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백천청명] 頂天履地(정천이지) 01,02

Pumpkin Time by 화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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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화음…….’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 며칠 만에 화음에 도달한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며 연신 숨을 고르다가 이내 비장한 표정을 짓고서 곧바로 화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챙겨온 식량도 물도 모두 떨어져 입안이 바싹 말랐지만, 그만큼 화산에 오르는 일이 소년에게는 중요했다. 고개를 들어도 저 위가 온전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은 산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삼킨 소년이 기합을 넣고서 앞으로, 위로 나아갔다.

분명 화음에 도착한 것은 대낮이었을 터인데,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는 화산의 중턱까지 도달하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소년이 조금 더 자랐을 때 화산을 올랐더라면 해가 떨어지기 직전에라도 화산에 도달할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아직 충년沖年(*10세 안팎의 나이)밖에 되지 않았기에 제아무리 부지런히 오르더라도 그 어린 몸으로는 화산의 중턱까지가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오악五岳 중 한 곳인 화산을 오르기로 했을 때부터 각오한 바였으나, 타오를 듯 붉어졌던 하늘이 차게 식으며 어둑해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급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지라. 소년은 바위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그간 먼 거리를 이동하며 혹사당해 후들거리는 다리로 어떻게든 다시 걸음을 내딛으려 하던 찰나였다.

“이 시간에 그 몸으로 그렇게 멋모르고 화산 오르다가 삐끗하면 뼈 다 부서진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몸뚱이 아까운 줄 모르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소년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굵은 선의 다소 거칠어 보이는 성정의 남성이 몇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뭘 그리 놀라? 화산은 숙련된 무인들도 한순간의 방심으로 다치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 너덜너덜한 꼴의 꼬맹이가 쉴 생각도 안 하고 혼자 화산을 오르려 하는데 당연히 지켜봐야지.”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가려져 있으나 내용을 들어보면 안그래도 험한 화산에 홀로 오르려 한 소년을 걱정해 뒤따랐다는 소리다. 그제야 남성의 가슴팍에 새겨진 매화와 그의 허리춤에 있는 매화검이 눈에 들어왔다.

‘화산파 사람이구나!’

……말투는 도사와는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지만.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도장께서는 화산의 도인이십니까?”

“오냐, 내가 화산파의 청명이다.”

화산의 청명! 그 이름은 소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좋은 쪽보다는 안 좋은 이야기가 훨씬 많았지만 말이다. 그가 몸담았었던 곳에서는 화산에 대한 좋은 소리가 나오는 일이 있을 리가 만무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소년이 언제 지쳤냐는 듯 정중한 자세로 말했다.

“화산의 장문인을 뵙고 싶습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퉁명스러운 낯을 하던 청명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간 말없이 눈으로만 소년을 짧게 살폈다.

“속가에서 왔나?”

“……아닙니다.”

“그럼 어디 다른 문파나 세가에서 보내서 온 것이더냐?”

이걸 보냈다고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소년이 고민하는 걸 보던 청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론 소년이 그렇다고 대답하더라도, 청명은 오늘 타문이나 속가에서 화산에 방문하겠노라고 온 연락이 없었으며 동시에 있었더라도 절대로 이런 어린아이 홀로 보내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청명은 떨떠름해진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뭐, 가출, 그런 거?”

“그, 따지면…, 예, 그쪽이긴 합니다…….”

우물쭈물하다 나온 소년의 대답에 청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소년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날린 뒤,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것들이 화산이 무슨 가출 청소년들 받아주는 곳인 줄 아나. 지금이라도 밑으로 내려가면 자시가 되기 전에는 화음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부모 속 썩이지 말고 얼른 내려가.”

청명으로 인해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가슴을 내려치며 지내 온 누군가가 들으면 너나 잘하라며 대꾸했을 법한 말을 하고는 고개를 푹 숙인 소년을 지나쳐 걸음을 내디뎠다.

