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생환 (完)

생환 - 7

쌍존 논컾: 환생 청명 & 생환 당보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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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생 검협 & 생환 당보 ] 원작 날조

- 글 쓴 사람은 화산귀환을 1549화까지 읽었습니다. 글에 직접적으로 스포일러가 될 내용은 없습니다.


당보는 화산의 수습을 도운 뒤 사천으로 돌아갔다. 화산에 남아 제 알던 혼의 성장을 목도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다마는, 마교가 발호할 조짐을 감시하고 만인방도 살펴야 하니 할 일이 많았다. 청명과 일련의 약속을 하기 전이었다면 사리분별하지 못하고 무작정 화산에 기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의 다짐을 되새긴 이상 당보도 제가 해야 할 일을 확실히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청명에게 관심을 끊었냐면, 그럴 리도 없었다.

“계속 나가려고 한다고?”

“네!”

그동안 살얼음같이 굴던 당보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서리 녹은 눈을 한 당보에 당소소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당차게 끄덕였다.

“현종진인은 말리지 않고?”

삼대제자가 허락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산문을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참회동에 들어가고도 남을 일인데, 하물며 그 시기가 문파에 큰일이 닥친 때다. 엄히 다스려야 할 죄인데 이리 넘어간다고? 화산이 정이 많은 문파긴 해도 절차와 법도를 무시해왔다면 이만큼 대문파가 될 일도 없었다. 당보가 의아한 낯을 하자, 당소소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직접 장문인이 말씀하신 바를 들은 건 아니지만… 벌을 주되, 그 시기를 늦췄다고 들었어요. 석 달 안에 화음을 벗어나고서도 검술이 무뎌지지 않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석 달 후에 참회동에 들어갈 것이고,”

“아니면 처벌을 미루겠다?”

“네. 만인방에 합당한 대가를 보여주어 화산의 뜻을 세우는 날에 처벌할 거래요.”

사정상 청명을 밖에 내세우지 못하는 건 화산에도 뼈아픈 일이었다. 지금만 해도 청명의 검술이 그 또래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닌데, 심지어 아직도 누구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재이니 만약 한 달 안에 청명이 직접 제 팔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처벌을 미루고, 처벌을 대신하여 청명을 중히 쓰겠다는 얘기였다.

현종은 실리와 먼 인물이다. 그런 이가 가히 실리적인 처분을 내린 이유를 짐작한 당보가 입꼬리를 올렸다.

홀로 만인방을 향해 뛰쳐나갔던 청명에게 부족한 건 자신을 돌보는 것. 저를 향하는 화산의 걱정에 대한 이해, 그리고 제 속내를 털어놓으며 제자들과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청명을 참회동에 가둬놓아봤자 청명은 더욱 저 자신에게만 집중하여 스스로 고립될 테다. 그렇다고 처벌을 내리지 않을 순 없으니, 시간을 주어 직접 보여주겠다는 결심이 느껴졌다.

상처를 입은 화산이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 제자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의지하여 힘든 시기를 헤쳐나가는지를.

‘이놈의 화산.’

벌을 주는 건 쉬운 일이나, 성장을 도모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상대가 저지른 잘못이 뚜렷하다면, 처벌을 내릴 권한이 있는 입장에서는 상대의 책임만 생각하지 제 책임을 중히 여기긴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현종은 저 자신도 책임을 지며 함께 문제에 몰두하자며 뛰어든 격이 아닌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언제나 화산의 극의를 생각해온 이만이 가능한 일이다.

‘향이 흐려지나 싶다가도, 끝끝내 이어지는구나.’

현당이란 현자배 대사제가 화산에 있었을 당시, 외부인인 제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입을 다물었으나 당보는 그가 장문인이 된다면 화산의 세가 위축될 거라 예상하였다. 그는 도사라기보다는 장사꾼의 모습을 하고 있어 도문을 이끌 재목이 못 되었다. 그때 되면 어찌할지 고민하던 찰나, 결국 그가 사고를 쳐서 장문인이 되지도 못한 채 알아서 내쫓기니, 끝내 도인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형님은 좋겠소, 그런 사람 보살핌도 받고! 당소소만 없었더라면 당장에 드러누워서 땡깡을 부렸을 당보가 애써 위엄을 지키며 앉아있자,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가주께서 오셨구나.”

