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20)

024. 사건의 지휘자

하여간.

"으억!"

달려드는 사내의 뒷목을 내리쳐 기절시킨 이레시아는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찼다.

벌써 몇번째야.

처음 늑대와 둘이서 왔을 때와 달리, 빈민가로 향하는 골목길 내리 하루살이들이 달라붙었다.

히아센이 급하게 준비해온 드레스와 구두 차림으로 이런 골목길을 혼자 함부로 거니는 것이 저들 눈에는 굴러들어온 먹이나 다름이 없겠다만.

"골목길 한번 들어설 때마다 이래서야."

의뢰와 상관없는 것들이니 함부로 죽일 수도 없고 성가셔 죽겠네.

이레시아가 짜증 어린 눈으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못내 제 판단이 잘못됐나 싶다가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워프의 출입 명단은 티파의 도시에서 관리하는 기록부이기에 히아센만큼 정보 수집에 능한 자가 없었고, 술집과 유흥가는 이 골목보다 더하면 더 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몇 번이고 말을 걸며 길을 막아서는 하루살이들을 쫓아내고 나서야 이레시아는 사제의 집 앞에 도착했다.

카일이 어디로 내뺐든 간에 그 일에 이 사제가 연루되어 있다는 건 확실했다. 분명 무언가 놓친 것이 있었을 것이다.

끼이익...

저번과 마찬가지로 낡은 문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여전히 뿌연 먼지가 쌓인 집안은 기분 나쁜 냄새가 진동했다. 며칠 전 바선생이 있던 방은 여전히 탄내가 남아있었지만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눈에 띄는 게 없어도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는 건...

이레시아가 손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칼날 바람이 다시금 방 안에 들이닥쳤다. 먼지가 쌓인 책장과 곰팡이 쓴 벽을 사정 없이 긁어댔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먼지에 옷자락으로 입과 코를 막으며 이레시아는 온 방 안을 난도질했다. 어차피 주인도 없이 다 쓰러져가는 집이니 봐줄 필요도 없었다.

한참을 시야를 가리는 먼지와 날카로운 난도질 소리가 집안에 흩날렸다.

그러다 별안간 벽을 난도질하던 바람 하나가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녀를 향해 튕겨 올랐다.

"?!"

난반사로 튀어 오르는 칼날 바람을 반사적으로 한발 물러서 피해냈다. 하마터면 목을 스칠뻔한 것을 한번 쳐다본 붉은 눈이 반대편을 향했다.

벽에 걸린 낡고 금이 간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가.

방안을 어지럽히던 칼날 바람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한바탕 일던 먼지가 가라앉자 이레시아는 허탕한 웃음을 흘렸다.

거울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 이런 단순한 것을 놓쳤을 줄이야."

어쩌면 바보 같이 바선생에게 정신이 팔려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이 없는 자책도 잠시, 그녀가 거울 위에 손을 올리자 달칵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 꺼림직한 기분은 이것 때문이었던가.

붉은 눈이 깊게 침잠했다.

다시 한번 거울을 힘주어 누르자 그 옆에서도 똑같은 것이 떨어졌다. 또 한 번에도, 그다음 번에도, 그 다음번에도...

천장에서 무언가 떨어질 때마다 붉은 눈도 저 밑으로 가라앉았다.

더 이상 세는 것을 잊었을 때서야 그녀는 거울에서 손을 뗐다. 이제서야 그 커다란 바선생이 왜 이곳에 있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좋은 먹이들이 있는데 당연도 했겠지..."

바선생에게 시체만큼 좋은 먹이가 또 있겠어?

혀를 턱까지 늘어트린 채 매달려 있는 시체들을 보며 속으로 침음했다.

젊은 여자들은 하나 같이 사람이 아닌 뱀과 같은 눈을 달고 뱃속은 훤히 들어내 놓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실험을 한 듯이 제각기 장기가 훼손되어 있었다. 이런 비슷한 실험이 자행되고 있다는 보고서를 분명 몇 일 전에 본 것 같은데.

