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어린 매화 01, 02
신룡 청명이의 몸에 구화산 삼대제자 청명이가 들어옵니다.
※ 첫번째 단행본이 나오기 전 작업 시작한 글입니다. 작업 중 외전이 나오면 정말 못 올리게 될 것 같아 첫편만 올려두었는데, 단행본 외전에서의 내용으로 다소 내용을 갈아엎는 과정에서 더이상의 진행이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하여 이전에 작업해두었던 2편까지만 업로드됩니다. 감사합니다UU!
※ 화산귀환 1100화대 초반부 진행 당시 구상 및 작업 시작하여 최신화 및 외전의 내용과는 맞지 않는 내용이 다소 존재합니다.
※ 화산귀환 686화까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청명아. 일어났냐? 청명아?”
문 너머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떴다. 어쩐지 몸 내부가 깨끗해진 느낌이 들었다. 낯선 기운에 상체를 일으킨 청명이 흐릿한 시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방의 침대에 홀로 앉아있었다. 청명이 대답하지 않으니 밖에서 기웃거리던 이가 “……나 들어간다?”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부름을 듣고도 조용한 것이, 여전히 잠들어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응? 뭐야, 깨어 있었네? 수련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안 나와서 와봤더니.”
수련 시간이 지났다고? 그 말에 청명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막 잠에서 깨어나 잠긴 듯 낯선 목소리가 나왔다.
“벌써 진시야?”
“응? 아니. 묘시. 원래는 묘시가 되기 한참 전에 일어나서 수련하다가 애들 봐주러 나오던 녀석이 낙안봉에도 없고, 다른 곳에 가봐도 없길래 혹시나 하고 데리러 왔지.”
보이는 방 풍경이나 이 사람이 입고 있는 복장이며 말을 들어하니 여기가 화산인 건 맞는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애들을 왜 봐줘, 당장 내 검 갈고 닦기도 바쁜데. 청명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으니 사형 좀 불러줘. 물어볼 게 있으니까.”
저를 깨우러 온 이를 힐끔 살펴보니 화산에서만 산 청명이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데다가 삼대제자 무복을 입고 있으니 일단 사숙이나 사숙조는 아니다. 청자배라면 청명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고, 설사 모르는 얼굴이라고 해도 그건 갓 입문한 사람들일 텐데, 그런 사람이 저런 건장한 몸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청명이 모른다면 저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누구? 대사형? 일어나자마자 뭘 물어보려고?”
“나한테 사형이 대사형 말고 더 있어?”
아니, 그나저나 쟤는 아까부터 왜 자꾸 반말이지? 내가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화산에서 비운 밥그릇이 몇 갠데! 청명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불에서 꾸물꾸물 빠져나와 개어둔 무복으로 갈아입으려던 청명의 손이 남자의 대답에 멈췄다.
“무슨 소리야, 네가 청자배 막낸데.”
“……뭐?”
청명의 되물음에 반사신경으로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붙잡으려던 남자가 청명을 힐끔 보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청명이 진심으로 당황한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그가 아무리 눈치 없이 굴 때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그, 그러니까 일단 대사형을 데려오면 되지?”
멍하니 있던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방에서 나갔다. 텅 빈 방 안에서 청명이 문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린 채로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잠이 덜 깼나 싶은 청명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그쪽 이름이….”
“……조걸.”
조걸이 대답하자 청명이 그의 이름을 낮게 여러 번이나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퍼뜩 고개를 들고는 조걸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경계 어린 눈빛에 세 사람 모두 바짝 긴장한 채 시선을 맞닥뜨렸다.
"그러니까 청자배 대사형이 이 사람이고, 백자배 대사형이 저 사람이다?"
조걸이 고개를 끄덕이고 떨떠름한 표정의 윤종이 청명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 그래. 내가 윤종이고, 이분은 백천 사숙이시다.”
