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환 - 8
쌍존 논컾: 환생 청명 & 생환 당보 AU
!주의 ¡
- [ 환생 검협 & 생환 당보 ] 원작 날조
- 화산귀환 500화대 이전 내용에 관한 스포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글에 직접적으로는 스포일러가 될 내용은 없으나, 주의 바랍니다. (글 쓴 사람은 화산귀환을 1549화까지 읽었습니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조걸이 불안 섞인 목소리로 물어도 유이설은 물끄러미 제 앞 광경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청명과 암존이 서로 마주하여 섰다. 영락없는 비무의 모양새이나, 당사자를 포함하여 누구도 이를 차마 비무라고 명명하지 못할 테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명은 정마대전에서 살아 돌아온 절대 고수고, 다른 하나는 강호 초출이라 할 만한 어린 제자라, 단순 나이를 제하여 강호 경험으로만 따져도 그 차이가 백 년이 훌쩍 넘는다. 백 년이라니. 십년하동 십년하서라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법인데, 이 극심한 차이는 강산이 열 번도 넘게 갈아엎히고도 남을 정도로 큰 차이 아니겠는가.
화산이든 당가든 그 장로들이 봤다면 각자 제 무인 붙잡고 뜯어말렸을 일이었다. 유이설과 조걸 또한 화산의 제자로서 장문인의 뜻을 미리 짐작하고 일찍이 말려 마땅할 일이었으나…
“무슨 수로?”
그러나 어떻게 말린단 말인가?
유이설의 담담한 대답에 조걸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벙긋거렸다.
감히 말 걸기조차 두려울 정도로 드높은 사람인 암존을 말릴 자신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청명을 말릴 자신이야… 당연히 없다. 이 자리에 윤종 사형은 물론이고 백천 사숙이 있어도 감히 나서지 못했을 테다.
“그럼 말릴 수 있는 사람이라도 불러와야…”
“괜찮아.”
유이설이 집요히 청명을 훑어보았다. 청명이 검을 쥔 팔이 떨리지 않았다. 청명의 턱근 또한 긴장감은 들어있되 도드라질 정도로 볼록하지 않으니, 긴장감은 있되 억지로 고통을 참는 모양새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잠시 둘이 사라진 사이에 암존이 어떤 조치를 내려주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갑작스러운 비무도 그러한 조치에 대한 확인에 가깝겠지.
“다치지 않을 거야.”
“…그렇겠죠?”
미심쩍은 낯을 하다가도 조걸은 끝내 수긍하고 말았다.
아무리 타 문파라고 하지만, 당가가 화산에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그에 멈추지 않았다.
변치 않을 친애. 각자 길을 걸어 나아가면서는 제 이익에 대한 도모나 욕심을 숨기지 않아 의견을 달리 하는 일이 있어도, 결코 서로에게 해를 입힐 일만은 하지 않는다.
이 관계를 수없이 증명해온 오랜 교류를 본 유이설과 조걸에게는 당가 사람이 화산 사람을 해칠 리 없다는 심정적인 믿음이 있었다. 결국 수긍하고 만 조걸이 얌전하게 유이설 옆에 앉았다.
당보를 앞에 둔 청명이 검을 한 번 허공에 직선으로 내리그었다.
“괜찮네요.”
청명이 만족스레 웃자, 당보의 눈매도 휘어졌다.
“선공하겠는가?”
보는 눈이 있으니 말이 낮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눈빛은 진중하면서도 친우를 바라보듯 장난스럽기 그지없었다. 환각 속에서 보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눈빛이 분명 부담스러워야 마땅할 일일 텐데, 청명은 그런 중에도 저절로 차오르는 흥취에 기꺼운 기색으로 자세를 취했다.
“그러죠, 뭐.”
청명이 바로 당보에게 달려들었다. 발이 채 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당보가 소매에서 비도를 꺼내 발출하였다. 비도는 분명 세차고 빨랐으나, 몇 달 전 이미 당보와 한 차례 약식 전투를 치렀던 청명에게는 약한 정도였다.
바람을 가른 검에 비도가 쉽게 튕겨 나간 순간, 당보가 순식간에 청명 가까이로 다가와 붙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띄우며 주로 공세를 가하던 모습과는 상이하였다. 의아함에 청명이 얼핏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피하는 대신 우선 제자리를 유지하여 무게중심을 낮추었다. 검을 두 손으로 잡고, 오른쪽 팔꿈치를 몸 가까이에 붙인 채 접은 다음 찌르듯 양팔을 펼치자, 당보의 가슴팍에 검 끝이 닿았다.
