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의 약속
직접적인 행위 묘사는 없지만 내내 성적인 암시를 하고 있으므로... 아무쪼록 주의해주세요.
"인연의 붉은 실이라고 하잖아, 보통."
단둘이 있을 때 그의 발화는 때때로 그렇게 갑작스러웠다. 나는 그럴 때마다 대답 대신에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수면등의 어슴푸레한 불빛이 땀에 젖은 등 위로 흘러내려 그의 반신을 돋보이게 했다. 그 광경은 아이돌 코토부키 레이지의 화보 촬영 현장을 연상시켰지만, 그것과는 또 달랐다. 지금의 그는 원한다면 바로 팔을 뻗어 내 품에 끌어안을 수 있었다.
"너와 나는 같은 실로 묶여 있는 인연이자 운명이야, 그렇게 말하지."
나는 그 비유를 듣고 연인의 손목을 묶은 붉은 실 따위를 떠올리는 대신에, 그의 등에 옅게 그인 붉은 손톱자국을 보았다. 꽤 아팠겠다 싶어 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행위가 끝난 뒤 그가 아프다거나 상처가 남았다는 일로 불만을 토로하는 일은 없었다. 내가 그에게 매달리며 등에 손톱을 세울 때도 그저 기쁘게 웃으며 내게 입 맞출 뿐이었다. 그게 그의 사랑 방식일 거라고 나는 추측했다. 무대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사랑에 따르는 고통마저도 너를 사랑하는 증거라는 걸 떠올리면 아프지 않다고.
"저기, 란란. 듣고 있어?"
"응? 어, 아니."
"정말이지~"
어느새 내 코앞에 얼굴을 갖다 대고 있는 그가 볼을 부풀렸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한쪽 볼을 찌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는 양쪽 모두에게 멋없는 행위인 것 같아서 꾹 참기로 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데?"
그가 다시 서서히 멀어졌다.
"참 예쁘게도 말하는구나 싶어서."
"…"
"사랑하는 상대를 내게 묶어두고 싶다는 건 꽤 어두운 욕망이잖아."
"하?"
십 대들이 좋아할 법한 유치한 낭만에 무슨 어른의 욕망을 덧씌우는 거야, 너는. 그런 말을 하려다가 나의 것보다 진한 회색을 띤 눈동자가 조용히 깜박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어둠 너머로 홀로 편지를 띄우는 밤바다의 등대처럼 무언가를 전하려고 깜박일 때면 나는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무슨 어리광이나 고집이 흘러나오든 간에 전부 들어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나는 너를 내게 묶어두고 싶어. 내가 보이는 곳에만, 손닿는 곳에만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빛나는 건 좋지만 너무 멀리 가지 말아줘. 나를 두고 가지 말아줘. 나에게서 벗어나지 말아줘. 좋아해, 정말 좋아해…. 이런 나라서, 미안해. ……사랑해."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은 언제나 자책으로 끝이 났다. 누워있는 내 몸 위로 그의 사랑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화면에 비치는 아이돌 코토부키 레이지의 사랑만큼 반짝이거나 달콤하지 않고, 질척하게 달라붙어 놓아주지 않으려는 사랑이었다. 뜨겁고 붉은 그것을 핥으면 씁쓸한 맛이 나겠지. 마치 심장과 같다.
내 심장을 꺼내어 네게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네 심장과 같은 박동으로 뛰고 있어.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러나 속으로만 그렇게 말해서는 그가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평소엔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주제에 이런 화제에서는 지레 겁을 먹고 내 생각이 자신과는 다를 것이라 생각하며 물러선다. 그것 또한 그의 사랑방식이었다.
그는 내 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긴 앞머리에 가려 표정은 볼 수 없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고 팔을 뻗어서 갈색 커튼을 걷었더니 그가 놀란 듯 몸을 움찔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애써 웃어 보이는 회색 눈동자를 보며 다른 쪽 팔로 침대맡을 더듬자 레이지가 촬영장에서 가져왔다는 하트 모양 상자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침대로 밀어붙일 때 떨어뜨리고 흔들린 탓에 내용물이었던 장미꽃은 이리저리 흩뜨려져 있었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대신 포장으로 묶여있던 진녹색 리본을 가볍게 당겨 풀었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지의 왼손을 잡고 그 위에 리본을 올려놓았다.
"란란…?"
"묶어. 이걸로."
"어?"
방금까지 심각한 표정이었던 그의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와서, 나는 무심코 웃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 위에 나의 왼손을 덮었다. 나보다 조금 작은 손을 꽉 쥐면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재촉하듯이 손가락을 들어 그의 약지를 톡톡 치자 그제야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여전히 한심하게 입을 벌린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리본을 들어서 내 왼손 약지에 묶기 시작했다. 내가 하라고 한 것이었지만, 반지를 끼우듯이 조심스럽게 리본을 묶는 그의 행동은 나를 왠지 모르게 부끄럽게 만들어서 어느새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슬그머니 다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재주 좋게 자신의 왼손 약지에 반대쪽 끝을 묶고 있었다.
흐릿한 조명 아래에서도 똑똑히 보이는 진녹색은 아이돌인 그의 이미지 컬러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것은 우리 둘을 연인으로 묶는 인연의 끈이 되었다. 어느 쪽이든 좋다. 어느 형태든 좋다. 나는 분명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 것이고,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을 직접 전하는 데엔 여전히 재주가 없는 나였지만, 그래도 한 마디만은 꺼낼 수 있었다.
"사랑해, 나도."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가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꽤 단단하게 묶인 리본 덕에 -나는 그 사실을 알아채고 이것도 그답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내 팔은 절로 들어 올려졌고, 뚜둑 소리가 나며 어깨가 뒤로 젖혀졌다.
"앗! 멍청아, 아프잖아!"
"아아! 정말이지, 내 연인은 너무 멋져서 탈이야…!"
가슴 위로 우리 둘의 왼손이 나란히 얹혔다. 그가 주먹을 쥐어 내 가슴팍을 팍팍 치며 나를 원망하는 말을 몇 마디 내뱉었고, 나는 오른손으로 그 주먹을 잡았다.
"왜. 또 반했어?"
"우우우… 그래, 맞아!"
그가 삐진 아이처럼 입술을 빼쭉 내밀었다. 이번에는 참지 않고 그 입술에 입을 맞췄더니 그 키스는 다음 순간 더 깊은 키스로 돌아왔다. 방금의 행위가 무색하도록 열을 되찾은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몇 번인가 도달했던 몸은 그의 손길이 닿는 곳부터 다시 화끈거리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재우지 않을 거야."
오늘 밤에 두 번째로 내 위에 올라탄 이 남자에게는, 닳디 닳아서 이제는 웃음거리로 쓰이는 편이 더 많은 문구마저도 감쪽같이 소화하여 달콤하게 저리는 말로 바꿔버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에게 붙잡힌 심장은 세차게 북을 친다. 그가 쾌락을 가르친 몸은 이미 말단에서부터 떨리고 있다. 어서, 어서.
"레이지…"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재촉하며 손을 뻗자 그가 내 왼손을 쥐었다. 그리고 리본이 묶인 자리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회색빛 눈동자 안에서 깜박이던 등대의 불빛은 어느새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욕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무심코 침을 삼켰다.
이 남자의 욕망과 마주할 수 있는 건, 욕망을 받아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오직 나뿐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독점욕'이라 부르는 게 옳을 듯한 묘한 환희를 느끼고, 나는 재차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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