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백천청명] 창문

Pumpkin Time by 화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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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풀기용 단편. 퇴고 X.

※ 요즘따라 장문인x일대제자 백청이 왜이렇게 좋은 느낌을 줄까요…….

 

 

 

열일곱 번. 백천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 횟수였다. 서른세 번. 이건 백천이 땅이 꺼질 듯 뱉어낸 한숨의 횟수였고.

“거, 장문사형. 창문 좀 그만 보십시오. 창문에 꿀 발라뒀습니까? 한숨도 좀 그만 쉬시고. 그러다 땅 꺼지겠습니다.”

“들어봐라, 상아.”

“뭘요.”

백천은 냉정한 사제의 목소리에도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은 채 투덜대기 시작했다.

“그간 죽을 듯이 일했으니 한동안 파업할 거랍시고 혼자 뛰쳐나간 것까지는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간 녀석이 그 어린 나이에 여기저기서 일하지 않았더냐. 쉬어도 별 말 안 할 텐데 자기가 알아서 일에 파묻혀 산 거면서.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내가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잖아. 어디에 갔고 어디로 갈 건지, 언제쯤 돌아올 건지, 하다못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화산에 연락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 이 넓디넓은 중원에 널린 게 개방도들일 텐데, 그것 하나 전하지 않는 게 말이나 되느냐? 내가 개방에서 방문할 때마다 청명이 녀석 소식이 있는지 전해 들어야겠냐고!”

아, 또 시작이군.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더니, 아까보다 하얘진 낯으로 쓰린 속을 달래려는 듯 뜨거운 차를 꾸역꾸역 들이켜 마시는 백천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백상이 멈추었던 붓을 다시 움직였다.

“뭘 새삼스레 그러세요. 청명이 녀석이 원래는 성실히 연락하던 녀석인 줄 알겠습니다. 꼬박꼬박 연락해오면 그게 청명입니까?”

그건 청명뿐만 아니라 나머지 오검도 마찬가지였다. 청명을 보고 배우면서 빠르게 일을 해결하고 복귀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도 옮은 것이다. 게다가 순식간에 많은 일을 하고, 다양한 곳을 오갔기 때문에 중간마다 보고하기가 어렵기도 했다. 제때 연락이라도 좀 하면 안 되겠냐던 사문의 어른들을 떠올린 백천이 반성하듯 긴 한숨을 뱉었다. 그때 무슨 심정으로 깊은 밤에 산문 앞을 서성이며 소식을 기다렸을지, 어떤 마음으로 복귀한 그들에게 제때 연통이라도 좀 넣으라며 혼을 내셨던 것인지를 새삼스레 이해하고 만 것이다.

“이런 심정일 줄 알았으면 어릴 때 장문인께 연락 좀 잘 넣을걸.”

“반성하시는 건 참 좋은 일인데, 계속 그렇게 붓 놓고 녀석만 기다리다가는 오늘도 쌓인 일 하느라 늦게 주무실 겁니다.”

“……그래, 자각시켜줘서 참 고맙다.”

사제 녀석이 어쩜 이리도 차분한지. 끙, 짧게 앓는 소리를 흘려보낸 백천이 다시금 붓을 들었다. 다시금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종이 위로 붓이 노니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그래도 날이 추워지기 전에는 오면 좋으련만.”

안 그래도 추위를 많이 타는 녀석이지 않나. 화산이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저 밑보다야 조금 더 춥다지마는, 매년 겨울이 되면 얼어 죽네마네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던 녀석을 떠올리던 백천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더니 작은 웃음소리가 피식 새어 나왔다.

“장문인, 개방에서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에 다시금 붓을 내려놓은 백천이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들어오라 말했다. 서신 꾸러미를 전달하고 나간 이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백천이 빠르게 서신들을 훑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소식들에 그러면 그렇지, 싶어 손이 느려지려던 찰나, 눈에 보이는 익숙한 이름에 백천의 손이 멈추었다.

“상아.”

“또 왜요.”

“청명이가 보낸 것도 있는데?”

“……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영 소식이 없는 청명을 향한 섭섭함을 토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때마침 그의 편지가 화산에 닿는단 말인가. 겉에 대충 휘갈겨 쓴 청명의 이름 두 글자를 손으로 쓸어보려던 백천의 손이 허공에서 일순 멈추었다. 불쑥 든 반가움도 잠시, 차마 뜯지 못한 청명의 편지로 두 사람의 떨리는 시선이 모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술 마시다 시비가 걸렸다고 해도 청명이라면 그놈을 두들겨 패서 입단속을 시켰으면 시켰지, 굳이 화산에 이를 놈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자신이 어디로 갈지 말할 놈도 아니었고, 여행을 떠난 감성에 젖어 서신을 보낼 놈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청명이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제발 무슨 문제가 생겨 보낸 것만큼은 아니기를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히 빌며 백천이 조심스레 종이를 펼치자, 짧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사숙, 자기 전에 창문 열어놔.

