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이설] 위화

마교와 싸우다가 뭔가에 씌어 온 유이설과 그걸 알아채는 청명

*화산귀환 헤테로 포스타입 온리전 [무림남녀상열지사] '글' 참여 게시물

* 가상의 2차 정마대전 배경입니다.

* 마교와 싸우다가 뭔가에 씌어 온 유이설과 그걸 알아채는 청명

* 천우맹의 체제는 해남행 무렵의 것으로 상정하고 썼습니다. (+뇌피셜)

* 제목은 안예은 님의 '위화(衛華)'에서 땄습니다. 노래의 가사와도 일부 통하는 모티브가 있습니다.

 *추가: 535화 (북해빙궁에피)의 대사를 차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一. 답설무흔 踏雪無痕

유이설이 눈을 떴다.

화산에는 간만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전각의 기와 사이사이를 가득 메운 눈이 마치 담비의 탐스러운 꼬리를 늘어놓은 것 같았고, 연무장의 바닥에 쌓인 눈 또한 깨끗한 목화솜이 가득 깔린 것만 같았다. 하늘을 가득 메운 수백 수천개의 하얀 알갱이들은 유이설의 머리칼에, 어깨에, 뺨에 내려앉고 이내 하나 하나 녹아 사라졌다. 

이렇게 맑은 풍경을 본지가 얼마만인가. 피 한 방울 없이 온통 순수한 것들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지가 얼마만인가. 잘 가늠이 가지 않았다. 유이설은 문득 자신이 지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일어나고 만 마교와의 전쟁을 시작하고서 몇개의 달이 차고 비워지기를 반복했는가. 피처럼 붉었던 하늘 아래에서 아군들의 죽음들을 짊어지고서 칼 끝으로 적들을 죽여야만 했던 나날들은 시간이 지난다고 익숙해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고작 매년 겨울이면 그저 내리는 눈을 보고도 내심 기뻐하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모처럼 마음껏 누리는 하얀 하늘을 그저 마음 놓고 기뻐해 마땅한 것이었다. 

곧게 뻗은 유이설의 검에 순결한 눈 알갱이들이 내려앉았다. 잘 닦은 면경과도 같이 깨끗한 검은 눈 때문에 하늘을 비추나 땅을 비추나 그저 희기만 했다. 검 손잡이에 달린 검정색 술이 유이설의 검로를 따라 찰랑거렸다. 눈 무더기 속을 파고든 발자국들은 하나가 새겨질때마다 다시 쏟아지는 눈들에 의해 메워져 금새  모습을 감추었다. 굳이 경공을 쓰지 않아도 답설무흔(踏雪無痕)이 실현되는 기묘한 현상이었다.

 붉은 매화가 맺힐 가냘픈 매화나무가지들 역시 하얀 눈 만이 소복히 쌓여있을 뿐이었다. 

온통 새하얀 화산은 그 어디보다도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이 곳은 오직 유이설 뿐이었다. 마치 영원히 이렇게 있을 것 만 같은, 그러고 싶은 감정이...

잠깐, 

왜 그러길 바랬을까?

유이설이 바라는 화산은 그녀 만이 있는 화산일 리가 없는데.

뭔가 기이함을 느낀 유이설은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형상을 발견했다. 

二. 僞花 위화 

"저거 요즘 이상하단 말이지."

청명이 팔짱을 끼고는 인상을 팍 썼다. 그의 시선 끝에는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유이설이 있었다. 꽤 길었던 전투가 일단락 된 후 겨우 꾸민 야영지의 모닥불이 붉은 빛을 뿜어내며 유이설의 얼굴 위에 끊임없이 일렁거렸다. 마찬가지로 청명을 이상하게 여긴 조걸이 딴죽을 걸었다.

"사고한테 왜 그러냐. 평소랑 다를 게 없는데.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자꾸 멍 때리잖아."

"사고가 표정 없이 가만히 있는게 하루 이틀이야? 아무리 생각이 없어 보여도 그걸 멍 때린다고 하면 어떻게 해!"

"사형은 가만 보면 두둔하는 듯 돌려까는 솜씨가 사숙 못지 않아."

청명과 조걸의 입씨름을 멈춘건 소소였다.

"말싸움 그만! 주둥이에 피 쏠리면 상처 빨리 안 붙어요!"

"눼."

"사고가 요즘 평소보다도 더 과묵해진 느낌이긴 한데, 뭐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요. 지금은 조걸 사형이 갑자기 말이 없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기니까요."