아직 도호를 안 받은 건가? 사형은 저 윤종이라는 이보다 더 어렸을 때 도호를 받았던 것 같은데. 게다가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잘생겼네?’
저 정도의 얼굴을 청명이 화산에서 봤더라면 모를 리가 없다. 원체 타인의 얼굴이나 이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기억해내는 것이 느린 청명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저 얼굴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종의 말을 듣고 한참 그와 백천을 빤히 바라보던 청명이 미간을 좁힌 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청문 사형이랑 백운 사숙이 아니고? 청문 사형은 어디로 갔는데?"
"얘가 진짜 잠이 덜 깼나, 대현검 청문이라면 당연히 등선하셨지! 인, 아아악!"
청명의 반복되는 질문에 황당한 상황으로 속이 터져 나갈 만큼 터져나간 조걸의 대답을 막지 못한 윤종이 일단 그를 냅다 걷어차 날려버렸다. 청명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하던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눈을 끔뻑이며 황당한 눈으로 윤종을 바라보았다.
‘…진짜 저 사람이 대사형인가? 강한 걸로 따지면 조걸이라는 사람이 더 강한 것 같은데 꼼짝도 못하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날려버린 이 사람이나, 마치 이러는 소동이 익숙하다는 듯 여전히 생각에 빠져있는 백자배의 저 사람이나 하여간 잠에서 깬 이후로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 없다. 멍하니 소동을 바라보던 청명이 그제야 조걸이 날아가기 직전 제게 한 대답을 떠올리고는 놀란 눈으로 윤종에게 물었다.
"아니, 잠깐. 대현검? 등선? 대현검은 뭐고, 청문 사형이 왜? 왜 갑자기 등선하는데? 어제만 해도 건강했단 말이야. 오늘도 수련 끝나고 나면 화산 밖 이야기를 마저 해주기로 했는데…."
그 말에 뒤에 가만히 서서 세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백천이 방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청명아.”
“……?”
도호가 뭐라고 했더라? 아, 백천.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백자배인 듯하니 존댓말을 써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던 청명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살짝 꺾였다. 그 움직임에 청명의 곁에 있던 세 사람 모두 움찔하고 말았다. 잠시간 망설이던 청명이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말했다.
“……왜, 요?”
청명의 대답에 하려던 말을 까먹고 백천이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청명이가…… 존댓말을 썼어?’
과하게 당황한 백천의 반응에 윤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사숙,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원래 사질은 사숙께 존댓말을 써야 합니다. 녀석도 옛날에는 존댓말을 썼고요.”
“아, 아니. 나도 알고는 있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른 누구도 아닌 청명의 존댓말을 너무 오랜만에 들었기 때문이다. 윤종의 말처럼 사질이 사숙에게 존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다른 청자배들은 몰라도 청명만큼은 백자배를 사숙과 사고라 칭하면서도 백천을 비롯한 백자배를 상당히 편하게 대하곤 했었다. 특히 청명은 걸핏하면 제 본명을 부르며 놀려먹지 않았나.
백천의 반응에 더욱 뚱해진 표정으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명은 이 상황을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청명현운백靑明玄雲白의 배자를 따르는 화산에서 청자배가 백자배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던가? 그게 무엇이 문제라고 저리도 멍하니 저를 바라보며 쑥덕이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뭘 물어보고 싶은 건데…요.”
청명이 벙쪄있는 이들에게 퉁명스레 말하자 그제야 백천이 입을 열었다.
“그, 네 이름이…… 청명인 건 맞지?”
그럼 내가 청명이지, 누가 청명인데. 살다살다 화산에서 처음 들어본 질문들에 청명이 여전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몇 대 제자냐?”
“나? 십삼대 제자인데….”
계속 존댓말을 해줘야 하나? 청명 또한 알 수 없는 느낌에 부러 말끝을 흐리며 말을 잘랐다.
“사, 사숙. 십삼대 제자인데다가 청명이라면…….”