예상하였는지 당황 없이 당보가 비도 없이 빈손을 움직였다. 내력 실린 손이 검날 안쪽으로 들어왔다. 당보의 손에 검이 바깥으로 밀려나 궤도를 잃은 순간, 당보가 청명의 어깨를 잡아채고선 그의 허리를 발로 노렸다. 청명을 걷어찬 순간 당보가 손을 놓자, 청명의 몸이 뒤로 붕 떴다.
“씨,”
짜증스러운 신음 흘린 청명이 바닥에 탁, 착지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쪽도 아니면서.”
당보는 권수가 아니었다. 아무리 이 비무가 정식 대결이 아니라고 하지만은, 당보가 구태여 비도를 쓰지 않고 육탄전으로 나온 것에 청명이 자존심 상해할 만도 하였다.
“그런데도 이기기에 충분하구나.”
그러나 당보는 실실 웃으며 한술 더 떠가며 청명의 약을 바짝 올렸다. 둘만 있는 게 아니라면 할 말이 그득한데, 보는 눈이 있어 되는대로 내뱉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당보는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이걸 써먹는 날이 오네.’
당보가 한 건 생전 검존의 흉내였다.
그 별호에 검이 달려 다들 검수였을 때의 모습에만 집중하곤 했지만, 그는 손에 검이 들리지 않은 때조차 이기기 어려운 상대였다. 발출할 비도 수가 정해져 있는 비도술 탓에 육탄전마저도 중히 대비해야 할 당보는 경험 삼아 검존과 무기 없이도 곧잘 대련하였는데, 무기의 특성이 반영되지 않은 부분인 만큼 서로 닮을 만도 하다만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단련해온 근육이 다르니 육탄전에서마저도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때는 시기가 수상하던 때라 새로이 몸을 단련시킬 여력이 없어 제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그가 죽고 난 뒤에는 남는 게 시간이었다. 사라져가는 기억을 억지로 떠올려 몸에 체화시키니, 영원히 잊히지 않았다.
그러니 전달할 수 있었다. 검수가 지향해야 할 경지가 어디까지인지, 당보가 검술로 가르칠 순 없겠으나 이렇게나마 간접적으로라도.
“팔은 멀쩡한가?”
“안 멀쩡한데요.”
“괜찮군.”
당보가 입꼬리를 올리며 청명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당보가 허리를 치던 순간에도 청명은 순순히 맞아주지 않았다. 옆으로 한 발짝 피한 청명이 왼팔로 당보의 다리를 밀었다. 내력이나 근력이 아직 충분치 않아 당보의 다리를 완전히 떨쳐낼 순 없었으나, 그를 통해 몸에 갈 충격을 분산시키니 가히 놀라운 순발력이었다.
‘하여간 다시 태어나도 귀신 같다니까.’
속으로 즐거이 혀를 찬 당보가 턱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끝인가?”
의기양양하다 못해 오만함이 철철 넘쳐흐르는 얼굴이었다.
‘와, 저쯤 되는 사람이…’
조마조마하게 둘을 보고 있던 조걸이 질린 표정을 하였다. 암존이라 하면 사람들은 노회하여 속을 알 수 없이 엄숙한 고수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한참은 어린이와 싸우면서도 또래와 노는 양 속절없이 신나 하는 철없는 모습이라니.
‘아무리 청명이라 해도 이기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격이 차이 나는 게 당연한 일인데 설마 저런 도발에 청명이…
“네? 하, 하, 하하하하… 왜요? 벌써 힘드신가?”
…발끈하네? 아니, 근데 저 자식이 말투가 저게…. 저래도 되나?
건방진 말투에 조걸이 기함하며 당보를 쳐다보았으나, 당보는 여전한 얼굴로 오히려 청명에게 달려들라 종용하였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도 한참은 벗어난 터라 조걸은 포기한 낯으로 몸에 힘을 풀었다.
둘이 다시 붙기 시작하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끊임없이 부딪히고, 끊임없이 튕겨 나가고, 다시 부딪혔다. 금속음과 타격음이 쉴 틈 없이 섞여 나는 게 소리만 듣고 있자면 마치 무기를 만드는 장인의 공방에 있는 듯하였다. 턱없는 호승심 담긴 매화가 피어나 바람에 날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명정해지는 사실에 조걸과 유이설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암존이 청명을 가르치고 있었다.