짧은 편지에 느리게 눈을 끔뻑이던 백천이 편지를 들어 등불에 가까이 대어보아도, 몸을 돌려 편지에 햇빛을 비춰도 더 드러나는 글자는 없었다. 그러니까, 종이 한가운데에 적힌 저 한 줄이 끝이란 소리다. 여백의 미가 아주 그득한 편지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침묵 끝에 백천이 종이를 다시 접으며 말했다.

“흠흠, 무슨 일은…… 없는 것 같지?”

“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일하다가 저 꼴을 다 보는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며 더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 백상이 고개를 숙인 뒤 일을 마칠 때까지 들지 않았다.

 

 


 

 

자시를 넘길 즈음에야 일을 마무리한 백천이 처소에 들어가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창문부터 열었다. 청명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언제라도 쉬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활짝 열린 창문을 타고 들어온 달빛이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그의 방 안을 그득히 메웠다.

등불에 불을 붙이고, 늘 하던 대로 무명천을 꺼내어 검날을 닦았다. 장문 자리를 넘겨받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아서인지, 오늘처럼 새벽에 잠깐 검을 휘두르고 난 뒤로는 온종일 검보다는 붓을 더 많이 드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늘 처음 검을 잡았던 날과 같은 마음으로 검을 닦았다. 이러고 있을 때면, 백천을 툭툭 건드리고 장난을 쳐대던 청명도 얌전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백천이 검을 닦는 모습을 보며 청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는지는 아마 백천이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괜히 그 시선이 민망하다거나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그의 눈빛에 깃든 감정이 안쓰러움이나 자책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검집에 검을 느리게 밀어 넣은 백천의 시선이 자연스레 창밖으로 향했다. 일부러 평소보다도 더 느리게 검날을 닦았는데도, 여전히 기다리는 이의 소식이 없다. 귀를 기울여도 들리는 것은 간간이 우는 풀벌레 소리와 바람에 풀이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올 줄 알았더니.’

하기야 청명도 창문을 열어두라고만 했지, 오늘 도착할 거라고 적어두지 않긴 했다마는, 어쩐지 그라면 서신이 도착할 즈음에 맞춰 화산에 올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도덕경이라도 읽으며 조금 더 녀석을 기다려보고 싶었으나, 당장 내일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기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누웠다. 청명이 언제 들어올지, 들어온다면 무어라 이야길 나눌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을 상상하던 백천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코끝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바람 냄새가 스쳤다.

느리게 눈을 뜬 백천의 앞에는 침의 차림의 청명이 제 품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뜨인 눈에 보인 창밖은 여전히 어두워 언제 돌아온 건지, 또 옷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그 물음에 대충 답할 것이 분명하므로 잠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괜스레 투덜거리고 마는 것이다.

“……평소에 내가 문을 잠가두는 것도 아니고, 굳이 내가 이 날씨에 창문을 열고 자야겠더냐.”

“깼어? 당연히 창문으로 들어오는 게 제일 빠르니까 그러지.”

그럴 줄 알았다. 오냐, 네가 좋으면 좋은 거겠지. 백천이 한숨을 푹 뱉으며 품을 파고든 청명을 끌어안으려 했으나 청명은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그대로 앉았다. 얼결에 그를 따라 백천이 몸을 일으키자, 그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던 청명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숙이 안 깼으면 내일 주려고 했는데, 이왕 깼으니 빨리 줄란다. 자, 이거 받아.”

청명이가…… 선물?

유람 중에 화산으로 서신을 보낸 것도 놀라 까무러칠 일이었는데, 무려 여행을 다녀오며 그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단다. 혹시 그가 일에 파묻혀 죽어가던 동안 졌던 해가 사실은 동쪽으로 진 건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제 품에 안긴 녀석이 청명을 흉내 내고 있는 삿된 무언가인 건 아닐까? 충격받은 백천이 얼떨떨하게 손을 내밀자 청명이 조심스레 무언가를 품에서 꺼내어 그의 손에 내려놓았다.

“……매듭?”

“검술.”

