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녀와 마녀와 신
이름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감이 어떠한 의미인지 아는가.
나는 오랫동안 이름이 없었다. 나는 남쪽의 작은 나라 산간의 어느 마을, 유복하지 못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이미 딸이 있었던 나의 부모는 지참금만 축내는 계집아이 대신 일꾼이 될 수 있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원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계집이었던 데다 건강하지도 않았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온갖 병을 달고 세상에 나왔으며 두 살이 될 때까지 걷지조차 못했다. 그에 더해, 부모 중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외모-새하얀 머리와 보라색의 눈-로 인해 나의 어머니는 줄곧 그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추문에 시달려야 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열병에 걸려 생사를 오가면서도 나의 목숨은 끈질겼는데, 나의 부모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반갑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가족에게 흐릿한 존재였다. 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그 남자’-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려 한다-외에는 아무도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죽기를 기다렸던 듯 하다. 나는 매일을 방치된 채로 곰팡이 냄새가 나는 조그만 골방의 침대 위에서 보냈으며 몇 번이고 말했듯이-이름조차 받지 못하고 그 애, 애새끼 정도로 불렸다.
인간은 그 어느 짐승보다도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들의 존재 여부는 타인에 의해 정의된다. 나는 줄곧 그 명제를 부정하고 나로써 존재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이름 없는 어린 아이가 아무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나로써 존재할 수 있었을까. 부모에게조차 관심을 받지 못하고 어린 아이라고만 불렸던 나를 대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세계는 오직 가끔씩 나의 생사를 확인하는 부모와 동정심에 못 이겨 나를 돌보러 오는 언니-그에겐 소피아라는 이름이 있었다-가 다였다.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툭하면 발작을 일으키고 코피를 쏟는 지긋지긋한 몸뚱아리? 단순한 언어로조차-나는 부모에게서 글도 말도 배우지 못했다-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는 나의 나약한 정신?
내가 발버둥쳤건 그러지 않았건 어쨌거나 그러한 생활에도 끝이 있었다. 내가 살던 나라가 멸망을 맞고 이교도 병사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나를 두고 도망갔다. 아니, 그건 순화한 표현이고. 정확히는 그들은 나를 넘기는 대가로 이교도 병사에게 그들을 죽이지 않고 도망가게 내버려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누구와도 닮지 않은 이 용모. 창백한 피부에 희게 센 머리, 보라색 눈. 확실히 나의 외모만큼은 보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고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는 이점이 되었다.
내가 보내진 곳은 노예상이었다. 그대로라면 나는 이교도들의 제국에서 권력자의 장난감 따위로 전락했겠지만 나를 사간 사람이 있었다. 옐레나, 그는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점을 쳐 먹고 사는 떠돌이였다. 조수가 필요하다고 했다.
내 용모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딱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밑에서 재롱을 부려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원숭이 노릇을 했다. 그는 자신을 스승이라고 부르라고는 했지만 정작 그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딱히 없었다.
그도 내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이름을 지어주면 도망간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내가 그와 독립된 강한 자아를 가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다. 그는 내가 자신의 꼭두각시나 놀잇감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는 늘 자기 마음대로였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그의 결정으로 어떤 벽지의 마을에 정착했다. 소렌탈이라고 불리는 아주 작고 폐쇄적인 마을이었는데,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긴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분위기 자체가 전체주의적이었다-조금이라도 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옐레나가 하필 왜 그곳에 정착할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라면 대도시를 택했을 텐데. 하긴, 그는 항상 작고 소박한 어딘가에 정착해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에 환상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곳을 택했던 것은 그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그나마 봐줄 만 했던 마을의 경치 때문이었을까? 혹은 그의 고향이었어서?
옐레나가 알았을지 모르겠다. 돌아온 탕아와 그가 데려온 어린아이. 그곳에서 우리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능숙한 화술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드는 것이 특기였던 그라면 몰라도 아직 라틴어에조차 서툴렀던 나 같은 아이는 그곳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언급했던 나의 외모-하얀 머리-누군가가 한때 그건 선천적인 병 때문이라고, 그걸 무어라 부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때문에 그들은 나를 꺼려했다. 병이라도 옮을 듯. 특히 마을의 머리가 벗겨진 신부는 내가 마녀라고 했다.
어쩌면 그것이 단지 나의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교회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고, 가끔씩 허공을 보며 대화했으며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로 야훼가 절대선이자 절대신이었다면 왜 나 같은 인간을 만들었으며 나 같은 작은 소녀 하나가 자신을 믿게도 만들지 못하는가. 왜 세상은 전쟁과 증오와 폭력으로 넘쳐나는가. 왜 그는 선악과 따위를 안배해 두었으며 하와의 선택은 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실존할 자유를 얻은 해방이 아니었던가. 왜 예수는 원죄를 짊어지도록 태어났으며 유다의 배신을 눈감ㅔ는 그런 운명을 타고났는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대머리 신부에게 뺨을 맞았던 날이 떠오른다. 의심 없는 믿음만이 참되다고 했던가. 바보같긴, 나중에 더 많은 것들을 접하고 공부한 시점에서 생각해보건대, 그것들은 그리 민감한 질문들도 아니었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진작에 연구하고 답을 내린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지 몇십 년은 되었을-학교를 나오기조차 했는지 의심스럽다-시골 마을의 멍청한 늙은 신부였고, 대답 대신 내가 역시 사탄의 자식이자 마녀라고 했다. 그래. 나는 그곳에서 마녀라고 불렸다. 모두가 나를 피했고 옐레나는 마을의 분위기를 눈치채자 나를 ‘고쳐놓으려고’ 용을 썼지만 실패했던 것 같다. 어린 딸을 안고 있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딸의 눈을 가리던 나이든 영주가 떠오른다. 혹은 내 머리를 겨냥해 던져진 토마토라거나, 날계란이라거나.
그래서 나는 정말로 마녀가 되기로 했다. 그들이 날 부르는 대로.
마녀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불길한 말들을 내뱉고 수상하게 구는 것. 항상 특정한 무언가로 존재함을 갈구하던 나에게 ‘마녀’는 딱 맞는 역할이었다. 결국엔 그들은 나에게 주목했고 열다섯도 채 되지 않던 나를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나는 마녀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병약한 아이에서, 점쟁이의 조수에서 벗어나 마녀가 되었다. 마녀라는 호칭은 다른 것들보다 특별했으므로 나는 그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정말로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했다고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마녀로써의 나는 오직 그들의 눈에 의해 관측되고 재조립된 형상이었다. 그때의 내가 그런 이름표에 매달렸다 한들 그건 진정한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어디에도 없는데.
그리고 얼마 후 마을에 유래없는 흉년이 들었다. 갓난아이 두 명이 우물 밑바닥에서 퉁퉁 불은 채 발견되었다. 다리 다섯 달린 송아지가 태어나 사람들의 두려움을 샀다. 대머리 신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원흉으로 옐레나와 나를 지못했다. 당연한 원리였다, 그 마을에서 이방인은 우리 둘뿐이었으니. 재앙처럼 다가온 반복되는 불운의 이유를 그들은 찾고 싶어했고 마을의 결속을 다지고 싶어했고 눈엣가시였던 이방인들을 치워내고 싶어했으며 나와 그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장작에 불이 붙었고 먼저 화형대에 오른 것은 옐레나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에게는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가 나의 종아리를 때리고 외출을 금지했던 것은 이런 사태를 예상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은 나의 차례였는데, 나는 순순히 죽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악을 쓰며 고래고래 내가 죽고 나면 죽음이 마을을 찾아와 복수할 것이며 마을을 통채로 불태울 것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뜻밖에도 그들은 그 말을 믿은 듯했고 나를 마을 밖으로 내보내기로 합의했다. 마녀의 스승, 한때 마을의 일부였던 자라면 몰라도 진짜 마녀를 죽이기에는 두려웠기 때문이었을까.
