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청명소병] 근데 너는 왜

고슴도치소병이 외전인데 본편보다 길어짐

*전문공개

*

의 외전

*무협알못주의

*대략 19,000자

 

 


 

 

 

 

아, 사랑이란 참으로 요사스러운 것이다. 

 

천재라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은 사람을 세상 천지 우둔하게 만들고 모른다는 두려움을 즐거운 호기심으로 바꾸는 한편, 전쟁터에서 수많은 이들을 잘게 다져온 절대고수를 칼 없이도 벌벌 떨게 만든다.

처마 밖에서 맞던 차가운 빗줄기가 금침 위에서 맞이한 푸르른 하늘보다도 달게 느껴지도록 하는데 세상을 다 가져 떵떵거린다 해도 과연 이 느낌 없이 인간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고작 불안하다고 쉽사리 포기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 생이 끝날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스쳐가는 생각들. 녹림왕이라 불리는 남자는 몇 번의 재세탁을 마치고 나온 자신의 옷가지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진득한 흙얼룩에 엉망이 된 꼴을 보면서도 행복하다는 듯 실실 웃고 있었다. 

 

지금으로썬 조금 지난 밤. 임소병은 반년동안 손끝 하나 건들기도 어렵던 어린 정인에게 이 사랑 찬가를 온몸으로 설파해냈다. 젊은 놈이 산전수전 다 겪은 영감처럼 철통처럼 마음 닫고 사는걸 풀어헤치느라 여간 고생했던게 아니었다지.

 누구 말마따나 신성한 도관에서 할 소린 아니지만 그냥 들어봐라. 

보통 사내놈들이라면 몸정만으로도 녹일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의 간격.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어 헌신하다 헌신짝되고. 낯선 마을에서 질질 짜기나 하는 수모를 겪었단 말이었다. 먼저 손 뻗지 않으면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지난 날들은 너무나도 외롭고. 아프기까지 하였다.

 

그랬던 만큼 임소병에겐 지금의 이 평온한 행복이 너무나도 달게 느껴졌다. 생애 처음으로 햇볕 아래 뛰어노는 아이마냥 온종일 마음이 들떴다.

 

당연하지만 사실 그렇다고 그의 일상이 크게 달라지는건 아니었다. 

 

수련중인 멧돼지들 통솔하기. 청명에게 얻어맞고 괜히 구박받기. 병아리들 약올리기. 산채 관리. 위협 감지와 정보수집. 회의와 계산. 그리고 계산. 협상과 위협. 또 계산… 

 

여전히 숨이 턱턱 막히도록 바쁘고 무거운 일과들 속 두 개의 작은 변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걸 버티게 하고도 남을 행복한 추억이 생겼다는 것과 일과 중 화산검협과의 밀회가 추가되었다는 것. 

 

 

 


 

 

 

“ 도장, 누가 뺏어먹는답니까? 그러다 체하겠습니다. ”

“ 촵촵촵촵촵촵 ”

“ 여기 물, 물 ”

 

 

오전 내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후 밥시간이 되어서야 잠잠해진 뒷마당. 모두가 식당으로 들어간 덕에 드디어 둘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최근 둘은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기 위해 식당을 이용하는 대신 추 부인께 따로 부탁드린 도시락과 간이 탁자를 들고 나오곤 했다. 시선을 피해 조용히 올라온 풀밭 위 아늑한 공간에서 개밥 퍼먹는 소리를 내며 도시락을 마시는 청명과 그를 바리바리 챙기는 임소병. 

맛깔나게도 퍼먹는 청명에 비해 타고나길 입맛이 없는 편이던 소병은 거의 그대로 남은 제 몫의 음식을 청명의 그릇으로 덜어주곤 젓가락을 놓았다. 그러곤 한동안 근처의 풀 따위로 손장난을 치더니 심심한지 대화를 시도한다.

 

 

“ 역시 봄은 봄입니다. 이렇게 조용한데도… ”

“ 촵촵촵촵촵 ”

 

 

 

 

 

“ …크흠, 이렇게 조용한데도 생동감이… ”

“ 촵촵촵촵촵촵촵촵촵!! ”

 

 

… … …

 

 

 

아, 내 감수성아…

 

귀하디 귀한 둘만의시간에 분위기 좀 잡아보고 싶었던 임소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어떠냐. 얼굴보고 같이 있는게 중요한거지. 그러던지 말던지 청명은 마치 수련의 연장인것처럼 식사에 집중해 누가 보기에도 체구에 조금 과한듯한 양을 마시듯 먹었다. 

그동안 몸을 돌리곤 뭘 계속 만지작대던 임소병. 얼마 지나지 않아 청명이 말끔히 비운 그릇을 올리자 소병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들이민다. 

 

 

“ 맛있게 드셨습니까? ”

 

 

비록 멧돼지처럼 쳐먹었지만 그래도 정인 앞이라는 자각이 조금은 있는것인지 입가를 슥슥 닦은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 넌 그거 먹고 이따 버틸 수 있겠냐? 그 녀석들 오전에 약이 바짝올랐던데. ”

“ 하하. 뭐, 소란 틈에 슬쩍 묻혀가면 나름 버틸만합니다. 아직까지는요. ”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전의 소동에도 나름 멀끔히 지켜낸 옷자락을 흔들어보인 임소병. 어디 다치고 뜯긴곳은 없나 그의 몸을 슬쩍 훑던 청명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그러더니 수상한 것을 포착한 사냥개처럼 어색하게 숨긴 팔을 턱짓한다.

 

 

“ 뭔데? ”

 

 

조금 질린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임소병. 

 

 

“ 거 참, 사람이 뭘 숨기는 것 같으면 모른척도 좀 해주곤 해야지. 뭐 그리 센스가 없습니까? 하여간 이래서 뭐든 경력직이 좋다고… ”

“ 죽고싶냐? ”

 

 

요즘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부드러워졌지만 기본적으론 여전히 청명이다. 임소병은 좋은날 괜히 대가리를 얻어맞기 전에 잽싸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죽고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 도장! 손 좀 줘보십쇼 ”

 

 

그러니 수상쩍게 보던 그가 마지못해 주먹을 내밀었다. 

