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존이설/청명이설] 타생지연他生之緣

[청명이설/검존이설] 他生之緣(타생지연) - 9. 적년회포

구화산에 떨어진 유이설

* 급전개 주의, 개연성X, 무협알못 

* 제가 혼자 도교이론과 시간여행이론을 짬뽕해서 만든 이상한 이론이 나옵니다.

* 흠천감 : 명나라의 황실 천문기관. 천문학은 단순히 별을 관찰하는 것이 아닌 하늘의 징조를 살피는 황제의 학문으로 신성한 의미가 있음. 주 업무는 천문관측, 역법 연구  

* 적년회포(積年懷抱): 오랫동안 품은 마음속의 짐, 생각.


시문령의 요청으로, 두 사람은 사람들의 귀가 잘 닿지 않는 곳을 찾았다. 해가 지기 시작하며 한껏 붉어진 노을이 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시문령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이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머뭇머뭇 말을 이어갔다. 

"이곳에 떨어지기 전의 저는, 본래 황실 흠천감(欽天監) 관원의 여식이었습니다."

"흠천...?"

"하늘의 징조를 관찰하고 별을 관측하는 기관이라 보면 됩니다. 별을 보는 방법도 아버지에게 배웠고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꽤 재능이 있어 아버지의 물음에 답을 찾아내는 식으로 일을 도와드리기도 하였죠. 별과 날짜의 배열이란 계절과 함께 끼고 돌아가는 규칙이 잘 드러나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늦가을이니 동편을 보면..."

유이설은 별 얘기를 시작하자 시문령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늘어놓는 말은 한번에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측면도 있었지만, 유이설은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하고 경청했다. 

"... ..."

"아차, 이게 하려던 말은 아닌데... 어쨌든, 이렇다 할 부족함 없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변을 당하기 전까지는요."

"변?"

"...원인은 저였습니다. 관원이 하늘의 일을 다른 이와 논의하는 것이 금지된 일이었기 때문이었죠. 그저 아버지와 딸이 지붕 위에서 별을 보며 얘기하는 것 정도야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것이... 안일했습니다. 누가 밀고를 한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황실의 분노는 우리 집과 아버지에게 미쳤고, 저희는 급히 평생 살던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길에서 어떤 자들이 들이닥쳐서..."

"... ..."

"사실 그 이후로는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직도 명확히는 모르죠."

시문령은 무릎을 모아 앉은 채로 땅을 한참 쳐다보았다. 아마 열기 어려운 기억을 더듬고 있던 터였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때 저는 제가 곧 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리에 입은 상처가 심했거든요. 피가 끝없이 흘러나와서... 갈증이 치솟고 온 몸이 떨렸죠. 이대로 죽을 일만 남았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낯선 곳이었습니다. 사등현이라는 마을의 한 노인께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저를 집에 데려와 돌봐주고 있었다 하더랍니다. 비록 다리를 평생 절게 되었지만, 은혜를 베풀어준 분들 덕에 기운을 차린 저는 가족을 찾고자 했으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과거로 옮겨 와서?"

"...네."

"최소 제가 살던 시기로부터 몇십년, 아니 백 년 가량 전인 시기이더군요. 죽음의 기로에 섰던 제가, 깨어나보니 백 년 전으로 돌아와 있던 것입니다... 물론 미래에서 왔음으로 인해 과거에 기록을 본 기억을 더듬어 사등현에 닥쳐올 홍수를 예견해주고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어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독이 되어 흑도 무리들이 저를 데려가게 하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시문령은 마른세수를 했다. 

"덕분에 후련하네요. 아무도 믿지 않을거라 여겨 아이 재울 때에나 털어놓았었는데."

유이설은 시문령을 보며 눈을 내리 깔았다. 유이설에겐 갑자기 백 년 전으로 떨어지더라도 오를 화산이 있지만, 이 소녀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녀도 운이 좋아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녀가 느꼈을 절망감과 고독을 완전히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시문령의 독백이 생각에 잠긴 그녀의 의식을 깨웠다.

 "...사실, 화산에 왔을 때에도 가끔씩 저 절벽에 몸을 던질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이설이 주위를 둘러봤다. 절벽, 절벽, 절벽. 이곳은 어디로 달려가나 온통 망할 절벽인 화산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퍼뜩 시문령의 목덜미를 꽈악 잡았다. 유이설 자신도 이성을 거치지 않고 한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고, 목덜미가 잡힌 소녀도 당황스러운 탄성을 질렀다. 