“제가 다시 돌아가더라도 제 자리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곳 또한 제 자리가 아닐 거고요.”

두어 걸음도 채 떼지 않아 청명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속상함이 묻어져 나오기는 해도 마냥 우울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사실만을 말하는 듯 담담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닌 듯해 청명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자신만의 자리 찾는 것 좋지. 그런데 그게 화산일 필요는 있나?”

물론 청명은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 화산에서 살아왔고, 화산으로 돌아왔으니 직접 제 자리를 지키거나 찾기 위했던 적은 없지만 말이다.

“……화산이어야 합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왜 가출했는지 궁금하기야 하다. 기어이 소년에게로 다가와 마주 보고 섰다.

“왜?”

“죽어도 이기고 싶은 형님이, 제 능력을 인정해주셨으면 하는 가족들이 종남에 있으니까요.”

“……뭐?”

그러니까, 지금 어디서 가출해서 어디에 입문하고자 한다는 소리인가? 청명이 드물게 놀란 눈을 하고서 소년을 바라보았다.

“종남에서 가출했다고요. 그러니 꼭 화산이어야 합니다.”

우울하진 않았어도 나름 맺힌 게 많았는지 이제까지의 고생이 물밀듯 떠올라 울적해졌다. 꾹 다물린 입술과 굳게 말아쥔 소년의 주먹을 본 청명이 잠깐 고장이라도 난 듯 멈춰버린 뇌를 움직였다.

‘가만 보니 자질은 그리 나쁘지 않은데. 강해지고자 하는 목표도 확실하고. 장문사형만 허락한다면…….’

이어지던 생각에서 벗어난 청명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서안에서 화산까지 어린 몸으로 오느라 너덜너덜해졌을 소년을 한 번 내려다보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꼬맹이.”

“…예?”

“너 멀미하냐?”

뜬금없는 물음에 두 눈을 크게 뜬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청명이 그의 속사정에 대해 더 듣는다고 해도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입문 또한 그의 권한이 아니기에 그저 화산의 장문인 청문의 결정에 따라야만 한다. 하지만 아이답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가, 돌아가더라도 자신의 자리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기까지 녀석이 겪어왔을 상황이 청명을 움직이게 했다. 청명이 냉큼 소년을 옆구리에 꼈다.

“멀미 안 한다고 했으니까 지리거나 토하면 혼난다.”

대답조차 듣지 않고 당황해 버둥거리는 움직임을 무시한 채 그대로 빠른 속도로 땅을 박찼다.



명도는 오늘 처음으로 번을 서보는 이대제자들을 지도하기 위해 산문 앞에 나와 있었다. 검 든 무인들이 지내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곳보다도 악명이 높은 오악 중 한 곳인 화산이라 감히 쳐들어올 간 크고 체력 좋은 침입자는 잘 없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어느 정도 무학을 익힌 일·이대 제자들이 돌아가며 번을 서 왔다.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며 혹시나 자신이 번을 서고 있을 때 침입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하던 제자들의 긴장을 풀어줄 찰나였다.

‘음?’

빠른 속도로 화산을 향해 오르는 기척이 느껴지자 명도가 미간을 좁혔다. 느껴지는 기척으로 보아 한 명인 것 같기도 하고, 두 명인 것 같기도 했다. 스릉. 혹시 몰라 재빨리 검을 빼든 명도를 보고서 덩달아 비장한 표정을 지은 몇몇 이대 제자들 또한 검을 뽑았다.

탓. 산문 앞의 무인들을 긴장하게 만든 장본인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화산 앞에 당도했다. 검을 든 채로 정면을 노려보던 명도의 낯이 스르륵 풀렸다.

“……장로님?”

화산의 장로, 청명이 아이들의 앞까지 성큼 걸어왔다.

“장문인은 안에 계시냐? 좀 봬야겠는데.”

“예? 예.”

