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잠 못 드는 밤
구화산 시절,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청명.
※ 화산귀환 409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 약간의 유혈묘사와 과거날조 有
※ 23년 1월 디페스타/아이소에서 판매된 단편집 '야화'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벌써 며칠째다.
청명은 퀭해진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누르듯 문지르다가 열이 뻗쳤는지 금침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쿵쿵 박아댔다. 어지간해서는 머리를 댔다 하면 곧바로 잠들던 청명이 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무인이었기에 망정이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몇 날 며칠은 뻗어있어야 할 상태였다.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면 악몽으로 끙끙 앓다가 눈을 번쩍 뜨는 생활을 며칠씩이나 이어가고 있었으니까.
서른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런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 늦은 밤에 사형제들끼리 모여서 나누던 무서운 이야기를 잔뜩 듣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게 드러누워 코까지 골며 잠들었던 청명이다.
천하의 청명을 이리 만든 원인이야 짐작이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오, 강호행이고 나발이고, 가지 말 걸 그랬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래, 그 빌어먹을 강호행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다. 이미 다녀온 강호행 때문에 이리됐는데 이제 와 어찌 해결을 할 수 있겠는가?
원래 청명은 강호행을 갈 생각이 없었다.
생각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조금의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몰래 술 마시러 나가는 것이 아닌 이상, 화산 밖에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행히 그의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는 장문인과 장로들이기에 그들도 청명을 화산 밖에 잘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섣불리 내보냈다가 잡으라는 사파는 무슨, 타 문파 사람을 피떡으로 만들지나 않으면 다행인 수준일 테니까.
보통은 이르면 삼대제자 시절부터 협행을 떠나 활약하고 돌아올 때 거창한 별호 한두 개는 얻어온다지만, 별호 따위 알 바인가? 청명은 그저 사형 몰래 화산을 빠져나가 서안에서 술이나 마시고, 그러다가 포기할 줄 모르는지 냅다 덤비고 보는 종남 놈들이나 쥐어패다가 슬그머니 화산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검이나 휘두르면 됐다. 그 이상도 이하도 바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청명이 강호행을 처음으로 떠나게 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얼마 전 강호행을 떠났다가 크게 다쳐 돌아온 사제가 있었는데, 그 녀석을 그 모양으로 만든 사파 새끼가 다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크게 다쳤던 사제는 청명이 보기엔 당연히 약하기 그지없던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후기지수 중에서는 기재 소리 듣던 이였다. 그런 놈을 그렇게 만들 정도라면 힘없는 양민을 상대하게 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물론 청명은 양민이 입게 될 피해보다 제 사제 녀석을 그 모양으로 만든 놈을 평생 죽만 먹고 살아야 할 정도로 흠씬 두들겨 패서 관아에 넘기겠다는 생각으로 강호행을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함께 떠난 사형제들 사이에서는 청명이 제일 뛰어났다. 그의 무위는 정식으로 화산의 삼대제자로 살아가기 전부터 사문의 어른들에게 쓰라린 위장과 큰 기대를 동시에 받았다. 선두에 선 청명이 화려하게 매화를 피워내며 상대의 시선을 끌어 무력화시키고 길을 열면 그 뒤를 따르는 사제들이 그의 등을 받쳐 놈들을 제압한다. 그들은 자신의 실력에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청명조차도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파의 무자비함을 직접 겪어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일이 마무리될 즈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방심하고 만 것이다. 청명이 주먹으로 잘근잘근 쥐어패 피떡이 되어 쓰러져있던 그놈이 최후의 발악으로 자신을 제압하던 청명의 사제들을 뿌리치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도를 주워 휘두를 줄 그곳에 있던 누가 알았겠는가. 그 기세를 눈치챈 청명은 망설이지 않고 녀석에게 달려들어 다급히 그의 목을 쳤다. 떨어져 나간 놈의 목과 머리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가 그의 얼굴과 흰 무복을 붉게 물들였다.
산문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청명도 충분히 각오했던 일이다. 강호행을 나온 검수가 타인을 죽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테니까.
