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월
경화수월 유혈웨딩? 할로윈? 아무튼 그것
朔.
어둠 속에 파묻힌 것이 있다. 모든 것이 쓰러진 위에 홀로 곧게 몸을 세우고 빳빳이 고개 든 것이 있다. 불길한 그림자 안에서 붉은 눈을 빛내며 붉은 옷을 입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붉은 것을 움켜쥔 것이 있다. 창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엔 선혈이 튀어 어지럽고 가슴팍은 뻥 뚫려 심장이 없고 내딛는 걸음걸음엔 뚜렷한 발자욱이 찍힌다. 뚝, 뚝 떨어지는 방울을 거슬러 고개를 들어올리면 새빨간 눈동자가 녹아내리고 있는 듯한 뻘건 피가 볼을 타고 흐른다.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마냥 굳어 버린 입매, 피로 붉어진 입술이 이내 길게 찢어진다.
그것이 말한다.
“— 남—와 —— 결——— —.”
들리지 않는다.
“그 ——를 —대 —지 —.”
들리지 않는다.
“그 —자를 절— ——하지 마.”
들리지 않는다…….
문득 그것의 옷자락에 시선이 닿는다. 그러면 직감한다. 저 옷은,
저 목소리는,
저 여자는 ——
헉,
숨을 들이켜며 퍼뜩 눈을 뜨면, 그 모든 것은 기억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자신은 다시, 그 모든 것을 잊는다.
드넓은 운하가 흐르는 도시는 그 그림자에 무엇이 똬리를 틀고 있건 상관없이 화려하게 빛난다. 관광객들은 이국적인 정취에 신이 나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누빈다. 그러나 이 도시가 얼마나 아름답건 간에,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고 그 음영 아래에는 다른 이들이 상상하지 못할 것이 또아리를 틀고 잠들어 있다. 이를테면—
“귀신입니다, 아가씨!”
상념을 깨는 경박한 외침에 여자는 종에게 눈을 흘긴다. 문을 열고 우당탕 굴러들어온 하인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항상 껄렁하게 머리 위에 얹고 다니는 선글라스는 웬일로 옷깃에 끼인 채다. 네가 웬일이냐는 시선이 그 쪽에 닿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팔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귀신이라니까요, 아가씨!”
“네가 조금만 더 그러고 있으면 나도 귀 없는 귀신이 될 것 같구나.”
“아니, 경사가 코앞인데 그런 불길한 농담을 하시고…….”
농담이겠니? 무언의 눈길을 받은 남자가 하핫, 웃음을 흘린다. 독설이 줄줄이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황급히 다시 입을 연다.
“요 근래 돈깨나 쓴다 하는 집안을 싹 휩쓸었던 괴소문 말입니다. 분명 깨끗했는데 밤이 지나고 나면 복도에 피로 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는 소문이요. 그게 귀신 소행이랍니다!”
“심심하니?”
“아가씨도 참. 아시잖습니까? 저는 언제나 아가씨를 위해 일하느라 눈코 뜰 새도 없다는 거. 이게 다 아가씨를 위해 물어온 이야기인데요.”
“나를 위해?”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얼굴은 그만둬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제법 신빙성 있는 소리예요. 유명한 법사가 강 씨네 저택을 들렀다가 뒤로 넘어갔다잖습니까. 귀신도 그런 독한 귀신이 없다면서요. 오뉴월에 서리를 내리다 못해 북풍한설도 못 당해낼…….”
다시금 여자의 시선을 받은 종이 쪼그라든다. 제 입을 한 대 친 그는 고개를 두어 번 털어내고는, 다시 말을 이어간다.
“아무튼. 강 씨 집안이 둘째 딸의 혼사를 앞두고 그딴 일이 생겨 아예 일이 취소당했더라고 하더랍니다. 제대로 독한 귀신이 붙었다고, 그런 집에서 며느리를 들였다간 신랑 측 집안에도 불똥이 튈 거라면서요. 강 씨네가 항의를 해도 아주 완강합니다.”