손을 줘보라니 주먹을 내는건 또 신기한 유형일세. 슬쩍 웃은 소병은 그가 내민 주먹을 살살 펴 거칠기 짝이 없는 손가락에다 등 뒤에 숨겨두었던 풀반지를 끼워주었다. 제 손에 끼워진 앙증맞은 반지가 조금 어색한지 묘한 표정을 짓는 청명이녀석.

 

 

“ …내내 뭘 하나 했더니 밥도 안먹고 이거 만들고 있었어? ”

“ 예. 잠시만요, 여기에 하나 더… ”

 

 

소병은 아예 손을 제 무릎에 올리곤 반지에 뭘 깔짝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들어보니 풀반지 사이 아주 작은 매화가지가 꽂혀있다. 

 

 

“ 검 쓰는 손에 금반지는 못해주더라도 이정도는 해줄 능력이 됩니다. 제가 ”

 

 

의기양양한 말투.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반질대며 쳐다보는 임소병을 보곤 청명이 피식 웃었다. 

 

 

“ 오후 수련할때면 다 떨어져 있을텐데 불안해서 어떻게 끼고다니라고? ”

“ 신경쓰지 말고 죄다 떨구고 오십쇼. 백개는 더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래보여도 산에서 자란 몸인지라...  ”

 

 

원래도 옆으로 찢어진 눈이 웃음기에 가늘어진다. 간질대는 가슴 한 켠. 

 

 

“ …마음에 드십니까? ”

 

 

씰룩이는 정직한 입꼬리를 보며 이미 눈치를 챘을텐데도 저렇게 조심스러운 양 물어본다. 

요 귀여운 놈. 도사 홀려대는 사파놈! 

밖에선 산이고 절벽이고 시선 투성이니 좀 참으려 했는데 자꾸 몸을 근질거리게 하네. 대답 대신 얇은 허리에 팔을 두르고 옆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면 악악대며 빠져나가려 버둥거리는 몸뚱이. 

이럴때 우리 사파새끼를 제압하는 방법은 너무 간단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꽉 껴안고 이마에 소리내어 입맞추면 급격히 움직임이 줄어들면서 곧 힘이 빠진다. 이 때, 문득 표정이 궁금해 얼굴을 들여다보면 바로 마주치는 촉촉한 시선. 평소의 능구렁이가 떠오르지도 않을만큼 살살 녹아서 바라보고 있다면 무력화가 된것이다.

 

 

“ … ”

 

 

어우, 이거 기분 이상하네

저놈은 자기가 하루종일 어떤 표정으로 따라다니는지 본인 모습을 관람하게 해주어도 이런 별 것 아닌 입맞춤에 저렇게 녹아버릴 수 있을까. 그저 좀 예뻐해주려던 마음이 괜히 울렁여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부채를 꼭 쥐곤 눈치를 슬슬 보다 어깨에 작고 동그란 머리통을 기대오는 임소병. 청명은 그의 깊은 연정이 아직 조금은 낯설었다.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 …큼, ”

 

 

헛기침을 한번 하니 떨어지라는 신호로 알았는지 머리통을 들곤 눈을 꿈뻑대는 헝클어진 쥐새끼. 아 아니라고 너 다시 기대라고 말하고싶은데 말은 좀처럼 다정히 나오질 못한다.

 

 

“ 이제 식당에서 애들 다 나올텐데 뭘. ”

“ 아닌데요? 아직 한참 멀었는데요? 거, 몸 건강한 사람이 불편해도 좀 참아봅시다. 하루종일 기댈 것도 아닌데 ”

 

 

따박따박 대꾸한 임소병이 다시 머리통을 어깨에 톡 기대곤 이번엔 아예 품 속으로 꼭 들어온다. 아, 이 녀석이 좀처럼 기죽지도 않고 아주 대드는 질긴 성정이라 다행이다. 생각하며 조용히 어깨를 감싸니 자연스레 올라와 깍지껴오는 시원한 손.  

 

전부터 느낀거지만 이녀석은 참 이런걸 잘 받아준다. 손만 대면 찰딱 감겨오는게 경력직의 향기가 풍긴다고 해야 하나. 햇볕 아래 평화로운 시간에서도 좀처럼 쉬는법을 모르는 청명의 감각들은 타인의 품이 그닥 낯설어보이지 않는 편안한 표정과 능숙히 잘 꼬아진 풀반지 등을 자꾸만 시야에 들여 어떠한 추측을 뽑아낸다. 

 

 

' 이자식… 아무래도 멋진 사랑을 했었나본데. '

 

 

그게 화나거나 나쁘다는건 결코 아니다. 임소병의 배경과 나이를 생각하면 없는게 오히려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차가운 두뇌와는 별개로 슬그머니 올라오는 장난기. 청명은 반지를 만지작대며 말했다.

 

 

“ 근데 참 잘 만들었네. 잘 풀리지도 않고 ”

“ 후후, 그럼요. 누가 만들었는데 ”

“ 자주 만들어 줬었나봐? ”

“ 그럼… …아니, 엇… ”

 

 

무심코 대답하려다, 급히 멈춘 소병이 눈을 얇게 뜨곤 올려본다. 

 

 

히죽. 누가 봐도 그저 장난질을 치고 싶어하는 듯 씰룩이는 입꼬리. 진지함이라곤 쥐뿔 없어보인다. 작게 코웃음을 치곤 대답하는 임소병

 

 

“ 아~ 그럼요, 이게 제 수법이다마다요. 시골뜨기 여인들에게 한번씩 걸어주면 어찌나 좋아하던지 ”

“ 여인? 뭐야 이자식, 너 여자도 만나? ”

“ 깊게 좀 파고들지 맙시다! ”

 

 

젊은놈이 영감님처럼 꼬장꼬장해가지고… 중얼거린 임소병이 슬쩍 근처의 인기척을 확인하더니 청명의 상체를 스윽 밀어 눕히곤 그 위로 살짝 올라탄다. 단단한 가슴을 베개삼아 팔을 살짝 괴고는 쳐다보니 바로 보이는 앳된 얼굴. 

 

 

“ 그러는 도장은 뭐. 인생에 분홍빛 한번 없었습니까? ”

“ 도사한테 할 말이냐? ”

“ 도사래도 그런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아이고 누가 이쁜 것 같다, 눈길이 좀 간다. ”

“ 진짜 없었다니까. 그리고 보기에 반반한거랑 좋아하는거랑 같어? 진가네도 그냥 생긴것만 보면 반지르르하니 이쁘잖아. ”

“ 에잉, 재미없는 인간 ”

 

 

어쭈. 요즘들어 내가 너무 봐줬나? 청명은 자꾸 기어오르려 하는 임소병의 뒷덜미를 잡아 몸 옆으로 끌어내렸다. 