막상 마을을 떠나 무작정 뒷산으로 들어선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갈 곳이 없었고 다른 마을은 어디에 있는지 몰랐으며 나를 받아줄지도 불분명했다. 그러다 예전에 했던 옐레나의 말이 떠올랐다. 가장 낮은 자들의 신. 번제를 바치면 누구든지 도망칠 곳을 만들어 준다는 구세주. 한때 옐레나가 그 신을 모시는 교단의 일원이었다고 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신이 듣기를 바라며 나는 방금 불태워진 나의 스승도 번제로 쳐 주냐고 했다. 그는 나로 인해 죽었으므로, 내가 그를 살인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비웃는 듯한 소년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풍경이 바뀌었다. 그곳에는 예전 고향 지방의 유적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오래된 유적 같은 신전이 있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사랑의 신이 귀애한 이름 모를 나라의 아름다운 막내 공주가 머물렀다는 신화 속 궁전을 떠올리게 했다. 보이지 않는 시종들에게 떠받들어지는 삶. 따뜻한 물과 보드라운 깃털 이불과 부드러운 빵과 치즈와 포도주와 올리브……하여간 온갖 식료품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다 떨어지면 새 것으로 교체되었다. 서재에는 아마 내가 평생을 일해도 한 권도 사지 못할 양피지로 만들어진 책이 가득했다. 다만 그 어떤 신상도, 제단도 없었다. 정말로 신전보다는 궁전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처음으로 혼자가 되어 내가 느낀 감정은 해방감이었다-방금 전에 스승을 잃은 제자가 느낄 감정으로는 부적절하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직 나만이 있는 공간. 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아무도 나를 단정짓지 않는다. 그때는 혼자 됨이야말로 참된 나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제서야 이름이 생각났다.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고유명사로 불리길 바랐지만 한 번도 나 스스로의 이름을 지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며칠을 고심해서 이름을 지었다. 어딘가의 책에서 찾은 코라라는 단어.
하지만 결국 내가 간과했던 것은 내가 이름을 무엇으로 짓던 간에 아무도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는다면 의미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름은 타인에게 불릴 때 의미를 가진다는 것. 결국에는 타인과 괴리되어 존재하는 ‘나’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이 되는가? 사회가, 타자가 없는 세상에서 주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스스로 코라라고 날 정의해봤자 무의미한, 소리 없는 외침에 불과하다는 허무감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지배했다.
한 그때쯤이었을까, 신전 밖에서 수풀을 헤치고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 것이.
한 손에는 등불을, 한 손에는 칼을-나는 적어도 익명의 방문자에게 내가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킬 작정이었다-들고 바깥으로 나섰다. 잿빛이 섞인 금발을 허리 너머까지 길게 늘어뜨린 소녀?-아니 젊은 여자?-그 언저리였다-가 눈앞에 있었다. 잘 먹은 듯 혈색이 좋고 피부가 보드라웠고 입은 청록색 드레스는 산길을 헤쳐오면서 군데군데 찢어졌음에도 딱 보기에 비싸 보였다.
쭉 찢어진 여우를 닮은 눈에 청회색 눈동자. 입가의 점을 보고 나는 그제서야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내가 마을을 나설 때에는 아직 어렸던 영주의 고명딸. 마을에서 유일하게 성이 있는 귀족 여자. 오르피아 소렌탈. 분명 우리는 말을 나눠 본 적이 없었음에도 그는 마치 오래된 연인을 대하는 듯이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내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해왔어, 친애하는 마녀.”
그리고 그의 입에서 그 다음으로 나온 말은 내가 절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나의 코라.”
그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서 있자, 오르피아 소렌탈이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하긴, 당신과 나는 지금 초면에 가깝지. 반가운 마음에 너무 친근하게 대해버렸네, 사과를 표할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위아래로 나풀거렸다. 나는 당황했다. 그가 왜 여기에 있지? 어떻게 온 거지? 영주의 사랑받는 외동딸일 그가 마을에서의 안화한 일상을 버리고? 마을에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귀족 여식인 그가 도망나와야 할 정도로?-그렇다면야 내게는 좋은 일이겠지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자 오르피아가 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꺼냈다.
“나의 방문이 그리 반갑지 않은가 봐, 안 그래?”
“……반가울 리가 있겠냐, 생각을 해 봐. 너는…….“
당연하게도 오르피아 소렌탈의 방문이, 아니 애초에 그의 존재 자체가 내게 반가울 리가 없었다. 일단 그의 방문이 나의 일상을 방해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아비, 영주는 나를 항상 병균 보듯 대했으니. 적어도 그가 나의 존재에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인간에게 내가 호감을 가질 리 없었다. 그의 핏줄들에 대해서도.
내가 마을에 있었을 때 오르피아는 꽤 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장아장 걷고 아버지의 품에 폭 안겨 다니며 귀여움을 받을 나이였지. 보통 그 나이의 어린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모방하기 마련이기에 나는 은연중에 그가 마을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상으로 성장하리라 생각했었다. 적어도 그가 다 자라서 나를 몇 년은 보며 가깝게 지낸 사람마냥 친근하게 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여긴 어떻게 온 거지? 평범한 방법으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여긴-“
”신전이지. 알아. 신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뭐, 신전의 양식이나 규모를 보아하니 꽤 영향력 있는 신의 것이었다고도 생각이 드네?“
”그걸 어떻게 아는데?“
”다 방법이 있지.“
오르피아 소렌탈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도망칠 곳이 필요했어. 얼마 전-일 년은 족히 넘었지만-에머릭 소렌탈이 죽었거든.“
생소한 남자의 이름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였더라, 들어본 것 같은데.
”그게 누구였지?“
”아, 잊어버렸어? 영주-그러니까 소렌탈 남작-말이야. 이제는 전 남작이지만. 나의 생물학적 부친.“
”아.“
영주는 내가 마을을 떠날 때에도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이였으니 죽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늦게 얻은 어린 막내딸을 끔찍이 아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르피아의 말에서는 제 아비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 전무해 보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생판 모르는 남을 대하는 것처럼 그는 제 아비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히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더 친근할 정도로, 그는 가족에 무관심해 보였다.
“잠깐, 여기 서서 이야기하기에도 불편한데. 나 들어가도 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칼이 있었고, 곱게 자란 귀족 영애인 그가 나를 해칠 생각을 품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설령 그러더라도 내가 지진 않을 것 같았고. 그는 나를 따라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오, 하는 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아늑하네. 내가 본 신전 중 제일. 신전보다는 여염집이나, 아니 그보다는 무슨 궁전 같은데.”
“신전을 또 본 적이 있어? 교회도 아니고?”
“책에서.”
그는 바닥에 깔린 카페트 위에 서더니 제가 움켜쥐고 있던 청록색 천 보따리-그 색깔을 보아하건대 드레스 치맛자락을 찢어 보따리로 쓴 것 같았다-의 매듭을 풀었다. 금화 몇 닢과 진주 목걸이, 금빛 머리핀과 팔찌 따위가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내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이게 다 뭐야……?”
“가문의 패물들과 재산을 좀 훔쳐왔어.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궁벽한 영지에 명목상의 남작위밖에 없는 시골 귀족 집안이니까, 변변찮지만. 여기 머무는 집세라고 생각해.”
“훔쳐왔다고? ……집세? 여기 머문다고?”
“그래. 차례차례 대답하자면, 첫째는, 나도 가문의 일원이기 때문에 내 재산이나 마찬가지니-정확히는 가져온 거지. 그리고 이건 집세야, 금붙이가 의미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나는 여기서 살 거야.”
그는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금붙이들을 발로 휙휙 쓸어 한구석으로 치워버리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긴 의자 위에 늘어지듯 걸터앉았다.
“당신도 앉지 그래?”