‘왜?’
둘 모두 그 이유를 몰랐으나, 어쨌건 간에 흥미진진한 비무였다. 화산에서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싸워나가는 비무에 둘마저도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세 제자가 배워 나가는 시간이 계속하여 흘러갔다.
생환 - 8
“왜 이리 애들이 안 오나 했더니…”
대체 어린애들이랑 뭔 짓을 한 거냐는 현종의 지긋한 눈빛에 이번만큼은 당보도 할 말이 없어 그저 뻔뻔스레 웃어 보일 뿐이었다.
청명에게 약이 잘 드는지 확인하고자 적당히 상대하려 했을 뿐인데 저도 모르게 신이 나 계속하여 상대역에 임해버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하늘에 햇빛이 어스름히 비치는 새벽이었다. 옆에 자리하던 참관인들이 왜 이 시간까지 말리지 않았나 싶어 둘을 바라보니… 한 명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진득이 바라보고 있고, 한 명은 반쯤 풀린 눈으로 이제야 끝났냐는 듯 말 없는 원망을 보내왔다. 그제야 둘이 저를 말리기엔 턱없는 어린아이임을 깨달은 당보가 머쓱히 셋을 챙겨 화산으로 복귀시켰다.
“그리고 청명이는 또 왜…”
제자들이 괜찮나 살피던 현종이 청명을 보며 말을 흐렸다. 흙먼지 섞인 땀에 젖은 채 그르르거리며 당보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낯이 흡사 미친개를 닮았다. 크흠. 제자에게 해선 안 될 비유를 해버린 현종이 애써 연상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헛기침했다.
“그래… 하여튼 고생한 모양이구나. 제자들은 우선 들어가 쉬거라.”
“네, 장문인.”
“네.”
“으르르… 네, 장문인.”
이놈이 그래도 장문인 말이라고 정신 차려 답하는구나… 허허… 그래, 그래….
생각 비운 웃음 흘린 현종이 다른 제자도 살폈다. 어쨌든 몹시도 더러운 청명의 몰골과는 달리, 다른 두 제자는 겉모양새가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암존 어르신이 청명에게 무슨 짓을 했다면 먼저 현종에게 소식을 전하려 안달복달할 제자들이건만, 그런 기색 없이 그저 피곤하면서도 상기된 모습이라 현종은 우선 안심하여 제자들을 보냈다. 그리고 암존과 함께 제 처소로 향하였다.
“사고, 어디 가요?”
“수련.”
유이설은 제가 오늘 본 바를 체득하고 싶은지 망설임 없이 수련하러 떠났고, 조걸은 고개를 젓고선 잠부터 자야겠다며 빠르게 백매관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청명은 잠시 서서 현종과 암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서성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계속하여 이뤄진 대련에 잔뜩 흥분했던 게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으니, 차라리 이 기분 이어 저도 수련을 할까. 청명이 고민하며 인적 드문 곳으로 발걸음 옮기다, 백매관 앞에 자리한 연무장에서 기척을 느꼈다. 누가 벌써 나왔나, 무심코 걸음 옮긴 청명은 숨을 삼켰다.
‘…사숙조.’
그래. 누구보다 빠르게 나서서 일찍이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이가 달리 누가 있겠는가. 팔을 하나 잃어 새로이 무학을 익히고 있는 운검이었다.
주먹을 꽉 쥔 청명이 침잠한 낯으로 바라보는 사이, 운검도 그를 알아보고 검을 멈추었다. 왼손에 든 검을 내린 운검에 청명이 먼저 인사하였다.
“관주님.”
“그래, 청명아. 이제 왔느냐?”
“네.”
“평소보다도 더 오래 걸렸구나. 팔은 괜찮으냐.”
청명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걱정 중, 운검의 걱정이 가장 무겁고 버거웠다. 팔 잃은 이 앞에서 팔이 아프다 투정 부리는 것만큼 우스운 꼴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기색을 내비치는 게 다시금 사숙조에 대한 실례가 될까, 청명은 치밀어오르는 마음을 꾹 누르며 고개를 들어 웃었다.
“그럼요. 암존 어르신께서 도와주신 덕에 오늘은 더욱이,”
“암존께서?”