"미안해."

유이설은 사과했지만, 여전히 손아귀에 힘을 풀지 않았다. 

"괘, 괜찮...습니다, 지금은 절대 안 뛰어내려요. 애초에 죽으려 한 것도 아니고!"

그 말에 유이설의 맥이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아귀와 함께 탁 풀렸다. 시문령이 잠시 옷을 정리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생각나는대로 말하다가 오해를 사버렸습니다. 사실, 저는 그게 다시 돌아갈 방법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거든요."  

"...돌아가는 방법이라고? 절벽에 떨어지는 것이?"

"그, 그게..."

유이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문령은 갑자기 격한 반응을 보이는 유이설이 낯설었지만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생각했다. 

"놀랍겠지만, 예. 그리 생각했습니다. 흠천각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밑에서 홀로 시간의 흐름을 공부하며 자연과 생명의 흐름에 대한 책을 읽은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시문령은 지루한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아 유이설을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경청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본디 선조들께선 명재경각(命在頃刻), 즉 한 인간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다는 것은 우주가 본래 가지고 있던 운명의 흐름이자 시간의 흐름인 파괴(死)와 생성(生)의 물줄기에 가까이 있는 상태라고 보았답니다. 운명의 흐름이 곧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죠."

시문령은 잠시 할 말을 고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턴 저의 생각인데요, 그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사람들이 순리에 따라 그 물줄기를 타고 사(死)의 경로로 들어가려다가, 어떤 변수에 의해 그 흐름을 역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운명의 흐름을 거슬러 사에서 생으로,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오게 된 것이라면 제가 죽기 직전에 갑자기 과거의 중원에 떨어지게 된 것이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그러니 되돌아가기 위해선, 그 물줄기에 다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죽음에 가까운 상태를요."

유이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해보니 유이설 자신도 이곳에 오기 직전엔 빈사 상태였다가, 눈을 떠보니 옛 화산의 의약당이었다. 그저 가설은 가설이었을 뿐이지만, 시문령의 의견은 유이설의 경우와도 아귀가 맞았다. 그러나 유이설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기껏 찾아낸 돌아가는 방법이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다니.

"그래서, 죽으려 한 거야...?"

"네. 네? 아, 아니, 물론 최종적으로는 살려고 한 것입니다.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고요. 그곳엔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게 되신 어머니와 제가 돌봐야 할 동생들이 있거든요. 물론, 그들도 지금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르나..."

시문령이 설핏 웃었다.

"많이도 울며 생각해본 결과, 저는 그냥 이곳에 있기로 했습니다. 화산의 사람들이 저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무엇보다도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확신이 잘 서지 않는 결심이지만... 이것 또한 제가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견뎌야 할 일인 것이겠지요. 달이, 그러니까 저와 같이 이곳에 온 아이는 화산에 입문하였습니다. 저도 목숨을 걸어가며 미래로 돌아갈 시도를 하느니, 이곳에서 살아보고자 합니다."

시문령은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었으나, 살짝 눈물을 비치는 것을 감추진 못했다. 유이설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자 시문령은 제 손바닥으로 두 눈을 훔쳐내었다. 

"이설 님도 화산의 문도가 아닌 빈객이라 들었습니다만, 돌아갈 곳이 없다면 이곳에 적을 두는 것이 어떠신지요? 솔직히 말하면, 이설 님이 이곳을 떠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설 님은 검수로서도 훌륭하니 제자로도 받아주지 않을까요? 저야 검은 문외한이어서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도사님들도 이설 님의 검을 칭찬하시던데요."

"...글쎄, 아직은."  

시문령은 유이설의 표정이 꼭 자기가 고민을 할적의 상태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설 님도 고민 중이신 건가요? 돌아갈지, 머물지..."

"응. 하지만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

유이설은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 해줘서 고마워, 궁금했어."

"저야말로요. 여러 해 동안 혼자 품고 있던 이야기를 하게 되니 마음이 가볍습니다."

"저, 근데, 이런걸 왜 궁금해 하신건지 제가 물어봐도..."

"그건..."

유이설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대로 말할 지, 대충 둘러댈지 눈을 굴려대던 유이설을 시문령이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혹시..."

"아, 아니야."

"제가 점술사여서, 도사님들이 저를 의심하는건 아니죠? 사특한 술수를 사용한다든지..."

"?"

거의 동시에 뱉어져 나온 말이었다. 유이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문령을 바라봤다. 순수한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오는 그 표정 자체가 답이 되었는지, 시문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닌가 보네요."