“아!”

당소소가 당장에 일어나 문을 여니, 당군악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어르신… 소소를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말은 공손하되, 눈빛은 아주 불손했다. 늘 당보를 조금씩 불편하게 여기던 당군악답지 않은 행동이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당보가 당소소를 꼬셔 화산에 보낸 이후로 제 딸이 허구한 날 유이설 보러 간다며 화산으로 떠나버리지, 당가에 와도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하겠다며 당보부터 찾으니…. 일찍이 후계 싸움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겠다고 선언한 당소소를 아픈 손가락으로 여기는 당군악으로서는 퍽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저놈도 중증이야.’

당군악은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은, 당보가 보기에 당소소는 어차피 당군악이 품기엔 너무 큰 그릇이었다. 어릴 때부터 가문의 법칙을 그대로 흡수하듯 자란 당군악이니, 정석적이지 않은 길만 걸으며 가문을 바꿀 불씨를 품은 당소소를 온전히 이해하고 이끌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당소소가 자의로 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는 모양새이거늘, 그래도 아비다보니 제가 돌보지 못했다고 여겨 늘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는 당군악이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새를 내치지 않음을 뜻했다. 머리가 딱딱하거나 속이 좁았다면 진작 둘의 관계는 파탄 났으리라. 가문의 중심을 잡으면서도 제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굳건하니, 결국 달라도 일원을 품는 그 성정 덕에 당군악이 이끄는 당가는 자연스레 변화를 목도해 나가게 될 것이다. 이는 당군악이 보이는 당가의 방식 아니겠는가.

‘나도 환생해서 아무 걱정 없이 군악이 아래에나 들어가고 싶네.’

당군악이 들었다면 제법 오싹해 할 생각을 아무렇게나 한 당보가 미소를 지으며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당보가 의원들을 제 원하는 대로 통솔해도 되겠냐고 묻자, 당군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생환 - 7

현종은 청명이 수련을 목적으로 산문 밖을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단, 해가 지기 전에는 화산으로 돌아와야 했으며 적어도 두 명 이상과 동행해야 했다. 산문을 벗어나면 아픈 청명을 위한 일명 ‘보호자’ 신분인 두 명 중 한 명은 청명이 나갈 때마다 바뀌었는데, 나머지 한 명은 거의 고정되다시피 했다.

“죽겠다….”

“죽어어? 정말 죽는 게 뭔지 보여줘?”

“사형. 이 자식아, 사형이라고.”

“그러니까 나보다 몇 년은 더 화산에 있었던 사람 아냐! 모범 안 보여? 고작 이 정도로 피곤해해?”

제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데에 혈안인 청명과 동행한다는 건 세 가지 관문을 지나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첫째로는 해가 뜨기도 전에 화산 아래로 내려갔다가 해가 지고 난 후 다시 등산해야 했고, 둘째로는 저 엄격하기로는 백매관 관주인 운검보다 더한 삼대제자 막내의 잔소리를 온종일 들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는 이 천하제일천재라고 일컬어도 부족할 광견과의 일대일 혹은 이대일 수련을 버텨내야 했다.

만인방과 대척하게 된 이후로 화산 내에서는 몸과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사는 게 일상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지독한 동행을 원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복수도 살아있어야 가능한 법. 화산광견과 밀착하여 온종일 하는 수련은 눈 뜬 채로 지옥에 가겠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희생양으로 뽑힌 게 조걸이었다. 어차피 발도 빨라 잘도 싸돌아다니는 제자고, 매일같이 청명과 대련하면서 처맞는 게 익숙한 놈인 데다가 가혹히 대해도 별 양심의 가책이 안 느껴진다는 점에서 별 어려움 없이 선택되었다. 조걸을 데려가라는 말에 청명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으니 더더욱 안성맞춤인 제물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된 거 강해지겠다며 주먹을 꽉 쥐던 조걸이었으나, 두 달이 지난 지금은 반쯤 죽어가고 있었다.