그래서 자신이랑 그 소동이 무슨 상관이냐는 무언의 질문이 남자를 쿡쿡 찌른다. 하인은 제가 다 생각이 있습니다, 하며 한쪽 눈을 찡긋한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여자의 귀에 무어라 속삭인다. 그 계책을 듣자마자 여자의 얼굴이 왈칵 구겨진다.
“그래서 나 보고 지금 멀쩡한 집안에 짐승 피를 뿌려 내 혼인을 파토내자는 소리를 하는 게냐?”
“너무 그렇게 듣지만 마시구요…….”
“정말이지 멍청한 소리만 해대는구나. 고작 그런 방법으로 해결이 될 것 같으냐? 한 씨 집안이 허무맹랑한 귀신 때문에 혼사를 파토냈겠냐는 말이다. 강 씨의 사업이 근래 힘을 못 쓰니 이 때다 하고 핑계를 댄 것이지.”
“강 씨네가 위태위태하다는 것도 제가 찔러 드린 정보잖습니까?”
“허무맹랑한 귀신 이야기보다야 더 설득력 있겠지.”
그건 그렇긴 합니다, 하고 남자가 제 턱을 쓰다듬는다. 무어라 반박할 거리를 찾는 것이 여실한 태도다. 이내 아! 소리를 내며 빙싯빙싯 웃는 얼굴로 입을 연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강 씨가 위 씨 집안에 따지고 들었거든요.”
“위 씨?”
“예. 아가씨도 기억하시지요? 석 달 전에 죽은 위 부인 말입니다…….”
여자는 그 부고장을 기억한다. 다름아니라 그것을 받아본 것이 자신의 혼처가 정해졌다는 통보를 받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두어 번 얼굴을 보았던 위 씨 집안의 장녀 위화양은 퍽 나쁘지 않은 집안에 본처로 들어갔다. 몇 년 간은 퍽 잘 지내는 듯 싶더니만, 최근 몇 달 간 갑작스레 남편과 사이가 멀어지더니 결국엔 죽어 버렸다. 병환이라고는 하지만 낌새가 수상한 것이 들려오는 풍문이 영 좋지 못했다. 남편이 손수 죽여 버렸다는 소리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진했다는 소리도 있고. 뉘인지 모를 목격자의 쓸데없이 상세하고 참혹하기 짝이 없는 목격담까지 꼬리에 달고 그렇게 떠돌던 소문이 결국엔 귀신 이야기로까지 번져 버린 모양이다.
여자가 잠시 상념에 빠지건 말건, 눈앞의 하인은 말을 멈추지 않는다.
“…… 그래서, 그 점잔 빼는 강 씨 가주가 위 씨 가주 멱살을 잡았다는 것 아닙니까. 미쳐 죽었다는 자네 여식이 우리 딸 앞날에까지 부정한 피를 튀겨 놓았으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요. 어때요, 이 정도면 신빙성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신빙성 정도야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아가씨께서 들어가실 그 집안이 이상할 정도로 미신 따지는 거 이 도시 사람이면 전부…….”
여자는 그 쯤에서 종의 헛소리를 그만 듣기로 한다. 제 혼사가 목전에 닥친 마당에 허무맹랑한데다 더없이 불길하기까지 한 괴소문에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가 들어올린 한 손에 경박한 소문을 주워섬기던 하인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눈을 굴린다. 무언의 항의가 종의 삐딱한 몸짓을 통해 여자에게 전해진다. 이 혼사, 별로시라면서요! 그래서 제가 방법을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여자는 귀에 선한 외침을 털어내듯 고개를 두어 번 절레절레 젓고 입을 연다.
“내 아무리 갑작스레 통보받은 혼사가 당혹스럽고, 석 달 뒤에 들어갈 집안 역시 썩 성에 차진 않고, 하다못해 상대의 얼굴마저 한 번 본 적이 없다 해도 이 말만 하마.”
이 말만 한다는 것 치곤 상당히 많은 것을 말씀하셨는데요, 하고 항의하는 듯한 하인의 눈을 또렷하게 직시하며 여자가 단언한다.
