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이설] 매화

아기 이설과 검존이 만나서 대화를 함

글러먹음 by 호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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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의 시신에서는 짙은 매화향이 났다.

아마도 아비가 이설의 기억 내내 붙들고 있었던 검법 때문일 것이라고, 이설은 막연히 생각했다. 광기에 절은 사람처럼 꼭 매화를 피워야한다고 되뇌이던 자가 아니었던가. 지학도 지나지 않았던 유이설은 움직이지 않는 아비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보다가, 어디서 보았던 절차대로 아비의 장례식을 어설프게 올렸다. 헤진 이불을 덮어주고 유품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동안 유이설의 주변에는 미처 개화하지 못한 매화 꽃봉아리들이 쌓였다. 아비가 개화시킬 수 없었던 미련들이 유이설을 집어삼킬 것처럼 치솟았다. 이내 이설이 그것에 잡아먹히려던 찰나,

"… 어린아이?"

매화향 나는 사내가 이설을 잡아 끌어올렸다.

오두막 안에 매화가 가득했다. 이설의 몸에 덕지덕지 늘러붙은, 불완전한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잔예와 남자의 도복 군데군데에 박힌 매화자수,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에 남은 향. 이설의 긴 머리칼에 엉킨 매화를 불친절하게 털어준 남자는 한쪽 팔이 없었다. 아비가 쓰러지기 며칠 전부터 숱하게 뱉던 사혈의 향이 나야할텐데 남자는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피 대신 매화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설의 까만 눈에 남자가 흘리는 붉은 매화가 들이찼다. 그걸 본 순간 어째선지 그를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설은 남자를 붙잡았다.

"뭐야?"

"가르쳐줘."

"아니, 뭘?"

"검법."

"아니, 내가 왜? 그리고 높임말 안 쓰냐, 요 꼬맹이가."

"완성시켜야해…… 요."

"그러니까 뭘-"

"이십사수매화검법!"

사람이 낸 소리라기엔 쇳소리에 가까운 것이 터져나왔다. 이설은 남자의 새까만 도복 소매를 붙잡아 늘어졌다. 오랜 공복으로 기력이 없어진 아이의 몸은 짧게 외친 말에도 쉽게 지친다. 힘에 부쳐 남자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가쁘게 헐떡이면서도 소매를 놓지 못하는 이설의 까치집 같은 머리칼 위로 손이 툭 올라왔다. 좀 쉬어라, 아해야. 잠시의 침묵 끝에 이어진, 나직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괴롭게 갈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끝으로 세상의 빛이 꺼졌다.

사람의 잠을 깨우는 소리는 여러 것이 있다. 장작이 타들어가다 재만 남아 불길이 픽 꺼지는 소리, 바람에 덜컹이는 창틀 소리, 솥에 담긴 것이 끓으며 나는 기포 터지는 소리, 공기를 세차게 가르는 소리. 평소라면 하나의 소리만 들려야 할 아침에 네 가지 소리가 뒤엉켜서 나고 있었다. 겨우겨우 눈을 뜨고 가물거리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잠을 쫓아내니 제 앞에 있는 화톳불에서는 묽은 미음이 끓고 있었고 덜컥거리는 창문 너머로 누군가가 검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검로를 따라 갈라진 공기가 창틀을 흔드는 것을 확인한 이설은 옷자락 아래를 부여잡고 문틀을 넘었다.

남자가 매화를 피우고 있었다.

아비는 화산에서 검법을 배웠다. 도중에 그만두고 본산을 떠나긴 했어도 한 번 몸에 배인 검술의 기초가 쉬이 흩어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늘 불안전한 매화를 피워내도 아비의 다리는 지독하게 단단했던 것을, 유이설은 기억하고 있었다. 어설프게나마 매화를 피워내던 검끝이 요란하게 흔들려도 다리만큼은 고목의 뿌리처럼 단단했었다. 남자는 기억 속 아비의 모습 그대로 검로를 그렸다. 아버지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그러나 요사스럽고, 동시에 가장 날카로운 투로가 공기를 가르고 그 틈새에 붉은 꽃잎을 비집어넣고 있었다.