운검이 눈빛을 달리하자 청명이 아, 하고 말을 멈추었다. 일대제자부터는 암존이 청명의 입문을 반대하던 배경을 알았다. 이 부분은 암존이 직접 제 뜻이 달라졌노라 해명해나가야 할 일인지라 청명이 말할 게 궁색했다. 청명이 잠시 말할 바를 가늠하는 사이 운검이 먼저 물었다.
“괜찮은 게냐?”
“네. 암존 어르신께서 직접 설명하시겠지만… 직접 문제를 해결할 약까지 만들어 전달해 주셨어요.”
“약이라니. 약으로 사술을 파훼한단 말이냐?”
“완전히 없앤 건 아니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는 약이에요.”
“…마비독이 아니고?”
“……독도 적절히 쓰면 약이라던데요?”
청명이 의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어찌 잘 포장하여 설명하려 해도 쉬이 되질 않았다. 서툴게 당보의 말을 가져다 그대로 읊음에 운검이 조금 미심쩍은 낯을 하다가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건에 대해선 장문인께서 정하시겠지…. 어쨌든, 무엇이라 한들 해결책이라 할 만한 게 생겨 다행이구나.”
“그렇죠?”
헤헤, 짧게 웃는 청명을 운검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어린 제자의 어깨가 무겁구나.’
제자가 어깨에 진 짐에 제 잃어버린 팔도 실려 있을 테다. 잃은 건 아쉽지 않으나, 그게 이 화산의 짐이 된 건 원통한 일이었다. 혹여나 그 짐이 제자에게 해가 되어 돌아간다면 운검은 결코 저 자신을 용서치 못하리라.
운검이 단호히 말하였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능한 방도라 할지라도, 장기적으로 그러한 방도가 네 몸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면 그건 해결책이라 할 수 없다.”
“…….”
“오래 걸린다 할지라도 네 탓 되는 일 없으니, 조급해하지 말아라.”
모든 걸 잃고 처음부터 제 길을 다시 걷고 있는 자가 전하는 말이었다. 스스로 읊다 못해 가슴에 새겨버렸을 그 말은 또렷한 애정 어린 진심이었다. 아릿한 마음에 청명이 눈을 짧게 감았다가 떴다.
웃음을 멈추고 바르게 선 청명이 운검을 바라보았다.
“…무리하지 않겠단 거짓말은 못 해요. 찾아낼 수 있는 모든 방도란 방도는 다 동원할 거예요.”
무거운 진심 앞에서 허투루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뱉을 순 없었다. 대신하여 저 또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청명이 제 나름대로 운검에게 존경을 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최악이라 생각되는 순간을 앞두게 되면, 그때엔 지난번과는 달리 생각할게요. 나를 걱정하고, 나를 생각하는, 이 화산이 있음을 잊지 않을게요.”
“……그래. 그러면 되었다.”
흔치 않게도 진중한 청명을 바라본 운검이 손을 내밀었다. 잔뜩 헝클어져 더러워진 머리 위로 다가간 손이 꼼꼼하고도 정성스레 땀과 엉겨 붙은 먼지를 쓸어내주며 미소 지었다.
“청명아.”
“네.”
“네가 이 화산을 지키는 만큼, 화산도 너를 지킨다.”
“…….”
“혼자 삭이지 말아라.”
청명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만약 암존이 쫓아오지 않아 제가 팔을 잘라냈다면, 그리 사라져 죽었다면, 운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지를 가늠하자 턱 숨이 막혔다. 그리되었다면, 운검은 지금과 같이 빠르게 회복하여 제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었을까. 쏟아지는 애정이 선명하니 답을 모를 리 없는 가정이었다.
그제야 청명은 깨달았다.
상처는 한 사람이 입혀도, 회복은 온 사람이 도와야 한다. 놓쳐버린 적에 흥분하다가 이미 입은 상처를 곪게 만들어버릴 뻔하였다.
그러니 단순히 상처 입지 않도록 하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지킨다는 건 그 과정마저 중하였다. 서로를 보살피며 지내고 함께 해야 한다. 그 어떤 상처를 입었든 간에 다시 회복하여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한 양분이 될 수 있도록….
‘훨씬 어렵잖아.’
악적을 죽이는 건 천성이라 말해도 부족할 정도라 마음에 부담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잘하는 것에만 몰두하여 그를 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면, 어떻게 해야 충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엄하고도 다정한 사숙조를 닮은 이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화산을 닮을까.
청명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손등으로 코를 훔쳤다. 그러고선 다시 운검을 바라보는 눈빛이 무거웠다.