청명은 신경질적으로 제가 구해낸 사제와 놈을 제압했던 녀석들에게 이러다가 강호행에서 죽으면 누가 알아주냐고 바락바락 성질내면서 요란을 떨었다. 그리고는 화산에 돌아와 보고한 뒤에도 연신 투덜거리면서 사제들을 갈궈대다 단장애에 숨겨두었던 술 한 병을 챙겨 처소로 향했다. 평소와 다른 것 하나 없는 청명의 모습에 사제들도 저 양반은 그런 일을 해내고도 참으로 한결같다며 두어 마디 얹다가 흐지부지 흩어져 처소로 돌아가 쉬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게 괜찮을 수가 있겠냐고…….”
검을 쥐면 그때 느꼈던 그 섬뜩했던 감각이 여전히 선명하다. 진검이 아닌 목검으로도 타인의 목을 충분히 베어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검을 배우고 진검을 손에 쥔 이상, 제 손으로 타인의 목숨을 앗는 일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감각이 이리도 서늘하고 거센 후폭풍을 지녔다면 차라리 강호행따위 나가지 않고 화산에 박혀 사는 것이 백 배는 나았을 것이다.
무섭다.
무서운 것 하나 없이 살아온 청명은 살아생전 처음으로 검을 쥐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타인을 향한 공포가 아니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공포였다. 사람의 목숨을 그리 쉽게 빼앗을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청명이 상체만 일으켜 가만히 앉아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제 매화검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청명아, 자느냐.”
방문 너머로 청문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자 멍하니 앉아있던 청명이 이불 속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문밖에도 들렸는지 낮게 웃은 청문이 말했다.
“이놈아, 안 자면 안 잔다고 대답하면 될 것이지, 왜 자는 척을 해.”
“……왜요?”
“들어가도 되느냐?”
방을 따로 쓰게 된 이후로 여태 청문의 방문을 단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는 청명임에도 그는 꼭 청명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 들어가도 되느냐고 묻곤 했다. 그 물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어오라고 말하자 청문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움직임에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여태 자지도 않고 무엇 하느냐. 왜, 늦잠을 핑계로 수련 빼먹고 서안 놀러 가려고?”
“하, 하하. 에이, 사형. 저 청명입니다. 제가 수련을 빼먹긴 왜 빼먹어요?”
물론 청명은 산문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받은 이후로 여태까지 몇 번이나 수련을 몰래 빼먹고 서안에 다녀오곤 했지만, 어색하게 웃었다가 되레 뻔뻔하게 굴었다. 그 뻔뻔함에 청문이 무어라 반박하려다가 결국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너는 화산 제일 기재이자 화산 제일 망둥이지. 그런데 그런 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이리 힘이 없어. 평소엔 이부자리에 머리만 대면 자더니 이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그 말에 청명이 입을 꾹 다물었다. 더는 뻔뻔한 얼굴을 할 수 없었다. 청문이 천천히 다가와 제 이부자리에 가볍게 걸터앉은 채 제 쪽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명은 청문의 저 미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저 얼굴만 보면 제가 몇 날 며칠이고 꼭꼭 숨기려 하고 또 숨겼던 생각들을 줄줄 읊게 되니까.
청명이 말을 하지 않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청문이 말했다.
“청우靑祐에게 듣고 왔다. 네가 그 아이에게 달려들던 사파 놈을 처리했다지.”
“……네.”
“그놈이 일전에 강호행을 나갔던 청연靑沿이 녀석을 크게 다치게 했다던 놈이더구나. 워낙 악독하여 당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더라.”
청명은 그가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대번 이해했다. 그런 악독한 놈이라면 그 손에 묻었을 피는 한둘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무인의 것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양민의 것도 있을 테다. 하나 결국 청명의 손에 죽어 그놈으로 인해 스러질 무고한 생명이 줄었으니 이리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청명은 충분히 이해했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사형. 그때 제가 놈의 목을 안 쳤으면 다른 사제 녀석들이 다치거나, 그, …죽을 수도 있었겠죠. 제가 강호행을 안 나가서 안 마주쳤더라면 놈이 다른 사람들을 죽였을 거고요.”
꽉 쥔 주먹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잘 다듬어진 손톱이 손바닥을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
청명의 말에 청문은 달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청명이 며칠간 해오던 생각들이 막힘없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요, 사형. 나는 사람 피가 그렇게 뜨거운 것을 처음 알았어요. 사람 목이 그렇게 잘려 나가는 꼴도 처음 봤고요. 나는, 저는 손짓 한 번에 사람 목이 그리 쉽게 떨어져 나가는 게 무서운 거예요.”