늘 산문을 휙 넘어 화산에 들어가서는 달리 확인이나 허락 없이 장문인의 처소에 들락날락하던 청명이 아니던가? 물론 어린 제자들이나 외인이 볼 때는 그러지 않긴 했지만 말이다. 옅게 들리는 죽어가는 소리에 그저 청명의 존재감만을 선명히 느꼈던 명도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헌데 사숙, 옆구리에 그 아이는……?”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꾀죄죄한 모습과 하얗게 질린 낯이 한눈에 들어오긴 했으나 그렇다고 잘생긴 얼굴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고놈 참 잘생겼네, 어디 명문정파 도련님처럼 생겼어. 어린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감탄하던 차에, 청명이 대답했다.

“화산 올라오던 길에 있길래 주워왔다. 가출했다길래.”

“……예?”

가출한 아이를 보았다고 냅다 이 화산에 끼고 왔다는 소린가? 화산의 밤은 다른 곳보다도 훨씬 춥다. 만일 다른 이들이 가출한 아이를 데려왔다면 날이 어두워졌으니 일단 화산에서 쉬게 해주고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일단 데려왔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명도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청명이었다. 그가 청명의 무위를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성격이나 성질을 잘 알고 있는 명도로서는 자연스럽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나, 그 의문은 곧바로 이어지는 그의 말에 풀렸다.

“종남에서.”

“……예?”

“종남에서 가출했단다.”

아니, 올 데가 따로 있지! 종남 놈이 화산에는 왜, 어떻게 온다는 말인가? 명도의 시선이 자연스레 청명의 옆구리에 붙들린 채 반쯤 넋이 나간 상태의 아이에게 다시 향했다. 혹여 아이에게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는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해도 종남은 종남. 화산과 종남이 서로에게 가진 악감정을 배제하더라도 이렇게 어린아이 하나를 내세워 같은 정파인 화산을 기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서로 죽이니 살리니 원수졌어도 두 문파 모두 구파일방에 속한 명문 정파가 아니던가.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을 수 있는 법일 텐데,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청명이 종남 녀석을 제 옆구리에 끼고서 화산 산문을 넘으려는 것이다. 명도가 정말 저 아이가 장문인을 만나도록 둘 것이냐는 듯 쳐다보니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 나도 저 녀석을 따라 들어가 있을 거니까.”

청명의 말에 명도의 낯이 살짝 풀렸다. 제 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새삼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어떤 누가 오더라도 청명은 화산과 화산의 장문인을 지켜낼 수 있는 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작은 아이가 검존을 이겨내고 장문인을 해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시고…….”

줄줄이 이어지는 당부에 미간을 좁힌 청명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상의 잔소리는 사절이라는 뜻이다.

“이러고 있으면 이 소리에 장문인께서 나오시는 게 더 빠르겠다, 이 녀석아. 장문인이 처소에 계신 건 알았으니 됐다. 가보마.”

“예.”

산문을 지나와 장문인의 처소에 다다른 청명이 여전히 제 옆구리에 들려있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하얗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린 것이, 정신을 차리려면 한참 멀어 보였다.

‘……혼나겠네.’

한참 어린아이를 이리 납치하듯 데려오고도 네가 도사냐며 혼낼 청문을 떠올린 청명이 저도 모르게 몸을 잘게 떨었다. 그 양반 손맛은 무슨 해가 갈수록 매워져. 모든 원인이 제 행동에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청명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이곳으로 오르던 길에 만난 청명이 자신을 옆구리에 끼고서 순식간에 화산을 올라 살면서 처음으로 멀미 증상을 보이던 소년이 정신을 차리니 화산의 장문인 처소였다. 제 앞에 놓인 매화차 한 잔을 느리게 홀짝이고서야 겨우 울렁이는 속을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대현검大賢劍 청문靑問.