 

털퍽. 맥없이 흘러내린 임소병.

 

 

“ 이게 자꾸 까부네. 넌 뭐 있어? ”

“ 뭐 사람인데 종종 관심있게 보게되는 특징이야 있기는 하죠. ”

 

 

관심있는 특징? 

 

임소병의 성격상 이건 함정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아니, 거의 함정이 확실하다는게 이성의 외침. 하지만 저 여우같은게 혹시 내 얘기라도 하려고 저러나 내심 기대하게 되는게 사람의 마음인지라. 청명은 관심 없는 척. 휙 상체를 세우곤 간이 식탁을 정리하며 물었다. 

 

 

 

“ 뭔데? ”

“ 평범합니다 그냥… 착하고, 얼굴 반반하고 ” 

 

 

 

얼굴 반반하고 착하다라. 난가? 혹시?

 

 

 

“ ...그리고? ”

“ 성격은 그냥 다정다감하고요. ”

 

 

 

아 이건 확실히 아니군. 약올리기로 노선을 정한 모양인데. 청명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마음으로 부추겨 본다. 

 

 

“ 또. ”

“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음… 예를 들면… ”

“ …? ”

 

 

임소병이 말하다 말고 상체를 일으킨다. 옷에 붙은 잔가지 등을 툭툭 털어내며 작은소리로 이어간 말. 

 

 

“ … …남궁… 소가주? 같은? ” 

 

 

후다닥.

 

 

“ 너 이새… ”

“ 하하! 이따 봅시다 도장! ”

 

 

유령문도 눈이 튀어나올 속도로 튀어나가는 임소병. 언제부터 각오를 다지고 있던건지 상욕을 내뱉은 청명이 주먹을 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때엔 저 멀리까지 도망간 후였다. 

 

 

“ 이… ”

 

 

인파 속으로 뛰어들어가면 안전할거라 생각했는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식당 근처로 쏘옥 숨어버린 임소병. 그의 작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아직 치우지 않은 간이 탁자가 풀밭 위에 인질처럼 놓여 발을 묶어놓고 있었고 기습이라면 순간 단거리로 나보다 상위에 있는 고수를 재낄수도 있을 테니까. 계산에 두지 못했던건 단 하나였다. 

청명이한테 그런 수작질 쥐뿔 안먹힌단거

 

 

“ 이 쥐새끼가 요즘 이쁘다고 오냐오냐 다 받아줬더니만 감히 도사를 놀려먹어? 것도 화산에서??? ” 

“ 억 잠깐 도… 도장… 으아아아악!!! ”

 

 

엄청난 속도로 땅을 박차고 날아간 청명. 임소병의 낯짝에 신발 밑창이 틀어박혔다. 대체 뭘 어떻게 날아온건지 짐을 주렁주렁 든 상태로 정확히 임소병만을 내리찍는 놀라운 솜씨. 이내 충격으로 몸이 뒤로 자빠지며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내력을 뺀 주먹이 날아와 꽂힌다. 아프지만 부러지지는 않을 곳만을 골라 패는 손놀림이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주변을 지나는 구경꾼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 녹림왕은 또 맞고계시네 ”

“ 요새 잠잠하더니만… 쯧쯧. ”

 

 

뭐 언제나처럼 눈깔이 돌아간 화산검협과 무력하게 맞고있는 녹림왕. 별 대수롭지 않게 구경하다 오후 훈련을 하러 지나가는 사람들. 나름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화산의 일상이 지나가고 있었다. 심하게 나잇값 못하는 어른들의 유치한 사랑싸움은 이렇게 막이 내리는 듯 보였다. 

 

 


 

 

근데 지금 이게 맞냐?

 

 

양껏 얻어맞고도 성실히 오후 고문… 아니, 오후 패싸움… 이것도 아니지. 오후 훈련에 참여한 임소병은 맡은 바 성실히 남궁가를 후드려패도 부족할 이 귀한 시간에 가만 멈춰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 야. 야! 밟아! 밟아! ”

“ 아아아아아아아아악!!! ”

 

 

당가의 무인들이 화산 멧돼지들과 뒤엉켜 뒷골목 패거리마냥 싸워대는 저 옆쪽의 모습. 이건 이제 녹림왕을 포함한 모두에게 그다지 어색한 장면이 아닌데, 임소병이 보고있는건 그 뒤에 서있는 상당히 수상한 한 쌍이었다.

 

 

“ 쯧, 저거 저거 저렇게 밟으면 금방 일어나지. 안그래 사숙? ”

“ 그렇지. 근데 청명아 왜… ”

“ 저 봐봐. 우리 동룡이면 저렇게 안할텐데 ”

“ 아니 그러니까 왜 나만… ”

 

 

난장판에서 한 발짝 물러나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곤 구경중인 화산검협과 화산정검. 청명 도장은 저기에 낄 짬이 아니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백천 도장은 왜? 졸지에 일손을 하나 잃어버린 화산파의 패거리들은 물론. 백천 그 스스로도 왜 몸 편히 빠져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당황스러운 눈치다. 

 

대체 뭘 하는건지 신경쓰여 아예 대놓고 쳐다보고 있으니 청명이 어깨를 감싸던 손을 슬쩍 내려 백천의 허리께를 토닥여준다. 

 

 

“ 사숙 그동안 고생 많았잖아, 조금만 쉬어. 어휴… 이쁜 얼굴 푸석한 것 좀 봐라. ”

“ 이… 이쁜… 아니, 불만이 있으면 제발 그냥 말해다오 ”

 

 

허리춤에 얹은 저 손. 저 손이 묘하게 더러운 흑심을 담고있는 듯 느껴진다. 고약한 말코녀석 어쩐지 오늘따라 조금만 패고 떨어진다 싶더니 담아두고 있었나?

 

 

 

 

진정하자. 저건 깔아놓은 덫이다. 저 뻔하고 같잖은 짓에 질투하면 지는 판이라는걸 알지만 가슴에서 뭔가 답답한 것이 올라온다. 마음같아선 당장 달려가 둘 사이에 몸통박치기라도 하고 싶지만 부채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참는 임소병. 