"...그건 그렇지."

"너희들 당사자 앞에 두고 이러냐?"

당소소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약 100여년 전에 천마의 목이 떨어지고 난 이후, 마魔는 기어코 다시 돌아왔다. 재림한 천마를 중심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선 마교도들은 이젠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는 듯 중원을 유린하려 들었다. 꽤 오래전부터 평화에 안주하지 않고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여 철저히 대비해온 천우맹이었지만 전쟁이란 것은 으레 공들인 탑도 쉽게 버티기 힘들기 마련이었다. 

 낮에는 악을 쓰며 적들을 베어내고, 밤에는 그들과 싸우다가 입은 부상과 마화에 시달리는 일상이 몇 달이 이어지고 나서는 마치 원래 그렇지 않음에도 무감정한 듯 행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직은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왁왁 말싸움을 할 수 있는 것도 지금처럼 큰 전투를 치르고 나서 중간에 생기는 틈들 뿐, 재정비를 마치고 싸움이 시작되면 그들 또한 마치 검만을 휘두르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처럼 오로지 검에 몸을 맡겨야 했다.

당소소는 능숙한 손길로 조걸과 청명의 상처를 살폈다. 피가 배어난 붕대는 새 붕대로 갈고, 완전히 새 살이 돋지 못한 상처에 약을 발랐다. 많이 지쳤을텐데 군더더기 없이 빠른 손놀림이었다. 

"너무 빨리 새로 가는거 아니야? 피도 별로 묻어나지 않았는데."

"어허, 이런 데에 물자 안 아끼겠다고 선언한지가 얼마나 되었지요? 붕대 마련하다가 모자라서 군량미에서 충당하는 일은 없을테니 적당히 하시지요?"

"소소 말에 토 달지 마 사형. 이런 건 사매가 가장 정확하잖아."

"너부터 소소 말 잘 듣고 얘기해라."

"우리 사형들, 주둥이를 꿰매버려도 실 다 끊고 다시 말싸움 하겠네."

그때, 주목을 요청하는 신호가 하늘 위에 펼쳐졌다. 백천과 윤종이 있는 제 이 본대로부터 사람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곳곳에서 아웅다웅 이어졌던 말소리가 싹 조용해졌다. 전령의 역할을 한 천우맹원이 모두가 주목하는 앞에서 서찰을 꺼내 읽었다. 

오 교구는 후퇴. 제 이 본대, 호광으로 이동. 합류 요청.

주요 인사들의 사망 소식 없이 이동하는 곳만을 밝힌 간결한 서찰. 이는 전투가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는 의미였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군이 승리했다는 것은 기뻐 마땅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은 마냥 환호할 수만은 없었다. 그들이 느낀 것은 겨우 다가올 수백번의 위기 중 또 하나를 무사히 넘겼다는 최소한의 안도 뿐이었다. 

한계라고 생각했던 지점을 몇번이나 넘나들며 총력을 다하고 전멸직전의 상황을 수도 없이 각오해야 했으나, 그렇게 많은 것을 쏟아 부어 한 전투를 승리한다고 해도 이것이 진정한 승리의 과정인지, 그저 죽음을 한 치 앞으로 미루는 것에 불과한 연명인지 알 수 없었다. 청명은 맹도들을 휘 둘러봤다. 노력이 완전히 보상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점차 마모되어가는 정신은 걷잡을 도리가 없었다. 전쟁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이런 절망에 무뎌진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은 정신이 나가버린 놈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날 새자마자 이동할 거니까 얼른 자 둬."

"도장께서는 자지 않으십니까."

"나는 졸리면 사형 깨워서 번 세우면 되니까."

청명이 검을 어깨에 얹고는 모두가 듣도록 이야기하며 불침번을 자처했다. 녹록치 않은 전투가 이제 막 끝났기에, 평소라면 일어나 자신이 불침번을 서겠다며 자원할 자들도 마치 수마(睡魔)에 빠져들 듯 곯아 떨어졌다. 야영지는 곧 고요해졌다. 청명은 뒷짐을 지고 모두가 잠든 야영지를 거닐다가 문득 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다. 야영지에서 불과 십 수 걸음 떨어진 나무들 사이에 유이설의 그림자가 홀로 서있었다. 청명은 별 생각 없이 유이설에게 다가갔다.

"청명."

"사고는 안 자고 뭐해."  

"잠이 안 와."

