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열감기
※ 큰 스포일러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암향매화검 제작 ~ 북해 에피소드까지는 보고 읽으시면 좋습니다.
※ 시점은 천우맹 개파식 전후 즈음으로 생각하고 손 풀 겸 정말 가볍게 썼습니다. 퇴고 X.
“네?! 청명이 녀석이 아프다고요?!”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조걸이 입을 떡 벌리고는 청명의 처소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평소보다도 더 격하게 놀란 모양새에 윤종이 진정하라고 말하려다가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조걸의 저런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무인이라고 아프지 말란 법은 없으나, 그 아프다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청명이니까.
“소소에게 전해 듣기로는 열감기라고 하더라. 녀석이 연무장에 모습을 안 비치면 내가 찾을 것 같아 전달해주고 방금 의약당에 갔다. 아마 오늘은 내내 처소에 있을 것 같다더구나.”
“그, …녀석이 그걸 가만히 받아들였을까요?”
“안 듣고 싶어도 아프다는 녀석이 그 몸으로 어딜 가겠느냐? 그래봐야 화산일 텐데.”
청명이 아프단 소식에 놀라 멈추었던 목검을 다시 바르게 잡아 쥔 조걸이 여전히 처소 쪽을 힐끔거렸다.
“의외네요. 녀석이 감기에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걸이 너도 그렇게 매번 옷도 제대로 안 여미고 다니다가 감기에 걸려 소소에게 끌려가도 난 모른다.”
“에이, 뭘 걱정하십니까? 저는 살면서 감기에 걸린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튼튼한 몸이라고요.”
주먹으로 제 가슴팍을 가볍게 몇 번 두들기며 조걸이 우쭐한 목소리로 당당히 말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윤종이 낮게 중얼거렸다.
“원래 바보는 감기에도 안 걸린다던데…….”
“예?”
“…아니, 아무것도.”
윤종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제 녀석들에게도 수련이 끝나 덥더라도 물을 데워서 씻으라 일러둬야겠다. 요즘 같은 날씨에 방심하면 골골댈 테니까.”
“하긴. 슬슬 추워질 때가 되긴 했죠.”
수련하러 나오며 내내 춥다고 투덜댔던 놈들은 멀쩡하고, 정작 그놈들을 때려잡을 듯이 잔소리하며 기합으로 이겨내라던 놈은 열감기에 드러눕다니. 하기야, 청명은 예전부터 추위를 곧잘 타곤 했다. 북해에 가서 극한의 추위를 맛본 이후로는 그래도 좀 괜찮아졌나 싶더니, 그새 여기저기 쏘다니며 무리했던 몸뚱이에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가 딱 겹친 것이다. 그래도 청명쯤 되는 무인이 열감기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없이 생각을 이어가던 조걸이 별안간 갑자기 처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디 가느냐?”
“청명이 녀석 좀 보러 가야 할 것 같아요.”
조걸의 말에 윤종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개인 수련을 하려다 말고 청명을 보러 간다니, 평소 앓을 일이 별로 없는 막내 사제가 아프다니 그래도 걱정이 되긴 했나 보다. 윤종 또한 제 목검을 허리춤에 다시 차며 옅게 미소 지으며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래도 나름 막내 사제 녀석이 아프다고 하니, 걱정되긴 하나 보구나?”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응?”
그게 아니야? 윤종이 얼떨떨한 낯으로 멈칫했다. 조걸이 주먹을 콱 쥐어 보이며 말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 구경이 어디 흔한 일입니까? 소소도 지금은 의약당에 가 있을 테니 이럴 때가 아니면……, 악!”
짧게나마 걸이 녀석이 청명을 크게 걱정한 줄 알았던 내가 바보지. 와중에 조걸의 말에 조금이나마 혹했다는 게 문제다. 의약당의 인정이 없으면 수련을 쉬는 것도 잘 봐주지 않던 청명이 아닌가. 물론 평소보다야 나름 조절해주기는 하나, 어찌 되었건 화산의 제자들은 어지간한 일로는 절대 수련을 쉬는 일이 없었다. 그건 청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련을 더 했으면 더 했지, 절대 덜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 청명이 수련까지 쉬어가며 처소에 처박혀있다는 소식은 그가 화산에 입문한 이래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당소소라는 후폭풍을 견딜 자신이 있다면 빠져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어렴풋하게라도 들렸을 소란도 없었던 것을 보면 청명의 열감기가 생각보다도 더 크게 온 것일 수도 있을 테다. 그리 생각하니 윤종 또한 한 번 상태를 살펴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얻어맞은 제 머리를 감싸 쥐고 연신 조잘대던 입이 백매관에 들어오자 다물렸다. 지금은 청명만이 남아있을 백매관에는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잠잠했다.
청명의 처소 문 앞에 선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청명을 불러보았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걸이 ‘그 녀석 튄 거 아닐까요?’라 말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자마자 안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청명의 상태를 확인한 두 사람은 내심 충격을 받았다. 물론 청명이 화를 참지 못해 뒷목 잡고 넘어가는 꼴이야 수십 번도 봤다. 제 뜻대로 안 될 것 같으면 냅다 드러눕는 꼴도 봤고, 얼마 전에는 무리하여 한철을 잘라낸 뒤에 결국 끙끙 앓아누웠던 모습도 봤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는 청명이 만신창이가 된 모습은 보았어도 그가 고통에 시달리던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다쳐도 곧잘 털고 일어나서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요란하게 싸돌아다녔으니까.