그는 제 옆의 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네 옆에?”
“응.”
나를 빤히 바라보길래,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곁에 앉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쓰다듬다가, 내가 싫어하리라 생각했는지-싫어했다-손을 거두었다. 그의 몸에서는 약간의 땀과 먼지와 장미 향유 냄새가 났다. 나는 잠시 그가 나를 왜 이렇게 대하는 걸까 고민하다가, 문득 들어오기 전까지 오르피아 소렌탈이 이곳을 방문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내고 말을 꺼냈다.
”그래서 영주가 죽은 뒤로 어떻게 되었길래 네가 이곳에 오게 된 거지?“
오르피아가 잊고 있었다는 듯 아, 하고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그가 죽은 이후로 좀 일이 있었어. 급사여서 유언이 없었거든. 일종의 권력 쟁탈전. 한심하지? 이런 아무것도 없는 시골 영지와 이름뿐인 작위를 위해서 가족을 죽이다니. 어차피 짧은 필멸의 인생, 부모도 죽어 없어진 이상 다시 얻을 수 없는 것이 형제일진대 그에 비하면 부도 명예도 의미없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게.“
”그 말은.“
”내 둘째 오라비가 첫째를 죽였어. 셋째도. 증거가 훤히 보이는 독살이었지. 왜 아무도 그걸 몰랐는지 모르겠어. 나는 막내고 여자니 경계할 필요가 없다 생각한 건지 살아남았고. 소렌탈 남작위는 자연스레 그의 것이 되었지. 그런데 있잖아, 별 것 아닌 권력에 미쳐 형제를 죽인 인간이 과연 유능하겠어? 영지 경영이란 걸 제대로 할 것 같아? 데메테르의 저주를 받은 에리식톤마냥 욕심을 채우느라 전전긍긍했지. 돈 나올 구석도 없는 시골을 어찌나 쥐어짰던지. 영지민들의 불만도 극에 달하고 성의 창고도 텅텅 비어갈 때쯤 그가 뭘 했는지 알아? 그 발상만은 높게 쳐줄 만했어. 산을 몇 개 넘으면 있는 부유한 영지의 귀족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지. 그가 몇 년 동안이나 신붓감을 구하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했거든. 지참금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신부대를 두둑히 챙겨준다고.”
“널 팔아 재산을 충당할 생각이었구나.”
오르피아가 조소했다.
“그래. 딱이었지? 내게는 환영할 일은 아니었어. 아내를 구한다는 소문이 몇 년이나 도는 이유가 뭐겠어? 아무 여자도 안 가서지. 그는 부인이 그 전에 네 명이나 있었거든. 모두 의문사였지만, 주목할 점은, 부인들의 시체에 하나같이 멍과 상처가 가득했다는 거야. 그런 이야기는 산을 몇 개 넘어 이 시골까지 들어올 정도로 유명했고, 오라비도 그 사실을 알았겠지. 나는 애초에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 목표가 있었거든.”
”무슨 목표?“
”어, 당신을 만나는 거?“
오르피아가 가식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웃기지도 않아서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몰아붙였다.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내게 말이지. 말이나 계속해. 결혼하기 싫어서 도망쳐온 거지?”
”진심이었는데-뭐, 그래. 그의 다섯 번째 아내가 되어 나머지 넷과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건 싫었어. 그보다 더욱 싫었던 건 오라비의 부를 위해 팔려간다는 사실이었고. 누구 마음대로 감히 내 운명을, 미래를 정해? 나는 고작 그런 걸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이런 시골 영지에서 시시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도 싫어. 내 인생은 내가 정해.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그는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눈에 담긴 확고한 눈빛은 나로 하여금 잠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런 그의 자신만만함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너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데?”
“사랑.”
“사랑?“
그는 당당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자명한 진리를 말하듯.
“나는 사랑을 할 거야.”
그리고는, 잠시 숨을 들이쉬더니,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로 내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마쳤다.
”코라, 당신과.”
“……미쳤니?”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저 얼굴이. 번드르르한 말이. 어떻게 저런 말을 그리 아무렇지 않은-아무렇지 않다기에는 그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내가 지칭하는 것은 그의 부끄러워하는 기색의 부재였으며-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가 내게 보이는 이유 모를 호의가. 나만이 아는 이름으로 나를 칭하며 거기에다 감히 뻔뻔하게 ‘나의’ 따위의 소유격을 붙이며. 지금도 내 손을 은근슬쩍 훑는 길고 잘 관리된 손가락이며.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지? 그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마을을 혼란에 빠트린 마녀라는 소문 따위가 다일 터인데, 어떻게 얼굴도 모르는 소문뿐인 허상을 사랑할 수 있는 거지? 그가 사랑하는 코라는 누구지? ......사랑이 도대체 뭐길래?
”미친 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걸.“
”날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잖아.“
”……본 적이 있어. 똑똑히 기억해! 마을에서 만났던 어린 당신을-비록 부친이 바로 눈을 가려버리는 바람에 순간뿐이었지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때 너 어린애였잖아. 기억한다고, 그걸?“
”네 살이었어. 그 정도면 다 기억할 나이지, 안 그래, 코라?“
”코라라는 이름은 어떻게 아는데?“
”당연히 알지. 당신이 스스로 지은 이름이라며. 누군가에게 그 이름으로 불리는 나날을 기다려왔지?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지만.”
“그 이름은 내가 마을을 떠나고 나서 지은 거야.”
오르피아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내 이름은 알면서 내가 마을에 있을 때 이름이 없었단 걸 몰라? 사랑한다면서?”
그가 처음으로 당혹한 낯을 보였다. 정말로 몰랐던 듯했다.
”……그건 봐줘. 나도 당신에 대해 모든 걸 알진 못하는걸……. 정말로. 하지만 이 사랑은 진심이야!“
또 헛소리나 늘어놓을 것이 뻔했으므로 나는 추궁하기를 단념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화제를 돌려주었다.
”그래서 나랑 사귀기라도 하려고?“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렇게 해 줄 거야?“
”아니, 일단 넌 여자고.“
”여자는 싫어? 아닐 텐데.“
”……만나 본 적도 없고.“
”이제 만났지.“
”너무 어려. 너 몇 살이야? 내가 마을에 있을 땐 완전히 코흘리개였는데.“
오르피아가 눈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올해 열일곱.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해! 결혼할 나이인걸?“
……열일곱? 성숙해 보이는 얼굴과 말투 치곤 목소리가 묘하게 앳되어서 어리겠거니 싶었는데 생각보다 더 어렸다.
”정신 나갔어? 내가 몇 살인진 알고?“
”……스물 여섯. 그렇지만 아홉 살 차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냐! 오라비가 날 결혼시키려 했던 그 남작도 서른 일곱인가 여덟이었는데, 당신 정도면 젊지! ……혹시 또래 취향이야? 아니면 연상?”
더 일찍 태어났어야 했나, 하고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성인이 되어서 와.”
“당신이 생각하는 성인은 몇 살인데?”
“열여덟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자 그가 눈을 반짝이며 내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열여덟? 약속했어. 그때가 되면-”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지금은 안 된단 거야. 죽어도.“
설마 죽이려 들진 않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그는 뭐, 그래. 당신도 그때가 되면 마음이 바뀔 거야. 하고 웃으며 입술을 매만졌다.