어둠 속에서 유이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라? 아까 멍하니 있을 때와는 뭔가 다른 느낌인데.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잠이 안 와. 안 피곤해?"

"불안해."

"불안해?"

'갑자기 안하던 어리광을 부리네.'

얘가 이런 적이 없는데. 청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고 하자, 유이설은 성큼 다가와 청명에게 몸의 무게를 실어 기대었다. 유이설의 푹 숙인 고개가 가슴팍에 닿아왔다. 청명이 눈에 띄게 흠칫거렸다. 희고 굳은 살이 배긴 유이설의 손이 청명의 검지와 엄지 사이를 파고들어 그러쥐었다. 손이 매우 차가웠다. 

처음 보이는 행동에 청명의 얼굴이 곤란함 비슷한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그렇게 수 초가 지났을까, 유이설이 여전히 청명의 가슴팍에 얼굴은 묻은 채 고개를 들어 흘끔 청명을 올려다봤다. 까만 눈동자가 그의 눈을 향해 멈췄다. 묘하게 경계심을 잠재우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눈이었다.

'이런 게 미인지계(美人之計)인가.'

물론 유이설이 갑자기 청명에게 이런 수작을 부릴 이유야 없지만. 청명은 문득 처음 유이설을 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남자 꽤나 후리겠다고 생각했었지. 달빛을 받은 유이설의 옅고 투명한 눈동자가 바닥까지 훤히 보였다. 품 속에서 유이설의 호흡이 느껴졌다. 그것이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녀답지는 않은 일이었다. 청명은 무심결에 한쪽 손으로 유이설의 머리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애가 잠이 안 온다는데.'

"아직 불안해 할 거 없으니까 마음 놓고 자둬."

"... ..."

유이설은 그렇게 한동안 말 없이 가만히 청명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갑자기 그에게 유이설의 무게가 확 실렸다. 청명은 당황한 표정으로 두 팔을 들어 유이설을 받쳐 들었다.

"자라고는 했지만 이런건 예상 못 했는데."


"그러니까, 이 지점을 확보하는 것이 북상을 완벽하게 막기 위한 첫 기틀이 될 것이라는 얘기입죠."

분리되었던 두 무력대가 합류한 이후엔 다음 전투에 대한 회의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이번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당분간 섬서에 있는 본거지가 위협 당할 염려는 놓아도 된다. 즉, 이번 싸움은 수비에서 공격으로 기세를 바꾸기 전의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다. 물론 이기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제 역할을 정해야 하는데..."


우려가 많았던 청명은 항의했으나, 후미를 맡게 된 것은 결국 청명과 유이설이었다. 

'제대로 마기魔氣를 쐬어본 지도 얼마 안 된 애송이들을 앞세워야 하다니...'

못마땅함과 걱정, 분노에 이를 부득부득 갈던 청명이 문득 유이설을 흘끔거렸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유이설의 얼굴은 얼마 전 처음 미묘함을 느낀 그 표정 그대로였다. 

'얘 또 멍 때리네.'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닌데. 유이설은 과묵하지만 무관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티는 나지 않더라도 그녀의 시선이 허공만을 향하는 시간은 그닥 많지 않다. 꽤나 오래 유이설을 봐왔지만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유이설을 본 지가 며칠은 되어간다.

어느 밤에 봤던 유이설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달빛을 그대로 빨아들일 것 같던 검은 자가. 투명하지만 한 길 속을 알 수 없던 기묘한 눈동자가. 한마디로 요사스러웠다. 그것이 이리도 길게 생각나는 것을 보면.  

'답답하구만.'

유이설은 이런 기분이 들게 하는 녀석이 아니었는데. 물론 사람이란 게 이따금 전쟁을 맞고 나면 지친 상태가 지속되어 보지 못했던 면모를 보이기 마련이다. 그녀도 그런 부류인가. 

"끄으응..." 

그것도 아닌데.

아무리 지쳤다 해도 유이설은 그런 부류가 아니다. 차라리 탈진한 고양이 마냥 바닥에 널브러져있으면 몰라.

'왜 내가 이런 고민을...'

하여간 안 그래도 급박한 상황인데 여러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신경쓰이게 한다. 청명은 괜히 원망스러운 감정으로 유이설을 노려보았다. 유이설 이 녀석은 이래도 눈 꿈쩍도 안할 테지? 마치 세상 저 혼자인 듯 아무데도 눈 돌리지 않고...

"왜?"