"...화산은 너를 그렇게 대하지 않아."

"이설 님에게도 믿음을 얻은 화산이라면, 믿을 수 있겠어요."

해가 완전히 져 노을이 물러간 하늘 아래, 두 이방인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고는 다시 산문 안으로 향했다. 

✿∘°˚∘°❀°∘˚°∘✿

깊어 온 밤이었지만, 유이설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유이설은 강호행을 하느라 꾸준히 돌보지 못한 기본기를 다시 착실히 점검했다. 달빛을 아래에서 놀리는 검은 마치 정성껏 짜여진 구성의 춤사위가 펼쳐지는 듯 했다. 숨을 고르던 유이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때, 뒤에서 닥쳐온 검기에 유이설이 급히 뒤 돌아 검기를 받아냈다. 깨끗한 검신 앞으로 붉은 검기가 깨뜨려져 흩어졌다. 

"아까는 잘도 도망갔겠다?"

"아..."

"아? 아아앙? 나만 혼났잖아, 너도 같이 갔었는데!"

유이설은 아차 찔리는 마음에 청명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일을 시작한 것은 청명이었지만 유이설 또한 그 곁에 함께 있었기에 최소한 청명이 혼나던 전각 앞을 지키려 하기도 했던 유이설이었다. 그것조차도 시문령과 이야기를 하려 자리를 떴지만. 그러니까 청명의 입장에선, 유이설은 같이 사고 쳐놓고 쏠랑 내뺀 사람인 것이다. 

"하, 씨. 아니, 내가 이러려 여기 온 건 아닌데. 사실 사형이 나만 잡은 것도 이해가 가긴 해. 너는 여기 문도도 아니고, 뭐..."

분노와 함께 날아올 검격을 막을 준비를 하던 유이설이 그 말에 당황한 듯 검을 거두었다. 검을 든 청명의 한손에는 술병이 들려있었다. 뭐 이건 일상이라고 쳐도...

"그러니까, 내가 전부터 생각을 해봤는데, 그... 저기..."

청명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술기운이 오른 듯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멋쩍어하며 제 뒷통수를 벅벅 긁어댔다. 

"너, 기억 잃었다는거 거짓말이지?"

"?"

유이설이 식은땀을 흘렸다. 어떻게 알았지. 유이설은 현재 자신에 대한 기억이 온전한 상태이다. 시문령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오기 직전의 상황만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이 누구고, 어디에 속해있었는지는 처음부터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유이설을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묵인해주고 있는 것 같았건만, 청명도 유이설의 기억상실이 오래전부터 수상했는지 이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내려는 모양이다. 거짓말했다고 추궁하려나.

"...난..."

"아니, 이 말 하려 온 것도 아닌데! 내가! 아오!"

"...?"

문짝만한 남자가 저 혼자 말을 꺼내다가 저 혼자 제 자신이 답답하다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하는 것이, 누가 보면 고개를 젖혀 웃었을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유이설은 검을 검집에 넣고 청명에게 다가갔다.

"의원, 필요해?"

"뭐? 날 뭘로 보는거야? 멀쩡하거든!"

가까이서 보니, 청명의 얼굴이 귀까지 붉었다. 보통 이 정도로 흥분한 청명은 항상 어딘가로 달려들려 했기 때문에, 원래는 사형, 사질들과 사지를 분담하여 그를 붙들어야 했다. 청명의 머리를 콩콩 때리는 것은 언제나 유이설의 담당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유이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선조에게 무슨 생각을...'

근데, 나는 그럼 지금까지 검존의 머리를 때리고 있던 걸까?

'... ...'

...순간 지금이라도 스스로의 목에 칼을 들일까 잠시 생각한 유이설이었다. 다행히도 청명은 유이설의 정체도, 유이설이 청명이 자신의 선조임을 알고있다는 것도 당연히 모르기에 저도 모르게 사질을 대하던 습관대로 행동했었지만, 종종 이렇게 자기가 무슨 짓을 한건지 엄습해올 때가 있었다. 

한편 지금 유이설 앞에 있는 청명은 가만히 안절부절 못 하고 있을 뿐 사고를 칠 징후는 보이고 있지 않아 유이설도 대처가 어려웠다. 옷 속에 말벌이라도 들어갔나?

"괜찮아?"

"난, 괜찮..."

유이설과 눈을 줄곧 마주치질 못하다가 마른세수를 한 청명은 뭔가 마음을 굳힌 듯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유이설과 마주 섰다.

"...유이설."