더없이 어질고 현명한 도인이라는 말을 소년 또한 어깨 너머로 몇 번이고 들었다. 강대하던 화산의 이름을 더욱 드높인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말로만 듣던 그를 이리 가까이서 대면하니 청명과의 만남에 휘말리며 죽어버린 긴장감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울렁이는 속으로 여태껏 꾹꾹 눌러 담아왔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었다. 자신이 종남파 장로의 자식이라는 점과 그간 부족한 실력으로 받아온 대우, 하여 가출해 화산을 오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말이다.

“화산에 입문하고 싶다고?”

“……예!”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모두 전해 들은 청문이 조용히 팔을 뻗어 청명의 옆구리를 꼬집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으나, 슬그머니 차를 마시는 척 시선을 내리깔아 보지 못한 척했다. 끙, 소년에게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앓는 소리를 낸 청문이 다시금 청명을 노려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정은 잘 알았다, 하지만…….”

청문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조심스레 말끝을 흐리자 소년이 그 또래답지 않게 담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문인께서 걱정이 많으심을 압니다. 화산과 종남은 빈말로도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화산과 종남은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 두 문파는 예로부터 걸핏하면 부딪히고 서로 잡아먹을 듯이 굴어왔다. 당장 소년만 해도 종남 내를 오며 가며 들었던 화산 욕만 한 바가지는 되었고, 청명에게 냅다 들려와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신이 종남에서 왔다는 청명의 말 한마디에 산문 앞에서 번을 서던 이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그러니 의심되고 고민되는 것이 당연하다. 다른 문파나 세가도 아니고 '그' 종남에서, 그것도 제 발로 뛰쳐나왔다며 제자로 받아달라고 말했으니까.

“하나, 어중간한 마음으로 오른 길이 아닙니다. 저는 화산을 오르내리며 팔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화산에 입문하고 싶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다. 가출한 것이 충동적인 선택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종남에서 가출하여 화산으로 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일에다 대고 무어라 옳으니 그르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나, 적어도 그 행동을 말미암아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는지 일깨워줄 필요는 있었다.

“한 번 입문한 이가 문파에서 나가게 된다면 단근참맥을 집행하여 그 무공을 회수해야만 한다. 물론 종남의 장로를 부父로 두었을 뿐, 정식으로 종남에 입문한 적이 없으니 너와는 경우가 다소 다르기야 할 테지만, 네 입문 하나로 종남에서 화산에 항의가 들어올 가능성 또한 높다.”

청문의 무겁고도 진중한 지적에 소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소년 또한 무학을 익히는 이들 사이에 있었기에 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이리 다시 들으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긴장감에 떨리는 손으로 따뜻한 매화차가 담긴 잔을 감싸 쥔 채, 긴 숨을 뱉었다.

“저 또한 듣고 자란 바가 있어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화산에 입문하고자 찾아왔다는 것이더냐?”

“…예.”

무거운 청문의 기세에 몇 번이고 움츠러들 뻔했으나 끝까지 바른 자세로 꿋꿋이 그 기세를 모두 받아내었다. 무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던 청문의 낯이 짧은 한숨과 함께 풀렸다.

“헌데…….”

“예!”

“생각해보니 상황이 워낙 당황스러워, 아직 네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했구나.”

그 말에 청명이 관심 없는 척 슬그머니 귀를 쫑긋 세웠다. 종남이라는 말과 저물어가는 시간에 그곳에 내버려 둘 수 없어 냅다 옆구리에 끼고 오느라 이름 물어볼 틈도 없었다. 청명의 그 모습에 청문이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고는 한탄하듯 말했다.

“저 녀석 또한 네 이름을 물어볼 겨를이 없었던 듯하고.”

“아, 그…….”

이제껏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절실하고 진지해 보이던 낯이 확 달아오르니 그제야 조금 제 나이다워 보여서, 청문은 저도 모르게 옅게 미소 지었다.

“괜찮으니 말해보거라. 입문을 허하건 허하지 않건, 그래도 우리가 네 이름은 알고 있어야 서로 편하지 않겠느냐.”