어, 돌리네.

고개를 홱 돌린 것이 민망하게 유이설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청명에게 다가왔다. 해를 등진 얼굴은 빛이 모자라 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고."

"응."

"다른 사람들이 이랬으면 정신이 바짝 서지 못했다고 갈궜을 텐데, 사고니까 이렇게 물어보는거야. 사고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지. 요즘 왜 그래?"

유이설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나도."

"모른다면 다야? 원인을 찾아야지!"

"... ..."

청명은 뭔가 답답한 마음에 성질을 부렸다. 유이설은 여전히 감정의 색깔이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럼 도와줘. 나는 잘 모르니까."

유이설이 천천히 다가왔다. 

"청명은 언제나 뭐든 알고 있잖아."

"무슨..."

청명은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더욱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빼고 이쪽을 바라보는 유이설의 눈이 다시 시야에 들어찼다. 이 눈은...

'간을 보는 눈이다.'

청명은 이런 종류의 눈을 모르지 않았다. 뻗기 위해 자리를 살피는 눈. 말은 않지만 계속해서 물어보는 눈.

더 다가가도 되는지, 계속 눈을 맞추고 있어도 되는지, 

이대로 닿아도 되는지.

...

얘가 미쳤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기 무섭게 청명의 꿀밤이 유이설의 머리에 적중했다. 유이설의 고개가 푹 내려앉다가 땅과 부딪히기 직전에 겨우 멈췄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눈을 끔뻑이며 맞은 곳을 손으로 감쌌다. 딱히 아파서 하는 행동 같지는 않았는데, 그래서 더욱 기묘했다.

'놀래서 힘조절 좀 못 했는데...'

"아파."

"아프라고 친 거다!"

"... ..."

"청명이, 이설이도 여기 좀 와 봐라."

어색한 침묵이 감돌 무렵 두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명은 도망치듯이 섬전처럼 자신을 부른 쪽으로 튀어 나갔다. 


유이설은 멀리 보이는 검은 형체에 눈을 돌렸다. 하얀 설원 위에 홀로 서 있는 검은 형체는 흰 종이 위에 튄 먹 방울 마냥, 이 평화로운 공간의 유일한 불순물 같았다. 

눈보라가 불어왔다. 

그러나 뺨에 닿아온 바람과 눈송이들은 그녀의 체온에 스러져버릴 뿐, 그녀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유이설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검은 형체에게 다가섰다. 소복이 쌓인 눈밭에 그녀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유이설이 그에게 다가갈수록 검은 형체의 윤곽이 점차 분명해져갔다. 검은 무복은 어두운 색인 탓에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멀리서 보아도 피에 젖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서 있는 눈밭 위에는 핏자국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기이했다. 유이설을 발견한 듯 살짝 떨궜던 고개를 든 사내가 번뜩 그녀를 노려봤다. 

인간성을 잃은 듯한 눈, 가까이 오는 것은 뭐든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듯 섬뜩한 눈이었다. 자신을 놓아야 할 정도로 치열한 살생을 마치고 온 자의 눈이었다. 유이설은 이 눈을 본 기억이 있다.

'청명에게서 보았던 눈.'

유이설은 이 눈을 본 적이 있었으나, 그 눈에 일말의 두려움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조용히 서서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사내는 유이설을 발견하자마자 손에 들고 있는 검을 휘둘러 검신이 머금고 있던 선혈을 눈에 털고는 그녀에게 돌진했다. 

"!"

유이설이 급히 검을 빼들어 그의 일격을 받아쳤다. 고작 첫 합인데도 내공의 격차로 인해 유이설의 기혈이 뒤틀리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충격을 더 받았으면 내부에서 출혈이 일어나 피를 토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막아냈음에도 뒤로 밀려나간 유이설이 숨을 고르며 눈 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사내는 위협적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비참하고도, 처철해보였다. 어디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온건지 피로 물든 전신은 이미 그가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으나 그의 기백은 여전히 유이설을 압도하고도 남을 위력이었다. 

그러나, 유이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서로 검을 부딪히는 순간 눈에 들어온, 사내의 가슴팍에 있는 붉은 매화 문양의 자수였다.


三. 상열지사 相悅之詞 

"가장 두려워하는 거, 뭐야?"

"...지금 사고가 하는 행동들."

"거짓말."