“그런 괴력난신을 내 혼인에 끼워넣는다면 나는 영영 자유치 못하게 된다.”
입만 두어 번 버끔거린 종은 그 말에 더 이상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다. 그런 것 말고 좀더 쓸모 있는 것을 물어오렴, 새끼 제비야, 따위의 농담을 듣고선 한숨을 푹푹 쉬며 방을 나설 뿐이다. 여자는 그런 하인의 뒷모습을 일별하고선 시선을 돌려 다시 서리 내린 창을, 만개한 수선화를, 꽃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연못을 바라본다.
기실 여자의 상황은 방법을 따질 정도로 그리 좋지 못하다. 그래도 퍽 유능하긴 한 하인이 괴담까지 끌고 온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첫 혼담이 제대로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에 파탄나고부터 석 달 전 부친의 통보를 듣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별당의 첫째 아가씨는 적당한 집안에 적당히 팔아치워 버리기엔 너무 귀한 자원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좋은 집안에 보내기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버렸다. 자식 장사로 세를 불리기로 이름난 집안에 혼담을 넣는 것은 쓸데없이 욕심만 두둑한 자들뿐이고, 그런 치들은 상대가 어릴수록 눈이 돌아가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여자는 제 아래의 동생들을 줄줄이 시집/장가보내고도 홀로 남아 고고하게 이 집안을 지켜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들어온 혼담이라면 반가워야 할 것인데…….
하지만 상대가 이 도시를 손 안에 쥐락펴락하고 있는 무뢰배의 우두머리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여자는 연못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쉰다. 평탄히 흘러갈 줄 알았던 삶이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속으로 가벼운 한탄도 해 본다. 최근 꿈자리도 뒤숭숭해 더욱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여자는 절망하기엔 너무도 젊었고 주저앉기엔 너무도 어렸으므로, 결국엔 눈을 두어 번 깜박여 상념을 몰아내고선 가벼이 찻잔을 든다. 언제나 해 오던 대로, 옥석 같은 낯빛 아래로 촘촘히 계획을 짜맞추며 잔을 입가로 가져간다.
뭐, 여차하면 저 연못에라도 뛰어들어 버리지.
구름 위를 거닐듯 가벼운 걸음걸음은 소리 하나 없다. 그러나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끈적하게 번지는 것은 짙디짙은 선혈이다. 남긴 자취마저 붉은 그것은 무심한 증오를 뚝뚝 흘리며 대나무처럼 꼿꼿한 자태로 어딘가를 향해 걷는다. 그 끝에는 분명 목적지가 존재하겠지만 지켜보는 이로선 알 길이 없다. 그저 그것의 옆모습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을 뿐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그것이 두른 옷이 무엇인지. 강물 흐르듯 물결치는 붉은 비단, 그 위에 은으로 수놓인 구름과 산과 모란과 두루미, 머리 위를 덮은 붉은 면사. 흰 옷에 피가 튀어 붉어진 것이 아닌, 처음부터 붉은 옷이었던 것이다.
혼례복.
그래, 혼례복이다. 저것은 혼례복을 입고 있다. 온통 붉게 젖은 저것은, 꽃가마를 타고 길을 지나 혼례를 올릴 신부다. 용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야 할 제물이다. 익숙한 길을 걷는 제물의 입이 열린다. 긴 호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이 칼날 같은 웃음을 지으며 찬 목소리를 내놓는다. 그것이 말한다. 또다시.
“혼인에는 기만이 함께할 것이다.”
불길한 음성.
“신뢰에는 배반이 함께할 것이다.”
사특한 경고.
“——에는 저주가 함께할 것이다.”
이루어진, 예언.
그러나 눈을 뜨면 잊힐 것.
먼 곳의 부름에 의식이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니 그 무엇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몇 달 전 시집을 간 동생은 요즘따라 부쩍 방문이 잦았다. 여자는 별당의 고고한 첫째 아가씨였고 동생은 언제든지 어디로든 팔려 갈 예비품과 같은 존재였으므로 사실 그리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몇 번 가량 정원에서 산책이나 하고 시종을 끼운 채 차를 마신 정도일까. 그럼에도 혼인한 동생은 시집 갈 날짜가 잡힌 언니를 자주 찾았다. 여자의 별당이 제 남편이 용인해 준 유일한 방문처인 탓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제 동생을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여자는 혼인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동생이 찾아오면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곤 했다.