“약해.”

오늘 같이 나가기로 한 유이설이 조걸을 보며 일갈했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쳐 예비 스승의 평가 따윈 알 바가 아니게 된 조걸은 오늘만큼은 못 가겠다며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에 눈이 뒤집힌 청명이 왈왈대며 조걸을 괴롭히니, 제법 큰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시끄럽다며 백매관 밖으로 나올 제자들은 없었다. 이제 새벽마다 반복되는 소란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탓도 있었고, 청명도 발 뻗을 곳은 잘 알아서 교관들이 머무르는 곳 앞을 지나가기만 하면 귀신같이 조용해졌으니까.

“쯧.”

다만 장부를 처리하느라 밤새웠던 현영이 재경각 안에서 찻잔을 들며 혀를 한 번 쯧, 찼다. 현영이야 혼내려면 못 혼낼 것도 없다만, 일찍부터 수련을 나가는 제자들이 저리도 활기찬데 굳이 그 위에다가 찬물을 뿌릴 장로가 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제대로 자지 못해 예민해진 신경질을 풀기 위해 옆에 자리한 현상을 째려보았다.

“또, 또! 또! 얼굴!”

현영이 짜증 내자 현상이 화들짝 놀라 제가 뭘 했냐며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현상이 요즈음 매일 아침, 제게 와서 달라붙어 있는 이유를 이미 짐작하는 현영으로서는 가증스러울 따름이었다. 심기가 불편하여 잠도 제대로 못 자니 함께 있을 사람이 필요한데, 이 시간에 깨어있는 사람이라 해 봤자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재경각 사람들밖에 없으니 이러고 있는 거 아닌가. 누구는 할 일이 많아 잠 못 자고 있는데 누구는 그걸 이용해 먹으니,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쯤 되면 짜증을 낼 때가 되었다. 자기합리화를 끝낸 현영이 역정을 냈다.

“와서 울상이나 짓고 있을 거면 나가시오! 나도 좀 속 편히 쉽시다!”

“……할 일이 많지?”

“아오, 진짜.”

같이 짜증 낸다면 저도 뭐라 더 할 텐데, 저리 우둔한 소처럼 눈치를 보니 뭐라 더 할 맛도 안 났다. 한숨을 푹 내쉰 현영이 짜증스러운 손길로 차를 따라 현상에게 내밀며 툭 물었다.

“청명이 불쌍합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습니까?”

“뭐?”

“아닌 척하지 마십시오. 솔직히 사형만 그럽니까? 다 큰 어른들이 아주 유난을 떱니다 그래.”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새벽이 되면 나가는 제자가 밤이 되면 땀 범벅으로 돌아온다. 수련 내내 앓는 고통의 후유증 때문인지 돌아와서도 팔이 덜덜 떨리는 걸 참으며 인사하니, 다들 모른 척하면서도 청명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평소 같으면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고 닦달이라도 할 텐데 청명이 한쪽 팔을 잃은 운검 앞에서 더더욱 아무렇지도 않게 구는 이유를 아니 뭐라 말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씩 다들 원래대로 제 궤도로 돌아가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무각주라는 양반이 뭐 그리 걱정이 많은지 아직도 안절부절못하니 영 보기 흉했다.

“…그래, 마음이 쓰인다. 어린 제자가 너무 큰 짐을 지고 있지 않으냐.”

“짐은 무슨.”

현영이 콧방귀를 뀌자, 현상이 이러한 말엔 울컥하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실력을 갖추고도 원하는 대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지 않으냐! 오죽 답답했으면 그때 뛰쳐나갔겠어! 그 마음이 예상이 안 되느냐? 어찌 그리 말을 가벼이,”

“그렇소, 사형. 나 같은 놈은 모르오. 청명이가 얼마나 큰 손해를 보고 있는지, 그런 것 따위 모르오.”

아무리 현영이 다소 무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해도, 그도 화산 사람이었다. 어찌 검문 사람이 이리 말한단 말인가? 이번만큼은 사제가 말이 심하다 싶어 현상이 진실로 화내려던 찰나, 현영이 말을 이었다.

