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하늘이 내리는 기적이라 했던가. 신이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기적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하늘 위의 존재가 누군가를 애정하는 만치 차갑게, 눈송이가 대기를 얼렸다. 세계가 잿빛에 잠겼다. 그러나 세상에 유일한 것 하나는 온전히 제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다. 만물의 어머니이자 위대한 자연. 시린 계절이 굽이치는 세월까지 얼리지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 있다. 그것은 행복도 슬픔도, 아픔도 아닌 그 무언가. 텅 빈 가슴 속을 메꿔줄 단비 같은 감정인 동시에 공허로 채워오는 안개 비스름한 것.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심장을 조금씩 적셔온 그 감정은, 너를 만난 순간에야 비로소 개화해 내 온몸을 잠식했다. 이 감정에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애틋한 느낌. 그러니까 그건.
살아가면서 후회를 참 많이도 했더랬다. 이때 이랬으면 좋았을 걸, 저 때는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지만, 과거를 반추하며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생각해보면 후회투성이인 인생이었으나, 앞으로 걸어갈 길이 더 많이 남았기에. 홍민재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더 완벽해지면 되는 일이었다
* 날조 / 적폐 / 캐해석 차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이전 드림과 동일한 몽주가 나옵니다. 불편하신 분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유료입장) 몸이 무겁다. 녹음이 만연한 산은 붉은 피가 흩뿌려져 제 색을 잃어버리고 죽음의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운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둑한 하늘 아래 생명력이라곤 느껴질
* 적폐 / 날조 / 캐해석 차이 있을 수 있습니다. * 현화산 시점(소설 446화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 매화연 결말에 대한 스포가 포함되어 있어 감상에 주의합니다. 산을 채우고 있는 나무가 바람을 맞아 흔들린다. 잎과 가지끼리 부딪치니 솨아아- 하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초록의 풍경이 어슴푸레한 노을빛으로 저물어간다. 하루의
회색 바탕에 빨간색과 갈색, 파란색의 선이 가로질러가는 테니스 스커트. 리안이 입고 있는 교복 끝이 나풀댔다. 리안의 시선 끝에는 은영이 아른거리고 있다. 언뜻 보기에 서늘한 느낌이 드는 얼굴이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리안은 알고 있다. 일전에 잠시 마주친 기억을 더듬어보노라면, 은영과 보낸 시간은 퍽 재미있었다. 리안의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기에
건조한 공기가 실내를 바싹 태웠다.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며 돌아갔다. 교실에 혼자 남은 인영이 흠칫, 몸을 떨었다. 권여루는 지금 교실에 우두커니 혼자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달이 맺혔고 별이 빛을 흘리는 시각. 떨어진 별빛은 지상에 안착하지 않고 지평선 너머 어딘가로 사라지길 반복했다. 밤하늘이 제게로 떨어지는 걸 지켜보던 소녀
본명을 필명으로 쓰는 비주류 소설가. 이제 그의 손이 활자를 연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의 심상 세계가 현실로 다시 녹아드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고 나서 절필했다. 그렇게 들었다. 적어도 그녀가 살아 숨 쉬는 동안에 아버지의 이상이 재차 실현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에. 째깍째깍. 시침이 5와 6 사이를 가리키고. 모두가 빠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았다. 이토록 모순적인 말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사랑했지만 그리워하지도, 애타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뿐이었다. 하나 단 한 가지. 내가 진실로 연모했던 것이 있다면… 그가 만든 세계였다. 권여루는 자신의 아버지가 만든 세계를 사랑했다. 친애하는 소설가가 빚어낸 세상을 눈에 담았다. 어렸을 때는 그것만이 세상
***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장마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도 연습으로 결석한 동아리 부원 채주현과 서하늘─결국 주현과 하늘도 나중에 고전문학부에 가입했다. 본인들의 의지가 강했다─로 인해 소연과 단둘이서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동아리 활동의 일환이었다. “여루야, 일단은 네가 동아리 부장이니까 주현이랑 서하늘한테 감상문 걷는 건
채주현은 불우한 가정환경을 타고난 이가 아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나름 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왔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신체적 정서적 학대도 없었다. 그렇게 보였으며 본인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집착의 결정체 같은 이가 생겨난 것일까? 이 광기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마냥. 그렇게 갑자기 생긴
한창 바쁜 활동 시기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이 하루 주어졌다. 활동 주에는 정말 드문 일이었는데, 매니저의 배려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주현은 생각했다. 그의 성과가 아닌 내 성과다. 어쨌든 내가 잡아낸 휴식의 기회니까. 아직 2월이라 날이 추웠다. 항상 차가운 음료만을 고집하는 소녀를 떠올리며 나는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딸랑- “안녕하세요.
태초에 이름 붙이길, 나는 그것을 거미의 입이라 하였고. 그것을 다시 거미의 집이라 하였네. 다양한 생명을 품은 둥지는 내 안식처 되어, 나는 지난 과거를 묻고 새 우주를 맞이하며 노래 부르네. 아아, 드디어 여기 알리노라. 옅은 봄 향기는 수런거리며 짙어지고 여름. 아름다움을 새기는(麗鏤) 계절이 진정 도래했음을. *** 여루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정말 별것 아닌 순간이다. 그런 별것 아닌 것들이 모여서, 작은 순간들이 모여서 사랑이라는 결과에 대한 원인을 만드는 것이다. 교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햇빛. 그 반짝임을 머금은 눈동자 색이 아름다워서. 약간 허스키한 톤의, 저음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이 활짝 웃는 순간 호쾌한 미녀로 변하
변화하는 계절은 사람을 잡아먹는다. 여루는 비로소 그것을 체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여름이란 곧 한 소년을 의미했고, 그 더운 공기가 누군가의 안위를 위협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던 하늘 아래 네가 서 있었다. 너는 그렇게 네 존재만으로 내게서 인연을 앗아갔다. 너는 그저 서 있었을 뿐이겠지만, 그것이 내게는 세상이 가려지는 순간이었다. “심증밖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다. 덕분에 여름인데도 조금은 싸한 공기 체온을 얼리고 있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미팅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기분 나쁘게 내리는 비 때문에 차도 운전을 조심스럽게 하는 터라 귀가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참이다. ──오래지 않아 지나갈 환상통이라 했다. 아니, 헛소리였다. 나는 사랑에 관한 명언이라며 지껄이던 어느 방구
사방에 사진들이 가득하다. 상처난 맨발이 바닥에 어질러진 사진을 짓밟으며 일어났다. 매끄럽게 인화된 누군가의 인영 위에 희게 지문이 남았다. 마치 자기 소유물에 낙인이라도 찍듯 그렇게 마구 지문을 묻히며 비틀비틀, 다리를 움직여대는 인영. 방금 막 지문이 찍힌 것들은 모두 한 대의 카메라에서 나온 사진들이었다. 카메라의 피사체는 모두 자기 자신. 그러
내 감정은 한 번도 질주를 멈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지칠 줄 모르고 속도를 올렸다. 그 끝이 설령 보답받지 못하는 길로 이어진다 해도 나는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건 패배할 결과를 알고도 사랑한 나의 선택이었다. 찰나의 감정이 아닌 걸 알았다. 색감이 옅던 그 갈색 눈동자를 본 순간 깨달았다. 계절이 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