“하여간 턱에도 배에도 욕심이 그득하게 들어차서는, 얼마나 의심이 깊은지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게 한다니까요.”
여자는 차를 마시며 동생의 말에 말없이 동조한다. 온 몸으로도 모자라 눈에까지 욕심이 그득 들어찬 제부는 정말이지 보기 좋은 치는 아니었다. 그러면서 여자의 몸을 샅샅이 훑는 꼴에 목전까지 욕지기가 치고 올랐다. 아비의 아집이 아니었다면 그 치와 혼인하는 것은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더더욱.
“그래도 그 집안 재산은 조만간 내 손에 들어올 것 같아요. 아버지가 혼처를 잘 잡긴 잘 잡았지요.”
“너도 그래서 부러 나섰던 것 아니니.”
“언니보다 혼인을 일찍 하게 된 것은 죄송한 일이지만요.”
일부러 건강이 좋지 못한 치를 골라 결혼한 동생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살풋 웃는다. 제부는 호색하나 자식이 없다. 근래 병석에 드러누워 골골대고 있는 그가 죽는다면 그 모든 재산은 고스란히 동생에게 떨어질 것이다. 진 씨네 집안은 미망인이 된 딸을 가시밭 같은 시댁에 방치하는 야박한 집안은 아니었으므로, 동생은 그 재산을 들고 진 가 저택으로 돌아와 다른 친척들이 그러했듯 얼마간 자유를 누리다 적당한 자리에 다시 시집을 가게 될 예정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하인이야 그 과정 중에 퍽 마음 고생을 하겠지만 여자가 알 바는 아니다. 여자는 그저 찻잔을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형부가 될 분의 얼굴은 보셨나요?”
“너는 그 때 제부의 얼굴을 보았니?”
“보았다면 그리 편한 마음으로 식장에 들어서지는 않았겠지요.”
“그런데 무얼 묻는 거니.”
그래도 그냥 물어본 거라며 동생이 입을 삐죽인다.
“당분간은 살 붙이고 살아갈 사람인데 얼굴 정도는 궁금할 수도 있지 않나요.”
“불한당의 수괴에게 무슨 기대를 하겠니.”
귀한 집안의 아가씨들이 도시를 손 안에 쥔 산주의 얼굴을 언제 보기나 했겠나. 그 대신 거리를 제 안방인 양 꺼드럭대며 돌아다니는 패거리의 얼굴을 떠올린 듯 동생이 푹 한숨을 쉰다. 모란 같은 언니가 그런 막 빚은 감자 같은 자와 혼인한다니요, 중얼거림이 퍽 우울하다. 그러는 너는 굴러다니는 공 같은 자와 혼인하였으면서,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찻물과 함께 내려보낸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암울한 화제는 멀리 치워 두기로 결심한 동생이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요즘 집안이 어수선하던데요.”
“샤오젠에게 들었니?”
부정하지 않고 웃는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자는 푹 한숨을 쉰다. 입 단속을 해야겠다는 말에 동생은 너무 그러지는 말라는 소릴 하며 웃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 녀석은 내 수족이다, 하는 타박에도 어쩔 수 없다며 변명하는 꼴이 꼭 닮았다. 여자는 한 차례 고개를 젓고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는다.
“너도 그 헛소문을 믿는 게야?”
“꼭 그건 아니어도 말이지요. 불길하지 않나요? 그런 발자국이라니…….”
“허무맹랑한 걸 다 신경 쓰는구나.”
“아무래도 혼인이 코앞이니 자연히 그러게 되는 것이지요.”
“네 혼인도 아닌데.”
“사랑하는 언니의 혼인이잖아요.”