* * *
하루가 저물었다.
현종과 의약당주 운각에게 탈탈 털리다 못해 청명에게 준 약의 재료를 직접 하나하나 보이며 제조하는 과정까지 얼추 시연해야 했던 당보는 해가 다 지고 나서야 겨우 풀려났다. 차가운 밤공기를 맡은 당보가 푸욱 한숨을 내쉬며 쭈욱 허리를 늘렸다.
이거 참. 맨날 암존이 두려우니 뭐니 해도 따져야 할 때는 따지기를 소홀히 하지 않으니… 이것 참 번거로우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휘어진 입매를 의식조차 못 하며 걸음을 옮긴 당보가 습관적으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야 한 편에 들어온 하얀 자락을 발견하였다.
‘참…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지?’
그를 빤히 바라보던 당보는 곧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화산 숙수를 찾아갔다가, 잠시 뒤 돌아온 당보의 손에는 술병과 잔이 들려 있었다.
지붕으로 훌쩍 뛰어오른 당보가 일찍이 지붕 위에 앉아있던 선객에게 슬쩍 다가가 얼굴을 내밀었다.
“안 주무, 악!”
내민 얼굴에 바로 주먹이 퍽, 내리꽂혔다. 그나마 힘 조절을 했는지 아프진 않았으나 황당하여 당보가 눈을 크게 뜨니 청명도 같이 놀란 듯 당혹스러운 낯을 하였다.
“아, 깜짝이야.”
“아니, 사람을 냅다 때리면 어떡하오!”
“그러게 누가 갑자기 나타나래요?”
“하, 참, 나! 이걸 내 탓을 해?”
“그럼 누구 탓을 해요?”
그리 뻔뻔히 말하면서도 이번만큼은 청명도 제 잘못을 아는지 주먹을 슬 내려 감췄다. 허, 허, 하고 헛웃음을 팍팍 터뜨리던 당보가 어휴 한숨을 내쉬며 못 이기는 척 청명 옆에 털썩 앉았다.
“애초에 암존이라는 사람이 이 정도도 못 막아요?”
“어려서부터 남 탓하는 버릇 들이면 안 좋소.”
그리 말하면서도 당보도 한참 어린 후인에게 얼굴을 맞았다는 게 어디 가서 못할 말이라는 건 알았다. 슬쩍 잔을 탁, 소리 내 내려놓으며 분위기를 환기하는 당보에 청명이 술병을 빤히 쳐다보았다.
“화주?”
“불만 있소?”
“아니, 암존쯤 되면 더 좋은 거 마실 줄 알았죠. 자그마치 당가잖아요, 사천당가.”
“공으로 주어진 득에 뭘 그리 따지오? 줄 때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쇼.”
“그거 화산 거 아니에요?”
“…자, 받으쇼.”
턱, 잔을 청명의 손에 올린 당보가 술을 따랐다. 꼴꼴꼴 술 따르는 소리로 입을 막아보려는 시도에 청명이 찝찝한 눈으로 당보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 암존 맞아?’
뭐 이런 허당이 다 있지?
그러나 어쨌든 건네진 술을 거절할 청명이 아니었다. 제 잔가지 채운 당보가 잔을 장난스레 탁, 부딪히자마자 청명은 단숨에 술을 털어 마셨다. 크으, 하고 동시에 소리를 내는 게, 마치 오래된 친구라도 된 양 자연스러웠다.
“좋네요.”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별말을 다 합니다, 그래.”
“…그러게요.”
어리다라. 청명이 당보의 말을 한 번 곱씹었다. 상대가 제법 생각을 정리해왔음이 느껴졌다. 차마 버릴 수 없었던 마지막 고집처럼 말투만은 마치 오래전 친우 대하듯 하나, 그래도 그 말투만 차치한다면… 둘이 인지하는 시간이 얼추 비슷해졌다. 이제부터 쌓아나가는 관계는 과거의 잔재를 따라한 어설픈 복제품이 아니라 오롯한 현재의 것이 되리라.
안도감과 미안함 섞여 술렁이는 마음으로 청명이 당보를 바라보았다. 당보는 그새 휘영청 뜬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청명이 술병을 들자, 당보는 달을 보면서도 청명을 향해 술잔을 기울였다. 청명이 그 위로 술을 따라주었다.
“고민이라도 있소?”
“고민은 무슨.”