청명은 고개를 떨구고는 한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뒤에서 제 허리를 감아 안은 유이설의 팔이 시야에 들어오자, 다른 한손으로 제 얼굴 전체를 감싸 마른 세수를 했다. 청명은 이번 생과 저번 생에 치렀던 전쟁 들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그러고는 머릿속에 그가 전쟁을 치르다가 보고 겪었던 각양각색의 광증들을 늘어놓았다. 환각, 악몽, 무기력, 실성... 

그래도 이딴 증상은 없었는데. 

보는 눈이 없을 때마다 이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도사한테 이러는 거 아니다! 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상대 또한 도사였다. 유이설이 청명의 등을 감싸 안은 채 한쪽 뺨을 대는 것이 느껴졌다.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다.

"아 진짜!"

'그냥 한번 흠씬 팰까?'

청명은 전쟁이 시작할 무렵 전시에 아군끼리 드잡이 하는 것만은 삼가기로 선언했던 것을 무를까 치열한 고민을 했다. 

'이걸 진짜 어떻게 해야...'

그때, 어디선가 작고 빠르게 토도도도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명의 예리한 청각이 그 소리의 정체를 바로 알아냈다.

'백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이 녀석, 아무리 요즘 심부름 할 것이 많다고 해도 웬만하면 내게 붙어있는데 오늘은 통 보이지 않더라니. 

지척까지 달려온 백아가 청명을 발견하고 도약을 할 준비를 했다. 청명의 어깨에 올라탈 때면 언제나 하는 자세였다. 그런데, 이 것이 갑자기 도약하려다가 말고 움직임을 멈추더니 코를 연신 꿈틀거렸다.

"키이이!"

그러더니 이를 드러내며 청명을 향해 앞니를 드러내며 우는 것이다. 청명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얘는 또 왜 이래. 이게 진짜?"

"키이이이!"

나한텐 절대 이러지 않는데. 아니나 다를까 청명의 말을 듣자마자 백아가 그의 눈치를 보듯 경계하던 태세를 바꾸었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지만 않을 뿐 몸을 낮춰 청명 쪽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하다.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하고도 청명의 정순한 기운 하나만을 바라보며 그의 목에 감겨들던 백아였다. 그런데 이번엔 웬일인지 달려들기는 커녕 경계를 하다니. 

잠깐, 기운...

무언가 생각해낸 청명은 뒤를 흘끔거렸다. 청명이 원인이 아니라면 남은 건 유이설이다. 그렇다면, 청명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사고." 

"응."

"저 쪽 숲으로 들어가자, 긴히 할 말이 있어."

"좋아."

"팔 이거 풀고. 앞장 서서 가."

유이설은 순순히 청명의 말을 따랐다. 단 둘이 있자고 하니까 되려 더 눈을 빛내는 것 같기도 하고.

"더 깊게 들어가. 아직 아니야."

"응."

청명은 유이설을 앞세워 숲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야영지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안 그래도 보름달이 아니라서 희미한 달빛이 울울창창(鬱鬱蒼蒼)한 나무들에 가로막혀 숲은 한층 더 어두웠다. 청명은 앞서 걸어가는 유이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마를 쳤다.

'왜 내가 이걸 이제 알아챘지?'

유이설의 기행(?)은 광증 중에서는 없는 증상이나, 사술 중에는 이와 비슷한 것이 있었다. 청명은 이전의 생에서 그것을 들어 알았다. 

100여년 전 마교가 발호할 무렵, 전시 중 여러 문파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멀쩡하게 마교와 싸우던 놈이 갑자기 제 사형제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는, 자기도 자살해 버리는 괴이한 일들이었다. 이 괴담들의 진상은 나중에야 뒤늦게 알려졌는데,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마교의 사술이었다.

청명은 전생에 어느 주교와 싸우는 과정에서 이 사술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원래의 정신은 환각 속에 가두고, 교활하고 파괴적인 본능만을 남긴 정신을 주입해 스스로 제 아군들을 죽이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마공을 통해 심는 일종의 섭심술(涉心術)로, 주로 최전방에서 싸우는 자들이 자주 걸렸다.

'그 새끼를 죽이고 나서는 싹 사라졌으니 그 맥이 끊겼으리라 여겼건만.'

사술에 걸린 자는 가장 강하다고 여기는 자, 혹은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자들을 그들이 방심할때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죽이고자 한다.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자들이 제 사형제, 제자 또는 스승의 손에서 허망하게 떠났는가. 