영혼 없는 소리를 한 동생이 살풋 웃음을 보인다. 여자는 쿡쿡 아려 오는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매만지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잠을 설친 것으로도 모자라 아침 댓바람부터 소란을 겪은 탓이다. 하인의 귀띔으로 최근 소문의 중심이 된 발자국이 집 안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는 알았으나 자세한 일은 모르고 있을 동생은 호기심 가득한 낯으로 여자를 보며 대답을 재촉한다. 무어 좋은 일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여자로서는 번거롭기 짝이 없는 시선이다. 여자는 결국 대강 답해주기로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연다.
“방 앞에 나타났더구나, 그 발자국이.”
“언니 방 앞에요?”
“그래. 이 방을 나서서 정원에까지 길게 이어지는 발자국이었다.”
그 꼴을 보고 긴 비명을 지른 하녀는 가주에게 끌려가 지금껏 돌아오지 않았다. 바퀴벌레처럼 몰려든 식솔들이 또렷하게 찍힌 핏빛 발자국을 보며 수군대는 것을, 여자가 나서서 무얼 하고 있나, 어서 치우라 일갈하고서야 며칠 전의 소동은 간신히 일단락되었다. 그럼에도 진 씨 집안은 뒤숭숭한 기운을 감출 수 없었다. 혼인이 코앞이니 더더욱 그러했다.
“소문의 그, 위 부인을 보았다는 이는요?”
“없어. 발자국뿐이었다.”
“…… 언니가 벌인 일인가요?”
동생의 맹랑한 질문에 여자는 코웃음친다.
“내가 무슨 추문을 덮어 쓰자고 그런 짓을 하니. 그 뺀질거리는 놈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하긴, 언니는 진암월이지요.”
그게 무슨 뜻이냐 물어오는 시선을 외면하며 동생이 찻잔을 기울인다. 여자는 잠시간 동생에게 압박을 주다 말을 잇는다.
“내가 최대한 하인들 입을 막아 두었고, 가주 역시 눈을 잔뜩 부라렸다마는. 분명 그 쪽에 흘러들어갔을 텐데 그 어떤 반응도 없더구나.”
“황룡회가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자매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흐른다. 무슨 일을 할 때면 꼭 풍수지리사를 불러 의견을 묻는다는 황룡회다. 이런 불길하기 짝이 없는 사건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니. 거슬리는 악몽도 모자라 깨어서까지 닥친 변수에 잔뜩 신경이 날카로워진 여자는 일련의 흐름이 껄끄럽기 그지없다. 제 앞에 흉흉한 덫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걸어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뭐,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요? 언니라면요.”
“말이 되는 소릴 하렴.”
태평하기 짝이 없는 소리에 타박하면서도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내린다. 찻잔을 다 비웠으니 동생은 슬슬 돌아가고, 자신은 다시 혼인 준비에 매진할 때다. 너도 이만 가 보는 것이 좋겠다, 배웅은 하지 않으마. 냉정한 인사에도 동생은 전과 같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냉큼 아씨, 하며 동생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오는 것을 적당히 무시해 주며 쌓아 두었던 서류를 집어든다.
“언니.”
“왜?”
“다시 봐요.”
“그러자꾸나.”
까만 활자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면 연못 옆으로 별당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쩐지 그 모습을 보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기도 하고, 다시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것 같기도 하여 잠시 두 인영을 바라본다. 길을 나선 둘은 작별 인사도 없이 멀리로 사라진다. 여자는 그제야 다시 시선을 돌려 읽던 것을 마저 읽는다. 할 일이 많았다. 남편의 얼굴이나 괴이한 발자국이나 동생의 연애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것들이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당분간은 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당분간 눈을 좀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새로 들어갈 집에는 연못이 있을까. 앞에는 의자를 하나 놓아야지…….