“…저는, 진가의 삼남인……, 동룡이라고 합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기어이 제 이름을 내뱉자마자 일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애써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인 청문과…….

“푸학!”

이제껏 청문의 결정을 기다리며 곁에서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청명의 낯이 처음으로 풀렸다. 도, 동룡이……, 어떻게 저 얼굴에 사람 이름이 동룡이……. 이제 열댓 먹은 어린아이의 이름을 면전에다 대고 비웃기는 그랬는지, 아니면 청문의 회초리 때문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소리죽여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으려 했으나 되레 그 반응에 소년, 진동룡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점점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사제는 어쩌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흐음…….”

청문의 물음에 긴 숨을 뱉으며 웃음소리를 겨우 억눌렀다. 언제 웃었냐는 듯 팔짱을 낀 채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청명의 날카로운 시선이 단숨에 소년을 꿰뚫는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그 압도적인 중압감에 동룡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말았다. 청명은 그러한 소년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살피다 말했다.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장문인의 결정에 따를 일이지만, 만일 받아들이신다면 당분간은 누군가 녀석에게 딱 붙어서 감시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어이하여?”

청문은 청명의 짧고도 간결한 의견을 이해했을 텐데도 다시 자세히 이야기해보라는 듯 굳이 되물었다. 청명과 청문의 시선이 일순 마주친다. 청문의 눈빛과 물음에 담긴 생각을 얼핏 눈치챈 청명이 작게 한숨을 뱉었다. 사형도 녀석을 받아들이실 생각이로군.

물론 저 아이를 화산에 입문시킨다고 했을 때 다소 소란이 일 수 있겠지만, 종남에서 뭘 어쩌겠는가? 녀석의 가족이 종남에 있다고는 해도 아직 종남에 정식으로 입문하지 않았을뿐더러, 무엇보다 당사자가 화산에 입문하길 저리도 간절히 바라지 않던가. 동룡이 화산에 입문하고서는 입문한 이를 빼내려 수작질을 부릴 수는 없다. 두 문파 모두 이름값 높은 대문파니까.

가정사가 어떻고, 두 문파의 관계가 어떻고, 하는 문제들은 청명이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이제껏 그런 것을 고민해본 적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녀석의 입문으로 떠안을 문제를 고민할 사람은 청문일 테니까. 그러니 청명이 주목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녀석의 손.’

몇 번을 다시 보아도 검수로서의 자질이 나쁘지 않다. 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든 해내는 악착같은 성정도 있는 듯싶고. 그게 아니라면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다며 원수 문파를 저 어린 몸으로 냅다 찾아오는 미친 짓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청명은 흔히들 말하는 천재니, 만재니 하는 것들을 높게 쳐주지 않는다. 재능이 있더라도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있으니만도 못한 것이니까. 재능 좀 있다고 하는 녀석이라고 해봐야 천하삼대검수 중 하나인 매화검존의 눈에는 얼마나 풋내기로 보이겠는가? 청명이 중요시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보통 입문하기 전 아이의 손은 굳은살 하나 없이 말랑거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입문 전에 검을 잡더라도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종일 수련만 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막 입문한 어린 제자들에게도 강도 높은 수련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저 나이 또래 아이 중에 저리 손에 굳은살이 박인 이를 찾기 힘들다. 그 말은 소년이 검을 오랜 시간 잡아 왔거나, 짧은 시간 내내 검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이를 생각하면 후자에 가깝겠지.

‘재능 있고, 악착같이 노력해야만 하는 목표 확고하고. 실행력 있고.’

거기에 나아갈 방향을 잡아줄 스승만 있다면. 출신이 종남이라는 것만 아니면 제자로 들이기 딱 좋다. 하여 청문 또한 요란해질 위험을 각오해서라도 소년을 받아들일 생각이 든 것일 테다.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다. 너는 결정은 장문인 내게 맡기겠노라 했으나 만일 아이를 화산의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는 당분간 아이를 감시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왜 그리 생각했느냐?”