사술의 특성상 걸려든 자의 기운에는 어느 정도 마기가 실려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기운이 심하게 경미하여, 사술에 걸린지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지 않는 이상 감지하기는 어렵다. 다행히도 백아가 초기에 이를 감지한 것이다. 

"정말 큰 일 날 뻔했네."

물론 유이설이.

"상대가 나여서 다행이지."

다른 애들이 표적이었다면... 어느 쪽으로나 상상하기도 싫다. 여하튼 유이설은 운이 좋은 녀석이라고 청명은 생각했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잃을 때마다 청명이 곁에 있었으니까.

"사고, 검 뽑아."

다소 뜬금없는 말을 들은 유이설이 우뚝 서더니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청명이 두 팔을 작게 벌리고 유이설에게 빈 손바닥을 보였다.

"날 죽이고 싶잖아? 그래서 계속 달라붙어 온거고. 지금이 기회야."

유이설은 대답도 않고 뒤를 돌며 서늘한 눈으로 스르릉 검을 뽑았다. 빛이 거의 없는 숲속에서 본 그녀의 눈이 어둠 속에서 살짝 붉은 빛을 띄었다. 청명은 새삼 한숨을 쉬었다. 이젠 유이설이 걸린 것이 사술이 아닐 일말의 가능성도 사라졌다. 

"좀만 기다려라."

청명과 유이설의 검날이 거세게 부딪혔다.


四. 衛花 위화

화산의 무복을 입은 사내는 유이설을 계속해서 몰아갔다. 마음만 먹는다면 단숨에 베어버릴 수 있음에도 그는 농락하듯이 유이설과 합을 이어가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낮고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자마자 바로 알았지, 너도 나와 같은 걸 두려워 한다고."

그 말을 들은 유이설은 자연히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떠올렸다. 지키지 못하는 것. 당장 전쟁이 끝난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상실들을 반복하면서, 감당하리라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견뎌내며 다다른 도착점 또한 황폐하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것. 그러면서도 멈출 수 없는것.

"아해야, 너는 나처럼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누군가를 지키긴 커녕 자신의 목숨마저 지켜내지 못한 나처럼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냔 말이다!"

검을 받아칠때마다 붉은 검기가 부딪혀 흩날렸다. 미쳐 막지 못한 매화검기가 유이설의 몸 곳곳을 베었다. 유이설의 눈이 흔들렸다. 하나하나가 굉장히 원숙하고 빈틈이 없는 검이다. 이 사람은 누구기에 이렇게 아름답고도 원한에 찬 검을 휘두를까.

"나를 상대로 벌써 지친 게냐?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하면 천마에게 대항할 수 없다."

천마? 유이설이 눈을 치켜 떴다. 천마와 직접 싸우던, 화산의 무복을 입은 사내. 그러나 유이설이 모르는 얼굴. 사내가 뿜어내던 살기는 형형했으나 유이설은 그에게서 악의보다는 애통함이 느껴졌다. 사내가 다시 절규하듯 소리쳤다. 손속의 사정 따위 없는 검날이 유이설의 몸 곳곳을 찢었다.

"적어도 그 새끼와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한 나보다는 네가 더 나아야지!"

'!'

사내의 정체에 대해 짐작이 간 유이설이 다시 사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려 했다. 그러나 그는 유이설의 빈틈을 맹렬하게 노릴 뿐이었다. 먼젓번보다 꽤 깊게 베인 유이설의 다리에서 피가 솟구쳐 흘렀다. 사내, 아니 매화검존이 또 다시 외쳤다.

"겨우 그 새끼 목을 치고서 죽어버린 나보다는, 네가 더 나아야지!"

유이설은 숨을 고르며 필사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꿈인가? 조상이 나오는 꿈을 꾸는 일이야 종종 있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유이설의 상처에서 느껴지는 통각과 매화검존의 생생한 살기는 절대 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유이설은 계속해서 그에게 빈틈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곳곳의 상처에서 솟구친 피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옷을 적셔왔다. 이대로 가다간 속수무책으로 그의 검에 목을 내어줄 것이다. 검존은 겨우 서있는 그녀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웃음이 나올 지경이로구나. 그렇게 자신의 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손 놓고만 있던 것이냐?"

검존은 그녀를 강하게 질책했다. 그러나 유이설에게는 그것이 자신이 아닌 매화검존 자기 자신을 향한 질타 같다고 느꼈다. 

자신을 이리 지독히도 미워하는구나.