“그, 그래……. 아무래도 이게, 이게……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마는…….”
사형은 매번 자기만 팬다며 연신 투덜거리던 조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윤종과 백천에게로 걸어왔다. 마찬가지로 새하얘진 안색의 백천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매화검존이시다.”
응? 매화……, 뭐?
청명이 그들이 내린 결론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안타깝게도 방 안에 있는 누구도 청명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백천이 허둥지둥 윤종을 잡아끌고 가며 조걸에게 속사포로 말했다.
“이, 일단 윤종이와 장문인께 먼저 가서 이야기해놔야 할 테니 일각 정도 뒤에 걸이 네가 청명, 이를 데…, 아니, 모시고…… 장문인 처소로 오거라. 참, 혹시 모르니 다른 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대답조차 듣지 않고 허둥지둥 빠져나간 둘이 있던 곳을 멍한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
조걸이 청명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새 몸을 움직인 청명이 서랍장 위에 올려둔 면경에 비친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면경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제 뺨을 이리저리 꼬집은 청명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이게 무슨……. 꿈도 아니네……. 이런 일이 도문에서 일어나도 되나?”
“…….”
오히려 그건 내가 묻고 싶다, 내가……. 조걸의 눈 밑이 저도 모르게 촉촉해졌다.
단체 수련 시간이 다 되어도 나오지 않던 청명을 데리러 갔던 조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윤종과 백천을 데려갔고, 이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백매관에서 뛰쳐나온 백자배와 청자배의 대사형이 장문인 처소로 향하는 것을 본 화산의 제자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지레짐작했더랬다.
아, 청명이 놈이 또 뭔가 기이한 짓을 했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백매관에서 나왔다. 하얗게 질려있던 윤종과 백천의 상태를 보아서는 두 사람이 다른 형태로 멀쩡한 상태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두 사람은 멀쩡해 보였다. 청명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얌전해보일 정도였다. 조걸과 청명이 연무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본 임평이 다가왔다.
“사형, 어디 가십니까? 옆에 청명이도 데리고.”
“응? 장문인 처소에 그, 뭐, 음, 어…, 장문인께 보고할 일이 좀 있어서.”
청명은 조걸에게 다가온 이의 낯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모여서 내려치기며 육합검 등 기초를 반복하는 중인 이들과 돌덩이를 짊어지며 몸을 푸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삼대제자와 이대제자가 모두 모여 수련을 시작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 시간에. 사람 수가 청명이 알던 화산보다 훨씬 적은 것 같긴 하지만……. 모두 기세가 대단하다.
‘어, 조금은…… 산적 같은 모양새긴 한데….’
저런, 수련을 얼마나 해댔으면. 자신이 저들을 저렇게 만든 것임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청명이었다.
걸어가다 말고 청명이 멈춰서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수련하던 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그 시선의 주인공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무복을 보아하니 삼대제자였다. 곽회가 말했다.
“청명아, 혹시 나 자세 틀렸어?”
“응?”
“계속 쳐다보길래…….”
“어? 어, 아냐. 하던 거나 마저 해.”
암만 십 년 가까이 검을 배우고 수련했다고는 하나, 어차피 지금 청명은 매화검존 시절을 지나온 청명이 아니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도 잘 몰랐다. 시연을 보여줄 수는 있겠지만 당장은 주위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 아니던가. 그리 말해도 영 믿음이 안 가는지, 연무장으로 돌아가면서도 연신 뒤를 힐끗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이 몸의 주인은 대체 어떻게 살았으면 이토록 신뢰를 못 받을 수가 있나. 청명은 수련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멈추고 다시 조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스쳐 지나가고 마주치는 이들 모두 모르는 얼굴이다.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 달라진 전각의 모습을 보고서도 실감하지 못했으나 이제야 청명은 생전 처음으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던 이 화산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 이 몸의 주인과 같은 차림새여야 한다며, 저 조걸이라는 이가 채운 제 허리춤에 달린 진검의 존재도 계속 눈에 밟혀서 걷다 말고 연신 주춤거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청명이 지학에 가까이 살아오며 산문 밖으로 나간 것은 화산의 산문 밖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며 장문인의 허락하에 제 사부와 청문과 함께 몇 번 정도 화음을 돌아다닌 것이 전부였으며, 그마저도 청명의 손에 진검이 직접 쥐어진 적은 없었다. 안 그래도 거친 성정을 가진 청명에게 진검까지 주면 아무도 그를 견딜 수 없으리라는 어른들의 판단이었다.