청명이 능청 떨면서도 당보를 빤히 쳐다보며 술을 털어 마셨다. 당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늦은 밤까지 잠도 안 자고 궁상떨고 있지 않았습니까? 하여간 꼴사납게.”
“어린놈한테 왜 자꾸 시비 걸어요.”
“불만이면 때려보시던가.”
“진짜요?”
“하고 싶어도 못 할 텐데.”
어젯밤 내내 비무를 했음에도 청명이 당보에게 끝내 닿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당보가 비웃으니, 청명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까 맞은 사실은 그새 까먹었어요?”
“…큼.”
그건 방심한 결과라고 말해봤자 무인에게 그만큼 궁색한 변명도 없었다. 당보가 헛기침을 큼, 크흠, 하고 반복하니 청명이 웃음 섞인 숨을 내뱉었다.
잠시 장난스러운 외면과 침묵이 흐르고, 곧 청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려워요.”
“…두려워?”
당보는 고민이 있냐 물으면서도 실제로 청명이 고민을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여 청명에게 고개를 돌리며 조금 버벅대 답하였으나, 그러한 당보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청명은 그저 눈을 내리깔아 잔 안을 응시하였다.
“그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거론 충분치가 않네요.”
고민이라…. 당보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잔 안에 담긴 술이 출렁였다.
그가 알던 검존은 고민을 털어놓을 줄 모르던 사람이었다. 밤하늘 아래 시커먼 눈을 하고서도 술만 연거푸 마시며 조용히 곪아갔다. 슬플수록, 분노할수록, 원통할수록 머리를 차갑게 식혀 무표정한 얼굴로 냉정히 굴던 건 그가 체득해놓은 생존 방식이라 유일한 친우인 당보라고 한들 섣불리 끼어들 구석이 없었다. 그저 옆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똑같이 굴어주는 게 당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기가… 정말로, 내 자리인가.”
“…….”
“나는… 화산이 좋은데. 과연 내가 화산 같아질 수 있을까.”
한탄과도 속삭임이 고요하고 덤덤했다. 그러나 그 속은 아직 익지 못하여 푸릇한 내가 날 정도로 미숙한 것이라, 아직 자라나고 있는 이가 지닌 혼란과 혈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그 모든 양을 담아낸 당보의 눈에도 생기가 가득 찼다.
“부족한 무학이야 단련시키면 되는 건데, 다른 면에서는 영영 다른 사람을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아서.”
‘기억 없이 돌아오니… 이런 속내를 들을 날도 다 오네.’
기쁘다 해야 할지, 슬프다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으나 썩 나쁘지 않은 일렁임이었다.
-장문사형은 내가 못 보는 걸 보는 사람이거든. 그런 사람을 보고 있으면, 뭐 아무리 이 세상이 한참 모자란 멍청이들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내가 또… 이기지 못할 사람도 있긴 하구나 싶지.
도사 형님, 그런 뜻이었습니까? 이런 생각을 거쳐서, 그렇게 자라나셨습니까. 그렇게 제 자리를 찾아 굳건해지셨소? 당보가 입꼬리를 올렸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이라 잃는 게 있는 만큼, 이런 상황이라 얻는 게 있는 법이다. 그 모든 득실을 들이마신 당보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도장은… 화산이 그렇게나 좋소?”
뜬금없이 내뱉어진 소리에 청명이 무슨 말을 하냐며 미간을 좁혔다. 당보가 실실 웃으며 청명을 마주 보았다.
“그렇게 좋아하니 모든 게 다 좋게 보여서, 그래서 따라잡기 벅찬 거 아니겠소.”
화산이 그렇게까지 좋은 곳일 리 없다 낮잡아 보는 건지 아닌 건지. 묘한 말에 청명이 멈칫한 찰나, 당보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하나같은 매화나무라 하여도, 어디 같은 나무에서 핀 매화라고 한들 다 같은 매화겠습니까?”
“…….”
“이 매화는 이래서 좋고, 저 매화는 이래서 좋고. 다 장단점이 있는 법인데, 도장은 각 매화의 좋은 점만 다 뽑아 따라 하려고 하니 벅찬 거 아니겠소?”
이 화산의 도인들이라면 보다 현기 넘치는 조언을 해줄 수 있을 테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나아가고, 이런 식으로 자라나라. 과거 청문진인은 그렇게 천하제일검을 키워냈다. 그러나 그건 청문진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당보가 당보로서 아직 꽃봉오리에 불과한 후인에게 하고 싶은 말, 해줄 수 있는 말은 그와는 달랐다.