“나처럼 매일 득실을 따지는 놈도 말이오, 사람을 실失로 봐선 안 된다는 걸 아니까!”

“…뭐?”

“뛰어난 무위를 가지고도 화산 안에만 있으면 문제라. 그건 화산의 손해입니까, 청명의 손해입니까? 대체 무엇을 우위에 두고 생각하고 계신 거요?”

현영이 탁자 위를 손으로 내려쳤다. 잔에 든 찻물이 출렁여 탁자 위를 적셨다.

“애가 잘 다니고, 잘 먹고, 잘 수련하면 됐지! 누구 마음대로 사람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거요? 다들 가만 지켜보면 청명이 보기 싫은 문제를 갖고 있으니, 빨리 그 문제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오.”

현상이 끄응, 신음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잠시 침묵하던 현상이 그러한 뜻이 아니었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다. 그러나 고작 그 때문에 마음이 쓰인다고 한 게 아니다. 애가 매일 아파하지 않느냐.”

“네, 그건 속상한 일 맞습니다. 근데 사형이 자꾸 그런 식으로 티 내면서 빨리 해결되길 기대하는 건 안 그래도 힘든 애한테 부담 더 주는 것밖에 안 되오. 주변 어른들이 죄다 자기를 불쌍하게 여기면, 애들도 자기가 불쌍한 줄 알고 그리 여긴단 말이오. 보통은 그 때문에 위축되겠으나,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지. 어디 청명이 놈이 그렇게 정석대로 할 놈입니까? 그 사실이 더 분해서 더 무리할 놈이지.”

이놈의 검수들은 무위로 사람을 판단하는 데 아주 이골이 난 이들이었다. 그러니 청명 같이 드높은 무위를 지닌 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걸 유난히 더 아쉬워한다.

그러나 현영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본다. 새로 구입해야 할 도복의 양이 많아진다. 연무장 바닥의 보수 빈도가 빈번해진다. 식자재 비용이 나날이 는다. 이는 곧 그만큼 많은 도복이 헤졌고, 그만큼 많은 검과 내력이 연무장 위를 스쳐 지나갔으며, 그만큼 제자들이 많이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숫자가 증명하는 흐름을 평생 읽어온 현영이 그 속에서 제자들의 노력을 매일 읽기 시작한 건 청명의 입문 시점부터였다.

대체 어디서 무얼 하다 온 건지, 매사가 필사인 청명 덕에 제자들이 더욱더 자신을 갈고닦기 시작하였다. 화산을 잠시 휩쓸 열풍이라고 생각했던 게 몇 년이 지나도록 사그라들기는커녕 계속해서 뜨거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냥 흐뭇해하던 현영은, 어느 순간 불안해졌다.

“…하……. 언젠가부터 말입니다, 의약당에서 나가는 지출이 늘덥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니, 듣자 하니 당 소저가 다들 다치는 줄도 모르고 미련스럽게 수련하는 꼴이 답답하여 약을 제때 받아 가라 역정을 냈다 그러지 않겠소.”

그리 혼낸다 한들 화산 무인들이 사소한 부상 때문에 약을 타갈까. 그런데도 약의 지출이 늘었다는 건 분명 그만큼 제자들이 다치는 빈도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얘기였다. 그제야 현영은 뒤늦게 생각했다. 노력과 혹사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근데 보아하니 윤종 그놈이 유난히 약을 타가는 일이 많아, 윤종을 불러 혹시 아픈 데가 있냐 물었소. 그랬더니 말이오, 그놈이 청명을 위해 타가는 거라 답하지 않겠소. 그놈이 제 몸 아픈 줄도 모르고 잠에 들어 끙끙댈 때가 간혹 있는데, 그러면서도 도통 의약당에 들리는 일이 없어 제가 챙기는 것이라고.”

“윤종이… 그 아이가 그랬단 말이냐.”

현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현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가늠이 갔다.

“사형,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오? 애한테 적시에 약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기도 전에 고통을 참고 버텨서 검을 들라고 종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게 도통 맞는 일인지….”