청문이 이리 묻는 의도를 눈치채는 건 빨랐고, 맞은 편에 앉아있는 녀석에 대한 파악은 더더욱 빨랐다. 청명이 뜸 들이나 싶더니 조금 심드렁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그리 말한 데에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녀석이 종남에서 왔기 때문이죠.”

“종남 또한 화산과 마찬가지로 속가 성향이 짙긴 하나, 도관이고 또한 명문 정파다. 이리 아이를 보내어 가면서까지 트집을 잡으려 할 것 같지는 않구나.”

“뭐, 그거야 그렇겠죠. 그냥 만약을 위해서 하는 것이 좋다는 소립니다. 게다가 말이 감시하는 거지, 어차피 입문한다면 누군가를 스승으로 둘 텐데, 그 스승이 지켜보고 어떤 녀석인지 장문인께 보고하면 될 테니까요. 그건 비단 저 녀석만이 겪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인 문파의 장문인이 문파의 제자들을 어떻게 다 관리할 수 있는가? 그건 스승과 제자로 이루어진 관계로 제자들을 키워가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제자들을 가장 가까이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제자들의 스승이다. 하여 장문은 주기적으로 그들로부터 제자들을 파악해왔다.

언제 가벼운 분위기였냐는 듯 진지하게 제 입문에 관련하여 대화가 오가자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청명의 대답에 청문이 고뇌에 빠진 듯 입을 다물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명 또한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다는 듯 느긋이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자 처소 내부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단.”

침묵 끝에 청문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긴장감에 동룡은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아버리고 말았다.

“화산에서 지내는 것은 허하마.”

침묵 끝에 나온 청문의 결정에 눈을 번쩍 뜬 동룡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표정을 본 청문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나, 아직 입문을 허하는 것은 아니다. 해결해야 할 일과 절차가 있고, 나 또한 너를 계속 지켜보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아이가 무서워하지 않게끔 돌려 말하긴 했으나,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화산이 동룡일 온전히 신뢰하고 화산의 제자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어디 허튼짓하지는 않는지 계속 감시하겠다는 소리다. 청문은 아이의 말과 행동에서 거짓됨을 느끼지 못했으나, 그는 문파의 일개 제자가 아닌 장문이다. 선택하더라도 그에 따른 책임은 온전히 그가 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문파의 어린 제자들이 될 테니까. 청문의 말에 동룡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으로 돌아가기엔 늦었고, 돌아가고픈 생각도 없었다. 어떻게든 이곳에 뿌리를 내려야만 했다. 받아주기 어렵다는 대답이 나왔더라면 동룡은 받아줄 때까지 몇 번이고 화산을 오르내릴 각오까지 했었기에, 오히려 생각보다도 일이 잘 풀리는구나 싶었다.

“그러니 일단 스승은 아니더라도, 너를 지켜보고 내게 고해야 할 녀석을 정해야 할 텐데…….”

화산의 장문인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던가. 고작 충년 언저리의 어린아이를 청문아 홀로 종일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동룡일 곁에서 지켜본 이의 보고를 들어본 뒤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터인데, 대체 누구에게 시켜야……. 이마를 짚으며 손이 비고 신뢰가 가는 청자배 녀석들의 면면들을 떠올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청문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차마 내키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망설이다 말했다.

“청명은 들어라.”

“예? 예, 장문인.”

이제 제 역할은 얼추 끝났겠거니 싶어 무표정한 낯으로 근방에 꽁쳐둔 술 어디 없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던 청명이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보고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 안다는 듯 청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청명은 그저 능청스레 헤헤, 하고 웃어넘길 뿐이었다. 하지만 그 능청스러운 웃음도 얼마 가지 못했다.

“……아이를 지켜보고 보고하는 역할은 네가 해줘야 할 것 같구나.”

“네? 제가요?”

