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6화. 실패한 사랑꾼 또는 잊혀진 소설가 (1)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채주현은 불우한 가정환경을 타고난 이가 아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나름 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왔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신체적 정서적 학대도 없었다. 그렇게 보였으며 본인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집착의 결정체 같은 이가 생겨난 것일까? 이 광기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마냥. 그렇게 갑자기 생긴 걸까? 권여루는, 그저 운이 나빴던 것일까?

*

운이라. 운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좋을 것 하나 없는 기억뿐이다. 운 총량 법칙에 대해서 아는가? 행운이 찾아온 만큼 불운이 찾아오고 불운이 찾아온 만큼 약간의 행운이 찾아온다.

그렇다. 행운이 찾아오면 그만큼의, 혹은 더한 만큼의 불운이 찾아오지만 불운이 먼저 찾아오면 쥐꼬리만 한 행운이 찾아온다. 이것이 권여루가 아는 운 총량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제게 한해서만 엄격해서, 그 어떤 작은 운이 찾아와도 곧이어 커다란 불행을 안겨주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여루는 평범한 고등학교에 들어왔다. 중학교 때 괴롭힘을 당했기에 아는 이 없는 학교로 진학하고 싶었는데 보란 듯이 그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전학해 온 곳에서 채주현을 만났다. 이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가는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좋아했겠지만 권여루에게는 인생이 바뀌는 사건이었다. 바뀌다 못해 그녀를 최초의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런 것이다. 운이란 이리도 불공평하다.

“여루야. 나 좀 봐.”

“......”

늘 그랬듯이 비가 오는 날이었다. 관계 후 지친 여루는 채주현에게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모로 누워있었다. 그녀는 아직 진정되지 않은 숨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호흡에 신경을 썼다.

곧 성인이 된다. 벌써 자신이 납치 감금당한 지 어언 2년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여루는 지쳤다. 너무 많이 지쳤다. 아직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지만, 너무 지쳐서 이제는 희망이란 것의 조각조차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까? 얼마나 갈까? 자신은 언제까지 이렇게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걸까?

“여루야.”

“...그만 좀 불러. 짜증 난다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뒤척이며 자신이 짜증 난 상태임을 행동으로 표현해 본다. 그러나 주현은 그런 말을 무시하고 계속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뒤에서 조용히 껴안았다. 역시 지쳤다. 그래서 발버둥 치기도 포기했다. 삶을 향한 의지조차 포기한 건 아니었으나, 그 목표는 이미 희게 바랜 지 오래였다.

몸을 바짝 붙이자 채 가시지 않은 뜨듯한 체온이 서로의 신체로 전이된다. 여루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고 결국 저도 모르게 작게 몸부림을 쳤다.

“놔... 이제 끝났잖아. 내버려 둬.”

“난 안고 있고 싶은데.”

“싫어.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소녀가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주현은 당황하지 않고 익숙한 듯 그녀를 다시 껴안으며 달랬다. 등을 느릿하게 쓸어주고 토닥인다. 제 가슴을 여루의 등 쪽에 붙여 쿵쿵, 진정되는 심장의 울림을 들려준다. 몇 분여가 흐르고 소녀가 약속한 것처럼 진정하자 주현이 그녀의 뒷목에 입을 맞췄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괴리감이 느껴지는 일련의 행동들.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아직도 삶에의 미련이 남아있나.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뭐가 남지? 뭐가 있지? 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대기업의 손에서 벗어날 방법이란 게 있나? 도망친다고 해도 내가 나가서 뭘 할 수 있지. 여루는 상황에 대한 합리화를 하다가 그것조차 그만두었다. 더는 찾아오지 않을 미래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주현아.”

“응.”

“나 죽고 싶어.”

텅 빈 눈동자를 한 여루의 입술에서 단 하나 남은, 어두운 희망이 새어 나왔다. 주현은 여전히 뒷목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웅얼거리는 소리로 답했다.

“응. 나중에. 같이 죽자.”

“......”

“아직은 아냐.”

마치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장난치듯 말하는 어조였다. 여루는 이 상황에 와서도 기가 막혔다. 어떻게 제가 망쳐 놓은 상대한테 죽고 싶다는 말을 듣고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 미친놈은 바깥에서 멀쩡히 사회생활을 한다. 역시 제정신으로 미친 게 틀림없다...

“너는... 도대체 뭐가 문제야?”

“아무 문제 없어, 나는. 네가 문제지, 여루야.”

“내가...?”

“그래. 다 너 때문이잖아. 이렇게 된 거.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내가... 나 때문이라고.”

“응. 어쩌겠어. 그러니 네가 책임져야지.”

“......”

여루는 텅 빈 눈동자를 들어 침대에 붙은 벽 어딘가를 응시했다. 제 방 벽과 똑같은 지독한 크림색 벽지는 불순물 하나 없이 깨끗했다. 갑자기 학교에 다닐 적이 생각났다. 낙서 된 교실 벽. 시원한 에어컨 공기. 여름의 습기로 무겁게 가라앉은 온도가 훅 끼쳐온다. 소녀는 몸을 움츠렸다.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 걸려버린 우연한 먹잇감이자 희생양은 이제 어디로도 갈 수 없다.

───내가 책임지는 건 네가 아니라 네 욕망에서 기인한 불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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