가까이 다가가 보니, 소소가 올려두고 간 것으로 보이는 수건이 청명의 이마에 가지런히 얹어져 있었고, 침상 옆에 있는 서랍장 위에 올려둔 대야에 찬물이 채워져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연신 끙끙 앓으며 청명이 뱉어내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청명의 얼굴에는 물수건의 물인지 땀인지로 물기가 가득했다.
‘분명 얼마 전에 소소가 다녀갔을 텐데.’
그새 이마에 얹어진 물수건이 따뜻하게 데워져, 얹으나 마나인 상태가 되었다. 수건을 걷어낸 윤종이 자신이 어릴 적 한 번 크게 앓았을 때, 흐린 기억 속에서 현상이 해주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마에서 걷어낸 수건에 물을 묻혀 짜준 다음 꼼꼼하게 땀을 닦아내었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그 손길이 느껴졌는지 청명이 몇 번 입을 벙끗거렸다. 하지만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것은 없었다. 조걸 역시 말은 그리 했어도 청명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지, 윤종의 옆에서 기웃거리며 손으로 청명에게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몇 번 더 물에 수건을 적시려던 윤종은 대야에 담긴 물이 따뜻해졌음을 알아챘다.
“걸아.”
“네? 네, 사형.”
“물을 좀 갈아와 주겠느냐? 그 김에 수건도 한 번 빨아와야 할 것 같다.”
그 말에 몸을 일으킨 조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윤종으로부터 수건을 건네받아 대야를 들고서 방을 나갔다. 문밖에서 멀어지는 발소리를 가만히 눈으로 좇던 윤종이 고개를 돌려 여전히 호흡이 거친 청명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땀을 닦아내어 그런지 아까보다는 상태가 나아진 듯해 보였다. 물론 그는 의술을 배운 적이 없어 차마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휑한 방 안에는 여분의 옷과 목검, 그리고 암향매화검 외에는 달리 있는 게 없었다. 윤종은 제 몸이 다른 이들보다 서늘하다는 것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도 사람을 저 멀리 날려버리는 막내 사제의 습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아픈 이를 상대로 할 생각은 아니다만, 혹여 열 내리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손을 얹었다가 백매관 밖으로 날아가기는 조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각오를 했던 것과는 다르게, 윤종이 청명의 이마에 손을 얹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간 다물렸던 청명의 입이 다시 무어라 말하는 것처럼 벙긋거리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희미하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응?”
“……사, 형…….”
형편없이 쩍 갈라지고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가 뜨거운 숨과 함께 툭 뱉어졌다. 그제야 청명이 몇 번이나 뻐끔거리던 말을 알아챌 수 있었다. 청명이 부르는 사형이 제가 맞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찾는지도 모르겠지만……. 윤종은 청명의 열로 따뜻하게 데워진 손을 떼고 반대편 손을 다시금 그의 이마에 얹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청명아. 네 사형들이 여기에 있다.”
저 밖에서 네 가르침으로 검을 휘두르고, 절벽을 오르내리고, 네 열을 수건과 함께 머금어 따뜻해진 물을 냉수로 갈아오며, 임시방편으로나마 그의 이마에 제 손의 냉기를 전해주려는 네 사형들이.
윤종의 말과 진심이 전해졌는지, 청명이 느리게 눈을 떴다. 흐린 눈동자가 제 이마를 짚은 손에서부터 윤종의 낯까지 천천히 굴러갔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던 청명의 눈이 다시 감겼다. 다행히도 아까보다는 훨씬 안정적으로 숨을 내쉬고 잔뜩 찌푸렸던 얼굴도 조금은 편안해진 듯해 보였다.
“사형. 물도 갈고 수건도 빨아왔는데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조걸이 냉수를 넘칠 듯 그득히 담아온 대야를 원래 있었던 자리에 올려두며 어울리지 않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종이 얹었던 손을 떼자, 조걸이 냉수에 적신 수건을 짜내어 청명의 이마에 올려두었다.
“슬 소소가 확인하러 올 것 같으니 나가자꾸나. 녀석도 아까보다 상태가 나아졌고.”
윤종이 자리를 일어나며 말하자,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끝까지 청명을 힐끔거리다가 조심스레 그의 처소 밖으로 나왔다. 말없이 걷다가 백매관을 빠져나갈 즈음에서야 조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저희가 처소에 막 들어갔을 때 본 청명이는 그, 좀…… 힘들어 보였는데, 잠깐 다녀온 사이에 상태가 많이 나아졌던데요. 사형, 사형도 소소처럼 의약당에서 모셔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 먼 미래에 장문인은 누가하고?”
윤종이 장난스레 대꾸하자 조걸이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청자배 녀석들을 하나둘씩 떠올리나 싶더니 이내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사형은 평생 청자배 대사형 하십쇼. 꼭 장문인 되세요.”
“오냐.”
그리 실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요란스레 딴지를 걸어대던 그 목소리가 새삼스레 떠올라서, 윤종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던 청명의 눈빛에서 어렴풋하게 어린 그리움을 느꼈다. 청명이 그사이에 윤종을 알아보았을지, 알아보지 못했을지는 영영 알 수 없겠지만, 그저 윤종이 아팠을 적에 현상이 곁에서 돌봐주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처럼, 청명 또한 아플 때 누군가 보살펴주었던 기억이 있는 듯해 보여서……. 그 안도감에 괜스레 눈을 꾹 감았다가 뜬 윤종이 옅게 미소 지었다.
“이제 수련이나 열심히 해야겠구나.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죽도록 혼나기 싫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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