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천시랑
朔. 어둠 속에 파묻힌 것이 있다. 모든 것이 쓰러진 위에 홀로 곧게 몸을 세우고 빳빳이 고개 든 것이 있다. 불길한 그림자 안에서 붉은 눈을 빛내며 붉은 옷을 입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붉은 것을 움켜쥔 것이 있다. 창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엔 선혈이 튀어 어지럽고 가슴팍은 뻥 뚫려 심장이 없고 내딛는 걸음걸음엔 뚜렷한 발자욱이 찍힌다. 뚝, 뚝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위풍당당하게 지나는 태양은 세상을 덮은 모래를 내려다본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빛이 주변을 메운다. 방랑자는 머리 위에 드리운 검은 베일을 조금 당겨 쓴다. 내딛는 걸음이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진다.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 무게 없는 깃털처럼 사구 위를 총총 걸어다닐 수 있긴 하다. 실제로 몇 번 해 본 적도 있다. 그
흩날리는 눈발 속을 여자는 걷는다. 눈 밟는 소리도, 기척도 없다. 두툼한 겉옷 아래 이따금 나부끼는 흰 자락엔 붉은 자욱이 점점이 튀어 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에 들린 칼날엔 피가 얼어붙어 간다. 흰 입김이 흘러나와 허공에 흩어진다. 유령이 아닌, 산 사람이다. 여자는 기억한다. 여자가 방랑 끝에 오래된 수도원에 도착했던 날도 눈이 내렸다. 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