현영이라고 무인의 자부심을 모르는 바 아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장통이 수반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제자들이 제 피와 살이 깎이는 줄도 모르고 나아갈 때, 한 번쯤은 막아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저 자존심 센 놈이 바라는 바를 함부로 막을 생각은 없소. 청명이 놈이 어디 그런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놈이오? 근데 더하라며 밀진 말란 말이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다.”

단순히 성과만 바라 함께하는 게 아닌데도, 때때로 욕심이 들어 성과를 과히 바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제자보다 우선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현상이 현영의 조언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침울해진 듯한 현상을 잠시 바라보던 현영이 다시 혀를 쯧, 차며 창을 열어 크게 소리쳤다.

“이설아! 아직 안 갔느냐?”

“장로님!”

유이설에게 물었건만 돌아온 건 조걸의 활기찬 대답이다.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는 제 예비 사부를 대신해 답한 조걸에게 현영이 셋 다 냉큼 이리 오라 하였다.

창 앞으로 쪼로록 온 셋에게 현영이 전낭을 챙겨 건넸다. 유이설이 받자 조걸과 청명의 눈이 둘 다 반짝 빛났다.

“쓸데없이 주전부리 같은 데에 쓸 생각은 말거라. 제대로 된 식사를 챙겨 먹으란 말이다. 알겠느냐?”

“네.”

당찬 대답들에 현상이 창 가까이에 다가갔다. 현상은 한 명씩 눈에 담더니,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치지 말고, 조심히 돌아오거라.”

말을 끝내며 마지막으로 청명을 가만히 쳐다보니, 현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청명이 어느 순간 활기차게 웃었다.

“그럼요!”

힘든 수련을 하러 떠날 청명을 볼 자신이 없어 그동안 아침에 맞이하는 대신 밤에만 마중을 나갔었다. 고통 참는 얼굴 대신, 환히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그 얼굴을 눈에 담은 현상 또한 웃으니, 현영이 속으로 손 많이 가는 사형이라며 혀를 찼다.

* * *

청명은 현상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예민하게도 알아차렸다. 난제를 맞닥뜨린 학자처럼 자신을 대한 지 오래였는데, 오늘은 그 얼굴에 근심이 조금 가시니 청명도 괜스레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리하여 어쩐지 오늘 수련은 조금 더 잘 풀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섰는데….

-장로님은 두려울 때가 없으십니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빌어먹을 환청. 원하던 방향대로 흐르지 않아 삐뚤어진 검로를 되짚은 청명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아파도, 검을 떨어트리는 것만큼은 제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청명이 이를 빠득 갈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련하던 조걸이 잦아든 검기에 바로 옆으로 가까이 왔다.

“사고는?”

“장로님께서 맡기신 심부름 하러 잠깐 가셨지. 괜찮냐?”

창백해진 청명의 낯을 보고도 평소와 같이 태평히 말할 정도로 조걸은 참으로 분위기를 가볍게 환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청명은 조걸이 편했다. 청명이 검을 들자 조걸이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지금?”

“뭐. 내가 아무리 그래도 사형 하나 못 이길 것 같아?”

생각이 얕은 건지, 아니면 오히려 깊은 건지. 알기 쉬워 오히려 알기 어려운 조걸은 잠시 묻기는 해도 곧 검을 들었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사정 봐주는 것 없이 전력으로 달려드는 조걸에 청명은 속이 시원해졌다. 정면으로 오는 조걸에 맞춰 검을 들자, 청명의 앞에 다다라서 조걸이 방향을 달리하니 검날이 옆으로 달려들었다.

청명이 바로 손목을 돌려 검을 막긴 했으나, 평소와 같이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이 검을 받쳐주질 못하니 검이 청명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진 검날에 조걸이 힘을 빼려던 찰나, 청명이 무릎을 들며 허리를 틀었다. 청명의 발이 허리를 거세게 때리자, 바로 빠지는 제 팔힘에 조걸이 이를 악물었다. 지 팔 힘 약해졌다고 남의 팔 힘까지 빼버리는 게 아주 고약했다.