 

그걸 시야 저편에서 보고있는 청명은 보란 듯이 전혀 푸석하지 않은, 오히려 갓 태어난 듯 탄력있는 백천의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준다. 상당히 소름끼치는지 머리 끝이 빳빳하게 일어난 헌양한 청년의 모습.

 

 

“ … … … 으허억, 쿨럭, 쿨럭! ”

 

 

저… 저…!

 

못볼꼴을 보고 너무 참은탓에 충격으로 점점 속이 쓰려오며 깊은 속기침이 올라온다. 젠장, 티내면 지는건데. 그 소리를 들은 청명의 입가가 씰룩이는게 선명하다. 그래도 협을 행한다는 작자가 어찌 저렇게도 치졸하게 복수한단 말인가. 

 

이제 뭐가 문제냐며 공포에 거의 울 것 같은 제 사숙에게 아예 의자와 물까지 가져다주는 웬수놈의 모습을 보니 기침이 멈추지 않아 돌바닥 위에 엎어져 쿨럭대던 소병의 팔을 누군가 잡아끈다. 

 

 

“ 괜찮습니까. 녹림왕 ”

“ 나… 남궁… …쿨럭! 쿨럭, 어우 속쓰려! ”

 

 

그 백천 도장에 맞먹을정도로 멀끔한 허우대와 얼핏 들으면 제법 다정스러운 말투. 그는 마치 허공에 맞기라도 한 듯 반 죽어가던 소병을 부축하며 남궁의 문양이 새겨진 손수건을 쥐여준다.  

 

괜히 트집잡아 시비를 걸었던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호의를? 수상쩍다는 눈으로 쳐다보니 그가 입을 연다. 

 

 

“ 괘념치 마십시오. 그 때는 판을 만들고자 했단걸 알고 있습니다. ”

“ …그렇습니까? ”

“ 몸이 좀 진정되면 우리도 시작합시다. 뒤쳐질 순 없죠 ”

 

 

오. 제법 깔쌈한데? 정중한 태도로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만 호의를 전하고 돌아가는 모습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병아리새끼처럼 보았지만 역시 명문은 명문이구나 생각하며 받은 손수건으로 목구멍에 모여있던 피들을 뱉어낸 임소병.

...

 

순간 섬짓하게 느껴지는 살기에 흠칫 놀라 돌아보니 방금까지 아주 신이 나서 백천 도장을 주물럭대던 청명이 이쪽을 보고있었다. 

 

 

“ … … ”

“ …어헛… ”

 

 

왠지 외도라도 들킨 기분이 들어 당황한것도 잠시. 이것 봐라?

 

머릿속 계산기가 돌아간 소병은 부채를 촤락 펼쳐 입가를 가리곤 상당히 재수없게 웃었다. 주먹다짐이면 조금 밀릴지 몰라도 살살 건드려 약올리는건 제 특기분야가 아니었나. 다시 여유를 찾은 임소병은 돌아가던 남궁도위를 향해 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 남궁 소가주! ”

 

 

남궁이라는 음성에 힐끗 돌아보는 청년.

 

 

“ 고맙습니다. 손수건은 조만간 돌려드리죠 ”

“ …예. ”

 

 

웃을때면 어딘가 구려보이는 청명과는 다르게 본의 그대로 산뜻한 웃음. 고개를 얕게 까딱이곤 돌아가는 그의 모습과 점점 더 심기가 불편해져가는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며 임소병은 생각했다. 이거 제법 쓸만한 패를 손에 쥐었다고.

 

 


 

 

“ 애써보았는데 핏자국이 잘 안지워지지 뭡니까. ”

“ 아, 괜찮습니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

“ 어찌 그러겠습니까. 짐승도 도움을 받았으면 되갚아주는… 아니, 보답하는 것인데. 붕대가 너무 꽉 조이지 않으십니까? ”

 

 

얼마 전 건네온 작은 호의를 빌미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주앉은 두 사람. 녹림왕은 지난번 손수건에 대한 보답으로 패싸움에서 생긴 남궁도위의 상처를 굳이 살펴보며 약초를 발라 돌돌 감아주고 있었다. 원래 그런거 해주는 성격이냐고? 절대 아니다. 

 

녹림왕이 그래도 체면이 있지 빚지곤 못 산다는게 표면적인 이유. 저 뒤편 살기를 내뿜으며 지켜보는 청명을 살살 약올리는게 진짜 목적이렸지. 

 

유치한 짓이지만 그가 나 때문에 저리 질투 같은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있는 것이 참으로 보기가 좋다. 그동안의 설움이 훌훌 날아갈만큼 말이다!

 

임소병은 부러 그의 팔을 다정히 매만지며 흙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붕대의 마감 처리를 했다. 남궁 소가주놈이 소름끼쳐하며 팔을 슬쩍 빼는게 느껴졌지만 상관 없다. 그 행동에 열이 받는지 청명이 뒷짐을 지곤 자리를 떴으니. 

 

 

“ 됐네요. 가보십쇼 ”

 

 

그럼 나도 볼 일 끝났지. 소병은 남궁도위의 등판을 팡팡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따라 일어나지 않고 가만 올려보는 시선 

 

 

“ 왜요? ”

“ 참. 사람이란게 여러 가지 면모가 있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

“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

“ 본래 잘 챙기는 편이십니까? ”

 

 

그냥 대충 두고 갈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대화가 이어진다. 뭐 친분을 쌓아둬서 나쁠건 없나. 조잘대며 일어난 그와 함께 수련장으로 돌아가니 미리 돌아간 청명이놈이 이미 쌈박질한다고 집을 개판으로 만든 병아리들을 죽어라 굴리는 중이었다. 

 

대가리들이 느려 터져서 왜 이제야 오냐며 욕인지 호통인지를 바가지로 먹은 후, 겸사겸사 청명의 표정을 살피니 아까 내뿜던 살기는 장난이었던 것 마냥 다시 평정을 찾은듯한 모습. 안도와 아쉬움이 섞인 오묘한 감정을 느낀 임소병은 정신을 가다듬곤 그들 무리에 합류했다. 

.

 

그래, 청명을 알고 나를 알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날 맞아죽지 않은것에 감사하며 이쯤에서 끝냈어야 했겠지. 근데 어찌 도깨비가 장난을 끊겠냐고. 그런 날들이 몇 밤씩이나 반복되었다. 