가야 할 곳이 있다. 그러나 길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처 없는 발걸음은 익숙한 복도를, 익숙한 정원을, 익숙한 방 앞을 하염없이 헤맨다. 어쩌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어디로 가야 했더라? 어떻게 가야 했더라? 왜 가야 했더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같고. 그래, 그게 맞다. 피를 뒤집어쓴 용의 머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비늘이 온통 뒤집어진 흉한 꼴로 땅을 구르고 있을 것이다. 그도 길을 잃었다. 가야 하는 길과 가고 싶지 않은 길 사이에서 몸부림치다 몸이 찢겼다. 하지만 그 몸부림에 나는 조각나 버렸어. 독을 품고 칼날 위를 걷게 되어 버렸어. 너무 많은 것을 놓쳤고 그 어떤 것도 잡지 못했어. 아, 팽개쳐 버리고 이용하려 놓아 버린 나의 두 파편들. 나는 차마 다시 주워들지 못할 것이다. 그야 이미 너무 멀어져 버렸으니까. 지워지지 않을 핏자국이 발자취로 남는다. 누군가는 볼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니? 당신.
그러니 말해야 해. 어느 것도 바뀌지 않겠지만. 이것은 꿈의 꿈의 꿈의 꿈이지만.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나에게. 나는 나고 나는 나이므로 나의 말을 들어라. 결혼해선 안 된다. 믿어선 안 된다. ——해선 안 된다. 그런데 ——이 뭐지? 그도 나도 나도 모른다. 그래도 해서는 안 돼. 나는 해 버렸지만. 나도 해 버렸지만. 그는? 모르겠다. 차라리 하지 않았던 게 낫다. 했다면, 그랬다면, 결국 그의 ——은 무엇이 되는 건데? 아니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얘기다.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떠돌고 있어. 이미 영영 잠들었으면서도 꿈을 꾼다. 그 안에서 나에게 말한다. 경고한다. 예언한다. 결혼은 기만이었고 신뢰는 배신이었고 ——은 저주였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아. 끝난 지 오래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떠돌고 있다. 왜? 어째서? 어떻게? 아니야. 떠도는 것이 아니다. 아,
가야 할 곳이 있다.
번쩍 눈이 뜨인다. 만개한 동백이 달도 없는 어둠 속에 숨었다. 가을 서리가 내린 밤은 더없이 차다. 하지만 이젠 상관 없다. 가야 할 곳이 있다.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붉은 옷감이 바닥에 끌려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세상이 온통 붉다. 아니, 시야가 붉다. 눈물 때문인지 머리를 덮은 면사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자리에서 일어나 앞을 향해 걷는다. 익숙한 길이다. 이 며칠간, 아니, 몇 년 간 떠돌던 길이다. 아니, 그 이전에도. 숨을 쉬고 있을 적에도. 이 길을 걸었던 기억이 있다. 이 길을 보았던 기억 역시 있다. 모든 일이 벌어지기 이전에. 하인이 살아 있고 동생이 살아 있을 적에.
결혼식 직전 꾸었던, 먼 기억 속에 파묻힌 악몽이 먼지를 털듯 드러난다. 피로 젖은 신부와 그것의 경고를 생각한다. 떠올린다. 깨닫는다.
나야. 나구나. 나였구나.
아, 이것은 원혼이 꾸는 꿈이다. 길을 찾기 전 부러 돌고 돌아가는 여정의 하나다. 익숙한 모든 곳에 걸음걸음 핏자국을 남기고 모두에게 모습을 보이면서도 오직 한 사람은 찾지 않는다. 죽어 없어진 것들을 기억 속에서 끌어올려 함께하면서도 하나 살아 있는 자만은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피해 봤자 가야 할 곳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보아야지. 만나야지. 가야지…….
파멸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어쩌면 모든 것이 시작된 그 날 그 때 칼을 들었다면, 독을 품고 있었다면, 그래서 처음 생각했던 대로 남편이건 뭐건 찔러 없애고 자유를 찾아 영영 떠났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죽어 버린 나는 과거의 나에게 그것을 바라 기만을, 배신을, 저주를 속삭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에, 아니면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기 전에 그 모든 것을 끝내라고.
하지만 그를 찔러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이리 독을 품고 죽으려 했던 것이 아니다. 나를 창살 속 꽃으로 기르고 때가 되어 높은 값에 팔아치워 버린 집안을 그리 소중하게 여겼을 리가. 고작 그런 것들 몇 개 죽었다고 내가 앉은 자리를 떨쳐내려 했을 리가.