"히아나 늑대씨가 오지 않길 잘했네."

보나마자 비위 약한 히아센은 당장에 뛰쳐나갔을 테고, 늑대에게는 잊고 있을 트라우마만 떠올리게 할 뿐일 테니까.

이미 죽어서 동공을 커다랗게 열고 있는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러니까 그 사제는 여기서 젊은 여자들을 빼돌려 사람이 아닌 존재로 만드는 실험 따위를 하고 있던 건가?

"연금술의 기초 같은 책이 나뒹굴었던 이 때문이었나..."

카일과 사제가 한 편이라는 가능성을 든다고 치자면 가능성이 높았다. 카일은 젊은 여자들을 공급하는 자였고, 사제는 대가로 돈을 지불했다면?

경비원 단장의 자리에서 쫓겨나 인생을 형편없이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남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역시 유흥을 즐길 수 있는 돈이었을 테니까.

처음 티파의 도시에 왔을 때도 프리실라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고.

"그럼 광산 안의 메두사는 이것들의 성공작 같은 건가."

뭐를 위해서 메두사가 필요했던 거지? 그때, 광산 안쪽에서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메두사는 왜...

팔짱을 낀 채 손끝을 까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째 파고들면 들수록 머릿속이 뿌옇기만 했다. 무언가 더 있을까 싶어 거울을 다시 한번 건드려 봤지만 딱히 변하는 것은 없었다. 비슷한 시체 한 구가 더 추가로 떨어질 뿐.

"아."

그러다 저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시체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 잠시 잠깐 제가 제대로 본 게 맞나 의심스러웠다.

"... 테사 부인?"

함몰된 한쪽 얼굴과 기이하게 꺾인 팔다리가 긴가민가했지만 확실했다.

죽었다던 티파의 영주 부인, 테사 라프레이 르샤가 그들 사이에 걸려있었다.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실렸던 여자였으니 모를 수가 없지.

의문의 사고사를 당한 4번째 록하트를 가진 인물. 원래라면 장례를 치르고 무덤 속에 있어야 할 여자였다.

대외적으로 외부인, 그러니까 사제나 다른 영지의 영주 등이 방문하면 그 거처를 정하는 것은 영주 부인의 일이었다.

그런 사제에게 이런 빈민가를 거처로 내준 것이 못내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둘 다 모종의 뜻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여자가 이곳에 이런 식으로 실험체로 방치되어 있다는 건...

"사제가 배신을 한 모양이군."

아니면 처음부터 테사 부인 역시 이용하고 버리는 말이었나?

일이 정 풀리지 않거든 최후의 방법으로 이 여자의 시체라도 찾아봐야 하나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이야.

그렇다면 사라졌다는 4번째 '록하트'가 누구 손에 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예의 그 사제.

'록하트'를 얻기 위해 영주 부인을 사고사로 죽인 뒤, 카일을 구슬려 젊은 여자들을 실험체로 공급하게 한 거겠지.

"비열하긴."

가짜 '현자의 돌'을 만드는 데 '록하트' 만큼 구미가 당기는 광물도 없을 테니까.

그래. 그렇다면 왜 하필 카일이 메두사의 시선을 회피할 수 있는 피어싱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설명이 됐다.

"유흥비를 벌기에 퍽 제격인 일이었겠지.

카일이 계속해서 사제의 심부름 노릇을 했다면 가짜 '현자의 돌'의 위치도 알고 있을게 분명했다.

"쯧."

처음부터 카일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어야 했거늘. 도대체 어디로 내뺀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내뺀 게 맞나...?

"잠깐..."

일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까딱거리고 있던 손가락이 멈췄다. 퍼즐이 맞지 않았다. 뭔가 빠트린 것처럼 기시감이 계속해서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아니. 애시당초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틀렸다.

사제와 카일, 그리고 메두사는 분명 서로 긴밀히 이어진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서로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레시아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스쳤다.

처음의 시작은 사제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광산 사건은 별개의 존재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면?