 

수련시간마다 훤칠한 미남과 미묘한 접촉을 시도하며 약올리는 임소병과 그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유지하는 청명. 

낮엔 분명히 신경 거슬린다는 티를 팍팍 내어놓고선 새벽이면 그런일은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적당히 안고 예뻐해주니 대체 무슨 심경인지가 궁금해 자꾸만 건드리게 되었다.

 

그게 반복되다 보니 촉발제로써 써먹고 말 예정이었던 남궁 소가주와도 진짜 고운 정이 들 지경인데 청명은 첫날을 제외하면 아무런 응징도, 제지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다정하면 다정했지.

 

 


 

 

늦은 새벽. 

청명이 비록 세상 제일가는 개망나니 다혈질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그 속은 냉철한 계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걸 이제 누가 모르는가. 임소병이 정말 궁금해 터질때까지 찔러보고 싶던건 그 부분이었다. 이 단순무식한 질투유발을 그가 그저 참아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질투의 대상이 막대한 돈을 지불한 남궁세가라서? 빤한 수작질에 넘어가주는건 자존심이 상해서? 그것도 아니면…

 

 

…짝!

 

 

“ 악! 아픕니다! ”

 

 

이불속에서 어찌 이리도 알차게 때렸는지, 갑자기 매섭게 얻어맞은 둔부에 눈물이 찔끔 나온다.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대체 제가 딴생각을 하는건 어떻게 알아챈건지. 안그래도 홧홧하던 하반신에 괜한 통증이 더해진다. 상체를 비스듬히 세워 내려다보던 청명은 늘 그렇듯 꼬장꼬장한 투로 불만을 내뱉었다.

 

 

“ 뭔 생각해 또. 너 진짜 바람났냐? 어? ”

“ 아이, 안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말로 좀 하시지… ”

 

 

엄살을 섞어 말하니 역시나 씨알도 안먹히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친다.

 

 

“ 두들기고 걷어차도 일어나는놈이 엄살은. 손이나 줘봐 ”

“ …여기요. ”

 

 

이사람이 또 짜증내다 말고 이러네. 

 

열기가 식어가며 차가워지던 양 손을 내미니 늘상 뜨끈한 제 손으로 감싸쥐곤 주무르며 녹이는 청명. 투박한 살결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에 손이 녹아가며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차분해진다. 

 

이제는 어색함보단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짧은 정적을 즐기며 잠시 생각하다가 찬찬히 입을 연 임소병.

 

 

“ …청명 도장. 혹시… ”

“ 어, 안돼 ”

 

 

뭐야? 뭐가요? 

 

 

“ 뭔 줄 알고요? ”

“ 남궁네로 갈아탈거니까 붙잡지 말라는거 아냐? ”

“ 예엣?! ”

 

 

벌떡. 너무 놀라서 상체를 급하게 일으키다가 등불에 머리를 박을 뻔 했다. 

...

농담인가? 소병은 잡혀있던 손을 빼내어 어둠 속 잘 보이지 않는 청명의 얼굴을 슬며시 쓸어보았다. 그다지 어떤 표정이 띄워져 있는 것 같지가 않은데. 

 

 

“ 아님 말고 ”

“ …유치한 장난이라 전혀 신경 안쓰는 줄 알았습니다? ”

“ 그래보이냐? ”

 

 

감정을 전혀 읽어내기 힘든 무심한 투로 대답한 청명이 손목을 붙잡더니 안기라는 듯 끌어당긴다. 저항 없이 어깨위로 몸을 눕히며 뻗어진 팔로는 그를 감싸안는 임소병. 안정적인 자세로 들러붙으니 그가 입을 연다.

 

 

“ 신경 쓰여. 유치한 수작질인건 아는데. 그… 좀… ”

“ 좀? ”

 

 

차분한 말투로 말하다 잠깐 말문이 막혔는지 망설이는 청명. 생각을 정리하는지 정적이 조금 길어진다.

 

 

“ 그러니까, 좀… … … … ”

 

 

아 씨, 뭔 뜸을 이렇게 들이는지 궁금해 미쳐버리겠다. 분위기상 차마 이 이상 재촉하진 못하겠고.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점점 눈에 들어오는 표정의 윤곽.

 

 

“ … … … …아니다. ”

“ 왜요? 뭔데요? ”

“ 궁금해? ”

 

 

뭐냐고 재촉하는건 그냥 추임새로 들렸습니까 도장. 이쯤되니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마음이 불안해진다.

 

 

“ …너 말이야 ”

 

 

입술이 건조한지 혀로 한번 쓸고 지나간 청명이 툭 던지듯 물었다.

 

 

“ 날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 ”

“ …예에? ”

“ 내가 대체 어디가 좋냐고 ”

“ 그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아니, 요즘 우울해요? ”

 

 

청명의 입에서 나올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질문에 왠지 데자뷰가 느껴지는 말을 건넨 임소병의 뇌가 빠르게 돌아간다. 

좋아하는 이유? 좋아하는 이유라. 지금 흐름에서 이 말이 나왔다는건 낯간지러운 사랑고백을 원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위험신호에 가깝지. 지금까지의 경험을 떠올려 예상했을 때. 아마도 그는…

 

 

“ …도장. 왜 비교합니까? 그냥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작질이었는데요 ”

“ 알지. 근데 둘이 같이 다니는걸 보다 보니까 참 뭐랄까. 걔가 나보다도 너한테 잘 해주는 것 같아서. 표정도 좋아보이고. ”

 

 

그럼 질투 촉발제로 이용해 먹으면서 죽상으로 대합니까?! 아무리 사파라도 양심이 있지. 

아니 왜 자꾸 흐름이 이렇게 가냐. 임소병은 단언컨대 이렇게 그가 자괴감에 빠지는걸 원한게 아니었다. 방향이 이상해졌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조금은 기죽어보이는 어린 얼굴에 꽂힌다. 당황에 잠시 할 말을 정하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있으니 청명이 천장을 보며 말한다.

 

 

“ 너 말이야. 나랑 있을땐… …에이, 아냐. 아냐. 잊어 ”

“ 아니 왜 그러세요… 저 진짜 무섭습니다 도장 ”

“ 신경쓰지 마. 새벽이라 헛소리 하나보다 해 그냥 ”

 

 

나랑 있을땐 뭔데요? 뭔 말이 하고싶은데요? 오만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가며 불안이 다시 손발을 얼리기 시작한다. 허나 쉽사리 대답해주지 않는 청명. 