아비가 바랬던 투로도 저것이었을 것이다. 유이설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던 남자가 기척을 깨달은 듯 검을 고쳐잡아 검집에 밀어넣고는 이설을 향해 몸을 돌렸다.

"… 어, 일어났냐."

"매화검법."

"그래, 이십사수매화검법… 아니, 근데 이놈시키가. 요 붙이라니까?"

"이십사수매화검법요."

"야."

요 쪼끄만한 애를 팰 수도 없고. 남자가 뒷목을 잡고 넘어가는 시늉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의 옷소매를 붙잡고(그의 손을 잡기에는 이설의 키가 작았고 남자의 키가 너무 컸다) 들어간 집에는 남자가 수습했는지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던 모포가 없었다. 그쪽을 쳐다보는 이설의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쓸어내리면서,

"우선 수습은 해 뒀는데 좀 이따 뵈러 가."

한 마디 하고는 이설을 솥 앞에 앉히고 투박한 손길로 미음 한 그릇을 내밀었다. 이설은 양손으로 그걸 받아들고는 하얗게 올라오는 김이 없어질 때까지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이설이 죽그릇을 바라보는 동안 순식간에 세 그릇을 비우고는, 국자 끄트머리로 이설의 그릇을 툭 쳤다. 안 먹어? 하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는 것이 영락없이 산 아래 저잣거리에서 왈패 짓을 하고 다니는 자들이랑 똑같았는데 마른 후각에 느껴지는 미음 냄새는 아비가 끓여주고는 했던 죽과 똑같았다. 이설은 이윽고 천천히 수저를 들어 미음을 떠 먹었다.

남자는 턱을 괴고 이설이 죽을 다 먹을 때까지 오래오래 지켜봐주었다.

남자는 자신을 '검존'이라고 칭했다.

검의 지존, 그러니까 그 시대에서 가장 검술에 통달한 자. 이설이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대충 "잘 싸우는 사람." 이라고 일축하고는 작은 목검을 내밀었다. 검존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보다 반하고 몇 치 정도가 더 짧은 길이였다. 이걸 왜 주냐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니 검존이 환장한다는 얼굴로 이설을 내려다보았다.

"이십사수매화검법."

"… 응."

"어허."

"…… 네."

"그래, 그거. 가르쳐달라며? 당장 그걸 배우긴 어려우니까 육합검이라도 가르쳐주려고 했지."

물론, 검존은,

끔찍하게도 애들을 못 가르쳤다.

이걸 왜 못 하냐며 저 혼자 화를 내다가, 마음을 다잡고 손으로 자세를 잡아가며 가르쳐주다가, 다시 왜 못하냐며 화를 냈다. 지존이라 불리는 이들은 다 성격이 괴팍한가보다. 혼자 망아지처럼 날뛰는 검존을 바라보던 이설은 사천당가의 선조가 들으면 길길히 날뛸만한 결론을 내리고는 마저 검을 휘둘렀다. 검존의 손가락이 어깨와 오른발의 올바른 위치를 가리키면 자세를 고치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손바닥이 쓸리는 것이 아파 어설프게 감아둔 천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고 나서야 검존은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근처에 있던 바위를 내리쳤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 비산했다.

"… 날 저렇게 친단 소리구나."

"아니거든!!"

검존이 미치고 팔짝 뛰는 동안 이설은 미련 없이 손에 감은 천을 풀어내고 종종걸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저렇게 날뛸 땐 뭐라도 입에 넣어주는 것이 좋았다.

“야!! 이 꼬맹이 어디 있 으브븝- …… 이거 맛있네.”

”어제 산 내려갔다가 얻은 건데.”

”언제 또 내려갔다가 왔어.”

”오후에 산 타러 갔을 때… 요.”

”그냥 말을 놔라, 놔.”

툴툴대면서도 썩 싫은 건 아니었는지 검존은 웃고 있었다.