이윽고 조걸과 청명이 장문인 처소 앞에 도달했다. 장문인 처소는 새로 지어진 느낌이 들었지만, 청명이 평소에도 들락날락했던 장문인 처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조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문인, 조걸입니다. 그…, 청명일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거라.”
긴장한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오자 조걸이 문을 열었다. 청명이 조걸을 따라 들어가며 살폈지만 역시 그가 알던 곳과 달랐고, 그가 알던 장문인이 아니었다. 청명이 장문인의 처소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찰나였다. 몸을 일으켜 청명에게로 다가온 이가 제게 허리를 숙였다.
“대화산파의 이십대 장문, 현종이 선조를 뵙습니다.”
단 한 번도 화산의 장문인이 제게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물론 자식과도 같은 이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집이 천하를 뒤져 한 집이라도 나오겠냐마는, 생전 처음으로 겪은 일에 청명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여 한 걸음 물러났다.
“왜, 왜 이러세요!”
주위의 인물들이 말려주기라도 하겠지 싶어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다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뻣뻣이 서 있기만 할 뿐, 차마 장문인을 말릴 생각도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청문이 온종일 저를 앉혀두고 청명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던 터라 결국 청명이 먼저 현종의 등을 떠밀어 장문인의 자리에 앉히고서 맞은 편에 앉아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왔는지 현종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를 내려 청명에게 건네었다. 청명의 기억에서도 청문이나 자신을 거둬들인 장문인께서 차를 건네주셨던 기억이 있었으나, 청명은 차보다는 당과가 좋았고, 그보다는 몰래 훔쳐먹는 술이 더 좋았다. 하지만 제게 허리를 숙여가며 예를 표한 후손들 앞에서 차마 술 좀 내와주면 안되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청명은 다도를 즐기던 청문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찻잔을 들었다. 호록. 깊은 맛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찻잔을 내려놓고 슬그머니 잔을 밀어두며 청명이 말했다.
“아무튼! 장문인께서도 제게 말 편하게 하세요.”
“그래도 감히….”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제가. 지금의 저는 그 매화, 매화…, 뭐였지?”
"……매화검존."
매화검존께서도 사람 이름이나 별호를 잘 못 외우는 분이셨구나. 그리 생각한 백천이 옆에서 조용히 알려주었다. 자연스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청명이 말했다.
“그래, 그거. 아무튼 그것도 아니고, 저는 그냥 화산의 삼대제자일 뿐이에요.”
청명은 비록 이제 지학을 조금 넘긴 나이였지만 이들에게만큼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저들이 한 말에 따르면 자신은 저들의 선조가 아니던가. 지금 이곳에는 뒷목 잡고 넘어가면서도 어떻게든 제가 친 사고를 수습해주려 애쓰던 청문도 없다. 제가 있던 곳의 청자배가 어땠는지 제 행동에 달린 것이다. 게다가…… 저보다 훨씬 오래 산 것 같은 이가 제게 공손히 말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니까.
청명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면, 전쟁 끝에 죽었다 어린 거지의 몸으로 살아난 청명이 화산에 다시 입문하여 벌여온 일들로 인해 화산은 삼대제자부터 장문인과 장로들까지 모두 청명 한 사람의 뒷수습을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열받은 청명의 대응법을 몇 가지나 정리해두지 않았나. 아마 이 대응법은 청명이 살아가는 동안 계속 추가되고 이어질 것이었다.