”그래서 말야, 머물게는 해 줄 거지? 난 갈 곳이 없어. 성에서 유모와 시녀들 손에 둘러싸여 곱게 자란 젊은 귀족 아가씨가 혼자 뭘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렇다고 돌아간다면 난 팔려가듯이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남편에게 맞아 죽겠지. 자비가 있다면 날 여기 머물게 해줘.“
나는 오르피아를 쭉 훑어보았다. 그는 유해해 보이지는 않았다. 평생 노동 한 번 해보지 않았을 몸은 가녀리기 짝이 없었고 몸에서는 산을 뛰어오느라 땀을 흘렸음에도 여전히 고운 향유 냄새가 났다. 고상한 말투에-다소 호들갑을 떨긴 하지만-사람에게 해를 가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 본 순진한 귀족 아가씨. 그 정도라면 만약의 사태가 온다 해도 내가 우위를 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판단 끝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할게, 나의-“
”진짜 제대로 머물고 싶다면 나의 코라라는 말은 쓰지 마, 오르피아 소렌탈.“
그가 쳇 하고 혀를 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르피아를 두고 떠났다. 수상하고-약간은 정신나가 보이는 방문자에게-아니, 이제는 동거인일까?-짐을 정리하는 걸 도울 정도의 호의를 내보이고 싶진 않았다.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손으로 정성스레 필사된 고대의 신화 이야기. 연인을 구하기 위해 리라 하나만을 들고 저승으로 걸어들어간 음악가.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음악가는 금기를 어겨 저승과 이승의 문턱에서 애인을 다시 영영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져 죽는다. 바보같게도. 나라면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사람 하나 죽었다고 제 발로 저승에 기어들어가지 않았겠지. ......애초에 난 그런 열정적인 사랑을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목소리가 들렸다. 섬칫해서 허리띠에 묶인 단검을 찾아 허리춤을 더듬다가 오르피아 소렌탈의 존재를 기억해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는 아까 입었던 군데군데 찢어진 드레스 대신 말끔한 청록색 무명 드레스로 갈아입은 채였다. 나에게는 맞는 그 옷이 조금 작은 탓인지 치맛단 밑으로 발목이 보였다.
“옷들이 당신에게 맞춰져 있는 것 같아. 내겐 조금 작던걸. 그래도 아까 입던 건 찢어졌으니 갈아입을 수밖에 없어서. 평민들이 입을 만한 옷은 처음 입어봐서 신선한 기분이야. 잘 어울려?”
“어, 그래. 잘 어울려. 청록빛 옷은 그것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색을 특별히 좋아하나 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해. 제일 좋아하는 색은 보라색이지만.“
그렇게 말하며 오르피아는 내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내 눈동자를 이야기하는 건가? 나는 무시하는 길을 택했다. 침묵이 이어지더니 오르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슬슬 허기가 지는데. 식사를 하지도 못하고 뛰쳐나왔거든.”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을 때였던가. 기묘하게도 신전을 둘러싼 작은 숲은 항상 달빛 하나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밤을 유지했다. 신전의 한구석에는 요즘 시대의 물건치곤 어울리지 않게 고대의 신전에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기계식 시계 한 대가 있었는데-사실, 내가 알기론 고대엔 기계식 시계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지만-그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을 통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오르피아가 올 때 일곱 시를 넘기고 있었던가. 그제서야 배에서 소리가 나는 듯했다. 나도 식사를 하지 않았던 참이었으니.
“식사는 보통 어떻게 해? 이 주변에 먹을 걸 조달할 출처라곤 보이지 않는데.”
”기다려, 먹을 걸 가지고 와서……이곳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게.“
창고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음식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과일과 야채, 흰 빵과 치즈와 햄, 포도주. 먹거리는 누군가 관리하기라도 하는 듯 상하거나 썩는 일이 한 번도 없이 항상 넉넉히 채워져 있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 수상하다 생각해 며칠이나 굶은 후 허기에 굴복하고 한 입 베어물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단 걸 알고 먹기 시작했던가. 나는 석류 하나와 사과 두 알, 빵 한 덩이와 치즈 조금을 바구니에 담아 오르피아가 기다리고 있는 대리석 테이블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식사의 질이 높네. 치즈나 빵 같은 건 직접 만든 거야? 밀이나 소젖을 구할 곳이 있어 보이진 않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든 게 아냐. 그냥, 저절로 생겨나 있어. 시간이 지나면 채워지고. 누가 이걸 하는진 본 적 없지만, 내가 이것들을 먹으면서 지금껏 멀쩡했으니 먹어도 괜찮을 거야.”
오르피아가 그 말을 듣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음식을 채워주는 누군가가 있다고.”
“그래.”
“여기 더 사는 이가 있어?”
“아니, 음-모르겠어.”
여기 살기 시작한 처음에는 분명히 누군가가 숨어서 날 지켜볼 거라 생각하고 신전을 이 잡듯이 몇 번이나 뒤졌다. 하지만 물건들이 저절로 채워지고 신전이 먼지 하나 없이 관리된다는 것을 빼면 인기척도 하나 없었고 사람이 사는 흔적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모든 것을 관리하는 이가 누군지 찾는 것을 포기하고 그가 베푸는 호의에 눌러앉기 시작했다. 매 순간 누군가가 항상 내 곁에 있다는 자각은 그리 유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머리에서 지워버리는 편을 택했다.
“당신도 나름대로 찾아봤겠지. 의심이 많은 성격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찾지 못했단 거야? 여기서 몇 년을-당신이 스물여섯이니, 십 년도 넘게 있었잖아. 그동안이나 못 찾았다고?”
“중간에 포기하긴 했지만, 맞아.”
“당신은 짐작가는 것이 있어?”
오르피아가 석류를 반으로 갈라 새빨간 알갱이 서너 알을 꺼내 손으로 굴리면서 말했다. 그는 내가 봤던 짧은 시간들 중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인간은 아니겠지. 신전이니……“
신이려나. 거기까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줄곧 생각해왔던 가능성이지만 오르피아의 입장에서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것이 뻔했다. 특히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독실한 신자였으니. 나야 그 남자를 매일같이 봐서 신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망상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란 보장이 없었다. 내가 잠시 망설이니 그가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여기의 신일 거라고?”
”……그래, 말도 안 되지만.“
”왜 말이 안 돼? 제법 가능성이 있는데. 다만 신이란 것들은 태생부터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인데, 어째서 모습을 감추고 님프들마냥 묵묵하게 인간의 시중드는 노릇이나 하는지는 알 수 없는 까닭이지만.“
그는 그 말을 하며 석류 알갱이 하나를 입에 넣었다. 나는 그가 신들이 태생부터 오만한 족속들이란 말을 어째서 마치 만나본 것처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마치 신을 만나본 것처럼 말하네. 애초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나 봐?”
“없을 이유도 없지? ……아무튼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게 확실해. 지금까지 당신이 무사한 이상 당신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아 보이지만, 글쎄, 코라. 너무 그런 존재들을 신뢰하진 마. 그나저나, 안 먹어?“
“아.”
그 말에 나는 빵을 조금 떼어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말없는 식사는 몇 분 동안 지속되었다. 내가 손바닥 반만한 빵 한 덩이를 다 먹고 손을 털어 부스러기를 털어내자 오르피아가 내 입에 석류 알갱이를 집어넣었다.
“우읍-”
“입이 짧나 봐. 그만큼만 먹고.”
“……입에 뭐 넣지 마! ……많이 움직이지 않으니 굳이 과식할 이유가 없지. 원래 많이 먹는 편도 아닌지라.“
”그래도 살이 좀 더 붙을 필요가 있어. 건강한 몸도 아니잖아?“
”그걸 어떻게-“
”……안색이 창백한 게 딱 봐도 뻔해. 아, 맞다. 당신 그거 알아?“
오르피아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뭐가?“
내가 묻자 그는 여우처럼 씨익 웃었다.
”당신이 마을에서 지금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궁금했던 적 없어?”
“…….”