지금 그가 입을 다물고 혼자 뭔 결심을 하고있는지 불안해서 미칠 지경인데 그 때, 청명이 스윽 몸을 빼내고 일어나더니 돌아가려는 듯 널부러진 옷가지를 주워입는다. 눈치를 보다가 옷 끝자락을 잡은 소병.

 

 

“ …같이 주무시면 안됩니까? ”

“ 어어, 내일 일찍 나갈일이 있어서 ” 

“ 제가 깨워드리겠습니다. ”

“ 피곤할텐데 됐어. 잘 자고 ”

 

 

보아하니 화난것도, 삐진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담담하게 혼자 있고싶어 나가는듯한 모습이다. 이러면 아예 박차고 나가는것보다 더 잡기가 어렵다. 어느새 옷을 다 주워입은 청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에 가벼이 입을 맞추곤 일어난다. 

 

 

“ 아, 그리고 먼길이라 늦을수도 있으니 기다리지 말고 ”

“ 어… 얼마 후에 오시는데요…? ”

 

 

아! 이 거지 같은 타이밍. 얼어죽을 타이밍. 

저 상태로 그가 나가버리면 임소병은 대체 얼마간을 이 불안에 떨어야하는가. 절박하게도 말한 임소병의 물음에 청명이 문을 닫기 직전 뒤돌아 뱉은 말은 절망적이었다. 

 

 

‘ 적어도 열흘? ’

 

 

 

탁. 

 

 


 

 

들어주십시오. 전 하늘에 맹세코 분명 그냥 질투하는게 재밌어 한번 터뜨려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녀석이 아무리 개털처럼 대할때에도 섭섭할 뿐이지 싫은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대체 남궁 소가주와 함께있을때 내 어떤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일까. 혹시 이 모든 것이 청명이놈의 함정인가? 

 

임소병은 그를 아주 오랫동안 봐온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알만큼은 안다 생각했다. 

 

누군가 진심으로 대할때엔 자신또한 진심으로 대하지만 구렁이처럼 굴면 속을 다 뒤집어까야 성이 풀리는 사람. 사소한 원한에 아주 치졸하게 굴면서도 사실 정 많고 따뜻한 사람. 

그리고 투명히 제 모든 것을 내비치는 듯 하면서도…

 

 

“ ...비밀이 많은 사람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 그렇군요. ”

 

 

팔랑. 팔랑. 잠시 말이 끊어진 사이 뭐가 그리 불안한지 정신 사납게도 부채를 부쳐댄다. 그저 지나가던 남궁 소가주를 붙잡아 느닷없이 청명에 대한 제 생각을 늘어놓은 임소병. 뭐 어쩌라는건지 조용해진 분위기 속 그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꺼낸다.

 

 

“ 그래서 어떻습니까?! 요즘 청명 도장이 뭔가 다르거나 이상했던 점이라던가… ”

“ 평소랑 똑같던데요? 질문 끝나셨으면 수련하러 가보겠습니다. ”

 

 

뭐 심각한 고민이라도 있나 했더니만. 그냥 불안해 죽겠는 녹림왕의 생각 정리용 상대가 되었다는걸 드디어 깨달은 남궁도위는 꾸벅 인사하곤 자리를 떴다. 

 

젠장, 이걸로 오늘만 몇 번째인가. 이제 더 이상 붙잡고 말할 사람도 없다. 

 

답답히 타들어가는 속. 청명이 어울리지도 않는 비교질을 하며 잔뜩 찝찝하게 만들어놓고 떠나간지 벌써 열흘이 다 넘어가는데 그는 어디서 뭘 하고있는지 통 올 생각을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져서라도 자고 가라고 할걸. 

 

드문드문 보는게 당연하던 때에는 안보여도 그러려니 했건만. 매일 보던 얼굴이 안보이니 이거,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 아휴… 미쳤지… 미쳤지 내가… ”

 

또다시 터져나오는 한숨. 그새 조금 마른듯한 임소병은 매화가 가득 핀 정원을 거닐다 청명의 숙소 앞으로 슬슬 걸었다. 별 목적은 없었다. 그냥 가다보면 아직 안지워진 발자국이라도 있을까 싶었을 뿐. 

 

“ … ”

 

임소병은 낮은 돌계단에 걸터앉아 생각했다. 혹시 내가 제 옆에서 행복해보이지 않는다고 느꼈던건가. 이제 막 마음을 연 애늙은이한테 이런 장난은 시기상조였나. 돌아오면 어떤 말로 기분을 풀어줘야 할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보니 도달한 곳은 열흘전의 그 질문. 

 

 

“ 왜 좋아하느냐니… ”

 

 

웃기지 않은가.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있냔 말이다. 어디 산속에서 죽을수도 있던 목숨을 살려주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막막할때마다 늘 예상치 못한 희망을 가져다주던 사람인데 말이다. 

물론! 성격에 흠집이 조금 많이 있기야 하지만. 그 외에도 이유야 많았다. 정말 차고 넘쳤다. 청명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임소병은 그를 생각보다 많이 좋아했다. 

그렇게 많은 이유가 있는데도 정할 수가 없던건 단순히 그가 뭘 원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어느 부분에서 기가 죽은건지 알아야 뭘 하던가 하지. 이렇게 막연하게 가버리면 어쩌자는 말인가. 

 

 

며칠간 잠을 심하게 설쳐서인지 점점 나른해지는 몸. 

햇볕 아래 혼자 오래도 앉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임소병은 결국 그가 돌아왔을때에 어떻게 달래줄지 나름대로 대책을 세웠다. 그래, 비싼 술을 진탕 먹여서 기분좋게 만들어두고 입으로 해주자는 기가 막힌 해결책을. 

그러곤 곧 깨달았다. 아무래도 수면부족이 지능을 떨어뜨리는 것 같다는 사실을...

 

 


 

 

“ … …어헉! ”

 

 

대체 언제 어떻게 무슨 정신머리로 길바닥에서 잠든것인가. 아무리 동맹이라 해도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깔려있는 공간에서 무방비하게 잠들다니. 어쩌면 자다 죽었어도 할 말이 없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꿈과 현실 그 사이에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점점 해석해가던 두뇌가 길바닥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도출하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임소병. 흐릿한 눈을 감고 깨자마자 놀란 탓인지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으려니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 … … …음? ”

 

 

뭘 살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개인 침실. 