"응."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달빛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청명은 몇번을 봐도 유이설이 알던 사질보다 더 굵직하고 강인한 이목구비였다. 확실히 도인 같지는 않다. 어쨌든 자꾸 더 살펴보고 싶어지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나이든 채 나타난 사질 같기도 하고, 되려 더 어리숙해진 사질 같기도 한 것이. 청명은 제 얼굴을 뜯어보는 유이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간에 힘을 주고 잔뜩 꾸민 목소리를 내어 얘기했다.

"너, 화산에 들어올 생각 없냐?"

"...?"

"사형하고 오늘 얘기해봤는데, 너라면 특수한 경우니까 입문해도 배분 건너 뛰어서 청자배 막내로 넣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 너, 어차피 갈 곳 없잖아."

"청자 배...?"

청자 배? 그럼, 청명이 유이설의 사형이 되고, 유이설은 청명의 사매가 된다. 게다가 청명이 유이설의 사형이 되면, 유이설은 청명에게 존대와 경칭을 사용해야 한다.

...싫다. 

나 백자 배인데, 나 네 사고인데.

사질은 사질인데.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따로 있지. 이건 명백하게 선을 넘는 것이다. 아무리 화산에 위 아래가 없고 배움에도 위아래가 없다지만, 위가 아래가 되고 아래가 위가 될 수는 없다. 물론 청명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그는 결코 유이설의 아래는 아니지만, 아무리 청명이 과거의 선조였다지만, 지금은 백천보다도 어린 이립의 청명인데...

장문인께 이 사실을 알려야... 아차, 

'진정하자.'

유이설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순간 정신을 놓고 마지막 남은 사고의 자존심을 주장해버릴 뻔했다. 청명은 유이설의 표정을 읽어보려다가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어갔다.

"알아. 너 돌아갈 곳 있는거. 기억하고 있고, 그리워하고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특히 가끔씩 혼자서 달 보면서 멍 때릴 때 엄청 티나거든? 내가 계속 지켜봤... 크흠."

"... ..." 

"어쨌든, 돌아갈 곳이 있긴 하지만 뭔가 사정이 있어서 못 가고 있는거 아냐? 그러니 이참에 그냥 여기에 있어. 옮겨."

뭐라 확답을 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유이설은 모든 사람이 화산을 떠나도 화산의 귀신이 될 사람이었지만, 이 곳은 화산이되 화산이 아니다. 시문령처럼 미래로 돌아가길 포기하고 이 곳에 남는다니, 유이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처, 청명. 잠시만..."

"어디야, 누군데. 부모? 형제? 스승? 난 원래 고아라 가족 그런 거 잘 몰라. 하지만 산문도 가족이 되어줄 수 있는 건 알아. 뭐, 나는 살짝 겉도는 위치긴 하다만..."

청명은 점점 빨라지는 어조로 유이설에게 말했다.

"너, 이게 얼마나 귀한 기회인지 알아? 화산이면 다들 황금을 바쳐가면서도 들어가고 싶어하는 대문파야. 어딜 가도 화산이라는 이유 하나로 대접 받고, 영웅이라고 칭송 받을 수 있어. 그리고,"

"... ..."

"...나, 나도 언제나 네 곁에 있을 수 있고."

"청명. 지금은 곤란..."

"너, 나를 지킨다면서."

청명이 두 손으로 유이설의 어깨를 붙잡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날 도우려 하고, 계속 비무 걸어오고, 내가 장사 갈때도, 청해로 마교랑 싸우러 갈 땐 같이 간다고 고집 부리고, 쪼금 다쳐서 왔을 땐 팔 하나 잘려온 것처럼 충격에 빠져 뛰쳐나가더니, 그래놓고 이제는 가버릴거야? 여기 버리고? 거기가 얼마나 대단한 곳이길래!"

유이설의 몸이 청명의 손에 잡혀 이리저리 흔들렸다.

"...버리는 거 아니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거기가 화산보다도 커? 무, 무슨 소림이라도 돼?"

청명이 손에 닿아오는 유이설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의식하고 했다기보단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인 듯 했다. 청명이 나지막하게 물어봤다.

"화산보다도 거기가 더 좋아서 그래?"

유이설은 그 행동에 살짝 당황했다. 청명은 아랑곳 않고 제 할말을 이어갔다. 용기가 생겼는지 이번에는 집요하게 눈을 맞춰왔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주향이 확 끼쳐왔다.

"...나보다도?"

유이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유이설이 청명에게서 한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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