예전의 일들은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내가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기자 오르피아가 내 눈치를 보더니 “……하지 말까?” 하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오르피아 소렌탈은 내가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었고 나는 십몇 년 만의 대화를 굳이 여기서 끊고 싶지는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흥미가 동하는 것도 아주 약간은 사실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다면야. 코라, 내 둘째 오라비가, 남작이 된 그 치가 당신을 이용하고 있단 걸 알아?“
”이용한다고?“
“그가 가산을 다 탕진했다고 했잖아. 영지민들에게 걷는 세금도 올려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거든. 불만을 잠재우는 데는 공공의 적을 내세워 외부로 증오의 화살을 돌리는 편이 효과적인 거, 당신도 알지? 내겐 당신이 그냥 시시한 여자애고 어차피 죽었을 거라 코웃음을 치며 말해놓고선, 뒤로는 제 사람들을 시켜 마녀의 산-당신이 도망친 산을 사람들은 그렇게 불러-에 숨은 마녀가 살아 마을을 지켜보고 있다고. 산에 겁도 없이 올라갔다가 인기척을 느낀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 소문도 뿌리고, 마을에 고양이 시체 같은 걸 걸어놓고.“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네.“
정말로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유희가 정말로 빛을 발했구나. 나는 정말로 마녀가 되어버렸구나. 이름을, 기억됨을 갈구했던 아이는 스스로 마녀를 지칭하고 참으로 그렇게 되어 제 자신을 기억시키는 데 실패했다. 아니, 그 마을에서 ‘나’가 존재하기는 했던가. 옐레나의 조수. 흰 머리의 마녀. ‘나’를, 정말로 마녀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코라‘를? 마녀는 이제는 내 손을 떠난, 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거대한 꼭두각시 인형-그것을 조종하는 실 끝에는 오르피아 소렌탈의 둘째 오라비가 있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르피아가 날 사랑하기는 하나? 내가 마녀라는 소문을 듣고도? 그렇다면 그는 왜?
“넌 내가 마녀라고 믿지 않았나 봐? 둘째 오빠 때문에?”
“당신이 마녀이길 원한다면 나 역시 당신을 마녀라고 했겠지. 하지만 당신은 마녀보다 코라이길 원하잖아. 그렇다면 내게 당신은 코라야.“
”…….“
대체 내가 거기서 분노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사람 좋은 낯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무슨 소리인지 모를 입발린 말을 지껄이는 오르피아 소렌탈 때문에? 나를 이해하는 척 하는 언행이 역겨워서?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그의 입에서 나온 코라라는 이름 때문에?
“되도 않는 소리하지 마-네가 ‘코라’에 대해 빌어먹을 뭘 안다고…….”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코라?”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나를 제대로 본 적도 없잖아! 너도 그런 인간들 중 하나겠지-만들어진 나를 바라보며 제 멋대로 지껄여대는, 제 환상에 나를 끼워맞추는 얼간이들. 기껏해야 원치 않는 결혼에서 공주를 구해주는 왕자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읽은 거겠지. 아니, 도망치려고 온 것은 맞아? 날 사랑한다고? 둘러대려고 머릿속에서 되는 대로 찌끄리며 책에서나 본 말을 늘어놓는 것 아냐?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가 다 그렇지. 나에 대해서 뭘 아는데? 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 넌 나에 대해 몰라-아무것도!“
오르피아는 말없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나는 문득 내가 아주 뜬금없는 상황에서 난데없이 화를 냈음을 깨달았다. 부끄러움이 들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누군가에게 분노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오르피아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더니 잠시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확실히 난 지금의 당신을 모를지도. 하지만 난 지금이 아닌 언젠가의 코라를 알아. 당신은 모르겠지만.”
“……뭐?”
“당신을 멋대로 단정짓는 게 아냐. 난 단지-단지 그때의 당신처럼 지금의 당신을 사랑해. 알고 싶어. 지금의 코라도.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멍청하게 서 있자, 그는 날 보고 옅게 웃었다.
“숨 가라앉히고 앉아.”
그 말은 어린아이를 어르는 어투였다. 이상하게 모욕적인 기분이 아니었다-그는 정말로 진짜 어른 같아서. 나보다 나이 든, 의지할 수 있는 어른, 어쩌면 ‘그 남자’ 같아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승이 불타버린 열넷의 그날에 멈춰버린 나보다는 눈앞의 그가 훨씬 어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니, 그가 정말로 열일곱은 맞나?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그 이상의 느낌이.
나는 쭈뼛쭈뼛 의자에 다시 앉았다. 오르피아는 내게 물잔을 건네주었다. 내가 그것을 다 마시고 심호흡을 몇 번 하기까지 기다린 뒤 그는 자리를 정리했다.
“다 먹었지? 치울게. 당신에게 줄 게 생각났어.”
“……줄 것?”
이렇게 많은 질문을 던진 날은 처음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음식 바구니를 한구석으로 치워놓았다. 그리고는 허리에 묶인 리본을 풀어 조그만 비단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옷을 갈아입기 전에도 차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은반지를 꺼냈다. 반지 한가운데는 동그랗게 세공된 회색과 보라색의 중간쯤의 빛을 내는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보석에 문외한인 나는 모르는 종류였지만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지야?”
“아끼는 거야. 특별히 세공사를 불러 만들었지. 당신의 눈동자와 닮았지? 생일 선물을 주고 싶었어. 코라, 생일 축하해. 늦었지만.”
뭐, 감동적인 말이었다. 다만…….
“오늘 며칠인지 알아?”
“1479년 8월 24일.”
“내 생일은 언제인지 알아?”
“……5월 29일.”
오늘은 내 생일으로부터 거의 세 달이나 뒤란 사실을 빼면.
”아는데 굳이 지금?”
“그래도-처음 만난 해의 생일을 챙기고 싶었어!”
오르피아가 얼굴을 붉히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반지를 직접 끼워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며 손을 달라고 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는 손을 잡고 반지를 끼우려다 내 중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고 질문을 던졌다.
“이건 뭐야?”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은색 철로 만들어진 금속 반지. 깃털 날개 한 쌍이 손가락을 감싸는 형태였는데, 이 반지는 아주 오래 전에 ‘그 남자’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죽음의 신, 타나토스.
그는 항상 내 주변을 맴돌았다. 검은 수의를 입고 긴 낫을 들고 우중충한 인상으로. 열병을 앓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내 이마를 가만히 쓸어주고, 악몽을 꾼 날이면 내 침대에 같이 누워 날 안아주고, 그런 식으로 부모에게 방치당한 날 돌보곤 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무녀리 같은 아이였던 내게 말을 가르쳐주고 그 다음엔 걷는 것을, 읽고 쓰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어릴 적 나는 차라리 그가 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일하게 내게 다정한 존재였으니. 웃기는 일이지, 나를 사랑해 준 단 하나의 존재가 죽음이라니. 사실은 그와 더 오래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정말로 죽어도 좋았다.
한때는 용기를 내 정말로 물은 적이 있었다. 내게 이름을 지어주고 아버지가 되어달라고. 그는 복잡한 얼굴을 하다가 결국 거절로 답했다. 어렸을 때는 그 때문에 그가 날 단지 동정하는 것 뿐이라고, 내가 인간이라-작고 약한 인간이라 날 더, 단지 가끔씩 챙겨 주는 아이 이상으로 가까이 두고 싶어하지 않는 줄 알았다. 지금은……잘 모르겠다. 일단 그렇게 믿고 싶진 않다.
‘미안하다, 널 가족으로 삼거나 네게 이름을 줄 순 없어. 우리가 지금 그러한 관계로 발전한다면 때가 맞지 않게 될 거다. 대신 이 반지를 주지. 내 어머니께서 내가 성장을 끝마친 날 내게 선물로 주신 반지다. 내 것과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고-소중한 이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지. 내가 방금 말한 두 가지를 제외하고 네가 이 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어떤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 맹세하지.’
그때 내가 무어라 말했더라. 때가 맞지 않는다는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핑계인 거 안다고. 소원 따위 필요없다고 울었다. 나를 여기서 꺼내달라고. 나를 구해달라고. 그는 내게 반지만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며 그를 불러도. 덕분에 더 미친 사람 취급받았다. 소원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를 만날 유일한 기회를 아무렇게나 날리고 싶진 않았다. 소원을 이루어주고 그가 다시 사라질 것 같았다.