청명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꾹 쥔 주먹이 약하게 떨렸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강호행에서 가까운 누군가가, 심지어는 청명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이 섬뜩해서. 누군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청명이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그 모순이…….
그의 말을 가만히 앉아 듣고만 있던 청문이 청명의 말이 완전히 끝난 듯해 보이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청명아.”
“…….”
그 부름에도 대답이 없었으나 청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그를 불렀다.
“청명아.”
“……네, 사형.”
몇 번의 부름 끝에 청명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끝까지 대답하지 않으면 해가 뜰 때까지 제 이름을 불러줄 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탓이다.
“나는 네가 손속에 사정을 두다가 다치거나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구나.”
청명이 대답하자 청문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그 말에도 청명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청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짧게 숨을 뱉고는 말을 이었다.
“살인에 무감각해지라는 말이 아니다.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것만 기억하거라. 네가 그 사파 놈의 앞으로 벌일 살인과 사형제의 부상, 죽음을 막은 것이라는 걸. 후회하지 않도록, 네가 며칠간 생각했던 것을 앞으로도 계속 많이 고민해보면 된다. 나는, 그거면 됐다.”
청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청명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청문이 그리 말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는 언제나 청명이 제 사제나 종남 녀석들을 팬 일에 대해 수습하고 난 뒤 저를 혼내고는 했으니까.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으나 혼자 끌어안고 있던 마음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도 같았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청명을 바라보던 청문이 장난스레 물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같이 잘까? 옛날처럼.”
“아니, 갑자기 징그럽게 왜 이래요? ……그, 뭐, 전 상관없긴 한데.”
잠깐 머뭇대다가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청문이 청명의 옆에 눕더니 그의 등을 토닥이고 약하게 쓸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시큰해진 콧잔등에 청명의 두 눈이 꾹 감겼다. 눈을 뜨고 있으면 창피한 꼴을 보일 것 같았다. 다 큰 무인인 청명이 눈물을 보이는 날이면 사형제들 앞에서 은근슬쩍 그 이야기를 꺼내며 한동안 사제들과 함께 그를 알차게 놀려먹을 것이 분명하니까.
“청명아.”
제 귓가에 청문의 목소리가 들려도 눈을 꾹 감은 채 뜨지 않자 머리맡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그러면서도 청명의 등을 쓸어주고 토닥이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강호행에서 돌아온 뒤 요 며칠간 한 시진은 뒤척여야 겨우 짧게 잠들던 청명이 일정한 속도의 토닥임에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 색색 숨을 뱉으며 잠들었다. 그가 푹 잠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의 등을 쓸어주는 청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 한참 청명을 내려보던 청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홀로 끌어안아 썩혔을 청명의 속을 들여다본 청문은 이제야 곁에 있어 준 자신을 질책했다. 시간이 지나 저도 좀 컸다고 몰래 화산을 빠져나가 술이나 마셔대다가 슬그머니 돌아오곤 하던 사고뭉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처음 화산에서 만났던 그 어린아이 같았다.
청명은 검을 통해 도를 닦고자 하여 화산을 오른 이가 아니다. 청문은 이런 일이 생긴다면 기꺼이 검을 들겠다고 충분히 각오하고 검을 통해 도를 닦기 위하여 화산을 올랐지만, 청명은 그저 날 때부터 화산에서 자랐고 우연히 무학에 미친 듯한 재능이 있을 뿐이었다.
청문은 청명이 처음 피워내던 매화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매화를 떠올리고 있자면 청명이 평생 검을 들고, 매화를 피워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는 했지만, 이런 일을 겪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한 청명을 보니 검을 들지 않고 그저 화산 안에서 화산의 천방지축으로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도 불쑥 들곤 마는 것이다.
그가 다시 검을 들 것인가, 아니면 검을 내려둘 것인가.
물론 선택은 청명의 몫이다.
‘그저‥….“
청문은 그저 그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묵묵히 지지해주고, 그의 말을 한 번이라도 들어주며, 청명이 옳지 못한 길로 가려 들면 조금이라도 더 옳은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그의 곁에서 알려주면 된다. 청명이 조금이라도 더 선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진정한 도를 깨우치고 진정한 매화검수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의 뒤에는 언제나 화산이, 그리고 청문이 있음을 그가 기억하고 있기만 한다면…….
한참을 생각하던 청문은 어느새 깊게 곯아떨어진 청명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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