조걸이 잡고 있던 중심이 흐트러진 틈을 노린 청명이 검을 뒤로 빼며 조걸을 향해 내리쳤다. 조걸이 기겁하며 바로 상체를 틀자 완전히 중심이 무너졌다. 청명이 바로 두 손으로 쥔 검파로 조걸의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으헉, 하고 조걸이 고통 어린 단말마를 내뱉었다.

“하체, 하체, 하체! 또 빠른 것만 믿지! 그것만 믿고 달려들었다가 중심 놓치면 다리 아작나. 그러면 그다음엔 뭐로 승부할 건데?”

조걸과 동시에 검을 수습하며 뒤로 물러난 청명이 검등으로 조걸의 허벅지를 연달아 때렸다. 검등이 아니라 검날이었다면 바로 다리가 잘려나갔을 게 분명하여 등골이 서늘해진 조걸이 기겁하며 뒤로 더 빠졌다.

“피해? 안 갖다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들어주지! 조걸이 기겁하였으나 이미 삐딱선을 탄 청명이 조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곧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기척을 느끼고서는 검을 들어 상대의 검을 쳐냈다.

“허.”

헛웃음을 지은 청명이 제게 달려든 이를 쳐다보았다.

“사고.”

“다음 상대.”

가볍게 착지한 유이설이 간단히 대답하였다. 하마터면 유이설의 발에 밟힐 뻔한 조걸이 기겁하며 후다닥 물러났다.

‘빠른 사람을 연달아 두 번이라.’

심지어 유이설은 조걸보다 까다로운 상대였다. 조걸은 검이 호전적이고 생각이 단순하여 검로가 단순해지곤 한다면, 유이설은 학습 능력이 빠르고 몸도 생각도 유연하여 검로가 시시각각 변하였다. 안 그래도 기척 느끼기 힘든 사람이니, 지금 몸 상태로 싸우기엔 지극히도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러니까.

“그래요.”

몸 상태를 이끌어 올릴 역경으로 제법 적당하단 얘기였다. 청명이 자세를 취하고 기다리자, 유이설이 선공을 양보하지 않고 움직였다. 정면으로 달려들다가 검로가 바뀌는 부분까지는 조걸과 같았다. 청명이 우선 똑같은 모양새로 검을 막았다.

검이 맞부딪힌 순간, 이 순간부터는 달라졌다. 힘으로 밀던 조걸과 달리, 유이설은 검이 맞닿은 상태에서 어깨와 팔을 더 틀었다. 검과 검이 맞닿은 부분을 중심으로 돌아간 검의 끝이 그대로 청명의 목을 노렸다. 청명이 검을 돌려 막기엔 제대로 자세가 안 나올 정도로 가까워서, 청명은 억지로 막는 대신 바로 허리를 젖히며 상체 간 거리부터 확보하였다. 검날을 세우고 팔꿈치를 굽혔다가 펴며 유이설을 노리던 순간, 매화의 환상이 청명을 덮쳤다.

-저는 두려워요. 그래서 저는 나가지 못하는 거겠죠…. 싸울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까.

매화향과 함께 과거에서 온 목소리가 울리며 팔이 저릿해졌다. 시끄러워! 청명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청명이 횡으로 검을 그으며 매화로 이뤄진 비를 갈라냈으나, 이미 한 번 멈칫했으니 그 순간을 유이설이 놓칠 리 없었다. 환상 뒤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던 유이설의 손끝에서 검기가 피어올라 그대로 직선을 그었다. 선인지로. 단순하나 충분히 날카로웠다.

“…….”

청명의 검이 늦었다. 유이설의 검끝이 청명의 명치 아래에 닿아 있었다.

“딴생각. 왜 생각이 많아?”

“조걸 사형이 너무 없는 거죠.”

“거기서 왜 나를 걸고넘어져!”

조걸이 항의했으나 둘 중 누구도 신경 쓰는 이 없었다. 잠시 검을 내려다본 청명이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 동작이 너무 큰데. 실제였으면 여기 박혔어도, 제가 사고 손목 잡고 찌르면 그만인 거 알죠?”