“코라?”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오르피아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 반지는 누가 준 거야?”
오르피아가 날개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무어라 말해야 할까. 죽음의 신이 주었다고? 그가 믿을까-죽음의 신에게 반지를 받았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나는 적당한 대답을 말했다.
“받았어. 음……. 소중한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
그가 질투하거나 적어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흥미로워하는 기색이었다.
타나토스가 사람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는 내게 소중했다. 그는 내게 유일한 도피처이자 안주할 곳이었다. 그리고, 뭐, 그가 사신이라는 것을 고려하건대 나의 수많은 무례한 말에 분노해 나를 데려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봐주고 있었다. 사실은 아예 그에게 나를 데려가달라고, 비탄이나 고통에 이기지 못하고 애원한 적도 있었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껴안으면서 자신이 날 데려갈 일은 절대로 없다고 말했었지. ……그래. 어떤 식으로든, 그 정도 관계는 아니었던 거겠지. 그렇지만 오르피아 앞에서 내가 나이가 차자 그에게 버려졌단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신에게 사랑받았다고 차라리 허풍을 치고 싶었다.
“음, 소중한 사람. 애인은 아니고……. 뭐랄까, 아빠 같은…….”
그러자 오르피아가 풉, 하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웃겨?”
“아니, 미안……. 조롱하려는 의도는 없었어. 그저 뭔가가 생각나서. 그 반지, 인간이 아닌 누군가가 준 거지?”
오르피아는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황했다. 어떻게 알았지?
“왜 그리 생각하는데?”
“비밀이야. 나도 방법이 있지. 나는 당신이 신이나, 요정이나, 악마나, 뭐 그런 존재에게서 선물을 받았다고 당신을 미친 사람이나 마녀로 몰아가지 않아. 그냥 말해도 돼.”
정말 말해도 될까? 그렇지만 안 될 것도 없었다. 사실 내심 그때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타나토스라고 알아?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 그가 내게 반지를 선물했어. 어릴 적부터 모종의 연이 있었거든. 어머니에게서 받았다고 했어. 그의 어머니의 이름이 뭐였더라…….“
”닉스. 밤의 신.“
”알아?“
“응. 고전은 귀족 영애의 소양인걸. 타나토스……. 그래, 역시 그였구나. 그밖에 없지. 그와 어릴 때 만났던 거야?”
“맞아. 왜인진 모르겠지만 날 챙겨주었지……. 아버지처럼. 정작 진짜 가족이 되기는 거부했지만.”
“글쎄, 그럴 수도 있지. 신들은 복잡한 족속이니까.”
오르피아는 그렇게 말하며 반지를 낀 손, 닉스가 타나토스에게 준 반지가 있는 중지 옆에 자신의 반지를 끼웠다.
“타나토스의 반지를 빼라곤 안 할 테니 이것도 껴주면 안 돼? 당신이 내 반지를 껴 줬으면 해서. 맹세하건대 저주하거나 하지는 않았어.”
“……안 될 건 없지.”
나는 손을 들어 반지를 바라보았다. 반지 두 개가 신전의 횃불의 빛을 받아 번갈아 반짝였다.
“그나저나,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네가 질투할 줄 알았는데.”
“오, 날 신경쓰는 거야?”
“그럴 리가.”
“그래, 농담이었어. 뭐, 소중한 사람이 연인밖에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가 타나토스의 반지를 한 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연인이었다면 약지에 꼈겠지. 약지는 비어 있었으니까. 반지가 당신 약지에 딱 맞아서 다행이야.”
“그나저나, 오르피아.”
“피아라고 불러줘.”
“소렌탈 영애.”
“……미안, 오르피아로 만족할게. 그래서?”
“넌 신이 존재한다는 걸 믿어? 내가 타나토스를 언급했을 때 바로 납득한 것도, ‘신이란 족속들’ 같은 말을 쓰는 것도 그렇고. 너도 만난 거야?”
오르피아는 나를 바라보더니 되물었다.
“당신도 자연스레 믿는 눈치였는데? 타나토스가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란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그야…….”
신이 없다고 믿었다-처음에는 나에게 이런 운명을 준 누군가가 살아 있을 리 없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타나토스는 실재했다. 그는 내게 자신이 신이라는 근거 몇 가지를 보여주었다. 금빛 피 같은 것들. 손짓만으로 바닥을 기어다니던 시궁쥐를 잿더미로 만든다던가 마을의 늙은이들의 사망을 예견하는, 죽음과 관련된 권능들. 주어진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타나토스가 내게 증명했으니까. 그런 전지전능한 존재는 신이라고밖에 할 수 없더라고. 내가 거부한들 그것이 현실이라면 받아들여야지.”
“허탈한 어투인데.”
“그래, 신 같은 건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런 존재들이 이 세상을 이리 부조리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더 잔인하니까.”
“구원을 바란 적은 없어?”
“한때는 타나토스가 나를 데려가주기를 바랐지.”
“……어떤 의미야, 그건?”
“알아서 상상해. 하지만, 구원은 스스로 하는 거더라고.”
오르피아가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코라? 진실을 알려줄까?”
“진실?”
“세상에 진실한 신은 없다는 것을. 신 비슷한 건 있겠지. 뭐랄까? 세상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힘 같은 거.”
“……힘이라고?”
“응. 일종의 법칙 같은 거야. 정해진 수명이나 능력 같은 거. 왜, 유능한 사람이 일찍 죽고 무능하고 악한 사람이 부귀를 누리며 오래 사는 걸 보면서 왜 저렇게 정해졌을까 생각한 적 없어? 법칙이 정한 거야.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걸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순 없어. 선도 악도 인간이 만든 거니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힘의 본질을 완벽하게 판단내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그리고 신들은 인간들의 피조물 같은 거야. 타나토스가 안 말해줬어? 그들이 모두 인간이 법칙을 보고 만들어낸 모방품이라고?”
“어……뭐?”
오르피아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멍하니 얼어 있다가 그의 질문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법칙. 그걸 인간들이 제멋대로 해석한 결과물이 신이야. 인격적인 존재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믿음에 의해 탄생한 피조물. 믿음이 신을 만들어내는 셈이지. 코라, 그것도 모르고 신을 숭배하는 인간들이, 자신이 인간들의 지배자라도 되는 양 행세하는 신들이 우습지 않아? 아주 멍청하기 짝이 없지.“
……이게 다 무슨 얘기지? 오르피아는 저걸 어떻게 아는-혹은 어떻게 다 지어낸 거고?
“-그러니 이 세계는 태초부터 부조리로 가득 차 있어, 코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없는 현상. 그게 부조리 잖아? 거기에 놀아나는 신도 인간도-”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
“으음, 세상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깊게 생각해 보면 깨닫게 되는 법이야. 저절로, 어느 날.
……코라, 슬슬 목욕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이었으나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복잡해져서 씻어내고 싶었다.
내가 먼저 씻고 오르피아가 씻은 후 우리는 하얀 튜닉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오르피아를 내가 쓰던 침대에서 재우고 침대가 하나였기에 나는 소파에서 자겠다 말했다. 사실은 그의 곁에서 밤을 샜다. 그를 감시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오르피아가 이야기한 법칙과 신에 대한 생각이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타나토스가 말했었지-‘잊혀 사라진’ 형제들에 대해. 그 말은 그들은 죽었다는 건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신을 창조한다면 망각은 신을 죽이는 건가.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없는 인생. 외부적인 법칙 따위에 지배당하는 인생. 그것이 세상의 본질인가? 그렇다면 나는-나의 존재는-
“코라.”
흠칫했다. 의자에 앉은 채로 깜깜한 밑을 내려다보니 희미하게 내 발목을 붙잡은 오르피아가 보였다.