청문이 힘겹게 꺼낸 말에 청명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사, 사형? 저 청명입니다? 착각하신 거 아니죠? 진심이세요?”

“애초에 네가 먼저 그러지 않았느냐. 화산에 들이게 되면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물론 청명이 그리 말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떤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을 동룡이 수긍하게끔 만들기 위함이었을 뿐이지, 청명이 녀석을 담당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했던 말이었다. 청문은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잘 물리지 않는다. 그 성정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아이 감시 일을 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청명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다, 다른 녀석들도 있잖아요. 청공이 놈이나, 청진이 녀석이나…….”

“그 두 사람은, 아니, 현재 청자배들 전원 각자 맡은 일이 있어 온전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다. 명자배 녀석들도 지금은 제 제자들 가르치느라 바쁘고.”

그러니 청명뿐이라는 것이다. 한 문파의 장로지만 딱히 맡은 일이 없고, 따로 가르쳐야 할 제자도 없는 사람은. 어차피 술이나 마시고 놀러나 다닐 거라면 화산에서 아이 감시나 하라는 소리다. 무엇보다…….

“애초에 아이를 이리로 데려온 사람도 너였으니 책임을 져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도 할 일은 많다고요!”

“무슨 할 일?”

“……그, 덤벼오는 종남 놈들 대가리도 깨줘야 하고! 호북에 쳐들어가서 검제 놈한테 비싼 술도 얻어먹어야 하고!”

청문이 그리 되물으니 잠깐 말문이 막힌 청명이 고민하는 듯싶더니 냅다 주먹을 콱 쥐어 보인 채 뻔뻔히 내뱉었다. 그런 그의 대답에 청문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명아.”

“……네.”

“시키는 대로 해라.”

“……눼.”

원래 권력 앞에선 장사가 없는 법이다.

내가 괜히 입이나 털어대서 이 나이에 핏덩이 하나 감시하게 생겼네, 아이고. 청명이 이마를 짚은 채 일각 전 남의 일이라는 듯 털어대었던 그 주둥이를 흠씬 두들겨 패놓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비 맞은 사람이라도 된 것마냥 연신 중얼거렸다. 잠시 뒤 고개를 든 청명이 체념한 듯한 낯으로 동룡이를 바라보았다.

“동, 풉…, 그래, 동룡아. 장문인께서 네가 화산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내 이제 거기에 말은 더 안 얹겠다마는…….”

언제 웃었냐는 듯 청명의 입가에서부터 서서히 웃음이 사라진다. 그 순간 방 안의 온기가 순식간에 걷히기라도 한 듯이 몸이 떨려왔다.

“감히 화산에서 버티기가 쉬우리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각오했습니다.”

눈빛 좋고. 청명의 기세에도 수그러드는 일 없이 꿋꿋하다. 얼결에 떠맡게 되었으나, 어쩐지 청명은 제 앞의 녀석이 조금은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조금도 티 내지 않으며 청명은 한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제껏 사제 놈들이 제자를 들이면서 해왔던 것들을 떠올렸다. 이렇게 귀찮은 걸 그놈들은 대체 어떻게 했나 몰라. 청명이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자, 청문이 가벼이 정리했다.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동룡이는 네 처소로 데려가거라. 남은 것은 내일 다시 이야기해도 될 테니까.”

“예, 사형.”

“그 사이에 애 괴롭히지 말고. 때맞춰 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문이 냉큼 덧붙이자, 입을 삐죽 내민 청명이 고개를 돌려 청문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이건 사형이 시키신 겁니다? 전 분명 안 한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 사형이 시킨 거예요?”

물릴까? 역시 물리고 지금이라도 청자배 녀석 아무나 불러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청명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청문이 흐뭇하게 웃었다. 어지간해선 결정한 일을 물리는 일이 없었으나 이 세상 누구라도 저 눈빛을 보면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역시 다시 고려해보겠노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이내 두 사람을 함께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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