분명 길바닥에서 잠들었을텐데 누군가 옮겨주기라도 한 것인지 곱게 이부자리 위에서 깨어나 있었다. 놀라 깨어나기 전까지는 아마 주름 한점 없이 덮여있었으리라 추정되는 이불을 내려보던 임소병은 조심히 일어나 조금 현기증이 이는 발걸음을 옮겼다. 

 

외출복 차림 그대로 문을 열어보니 대체 얼마나 퍼질러 잔것인지 하늘에 떠있던 해가 그새 달로 바뀌어 있다. 서늘해진 공기와 고요하기 짝이 없는 넓은 마당. 하루를 날려먹은 충격에 머리가 지끈거려 잠시 미간을 짚고 있으니 점점 잠이 깨며 머리가 맑아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방금까지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누군가의 기운이 느껴진다. 것도 아주 맑고 익숙한 기운이.

 

혹시나 하며 고개를 들어 지붕 위를 쳐다보니 역시나. 팔자 좋게 앉아있는 그와 눈이 마주친다.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있을때에 도착한건가?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달빛 아래 조금 낯설어보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기억과 다를 바 없다. 저 무심한 표정까지 말이다. 

 

 

텁. 

 

 

가볍게 임소병의 앞으로 뛰어내린 발걸음. 줄곧 보아왔던 장면이지만 둘 사이 조금 어색한 기류가 감돈다. 역시나 먼저 입을 떼는 임소병

 

 

“ 언제 오셨습니까? ”

“ 좀 됐어. 언제지... 누가 내 방 앞에서 노숙하고 있을때 쯤인가? ”

 

 

지나가던 번충이 우연찮게 발견하기라도 했나 싶었는데 이 사람이었군. 하기야, 우리 애들이었다면 아마도 두툼한 이불을 목까지 얹어두고 조금 구겨둔채로 갔을 것이다. 

굳이 볼 일도 없는 청명의 방 앞에서 잠든채 발견되었다는 것에 다소 민망한 마음이 들어 소매 끝자락을 괜히 만지작댄다.

 

 

“ …여행길은 피곤치 않으셨습니까? ”

“ 가다가 몇 놈 시비걸어서 날린거 빼면 뭐 평화로웠지. ”

 

 

아직도 이 근방에 그런 용감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뭔가 공백이 많고 어색한 대화. 만나면 얼굴보고 할 말을 그렇게나 생각했는데, 왠지 평소와는 다른 기류에 어서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 무사히 오셔 다행입니다 도장.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주무시지요 ”

“ 그러려던 참인데… 그 전에 잠깐 시간 되냐? ”

“ 몸이 조금 피곤해서 말이죠. 내일 얘기하는건 안되겠습니까 ”

“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

 

 

정말 답지않게 무거운 말투. 과연 달빛 때문일까? 청명은 떠나기 전보다도 왠지 가라앉아 보인다. 흔히 하던 농담이나 불평조차도 할 생각이 없어보일 정도로.

끄응. 뇌리를 스친 불길한 예감에 순간 심장이 덜그럭댔다.

언제였던가. 임소병은 과거 몇번씩 이 분위기를 겪어본 적이 있다.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으려 표정을 덤덤히 두고는 있지만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숨기는듯한 모습. 

 

 

‘ 이런날이면 아무리 애써도 꼭 이별이 다가오곤 했었는데. ’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우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니 청명이 발걸음을 옮긴다. 관계를 들키게 되면 파장이 클 둘이니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애용하던 나무 뒤 자그마한 풀밭. 낮에도 유독 조용한 그 장소는 오늘따라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

 

 

부러 질질 끄는 걸음으로 말없이 걸어와 늘 그랬듯 청명의 왼편에 앉은 임소병. 

단순한 새벽의 추위인지 긴장인지 몸이 조금 경직됨을 느껴 옆으로 붙어앉으니 청명은 팔을 뻗어 어깨를 감싸주었다. 시선을 올리면 눈에 들어오는건 저 멀리 허공을 보고있는 옆모습.

" ... ... "

" ...큼, "

할 말 있는 사람이 먼저 입을 떼주길 기다리던 임소병이 답답한지 옆구리를 쿡 찌른다. 그러자 마주보는 시선이 마찬가지로 다소 경직되어 있는것이... 괜히 사람 불안하게 만드네. 돌아보고도 눈만 껌뻑이는 청명에게 소병은 조금 위축되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도장. 혹시 저 피말려 죽이는게 취미십니까? ”

“ 왜. 많이 피곤해? ”

“ 아뇨 분위기 잡으니까 긴장돼서요 ”

 

 

뭘 또 긴장까지 해. 뒷말을 잘라냈는지 평소보다 조금 짧은 투덜거림을 뱉은 청명. 생각을 정리하는건지 멍때리는건지 한쪽 무릎을 세운채로 손을 꿈질거리던 그는 더 오래끌면 안되겠다 싶었는지 드디어 말을 꺼낸다.

 

 

“ 저번에 했던 말 기억나지. 날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고 ”

올 것이 왔다. 열흘 내내 생각했던 그것. 임소병은 수많은 대답을 준비해 왔다. 청명의 태도, 기분에 따라 어떻게 대답할지도 정해서 말이다.

“ 예. 대체 물어본 이유가 뭡니까? 것도 집 나가기 하루 전에 ”

“ …이유가 있나? 궁금해서 물어본거지 뭐. "

그러니까 그 궁금했던 이유가 뭐냐고요. 답답해진 소병이 입을 달싹거리니 청명이 곧바로 이어 말한다.

" 이제 와서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어. 그 날 생각이 좀 많았거든 ”

 

 

덜그럭. 

