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명이 누구야? “청명이 누구냐고요?” 같이 교양 수업을 듣는 후배가 숟가락을 든 채 정지했다. 마치 유이설이 1+1=? 의 답이 무엇인지 몰라 물어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청명이 누군지는 유이설도 알겠지. 정확히 ‘청명이란 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그렇게 싹수가 없냐?’라고 묻고 싶은 거 아니야?” “그게 그거죠. 이
0. 엔드 크레딧을 기다리며 깜빡…. 분명 눈을 떴음에도 어두워서 다시 깜빡, 눈을 깜빡인다. 그녀는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 묻혀있었다. 당황하지 않았다. 잠자코 기다리자 그녀를 둘러싼 주변이 어렴풋하게나마 천천히 제 모습을 찾아갔다. 그녀가 앉아있는 곳은 불그스름한 푹신한 가죽 의자. 손끝에는 컵을 놓을 수 있는 받침대가 움푹 들어간 것이 만져진다. 무
몸뚱이를 헤집는 십수개의 자상은 고열을 동반한다. 침상 밖으로 툭 늘어진 희고 가는 손이 보였다. 면 이불 아래 누운 이에게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침상 하나, 작은 탁자 하나, 그보다 작은 의자 하나. 단출한 가구로도 꽉 채워지 작은 방 안이 갑갑한 열기로 가득했다. 이불 아래 감추어진 가슴께가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것을 본 청명의 눈이 어둡게 잠
나는 종종 월하노인의 실존을 바라고는 했다. '언젠가 나도, 그가 붉은 실로 엮어놓은 이를 만나 함께 영원을 약속하고 싶다' 따위의 아이같고 낭만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가 실존해야 멱살을 틀어쥐고 내 부탁을 들어달라 협박이라도 건네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서슬 퍼런 눈으로 칼춤이라도 추며 겁박하다 보면 마지못해 네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겠노라
"옛날 생각 나지 않아?" 날붙이 끝에 매달린 빗망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무심한 낯이 기울었다. "언제." "그 왜, 그날도 비가 왔잖아. 사고가 대뜸 튀어나와서... 어이쿠, 사람 말하는데." 서늘한 날붙이가 아슬하게 목께를 스치고 지나갔음에도 남자는 지나치게 동요가 없었다. 검 끝에 부딪혀 튄 물방울이 더
"...제발 가만히 있어, 사고." 섞여드는 숨결 사이로 새어 나온, 도저히 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치 낮고 느른한 목소리는 차라리 먹잇감을 앞에 두고 인내하는 짐승의 그것과 같구나. 유이설의 여린 살결을 잘게 물며 떨어지던 청명의 머리 속을 스친 것은 무익한 상념의 조각이었다. 낮게 새어나온 한마디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작게 기울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