“어쨌든 못 막았어.”

-장로님. 다시 뵐 수 있겠죠?

젠장. 청명이 인상을 썼다. 마지막까지 집중했어야 했는데… 자꾸만 헤매는 기분이라 답답하여 짜증이 치솟았다.

“그리고, 괜찮아. 그럼 조걸이 해치워 줬겠지.”

그거… 자신 없는데요. 조걸이 뒤에서 투덜거렸으나, 유이설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고 검을 회수했다.

“혼자 싸우는 게 아니야.”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유이설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이미 한 번 제 도움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유이설도 제가 도움이 필요한 줄도 몰랐던 때가 있었다.

청명은 유이설을 응시했다. 유이설은 말이 적었으나, 그 눈에는 늘 조용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검밖에 몰라 저 혼자인 것처럼 굴다가도, 어느 순간 다가와서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로 자연히.

“…….”

유이설의 뜻은 알아들었다. 혼자 버티지 말라는 말 아니겠는가.

그러나 상대가 얼마나 믿음직하든 간에 상관없이 제 상태를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자기한테 검존의 기억과 감정이 있다고 말하면 그땐 뭐가 달라지냔 말이다. 혼란만, 어쩌면 의심도 가중할 뿐이다. 이건 혼자서 이겨내야만 하는 문제였다.

청명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유이설도 당장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듯 고개를 돌렸다. 그때, 불쑥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사이 좋긴.”

셋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당보가 서 있었다. 팔짱 낀 채 삐딱한 자세로 웃는 낯을 한 당보가 말했다.

“잠깐 시간 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자명했다.

“자, 보시오.”

“그게 뭐, 읍!”

무엇인지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당보가 무턱대고 손에 든 것을 청명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러나 아무리 놀란다 한들 뭔지 모르는 걸 삼킬 생각 따윈 없는 청명이 당보를 노려보았다. 당보가 태연히 웃는 낯을 하였다.

“한 번 믿어보라니까요.”

으으으음. 청명은 고민하였으나, 숱하게 많이 보고 들은 기억 속에서 이 앞의 사람은 단 한 번도 믿지 못할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과거 기억을 담보 삼아 삼키자, 침을 꺼낸 당보가 청명의 왼쪽 팔 위를 빠르고 일정하게 찔렀다.

“자.”

왼쪽 팔을 잡은 순간부터 짐작 가는 것이 있어, 당보가 팔을 놓아주자마자 청명이 바로 제 팔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팔을 접었다가 펴고, 잠시 고민하다가 일어난 청명은 곧 고통이 가셨음을 이해했다.

-잊지 마.

그렇다 하여 환각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청명이 어떻게 한 거냐며 당보를 쳐다보았다.

“어떤 사술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통증 자체는 어느 정도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의원들과 함께 연구했죠.”

몸 한구석을 마비시키는 데에는 우리만큼 능한 자가 또 없잖아요? 당보가 천연덕스럽게 말하니, 청명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독이에요?”

“적절히 쓰면 약이지 않겠습니까.”

“궤변.”

“어쨌든 안 아프면서. …그래도 조심하긴 하쇼. 왼쪽 팔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안 다치는 거랑 동급은 아니니까.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 오히려 더 크게 다칠 수도 있소.”

“효과는…”

“반나절은 가오.”

“더 길게는 안 돼요?”

하여간 이놈의 인간은 다시 살아나고서도 감사 인사가 너무 박하다. 이 방도를 만들기 위해 당가 의원들이 얼마나 굴렀는지 알기는 할는지 원. 의원들을 굴린 장본인인 당보가 고개를 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너무 길어지면 몸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으니 그 정도로 만족하쇼.”

일시적으로 몸 한 군데 흐름을 차단하는 일이다. 의원들이 만들어낸 약들을 전부 직접 먹어보며 내력이 제대로 도는지 확인해보긴 했다마는, 그래도 아직 불안정하여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앞으로 더 신경 쓰고 지켜봐야 했다. 화산에서 내세운 수련 기간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한 달, 그 시간이 지나면 팔을 제대로 쓸 수 있든 말든 무리해서라도 나갈 성정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서둘러서 가져온 탓에 무리한 감이 있었다.