하여튼 청명이 이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처소에 모인 이들은 모두 감격한 얼굴이었다. 현재 화산에 매화검존을 흠모하지 않던 이가 있던가. 그는 후인들을 위해 각종 비급서와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도해를 남겨주셨으며,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 외에는 그의 무위에 대하여 알 길이 없으나 그는 언제나 화산의 자존심이자 자부심이었다.
“제가 상황 파악이 잘 안 되거든요.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화산은 어떤지.”
"…그럼, 전쟁에 대해서부터 간단히 이야기해야 할 것 같구나."
청명은 현종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몸의 주인 또한 이름이 '청명'이라는 점―이에 조걸이 무어라 다른 이름을 말하려 했으나 윤종이 빠르게 그의 입에 주먹을 쑤셔 넣어버렸다―과 삼대제자에 불과한 몸으로 강호에서 수많은 일을 해왔다는 것. 그리고 얼마 전에 있었던 전쟁으로 강호가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것까지.
“어쩐지 전각 모양새도 좀 다르고, 예전에 비해 사람이 많이 없더라고요. 전쟁이 꽤 크게 났나 봐요?”
“……그랬지.”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그건 전쟁으로 인해 화산이 몰락했다가 상황이 나아지며 다시 지었기에 그렇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앞에 앉아있는 소년이 현재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이 아니라 매화검존이 되기 전의 청명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말하면 무엇이 달라지나? 이미 전쟁은 일어났고, 과거 선조들께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천마에게 덤벼 대산에서 명을 다하셨다. 만일 지금의 청명이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때, 제 말을 기억하게 된다면…, 그건 그저 한 사람에게 무겁고도 거대한 마음의 짐을 떠넘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해서, 현종은 청명이 아는 화산과 지금의 화산 사이의 간격에 대한 것과 천우맹에 대한 것만을 줄여 설명해줄 수밖에 없었다. 마교와의 전쟁을 몇 년 전으로 이야기했으며, 몇몇 내용은 지우고, 적당히 거짓된 내용도 섞어 제 앞의 어린 선조가 아직 겪지도 않은 일에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길 바랐다.
강호를 겪을 대로 겪은 매화검존 청명이 왔더라면 설명 속 이상한 점을 눈치챘을 테지만, 다행히도 그들의 앞에 앉아있는 이는 화산에서만 자라온 화산의 어린 삼대제자 청명이었다.
처소에 모인 이들은 화산의 제자들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고 당분간 대외활동을 줄여 타 문파에 이 소식이 들리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이야기했다. 현종은 천우맹의 맹주로서 맹의 구심점인 청명의 소식이기에 천우맹 소속 문파의 수장들에게 알릴까도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이 사실을 아는 이는 되도록 적은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러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마교의 잔당이 남아있고, 천마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청명으로부터 들었기에 더더욱.
“저, 장문인…….”
백천이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모두의 눈이 백천에게로 쏠리자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 다른 문파에는 알리지 않더라도 화산의 다른 녀석들에게는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산에 거하는 아이들이 꽤 많은데, 혹여 말이라도 샌다면…….”
“하지만 폐관 등을 핑계로 숨기더라도 당장 해결책이 나오지 않은 지금, 언제까지고 화산 내부에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현종이 걱정하였으나 윤종이 백천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거들었다. 이에 유이설이 고개를 끄덕였고, 결정적으로 백천의 말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청명의 말이었다.
“언젠가는 밝혀질 수도 있다면서요. 그러면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사제를 대했는데 알고 보니 그놈이 머나먼 선조였다, 이러면 나중에 충격받지 않겠어요? 새파랗게 어린 후손들의 정신을 위해서도 그냥 먼저 말해버리는 게 좋겠죠.”
“……예.”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지금은 이 화산에서 검존께서 제일 어리십니다…….
모두가 그 말 만큼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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