이제 와서, 굳이, 정인에게 듣고싶지 않은 말 경연을 한다면 적어도 20위 안에는 들 수 있는 불길한 징조의 상징 아닌가. 갑작스럽게 홀로 많은걸 정리해 버린듯한 그의 태도에 조금 당황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양 호흡을 가다듬는 임소병. 마주보는 청명의 표정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 내가 그동안 뭘 잘해준 것도 아니고 해준것도 딱히 없고. 일정은 개판에… 솔직히 말해 맨날 너 혼자 애쓰고 고생하잖아. ”

“ 아는 사람이 그럽니까? 알면 이제부터라도 잘 해 보시던가요. ”

 

억지로 기분을 끌어올려 가볍게 내뱉은 말은 내가 졌으니 그만해달라는 임소병의 항복 신호였지만… 청명은 그 절박한 시선을 피하며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 ...미안. 저번에도 그러고 가서 신경 많이 쓰였지?  "

" 아니, 왜... "

마음의 동요가 숨길 수 없이 커진 것인가. 말 끄트머리가 꼭 울음을 참는 사람처럼 살짝 흔들렸다.

" 봐라, 또 울리기나 하고.  아 왜 벌써 울어 ”

 

 

청명은 그새 조금 더 마른 어깨를 쓸어내리며 제법 다정하게 달래는 투로 말했다. 

이 말코새끼가 평소에나 이렇게 좀 하지 왜 말마따나 이제와서 이러냐. 임소병은 억울해 죽을 것 같다. 난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닐뿐더러 여기서 어떤 말을 듣던 무조건 담담하게 도도하게 나가겠다고 다짐했었다. 게다가 아직 울 생각도 없었는데 그 말을 들으며 쓰다듬어지니 이상하게 울컥하는 것이다. 

와중에 귀에 들어온 벌써 우냐는 말이... 전쟁은 좀 이기나 싶을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라더니 딱 이 꼴이구나. 소병은 체면이고 뭐고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떨구곤 말했다. 

 

 

“ … … …됐습니다. 알았으니 본론만 말하십쇼 ”

 

 

그러자 어깨를 쓸던 손을 조심스레 내려 차가운 손을 잡아주는 청명. 보이지 않는 저 표정이 무섭다. 

짧은 침묵이 지나곤 말이 이어진다.

 

 

“ 그래. ...넌 본래가 괜찮은 녀석이니 그 누구한테 가던 환영받을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옆에 붙어서 이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어 ”

 

 

임소병은 눈을 꾹 감았다. 담대하고 회복력도 강한 그 또한 그저 나약한 인간이라고 끄집어내는 듯한 이 순간이 너무 싫었다. 이제 말에 숨길 수 없이 울음기가 묻어난다.

" ...그래서요? 이제 그만할까요? "

결국 입 밖으로 나와버린 그 말. 청명은 조금 부스럭대더니 툭 대답했다.

 

 

“ 뭔 소리야. 그러니까 나 좋아할 이유 하나 만들어준다고 ”

 

 

응?

 

 

축축해진 눈을 번쩍 떴다. 히죽, 바로 코앞에서 얄밉게 웃고있는 얼굴. 

" 예? "

" 손 봐봐 "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가?

울먹이다 말고 벙쪄버린 임소병. 손, 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여태 잡혀있던 손가락에 뭔가 이물감이 느껴진다. 

" 아… … … ”

 

 

대체 언제. 뭔 귀신도 아니고 이 분위기에서 무슨 재주로 이걸 끼워두었단 말인가. 따뜻하고 투박한 청명이놈의 손 위 얹혀있는 마르고 흰 손. 그리고 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당했다. 

이 어린놈 손바닥 위에서 완전히 농락당했다. 긴장이 풀리며 밀려오는 안도감에 임소병은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걸 보며 배를 잡고 낄낄 웃어대는 청명.

" 마음에 드냐?  "

 

대체 언제부터 이러려고 작정한 것인가. 그리고 나 자신은 왜 이 뻔한짓에 홀랑 넘어가 당해버린 것인가. 그래, 생각해보면 그냥 처음부터 이상했다. 고작 이런일에 기죽을 인간도 아니고 자기가 한 말은 지키던 사람인데. 안된다면 되게 만들고 복잡한 문제는 정면돌파하는 것이 그의 방식 아니었는가.

 

이게 수치심인지... 안도인지... 자꾸만 눈물이 질질 나오는데 이 고약한 말코가 자꾸 얼굴을 들여다보려 기웃댄다.

 

 

“ 간만에 비싼 선물 쥐여줬는데 요거 얼굴 좀 보자. 엉? ”

“ … … …아 됐습니다! 잠이나 자러 가십쇼! ” 

“ 그러게 감히 도사를 놀려먹어? 아 속이 다 후련하네 ”

 

 

아... 복수하셨군요. 

그래. 이렇게 쪼잔하고 가혹해야 이 사람이지.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훌쩍이던 임소병이 고개를 슬쩍 들어 손을 다시 내려본다. 

" ...킁, "

무늬도 없고 밋밋하기 짝이 없지만 반짝이는 태가 척 봐도 어디 아무데서나 살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청명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걸 사왔을까. 상상하다 보니 놀랐던 만큼이나 조금씩 차오르는 충족감. 눈물이 잦아들며 조금 진정한 임소병은 옆에서 귀가 떨어져라 놀려대는 그를 죽일듯 째려보더니 이내 목에 두 팔을 감아 꼭 끌어안았다. 

예쁘다고 안았나? 아니,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도 둥둥거리는 심장소리 좀 들어보라고 안았다.

 

 

“ …들립니까? 이런거 두 번만 더하면 저 제 명에 못 죽습니다… ”

“ 뭐 어때. 내가 살려둔건데. 그리고 그거 진짜 비싼거라 두 번은 해줄래도 못해줘 ”

" 어휴... 그냥 내가 죽지... 죽어... "

청명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푸념하는 임소병을 마주 안더니 머리를 쓰담는다. 이상하게도 한참 어른 같은 느낌이 드는 손길. 익숙한 체향에 마음이 점점 풀려나간다.

...그래, 좋은게 좋은거지 뭐 어쩌겠나. 이건 이미 지는걸 확정하고 들어간 시합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소병은 곧 완전히 진정된 편안한 표정으로 밀린 얘기를 듣곤 그가 없는 사이 겪은 고생들을 털어놓으며 마음껏 불평했으며, 소소한 고백들을 했다. 청명은 또 그의 기나긴 인생사에 비하면 그닥 흥미진진하지도 않을 그 이야기들을 귀기울여 들었다. 어떠한 목적도 없이 그저 함께한다는데에 의의를 둔 대화가 이어지니 점차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이기 시작한다.

고요했던 풀밭은 이파리들이 나부끼는 소리가 반복되며 생기가 돈다. 그저 그뿐인 이야기리라.


(*아래는 후기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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