나는 단지.
당신은 알고 있었잖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 내가 결코 배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
그럼에도,
당신은 날…….
문은 소리 없이 열린다. 남자는 침상 위에 누워 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핏기 없는 얼굴로 가지런히 누워 있다. 눈을 감은 얼굴은 꼭 처음 보았던 그 날처럼 퍽 멀끔한 것 같으면서도 숨길 수 없는 세월과 피로가, 길을 잃은 어떤 광기가, 혼란이 켜켜이 쌓여 있다. 혼례복을 차려 입은 채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인다. 방 안에 들어찬 죽은 것들에게는 시선을 두지도 않고 신랑에게 고정된 눈동자가, 누구도 뚫어 볼 수 없는 붉은 면사 아래서 미미한 웃음기를 담고 휜다. 정해진 파멸로 향하는 걸음 걸음마다 붉은 발자국이 남는다. 얼굴에 흩뿌려진 가족의 피는 아직도 뜨끈한 김을 뿜고, 뜯겨 버린 심장은 괴이한 박동을 이어가고, 두 눈알이 녹아 흐르는 핏물은 상대의 얼굴을 향해 끊임없이 추락한다. 툭, 툭 떨어지는 감촉에 움찔거리던 눈꺼풀이 자색 눈동자를 드러낸다. 꼭 그 때처럼 창백한 얼굴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면, 왼손을 들어 그가 내민 손 위에 내 심장을 쥐여 준다. 질꺽. 그리고 속삭이는 것이다. 황룡회의 산주, 류패현.
당신을 위한 선물이 있어.
드넓은 운하가 흐르는 도시는 그 그림자에 무엇이 똬리를 틀고 있건 상관없이 화려하게 빛난다. 관광객들은 이국적인 정취에 신이 나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누빈다. 그러나 이 도시가 얼마나 아름답건 간에,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고 그 음영 아래에는 다른 이들이 상상하지 못할 것이 또아리를 틀고 잠들어 있다. 이를테면 물 속에 웅크린 괴물이라거나, 영영 꿈꾸는 위대한 옛 신이라거나……
아니면, 영면하지 못한 원혼이라거나.
황룡회 내부에는 최근 소문이 돌았다. 병에 걸려 죽은 진 부인이 원혼이 되어 떠돌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진 부인을 가까이서 모시던 시종, 진 부인의 호위 역을 맡던 조직원, 어린 도련님과 진 부인의 사생아, 심지어 막 들어온 신입까지 진 부인의 유령을 보았다. 온통 붉은 혼례복을 차려 입은 혼령은 생전과 같이 대나무마냥 꼿꼿하고 백합처럼 단아한 자태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지나간 길에 남은 피비린내 나는 자취는 풍수지리사의 명령 아래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치워졌지만, 원혼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사람들의 의문은 쉬이 치워 버릴 수 없었다. 소문을 들은 치들은 여러 추측들을 꺼내놓는 것을 주된 일과로 삼았다. 역시 어린 도련님의 옆이 아니겠느냐(그 여자가?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그저 산책하는 길이었을 것이다(고작 산책이나 하자고 원혼이 되었겠는가), 그것도 아니면 류 대인을 보러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그 쯤 진행되면 하던 일이나 마저 하라며 한 대씩 머리통을 얻어맞았다. 소문에 목이 마른 사람들은 자연스레 흩어졌다가 다시 진 부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면 또 다시 모여들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많은 토론을 거치고 수렴된 결론은 류 대인을 보러 가려는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조직 내에서 힘깨나 쓰는 자들은 산주와 진 부인의 갈등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므로, 역시 복수를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이유가 제일 신빙성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 예상과 달리 진 부인은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유령은 그저 화려한 본관 복도를 따라 걷거나, 다른 공사가 예정되어 황량해진 옛 정원을 끊임없이 걷거나, 누구도 건드리지 못해 장례식 아침 그 날 그대로 남은 제 처소 앞을 하염없이 걷거나, 아무튼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유령이 나오건 말건 황룡회는 여전히 건재했으며, 그와 관련된 괴기한 사건도 딱히 더 일어나지 않았고, 류 대인 역시 조직 내에서 도는 소문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풍수지리사만은 재미있다는 듯 속 시꺼먼 웃음을 짓는 터라 모두가 슬슬 피해가곤 했지만. 심지어 진 부인의 사생아가 쫓겨나던 날도 평소와 같았으므로, 어찌되었건 진 부인의 원혼에 대한 토론은 어떤 사건도 벌어지지 않은 채로 몇 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열기가 식어 점차 사그라들었다. 아침마다 어딘가에 찍힌 진 부인의 발자국을 지우는 아랫것들이나 볼멘소리를 좀 했을 뿐이었다.
