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풍잔월 曉風殘月
청명이설
"...제발 가만히 있어, 사고."
섞여드는 숨결 사이로 새어 나온, 도저히 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치 낮고 느른한 목소리는 차라리 먹잇감을 앞에 두고 인내하는 짐승의 그것과 같구나. 유이설의 여린 살결을 잘게 물며 떨어지던 청명의 머리 속을 스친 것은 무익한 상념의 조각이었다. 낮게 새어나온 한마디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작게 기울어지는, 머리 위에 뜬 둥그런 달 보다도 하얀 시리도록 아름다운 낯. 그 하얀 낯에 별처럼 박힌, 은은히 빛을 내는 흑색 눈동자에 잠시 시선을 두었던 청명은 머리 속을 스친 상념을 날리고자 다시금 고개를 숙여 달처럼 하얀 여자의 입가에 잘게 입술을 내리었다.
여인의 목께를 조심스레 쓸어대던 단단한 손가락 사이로 흑단같은 머릿결이 조용히 흘러 내렸다. 갓 피어난 꽃잎만치 부드러운 머리칼이 여린 물결처럼 흘러 손아귀를 스치듯 빠져 나가는 찰나가 아쉬워, 청명은 유이설의 목께를 쓸던 손끝을 곱아 내려 채 흘러나가지 못한 검은 비단을 모아 쥐었다. 희고 서늘한 피부 위를 떠돌던 입맞춤이 그의 흉터 가득한 손, 그 안에 갇힌 검은 물결 위로 내려앉았다. 나긋한 입맞춤 위로 또렷이 빛나는 매화색 눈동자를 마주한 유이설은 그 속에서 절절히 끓는 욕망을 읽어내고서야 참았던 숨을 느리게 뱉어 내었다. 매화꽃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을 향해 들끓는 이 감정을, 나는 채 삼켜낼 수 없노라.
살결이 아닌 곳에 두어번, 가볍게 입을 맞추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머릿결 위에 입술을 내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텅 빈 허공에 입을 맞추고 있는 듯한 공허한 소리가 연거푸 울렸다. 조급하게 굴고 싶지 않다는 청명의 나긋한 말에 기울였던 고개를 제 위치로 돌리며 가벼이 끄덕이던 유이설은 덧붙여진 음성에 흘러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러니까 자극하지 마. 참기 힘들어."
먼저 조급하게 다가와 입을 맞추어 놓고는 그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간지럽게 닿아만 있는 남자의 망설임이 불만스러워, 결국 제가 먼저 허락의 뜻으로 이를 내어 살결을 물어내 준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가 제법 오랜 시간 누르고 참아 온 욕구의 틈을 열어 낸 모양이었다. 유이설은 조금 전의 급한 입 맞춤에서, 다가오는 그의 선홍빛 입술이 작게 비틀려 올라가 있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그 웃음을 보느라 채 숨을 들이키지도 못한 사이에 다시금 맞붙어온 살결이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보드라웠다. 그가 작게 물어 벌린 제 입술 사이로 뜨거운 살덩이가 밀고 들어오는 감각이 아직 선연했다.
내가 무엇을 하였다고 나를 탓하느냐 부정하여 그를 놀리어 볼까. 그리 하면 청명은 분명 저 심술 가득한 눈가를 잔뜩 찌푸리며 짐짓 화를 낼 것이다. 부러 그를 놀리고자 뱉은 말임을 금세 알아채고 투정을 부릴 것 같기도 하였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이렇게 바라보고만 있을까. 그럼 그는 사고 속은 도저히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뱉고 그저 잘게 제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춰올 것이다. 그 장난스러운 접문은 분명 손 끝이 곱아들 만큼 간지럽고 따뜻할 것이었다. 허나 유이설은, 그러한 여상스러운 접촉만으로 이 찰나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여 유이설은, 여전히 제 머리칼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부드러이 감싸 잡는다. 손등을 데우는 온기에 눈가를 휘어 접는 남자의 매화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일자로 굳어 있던 입꼬리를 끌어 올려 작게 미소지었다. 손톱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큰 손바닥에 여인의 서늘한 뺨이 닿았다. 주인의 손을 탄 고양이처럼 그의 손 안에 살짝 뺨을 부빈 유이설은, 다시금 작은 걸음을 내딛었다. 이 여자만큼은 도저히 말릴 재간이 없다는 듯,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웃음 섞인 작은 한숨이 하얀 콧잔등 위로 내려앉는다.
"사고, 내 말 듣긴 했어?"
"응."
"안 들었네."
"응."
"하여간 앓느니 죽어야지 내가.."
꼰대. 투정을 부리듯 쏟아지는 불만 위에 조용히 숨을 가져다 댄 유이설은 다시금 그의 입술을 짓쳐 물었다. 작은 귀 속을 연신 울려대던 낮은 목소리가 멈추고 사각사각 옷깃과 살결이 스치는 작은 소음들이 웅웅대며 찰나를 매워오기 시작했다. 유이설의 뺨을 감쌌던 청명의 두터운 손은 다시금 그녀의 목께를 감싸고, 다른 손은 도톰한 도복으로 둘러 감추어진 얇은 허리를 찾아 억세게도 쥐어 당긴다. 한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게 단단히 눌러 잡은 손아귀와, 품으로 그녀를 끌어 당기기 시작한 단단한 팔이 무겁게도 그녀를 짓눌렀다. 청명은 제 품 안의 여인을 더욱 당겨 안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도톰하게 튀어나온 붉은 살 위에 이를 내어 조금 아프게 물면, 다물렸던 입새가 작게 벌어진다. 벌려진 틈 사이로 조급하게 설을 밀어 넣으면, 유이설이 청명의 가슴팍 위를 덮은 옷깃을 틀어쥐고 풀리는 다리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 안을 버겁게 채우고 들어가 느릿하게 치열을 훑으면 품에 안긴 여인은 바르작 몸을 떨며 작게 침음성을 흘려대었다. 저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음을 청명은 알았다. 어둡고 짙푸르던 새벽의 공기는 곧 밝아질 것이다. 작은 입 안을 멋대로 휘저으며 잠시 눈을 뜬 청명은 열기에 흐릿해진 시야 안에 잘게 떨리는 여인의 속눈썹을 담았다. 그는 하얀 달빛을 받아 더욱 희고 투명하게 빛나는 닫힌 눈꺼풀을 어여쁘게 바라보다 이내 다시금 눈을 감고 감은 팔에 더욱 힘을 실었다. 부디 새벽의 이 어스름이 오늘은 조금 더 늦게 걷혀, 이 기민한 여자가 이제 그만 멈추자며 제 가슴팍을 밀어내는 순간이 가능한 한 천천히 찾아오기를. 그리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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