“아직 지켜봐야 하니까, 왼쪽 팔 크게 다칠 정도로 무리하지 말고!”

“그러죠, 뭐.”

답 빠른 거 봐라. 당보는 절대 청명의 빠른 답을 믿지 않았다. 저리 답해놓고 절대 안 지킬 인간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거짓을 저리 망설임 없이 빠르게 답하지 않겠으나, 청명이 양심이 있을 리 없다. 당보만큼 그 사실을 잘 아는 인간이 또 있을까.

“한 달, 옆에서 지켜볼 겁니다.”

“네? 바쁜 사람이 왜…. 그냥 약이랑 어디 찌르면 되는지 알려줘요.”

“산적이 약 짓는 소리 하고 앉아있네.”

“뭐라고요?”

“직접 하긴 무리입니다. 화산 의약당주에게 방법을 일러놓긴 하겠습니다만, 걱정 마십쇼. 청명 도장 나가는 일 있으면 반드시 날 부르도록 장문인께 내 단단히 얘기해 놓을 테니!”

청명이 불퉁한 낯으로 당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당보가 누구인가, 뻔뻔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당보도 따라서 청명을 꿋꿋이 바라볼 뿐이었다. 눈싸움과 같은 모양새가 이어지자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 사람 때문이잖아. 책망 어린 말에 당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 이미 그 확고한 뜻은 알아들었습니다. 둘이 다른 사람이라 이거 아닙니까?”

“알아들은 사람 같지가 않은데.”

“도장의 뜻대로 할 거요. 도장이 내가 기억하는 누구와 다른 모습 보인다 하여 실망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둘이 같다 여겨 필요 이상으로 의지하거나 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청명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헛소리다. 이미 심할 정도로 과히 신경 쓰고 있지 않은가. 어느 가문이 다른 문파의 삼대 제자를 신경 써서 이렇게 약을 지어와 준단 말인가. 그것도 단 두 달 만에 맞춤형 약을 만들어 준 격이니, 지나친 특별대우였다. 청명의 시선이 당보의 입으로 향하였다. 슬 벌어진 입 안의 혀끝이 시커멨다. 전에 본 적 없던 녹피장갑을 하필 오늘 끼고 나타난 것도 수상쩍었다.

‘거짓말은.’

그러나 그만하라고 청명이 딱 잘라 말하기가 영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 순간에도, 상대의 눈이 지나치게… 간절해서.

“근데, 지켜주게만 해줍쇼. 이것만은 양보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당보가 차분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 검존이라는 사람한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그 사람 것이라고 하면 한낱 물건에 불과한 흔적이라 할지라도 극진히 모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검존과 암연의 연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고, 또 직접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전우를 경험해보기는커녕 아직 강호에 나간 적도 없는 청명이 쉬이 납득하기엔 지나치게 깊은 관계였다. 그래서 백 년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매달리는 이유를 도무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문득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는 유이설의 말이 떠오르긴 했다. 이 사람은 제가 지닌 기억의 주인공이 마음 놓고 함께 싸웠던 사람이었다. 이 사람도 그리 여겨서, 그를 그 어떤 속내도 털어놓을 수 있었던 다신 없을 친우로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무엇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건 검존도 막을 수 있었던 적 없으니, 한낱 청명 도장도 막을 생각 하지 맙시다.”

상대가 가득 품고 있는 그리움에, 회한에, 바람에 저 또한 흔들리고 마는 걸까. 왜 상대가 즐거이 웃는 얼굴을 보면 어쩐지 안심이 되는 걸까.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나중에 제가 이용해 먹었다고 뭐라 하는 거 아니죠?”

“마음껏 이용하십쇼. 이런 기회 아무나 가지는 거 아닙니다?”

이 암존이란 사람은 제멋대로이고, 웃기고, 짜증 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청명은 하릴없이 웃었다.

당보와 있을 때면 더욱더 선명해지던 환각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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