일렬로 일어난 사건이라 한 덩어리로 보고만 있던 게 편협한 생각이었다.

사제와 카일은 같은 편일 확률이 높다 쳐도, 메두사는 원치 않은 사건에 휘말린 부산물이었다.

물가에 얹어진 돌다리를 건너다 어느 순간 위화감을 느낀 것만 같이 두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중간에 사건의 '지휘자'가 바뀌었다.

처음부터 무언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손 닿는 곳에 알맞은 퍼즐이 놓여 있는 듯 한 기시감. 마치 길을 안내해 주듯, 장애물이 있는가 싶으면 그 옆에 돌아갈 수 있는 돌다리를 누군가 의도적으로 놓아둔 것 마냥.

그녀가 줄곧 느끼던 위화감은 어쩌면 거기서부터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돌아갔다.

현자의 돌에 대한 소문, 사제의 집, 카일이 가진 피어싱의 존재, 그리고 메두사가 숨어 있는 광산의 위치까지.

그 모든 걸 알려주고, 현시점 카일과 적대관계를 가진 여자.

"... 프리실라."

결국 그녀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

똑. 똑. 똑.

천장의 종유석에 맺힌 이슬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치 죽은 듯 앉아 있던 메두사 한 마리가 눈을 떴다.

줄곧 광산 저 안쪽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던 메두사는 작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입구 저 끝에서부터 작은 발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무언가 질질 끌려오는 소리도.

이곳의 다른 메두사들처럼 죽음만, 그저 죽음만을 바라던 그 메두사는 주름이 잔뜩 진 지친 얼굴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이 광산 안에 갇힌 지 겨우 한달여 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메두사는 혼자만의 죄책감에 짓눌러 작게 웅크려져 있었다.

죽음, 그 얼마나 무거운 이름인가.

죽음, 그 얼마나 값지고 귀한 이름이란 말인가.

삶, 그 얼마나 무겁고 잔혹한 걸음인가.

삶, 그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는 나날이란 말인가.

삶. 이제는 이곳에 없는 이름을 메두사는 떠올렸다.

삶과 죽음. 그 언저리에 시간이 멈춰서 그 무거운 이름을, 그 찬란한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그가 아직 사람이었을 적에, '희망'을 찾아 챙겨 들고 왔던 작은 호롱불이 작게 흔들렸다. 남은 기름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희망'을 찾아낸 순간부터 호롱불의 기름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희망'이라는 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그리고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광산의 어둠 속에서 낡은 치마차림을 한 아리따운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이용할 생각 같은 거 없었는데..."

여자의 피부는 마치 돌처럼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잿빛을 띠고 있는 한 손에는 피떡이 된 채로 축 늘어진 남자가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광산을 조사하러 오셨다는 걸 들었을 때 깨달았어."

아, 이 도시가 드디어 날 죽이기 위해 사람을 보냈구나. 나는 분명 저 사람을 이길 수 없겠구나. 하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난 아직 죽을 수가 없어. 왠지 알아?"

그녀가 인간이었을 적, 아름답던 손은 빛을 잃어 거칠어져 있었고 깨진 손톱이 덜렁거리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잿빛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네가 아직 살아있잖아, 카일."

광대 밑까지 괴기하게 찢어진 입과 반달로 휘어진 눈을 하고 그녀는 늙은 메두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마님의 손에 죽기 전에... 너를 내 손으로 도륙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어서."

늙은 메두사의 표정은 지쳐있었고, 죄책감까지 엿보이는 연민의 눈을 하고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 눈이 담은 많은 감정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축 늘어진 남자를 그 앞에 집어던지며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

"이제... 곧. 모든 게 끝이 나요. 할아버지."

여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을 깔깔깔 거리며 터트렸다.

프리실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정말 이 이상 기쁜 일이 없다는 듯이 울어댔다.

아니. 그녀는 웃었던 걸까, 울었던 걸까.

웃고 싶었던 걸까, 울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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