠다. 아무리 보아도 다이루크와 너무 닮은 것 같았다. 아메는 눈을 찡그리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들여다보다가, 시야를 자꾸 침범하는 흙먼지를 있는 힘껏 털어냈다. 문이 열려 있었는지 어디서부턴가 빵 굽는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아메는 침을 한번 다시고서 그 방향으로 몸을 돌려 보았다.

그곳에서는 한창 축제를 즐기는 몬드 성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몬드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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