모든 상황이 정리된 것은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기실 특별할 것 없이 평소 같은 하루였다. 하나 다른 점은 진 부인의 자취가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는데, 자연히 몇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온 유령 소동이 드디어 끝나는 건가 하는 추측이 고개를 들었다. 그 희망찬 생각처럼 그 날은 어떤 사건도 없이 지나가는 듯했다.
달도 뜨지 않은 그 날 밤, 류패현이 미친 사람처럼 처소에서 뛰쳐나와 진 부인의 방을 뒤집어 엎기 전까지는.
진 부인의 방은 그녀가 죽은 뒤로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상태였다. 진 부인이 공들여 가꾸던 정원은 풍수지리사들의 주도로 갈아 엎어진 지 오래였지만 그 방만은 그들도 채 손대지 못했다. 청소하는 이들조차 꺼리는 그 방에 들어설 사람은 류 대인뿐이었으나, 그 역시 그 날 이전까지는 주인 없는 방의 문을 열 생각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문을 거의 뜯어내다시피 하고 들어선 방은 두텁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진 부인의 침상도, 덩굴 문양으로 장식된 탁상과 친가에서부터 가져온 유리등도, 열면 정원이 한가득 들어오는 창문과 그 앞에 놓인 우아한 의자도, 한켠에 놓인 책장과 가지런히 꽃힌 책들마저도 세월에 박제된 듯 그대로였다.
폭풍처럼 들이닥친 류패현은 침상부터 뒤집어엎었다.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선 탁상 앞 의자를 대강 끌어 던져 버리고 탁상 위에 놓인 종이들을 마구잡이로 쥐어 눈앞으로 들이대 내용을 대강 훑고 던져 버리길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진 부인이 즐겨 쓰던 문진이 떨어져 깨지고 만년필이 바닥을 굴렀다. 달이 각인된 만년필은 데구르르 굴러 책장 앞에서 툭 멈추었다. 무뢰한의 시선 역시 만년필을 따라 데구르르 구르다가 책장 앞에 가지런히 찍힌 발자국에 멈추었다. 만년필이 닿아 바닥에 번지기 시작한 핏자국은 찍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뻘건 빛을 띠었다.
류패현은 그 방에서 흑단으로 만든 상자를 하나 찾았다.
호숫가에 비친 달이 자개로 박힌 상자였다.
정말로, 당신은…….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류 대인은 내쫓았던 진 부인의 사생아를 다시 데려왔다. 비루먹은 여우 새끼 같던 어린애는 그를 은인으로 모시며 벌써부터 오만하기 짝이 없는 도련님의 아래에서 양껏 굴렀다. 내쫓아 놓고 다시 데려오는 그 행동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싹수 노란 도련님이건 나름대로 얌전한 사생아건 그 결정에 딱히 의문을 표하진 않았다. 아이들은 자라났고 산주는 침묵했으며 풍수지리사들은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한때 황룡회를 뒤집어 놓은 유령 소동은 기억 저 편으로 흩어졌다. 진 부인의 방은 다시 닫혔다. 누구도 다시는 그 방에 걸음하지 않았다.
진암월은 죽었고, 그 방에는 더는 그 무엇도 남지 않았으므로.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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