“놀랐잖아-뭐하는 짓이야!”
내가 소리를 지르자 오르피아가 조용히 하라는 듯 입에 검지손가락을 올렸다.
“조용히. 인기척이 느껴져.”
“뭐!? 침입자가-”
“그건 아냐. 따라와.”
오르피아가 내 손목을 잡고 길을 이끌었다. 가녀린 체구에 걸맞지 않게 힘이 상당했다. 불을 모두 꺼트렸는데도 오르피아는 훤히 앞이 보이는 양 잘도 암흑을 헤쳐나갔다.
“잘 들어봐.”
오르피아의 말대로 귀를 기울이니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토독, 토도독.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갑자기 오르피아가 내 손을 놓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허공으로 달려들었다.
쿠당탕, 하고 두 사람이 뒤엉켜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불을 밝히고 너의 정체를 말해라, 미지의 신이여.”
“-답지 않게 늙은이같은 말투를 쓰는구나, 오르피아 소렌탈.”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확 밝아졌다. 신전의 횃불들에 불이 붙었다. 오르피아가 조그만 소년 위에 올라타 있었다.
소년은 예닐곱 살쯤 되어 보였는데, 검은 긴 망토에 똑같이 검은 히마티온을 입었다. 갈까마귀 같은 빛깔의 머리카락은 길게 하나로 땋았고 굽은 뿔이 달린 초식동물의 두개골을 뒤집어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머리뼈 가면 사이로 살짝 보이는 황금빛 눈이 포식자처럼 빛났다.
그리고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인간이 신을 제압하려 하다니, 어리석어.”
소년이 오르피아의 팔을 뒤로 꺾어 제압하고선 일어났다. 오르피아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고, 나는 달려나가려고 발을 앞으로 딛었으나 어째서인지 내 발은 들어올린 그 상태로 움직이질 않았다.
“너, 뭘 한…….”
“이거 놔!”
“해칠 생각은 없어, 소렌탈. 네가 날 해치지 않는다면 애초에 먼저 폭력을 쓴 건 너였고 말이지?”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넌 신이잖아.”
“널 해칠 힘도 없는 하찮은 신이란다.”
“못 믿어.”
“스틱스에라도 맹세하리?”
“그 강은 이미 말라버렸잖아, 이제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을!”
잠깐의 침묵 끝에 소년이 입을 열었다.
“네가 스틱스가 말라버린 걸 어떻게 아니?”
그는 내가 가졌던 의문을 정확히 짚어주고 있었다. 스틱스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 강이 말라버렸다는 사실 두 가지는 차치하고, 정말로 오르피아가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스틱스가 말라버렸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시대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당연하겠지. 진짜로 이거 놔!“
”......그래.”
소년이 오르피아를 풀어주자 오르피아가 잽싸게 일어나 내 앞을 막아섰다. 그는 나를 보호하려는 듯이 팔을 들어 나를 가리고 있었다. 정말로 왜?
“코라. 칼 있어?”
그가 속삭였다. 항상 작은 칼을 허리춤에 지니고 다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게 신-혹은 적어도 인간 외의 존재-앞에서 도움이 되나?
“있지만 그게 쟤한테 먹히겠어?”
“다 들린단다, 얘들아. 코라의 말대로 소용없으니 칼은 내려놓아 줄래?”
내가 칼을 다시 허리춤의 칼집에 넣자, 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질문이 있다면 해도 돼.”
오르피아가 곧바로 물었다.
”넌 누구지? 이름을 대.“
”난 이름이 없어. 이름조차 잊힌, 기록되지 않은 고대 헬라스의 하급 신이지. 다른 신에게 종속되어 신격조차 희미한. 나는 모로스의 하위 신이었어, 그를 섬기는. ……아나?”
“……모로스라고.”
오르피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리……모로스가 살아 있어?”
거의 절박한 어조였다. 소년이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나도 몰라. 지상에서 목격되었다는 풍문이 돌기는 했는데 그조차도 사라진 지 몇백 년은 되어서.”
모로스. 처음 듣는 이름은 아니었다. 옐레나가 젊을 적에 머물렀다는 사교도 집단이 모시던 신. 가장 낮은 자들의 수호자이자 번제를 바치면 은총을 내려준다는. 이 신전도, 내가 스승을 번제로 바치고 들어온 곳이었지. 그제서야 생각났다.
“모로스라면 내 스승이 섬겼다던 그-”
“아, 옐레나라는 이름이었나? 알지. 도망자.”
“교단?”
오르피아가 묻자 내가 설명했다.
“모로스를 주신으로 섬기는……사이비 같은 거.”
“사이비라니, ......맞기야 하지만,”
“그렇다면 모로스도 살아 있을 수 있단 거네? 그를 모시는 이들이-비록 사이비라도-있었다면?”
“넌 그가 죽었단 것을 어떻게 알고, 왜 그에 대해 그렇게 절박하게 말해?”
내가 묻자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유달리 창백했다.
”……미안.“
알려줄 수 없다는 신호. 나는 더 캐묻기를 때려치고 소년을 불렀다.
”그 뭐냐……뼈대가리.“
”나? 이거 염소 두개골이란다, 아가야. 그냥 뼈대가리가 아니고.“
”그래, 염소대가리. 모로스가 무슨 신이야? 죽었다고?”
“몰라?”
오르피아가 즉각적으로 물었다. 소년 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소렌탈에게 설명해달라고 해.”
오르피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신이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좀 길어. 이따 자리를 만들어서 이야기해줄게. 나도 질문 하나 해도 될까, 소렌탈?“
”그러던지.“
”날 어떻게 알아챘어? 코라는 12년 동안 줄곧 몰랐는데.“
”……너 나랑 같이 있었어?“
내가 따져 묻자 소년 신이 대답했다.
”이 신전을 누가 관리한다고 생각했니? 생필품을 채우고, 신전을 청소하는 것과 같은 잡일들. 전부 내가 했단다. 안심하렴, 코라. 난 정말로 그것만 했어. 네가 눈치가 없었던 것도 아냐-인간이 신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허접한 속임수던걸-코라가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고? 발소리도, 그림자도 보였어.”
“야, 너……”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거야. 분명 인간은 모르도록 모습을 감췄는데?”
“네가 하급 신 따위라 어설펐나 보지.”
뼈-염소의-가면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 신이 얼굴을 구기는 게 보이는 듯했다.
“그래, 하나 더. 왜 날 신이라고 짐작했니?”
“뼈 가면이나 쓰고 다니고, 모습 감추고, 그런 것들을 하는 족속이 신 말고 더 있어?”
“뭐, 난 신이 맞으니. 그래, 그렇다고 치자꾸나.”
“이 신전은 네 거야?”
내가 묻자 소년 신이 답했다.
“아니, 모로스의 것. 그가 사라지고 방문자도 발길을 끊고 나선 내가 줄곧 관리했단다. 너희 둘을 받아들여준 이도 나야. 아마 모로스 본인이었다면 너는 번제를 바쳤을 때 죽었겠지. 그게 모로스의 은총이니. 근데 난, ……모든 하인들이 그들의 주인과 생각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차피 아무도 없고 외로운 참에, 동거인이나 들일 생각이었어. 오르피아는 널 찾길래 들여보내줬고.”
“그렇게 아무나 들여보내줘도-”
“안심해, 오르피아는 네게 무해하단다.”
“......내가 죽을 뻔 했단 건 뭔 말이야? 그가 구세주라면서?”
“당신 몰라? 그는 필연적인 죽음과 파멸의 신이야. 그의 은총은 고통없는 죽음이고.”
“……뭐?”