오래 지냈다고 느낀 것과 달리 날짜를 손가락으로 세어보던 이설은 검존과 함께 있었던 시설이 이제 겨우 칠주야가 지났음을 깨달았다. 검존이 요리를 못 하는 건지 아님 알고 있는 조리법이 거의 없는 건지 끼니는 늘 비슷비슷한 음식이 나왔으나 꾸준하게 식사를 챙긴 몸은 착실하게 살이 붙고 근력이 생겼다. 검을 휘두르는 방법에도 조금씩 요령이 붙었다. 어깨 너비만큼 벌린 발의 어느 곳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할 것. 어깨를 펴고 상단세를 잡아 내리치되, 검로부터 검끝, 검자루, 손잡이, 그걸 붙잡은 제 손까지 전부 일직선상에 있을 것……. 그런 것들에 그럭저럭 몸이 익숙해질 무렵 이설은 한밤에 빠져나와 아비의 무덤으로 향했다.

"어디 가냐."

걸렸다.

"무덤에…… 요."

"이 밤에 어딜 가. 같이 가."

"괜찮은데."

"됐고."

남자의 손에는 아비가 죽기 전까지 붙들고 있던 책이 있었다.

이설은 그새 봉분 위로 자란 잡초를 뜯어냈다. 들짐승이 파헤칠까 싶어 곁에 심어두었던, 동물을 쫓는 풀을 다시 심고 묘비 대신 꽂아두었던 아버지의 검도 다시 세웠다. 그걸 물끄럼 바라보던 남자가 이설의 어깨를 붙잡았다. 남자는 한팔밖에 없었던 탓에 이설의 어깨에서 마른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달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아래에 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어서, 이설은 남자의 손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몸을 물렸다. 이설이 남자보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자 남자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이설은 부러 듣지 않았다. 매화향이 남은 남자는 필시 화산의 검수였다. 화산의 검수가 화산에서 도망친 제자에게 할 말이 없을 리가 없었다. 이설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팔밖에 없는데도 하늘처럼 넓어보였던 검존의 등이 작아 보일 정도로 물러났다.

… 이대로 눈을 감았다 뜨면 남자가 없어져 있을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는 것마저 이상한 일이다. 남자는 피 대신 매화를 흘렸고, 잠을 필요로 하는 자가 아니었으며, 몰락한 화산에서 나올 수 없는 매화였다. 검존이라 불렸던 이는 백 년 전에 죽었었다고, 한때 아버지는 이설을 무릎 위에 앉혀두고 화산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리 말하고는 했다. 그러니까 이설은 매화 꽃봉오리 속에서 자신을 끌어올린 남자가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다. 지학이 지나지 않은 아이마저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거짓말을 여태 현실이라 믿던 것은 단지 검존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설은 매화를 피워내야만 했다. …… 아비의 유언이 저주처럼 박혀들었다고 해도, 검을 잡고 그 끝으로 매화를 피워내야 하는 숙명이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머리칼을 흐트렸다.

"아해야."

"……."

"화산으로 가라."

"……."

"화산으로 가서… 좀 더 전문적인 검법을 배워. 나한테 배우는 것보단 훨씬 나을테니까."

팔 일째 동이 터오고 있었다. 하얀 옷자락 위로, 햇볕이 닿은 곳마다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꽃잎이 흩어지며 검존의 몸도 사라지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이설에 눈을 깜박였다. 검존은 씁쓸한 얼굴로, … 화산의 맥을 이을, 어린 검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네게 미래를 맡겨야 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안다. 그러나 검존은, 손에 천을 감아가며 몇백 번이나 내려치기를 연습하던 아이를 한 번 믿어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가 또 이 아해를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검존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이설의 머리를 투박한 손길로 털어냈다. 굳은살이 박힌 손끝 사이사이로 매화가 떨어졌다. 유이설은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설의 몫만큼 검존이 웃었다.

이내 다시 눈을 떴을 땐 화산의 장문인이 이설을 끌어안은 채 조용히 통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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