“힘 빼시오.”
“그 무슨…”
“그러다가 피기도 전에 지쳐서 지겠소. 그냥 원하는 대로 하쇼. 그렇게 피면, 그 자체로 매화 한 송이 되지 않겠소?”
“…거참, 무책임한 말이네요. 그거 내키는 대로 살라는 거 아니에요?”
“하하!”
당보는 웃음을 터뜨렸다. 과거 청명을 알던 사람들이면 선계에서건 저승에서건 지옥에서건, 이 광경을 본다면 모두 사색 되어 당보를 말리고 있을 게 뻔하였다. 안 그래도 제 원하는 대로 살 망둥이의 고삐를 풀어주는 일 아니겠냐며 손사래 치고 있겠지.
그러나 알게 뭐람.
‘억울하면 지네가 오래 살았어야지.’
정마대전이 끝나고 당보가 내내 생각하던 일이 있었다. 과연 그때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청명을 붙잡을까. 희생하지 말고, 이 세상 구하지 말고, 그저 살아남아 달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상 속에서야 온갖 말이나 행동을 다 해볼 수 있었다. 어떤 때에는 다 됐으니 적어도 함께 사지에 가자고 악착같이 달라붙고, 어떤 때에는 잔뜩 화를 내며 그 몸 좀 챙기라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만족할만한 상상이 되진 못했다. 지나치게 어려운 질문이라 감히 답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로 돌아가, 적어도 단 한 문장만은 전할 수 있다면… 그건 반드시 이 문장이어야만 했다.
도사 형님. 행복하시오?
“행복하면 그만 아니겠소?”
숭고한 희생이니 뭐니, 그 어떤 드높은 뜻이라도 사람의 목을 죄는 순간 형구에 그칠 뿐이다. 당보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그가 불행히, 무거운 마음으로, 외로움에 사무쳐 떠나는 길이었다면… 이 세상이 어찌 되든 간에 당보는 그를 붙잡았을 테다.
‘형님, 나는 영원히 철 들지 못할 인간인가 보오.’
근데 당신도 이미 아는 사실이잖아? 어쩌겠냐며 당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
온몸을 희생하며 마교의 손길에서 세상을 구해냈다는 이가 내뱉기엔 지나치게 가벼워 보이는 말인지라, 청명이 일순 말을 잃고 가만히 당보를 쳐다보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기색에 당보가 술병을 턱짓하자, 청명이 술병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입구를 입에 대어 그대로 꼴꼴꼴 마셨다.
“아니, 다 마시라는 건 아니었는데…”
나 마실 건 남겨야지! 당보가 아깝다는 눈으로 쳐다보건 말건, 순식간에 술병을 다 비운 청명이 술병을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당보를 마주한 얼굴은 걱정이 한결 가셔 상쾌한 얼굴이었다.
“참… 속된 말 같은데도, 이상하게 나쁘지 않네요.”
술내 섞인 말에 가뿐함이 묻어났다. 당보가 그럼 됐다며 청명의 등을 손바닥으로 탁 두드리면서도 술병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 술 가져올게요.”
“이왕 가져오는 거 좋은 걸로 챙겨 오쇼.”
진담 반 농담 반 섞인 대답에 청명이 그럴 거라며 고개를 끄덕이며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완벽히 착지하고 잽싸게 움직이는 어린 뒷모습을 보던 당보가 웃음 섞인 숨 흘리며 다시 달을 보았다.
“못났죠? 어린애한테 기대 한풀이 하는 모습이.”
몇 잔에 불과한 양으로 술기운이 돋아날 리 없는 몸이건만, 당보는 몸 가누기 벅찬 사람처럼 지붕에 잔뜩 기대어 드러눕다시피 하였다.
“그래도 해 갈 일은 안 할 테니, 이번만은 내 원하는 대로 다 해봅시다.”
낮은 속삭임이 밤하늘에 맺혀 느리게 폈다.
“뭐, 내가 뭐라 한들 그대로 자랄 형님도 아니지 않소.”
아쉬움과 반가움 섞여 결국엔 기쁜 기운이 밤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보의 매화나무 대사는 원작 494화의 내용을 변형하였습니다.
원작에서는 청명이 소소에게 한 말입니다.
언젠가 청명이 말했다.
한 나무에서 피어나는 매화 중 동시에 함께 피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
이제 다음화부터 2부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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