이윽고 검존이 검을 바닥에 꽂고 한쪽 다리를 꿇어 앉은 유이설의 머리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유이설은 제 다리마저도 가누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피를 토해가며 숨을 고를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 요."

"... ..."

눈보라가 멈췄다. 검존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더 해보라는 듯이. 

유이설의 발 밑을 적신 피가 작지 않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유이설은 얕기만 한 호흡을 겨우 겨우 뱉고 마셨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것이 목이 달아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더라도.

"약해도... 지지 않으면 돼요."

"...그것 참 궤변이로구나."

"믿으니까."

천우맹의 맹도들을, 화산의 제자들, 사형과 사질들을. 

"약해도 괜찮아요. 혼자가 아니니까."

"내가 나약한 건, 지키지 못한 것은 정말 원통하지만,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지만, 절망하지 않아요."

지키는 자는 나 혼자가 아니니까.

"... ..."

그리고, 지금의 유이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름아닌 눈 앞의 매화검존이었다. 그가 목숨을 바쳐 천마의 목을 베지 않았다면, 지금의 화산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유이설이 검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에 온 몸을 떨고 있지만 눈빛은 올곧았다.

"...덕분에."

혼자가 아니기에 내가 죽더라도 나와 뜻을 함께해온 자들이 내 뜻을 이어줄 것이라 믿고, 눈감을 수 있다. 나 하나가 스러지더라도 화산은 나의 의지를 이어갈테니.

"... ..."

그 말을 들은 검존은 검을 휘두르지도, 거두지도 않았다. 그저 깊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서는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유이설은 결국 부상을 견디지 못하고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보전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던 찰나,

'!'

갑자기 단전에서부터 무언가가 역류해오는 느낌에 유이설은 번쩍 눈을 떴다. 문득 드는 이질감에 고개를 드니 숱했던 부상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있었고, 남은 것은 몸 속에 어떤 불순물이 들어차있다는 불쾌감 섞인 공포였다. 마기가 유이설의 단전에서부터 흘러나와 몸의 말초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기!'

밖에서 쐬기만 해도 불쾌한 것이 단전에서 뿜어져 나와 온 몸을 물들이는 감각이 너무도 불쾌하고 공포스러운 상황, 설상가상으로 유이설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유이설은 갑자기 솟구치는 기의 흐름에 못 이겨 검을 쥐고 압도적인 힘으로 검존을 밀어붙였다. 멀쩡한 초식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검존은 마치 소의 뒷걸음질에 벌레가 밟히듯이 허무하게 압도되어버렸다. 

검존은 왜인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담담히 검을 들어 자신을 찢으려 드는 검날을 겨우 가로막기만 할 뿐이었다. 순식간에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유이설의 손에 검존의 살을 베는 검의 진동이 생생하게 닿아왔다. 그녀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건 대체...!" 

힘이 넘친다기 보단 다른 힘의 꼭두각시가 된 것만 같은 기이한 움직임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상황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추스를 새도 없이 급작스럽게 흘러갔다. 이내 유이설이 맞붙은 검을 거세게 쳐내자, 검존이 눈에 띄게 휘청였다. 

빈틈을 놓치지 않은 유이설의 검이 검존의 목에 쇄도했다. 검존은 이제는 방어하려는 의지조친 보이지 않은 채 아무런 표정 없이 담담히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안돼!"

 하얀 설원에 또다른 핏자국이 흩뿌려졌다. 그 붉은 모양이 마치 바람에 흩날린 매화 꽃잎을 붓으로 그린 것 같았다.

"... ..."

다시 눈보라가 불기 시작했다. 눈 밭을 수놓은 핏자국들이 빠르게 눈에 덮여 자취를 감추어 갔다.

유이설이 검에 꿰뚫린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여전히 흰 눈밭에 새로이 붉은 색이 물들어 갔다.

"허억..."

아주 짧은 찰나 동안, 마기의 조종을 벗어난 틈을 타 유이설은 자신을 멈추기 위해 스스로를 찔렀다.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큰 고통이 느껴졌다. 아무리 숨을 쉬어도 그 숨이 가슴팍 안을 채우지를 못하고 흩어졌다. 단전에는 예리한 칼로 찔린 극심한 고통이 닥쳐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고통은 사라지고, 치명상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상처가 빠르게 사라졌다. 이대로 다시 마기가 그녀를 물들일 것이다.

"한번 더는 안 당해...!" 