실을 꼬고 엮어 검 손잡이 끝에 장식하는 것이다. 백천의 손 위에 얹어진 하얀 비단실로 매듭지어진 장식이 창문 너머 달빛을 받자 조금은 빛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쩐지 장인이 만들었다기에는 조금 서툰 듯해 보이는 꽃 매듭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청명에게 예술적인 재능은 없었지만, 의외로 그는 예술품이나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 높은 편이었다. 아무리 도문이라지만, 화산의 장문이 초라한 차림새로 다니는 꼴을 자신이 볼 수 있을 것 같냐며 불을 뿜어대는 청명의 성깔을 생각한다면 그가 이런 서툰 매듭의 검술을 사 올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백천의 두 눈이 커졌다.

“……청명아, 혹시 이거 네가 만든 거냐?”

“뭐야? 어쩐 일로 눈치가 빠르네, 어떻게 알아봤대?”

영 민망한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백천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한 청명이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처음엔 도관을 사주려고 했는데, 사숙이 새 도관을 마련한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래서 굳이 새 걸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았지. 그런데 화산이 이제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장문 자리에 앉으면서 넘겨받거나 선물 받은 것도 많으니까 영 줄 게 없더라고.”

백천은 장문인의 자리를 이어받은 뒤로는 하고 다니던 영웅건을 넣어두고 도관을 머리에 얹었다. 예비용으로 구비해 두었던 많은 영웅건은 청명이 돌아다니다 머리끈을 끊어먹고 들어올 때마다 머리끈의 역할을 해주기도 했고, 때로는 연인의 밤에 쓰이기도 했다.

새 검이라도 하나 만들어주자니 원래도 화산에서 쓰는 검은 그 당가에서 제작해서 보내주고 있고, 비싼 돈을 들여 옷이라도 한 벌 지어보자니 가끔 외출할 때 말고는 화산에만 틀어박혀 있는 백천에게는 다소 과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술처럼 한 번 마시고 나면 금방 사라지고 마는 것을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울리지 않게 며칠 동안 내내 고민하며 거리를 나돌던 와중에 청명은 우연히 실로 만들어진 검술을, 그리고 가판대 너머에서 손을 바삐 움직이며 실을 엮어대고 있던 이를 보게 된 것이다. 저걸 사다 줄까, 하던 차에 청명을 알아본 이가 진열된 온갖 물건들을 소개하다가 대뜸 한번 직접 만들어보겠느냐고 묻는 게 아닌가.

“요즘 검도 잘 못 잡는 것 같던데, 수련 시간 늘리라는 이 스승의 뜻을 담아 해봤지.”

민망함에 이리저리 덧붙인 변명에도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백천의 시선은 청명으로부터 떨어지질 않았다. 아무리 청명이 손재주가 좋다고는 하지만, 검만 잡으며 살아왔고, 성질도 급한 녀석이 생전 처음 만들어보는 매듭을 이리 꼼꼼히 잘 엮었을 리가 없다. 실을 계속 만지작거리면 보풀이 일고 부스스해지니 이 완성본을 만들기까지 아마 몇 번은 새로 만들어봤을 것이다. 물론 그러다 그냥 사다 줄걸, 하고 후회도 했을 것 같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만든 것을 이렇게 백천에게 선물하지 않았나.

“아, 마음에 안 들면 돌려주던가!”

내내 조잘거리며 반응을 유도해도 백천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만을 바라보자 청명이 괜히 큰소리치며 냉큼 다시 챙겨오려는 듯 손을 뻗으려 했다. 와락. 그 순간 멍하니 앉아있던 백천이 검술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청명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엥.”

“선물 고맙다.”

에휴. 청명이 그제야 작은 숨을 뱉으며 몸에 들어간 힘을 빼고 백천에게 기대었다.

“……마음에 드는 건 맞아?”

“마음에 들어. 그런데 애초에,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네가 날 두들겨 놓을 거 아니냐?”

“당연하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걸 줬는데 안 좋아하면 두들겨줘야지. 좋다고 할 때까지!”

어쩜 이 막돼먹은 인성은 수십 년이 지나도 고쳐지질 않을꼬. 이미 몇 명의 장문인들이 평생을 바쳐 청명의 인성 교육을 시도했는지 알 턱이 없는 백천이 흐뭇하게 웃었다. 물론 청명이 주먹을 들지 않았더라도 제 손에 들린 이 작고 서툰 검술은 천금을 준대도 바꾸지 않을 만큼 마음에 들었고, 소중했다.

“네 말대로, 스승의 뜻을 받들어 오늘부터 수련 시간을 늘려야겠구나. 아니면 일을 할 때도 검을 휘두를까?”

부둥켜안은 채 다시 침상에 누운 두 사람은 눈이 완전히 감기기 직전까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러고 있으니 이제야 집에 완전히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사숙.”

“……응?”

“다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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