“그를 숭배하는 인간들은 다 구제할 길 없는 빈민이거나 장애자거나 병자, 그런 이들이야. 당신 정말 모로스에 대해 모른다고? 당신 스승이 도망자였다면서?“
몰랐다. 옐레나는 자신이 젊을 적 의탁했다던 교단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다 돌아버렸다는 소리뿐이었다.
”간단히 설명할게, 코라.“
오르피아가 말하고선 소년 신에게 불을 켜라고 지시했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불을 켜 주었고, 오르피아는 나를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리더니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으음, 모로스 교단에는 다른 창세신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신화가 있어. 그들은 닉스, 밤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지. 외로움을 타던 밤은 어느 날 자신의 반려로 어둠을 만들어냈고 그들이 관계해 낮과 빛이 생겼어. 그러자 낮과 밤의 순환을 상징하는 시간과 필연의 신이 탄생했고, 그들이 사랑을 나누자 실체가 있는 공간인 하늘과 땅이 탄생했어. 그 후 하늘과 땅의 교합으로 땅이 자식들을 낳으면서 세상이 완전해졌고.”
“그게 모로스와 무슨 상관인데?”
“들어봐, 땅이 낳은 것들 중에는 인간도 있었어. 인간들은 불로와 불사를 누리며 번성했지. 하지만 그들은 곧 오만해지고 세계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어. 밤이 오면 어둠 때문에 세상을 즐길 수 없으니, 낮만 존재한다면 얼마나 완벽한 세상이겠어? 그래서 인간들은 밤을 끌어내릴 계획을 세웠지만 곧 들통났어. 분노한 밤은 혼자서 파멸을 낳았어. 그게 모로스야. 인간들에게 내려진 벌, 필연적인 끝. 그때부터 인간들은 죽게 된 거야.”
“아니, 그러니까-”
“계속 들어. 밤은 분노에 못 이겨 끊임없이 자식들을 낳았어. 죽음이나 고통이나 불화 같은 아이들. 결국 땅이 밤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 몸을 떼어서 세상을 다스릴 열두 티탄을 만들었지만, 알잖아? 크로노스가 자기 아들을 잡아먹은 거. 결국 티탄과 티탄의 자식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얘기.
크로노스의 막내 제우스는 자신의 조모 땅에게 크로노스를 이길 방법을 물어왔고 대지는 만물의 어머니인 밤에게 가 보라고 조언했지. 밤은 제우스에게 모로스를 보냈고, 모로스가 크로노스를 파멸시킬 방법을 예언하면서 제우스는 이겼어.”
“-아니, 이게 뭔 상관이고, 그럼 모로스는 왜 죽었단 거야? 모로스 덕에 제우스가 이겼다며.”
”그건……“
오르피아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소년 신이 끼어들었다.
“내가 대신 얘기할게. 여러 해 이후로 제우스는 밤과 밤의 자식들, 그 중에서도 모로스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단다-그가 자신의 파멸도 예언할까 봐. 그래서 그는 정말로 모로스를 불러 자신의 파멸을 봤냐고 물었어. 어리석게도. 그리고 모로스는 이렇게 답했지-
-그대들은 전부 인간들의 손에서 놀아나는 조잡한 꼭두각시에 불과할지니. 인간들은 새로운 꼭두각시를 찾아내리라. 남자 없이 여자의 홑몸에서 태어난 예언자가 올림포스의 화톳불을 꺼트리리라. 그때가 되면 수많은 신들이 이름을 잃고 재와 먼지로 돌아가리라.
제우스는 눈앞의 모로스를 보고, 문득 깨달았지. 밤이 모로스를 홑몸으로 낳았고, 모로스는 예언을 할 수 있단 사실을. 그래서 그는 평소의 그와 달리 매우 충동적인 행동을 했지. 오르피아? 맞혀 보련?”
”못해……“
”......그는 그 자리에서 모로스에게 벼락을 내리꽂았단다. 모로스는 불타 죽고 그 자리에는 잿더미만 남았지. 밤이 한때 모로스였던 잿더미를 어그러쥐고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는 것은 몰라도 될 사실이고, 그 다음부터 제우스의 통제광적인 기질이 유달리 강해졌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하다못해 제 부인이 혼자 낳은 아들, 아레스마저 견제했다는 것도! 하지만 바보같은 헛수고였지, 코라! 올림포스의 화톳불을 꺼트린 예언자가 누구겠니?”
“……예수 그리스도. 동정녀 마리아가 낳은.”
대답한 것은 뜻밖에도 오르피아였다.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이. 마치 뭔 예수가 가족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맞혔구나, 오르피아. 어떻게 제우스가 그를, 인간들의 이탈을, -필연적인 흐름, 신화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세상을 막을 수 있었겠니? 하지만 어쩌면 다행일까, 헬라스 신들이 쇠락하고서도 많은 신들이 힘을 잃거나 재와 먼지로 돌아갔지만 몇몇은 민간 신앙의 형태로 비참하게나마 존속했지. 그 중 제일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것들 중 하나가 모로스 신앙이었어. 그의 교단은 오르피아의 말마따나 약자들이었지. 그들이 아니면 누가 파멸의 신을 섬기겠니?
그들은 모로스가 살아있다고 믿어. 밤이 인간의 파멸을 위해 모로스를 낳은 것처럼 언젠가 그들의 구세주인 모로스가 돌아와 온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고 세상을 태초의 밤으로 되돌리리라고.
그리고 모로스는 지금 온 세상을 떠돌며 악한 인간들에게 제 은총을 선물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믿고 있는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인세가 부패로 가득 차 되돌릴 수 없게 되는 날 모로스에 의해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공평하게, 강자도, 약자도. 모두 재에서 재로, 먼지에서 먼지로.”
“그거 좀 위험해 보이는데.”
“그렇지. 묵시록 같은 걸 생각해보면 종말론적 사상이 종교에서 아주 드문 교리는 아니다만 이쪽은 종말 자체를 숭배했기 때문에 종교로 자리잡지 못하고 박해당했어. 요즘은 거의 사라졌단다. 극단적인 광신도들만 남아있지-모로스에게 인간 번제를 바치는 자들. 그래서 네 스승이 탈출한 거야-결국 그 자신도 번제로 바쳐졌지만, 코라?”
“……후회는 없어. 어차피 죽은 거, 써먹어야지.”
“번제로 바쳐진 제물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내가 알 바야?”
“……좋은 마음가짐이야.”
오르피아는 줄곧 말이 없었다. 나는 살짝 신경쓰여서 오르피아와 소년 신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제서야 나를 바라보던 오르피아가 입을 열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코라, 졸려?”
졸리긴 했다. 거의 새벽이었으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 신이 손뼉을 쳐서 침대를 하나 더 만들어냈다.
“안 그래도 오르피아를 위한 침대를 만들어두려 했는데 기회가 났구나.”
오르피아가 말없이 침대에 누웠고 나도 따라 누웠다. 문득 소년 신이 마음에 걸렸다.
“안 자, 넌?”
“신은 자지 않아도 돼. 잘 자렴, 코라, 그리고……오르피아.”
그가 사라지고 불이 꺼졌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었다.
*
“내 제안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해 봤니?”
그곳에 있는 것은 소년 신과……나였다. 문득 이게 꿈이라는 걸 알았다. 그곳에는 오르피아가 없었으며 나는 헬쓱하게 말라 파리한 기색으로 담요를 두르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응, 네 말대로라면 내가 ◼ ◼로 가서 네 ◼ ◼ ◼의 ◼ ◼을 ◼ ◼ ◼다면 내게-”
내가 한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소년 신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 스틱스에 맹세할게.”
“하, 네 입으로 말했잖아. 스틱스는 이미 말라버렸다고.”
그러더니, 꿈 속의 나는 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코라. 언젠가는.”
그리고 눈이 뜨였다.
결제상자를 옮겨 유료분량을 만들어보세요
유료분량을 만들고 발행을 유지하면 90% 이상이 수익을 올려요.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