 유이설은 검을 들어 자신을 향하게 했다. 검이 한번 더 목표를 향해 쇄도했다. 이번엔 그녀의 목이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녀 자신의 검으로는 화산의 누구도 해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해도.

"-미쳤어, 사고?"

그때, 어떤 손이 유이설의 검을 잡아 막았다. 신기하게도 날카로운 검이 그의 손에 닿자 잿가루처럼 흩날려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시야 구석부터 가득 채우고 있던 설원의 풍경 또한 잿가루 날리듯이 흘어져갔다. 제정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기묘한 광경에 유이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후 까무룩 세상이 무저갱 같은 어둠에 잠겼다.


 "...이번엔 진짜 위험했다."

의식을 잃은 유이설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청명의 품에 안겨있었다. 유이설이 제대로 호흡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청명은 그제서야 제 가슴을 움켜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유이설을 제압하는 것이 청명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청명이 애를 먹은 것은 그 후였다. 사술의 최종적인 절차가 걸려든 자의 자살이었는지, 청명은 갑자기 자신을 찌르려 하는 유이설을 다치지 않게 하며 막아내느라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사고 힘이 이렇게 센 줄은 처음 알았네."

유이설을 겨우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난 뒤 다시 일어나기 전에 부랴부랴 마기를 정화하여 사술을 해제하고 나서는 청명도 기진맥진해질 지경이었다. 청명은 유이설의 배에 손을 대고 진기를 불어넣었다. 사술이 단전을 헤집으면서 엄청난 내력의 소모를 겪었을 것이다.

 "음..."

유이설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온 몸에 힘이 없었다. 유이설은 급히 몸을 일으켜 두리번 두리번 제 주변을 살피다가, 청명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꿈...?"

"뭐 대충 그래. 어떤 걸 봤든지 잊어버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유이설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환각 속에서 온 몸을 물들였던 마기, 최소 한나절 전부터 통째로 사라진 기억,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진기를 불어넣고 있는 청명. 단서들을 떠올리니 자연히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상황이 떠올랐다. 유이설은 제 양 뺨을 감쌌다. 조금 부어올라 있었다. 약간의 열감도 있었다.

"뺨이..."

청명이 조금 곤란해하며 핑계를 대었다.

"그건 사고가 하도 의식을 못 차려서... 딱히 평소에 앙심이 있던거 푼 건 아니고."

"......"

유이설은 그저 의문을 해결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보다 더 급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유이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청명에게 기대어 있는 와중 청명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나, 베었어?"

"못 베었어."

"아무도 안 베었지?"

"그래."

유이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정확히 말하면 고개만 떨군다는게, 심하게 지친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거의 청명의 품 속에 눕다시피 해버렸다.

"다행이야, 정말..."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게 평소의 사고지.' 

"...너무 졸려."

"그럼 자고 있어. 내가 데려다 주면 되니까."

 유이설은 몸을 둥글게 말고 청명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청명은 잠든 유이설의 머리를 툭툭 쓰담았다. 덕분에 고생 꽤나 했지만, 원래대로 돌아와 곤히 잠든 유이설의 얼굴을 보니 기특한 마음부터 들었다. 

유이설이 사술에 홀려 마기를 뿜어내며 청명에게 칼을 휘두르던 때에도 유이설은 종종 안간 힘을 쓰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유이설 자신도 사술과 싸우고 있던 거였다. 또한 종국에 유이설이 스스로에게 칼을 겨눌 때 당시 청명은 이것 또한 사술의 일부라고 여겼으나, 곧 자신의 추측을 수정했다. 유이설이 스스로를 찌르려던 그 당시에는 아직 다른 이들을 죽인다는 사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칼을 겨눈 것은 사술이 심은 마기의 의지가 아닌, 유이설 자신의 의지였을 것이다. 청명을 베지 않기 위한 유이설의 의지. 유이설은 결국 이겨냈던 것이다. 

"그 지독한 사술을 이겨내는 건 백 년 전에도 못 본 것 같은데, 정말이지 사람 여러 번 놀라게 한다니까." 

지켜내기로 한건 반드시 지킨다 이건가. 유이설 다웠다.

유이설이 몸을 약간 뒤척이며 침음을 흘렸다. 청명은 퍼뜩 유이설의 등을 토닥여줬다. 유이설의 호흡이 점차 깊고 길어졌다. 그리고 나서야 청명은 유이설을 안아들고 몸을 일으켰다.  

"잘 자. 사고."

다시는 이상한 꿈 꾸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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