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화산귀환] 무제

두번째 정마대전 이후 당패와 정체를 밝힌 청명이 대화를 나눕니다.

Pumpkin Time by 화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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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귀환 1120화가 최신화일때 작업시작한 글이며 이후 원작에서 진행되는 내용과 어긋나는 내용 및 설정이 다소 포함될 수 있습니다. 1120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 손풀기용 퇴고X 단문.

전쟁이 끝나고 그 뒷수습마저 마무리되어갈 때 즈음 당가의 소가주, 당패로부터 화산에 서신이 도착했다. 서신의 내용은 짧았다. 청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갑자기 온 연락에 어찌할지 그에게 물었으나 청명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그게 뭐 어려워서 거절하느냐 대답하고는 휘적휘적 검을 들고 연무장으로 나갔다. 그리 답신을 보낸 뒤 며칠이 지나 당패가 화산에 방문했다.

당패가 화산에 거의 다다랐다는 소식을 접한 백천이 곁에서 빈둥대던 청명을 데리고 마중 나가자 막 화산에 도착한 당패와 마주쳤다. 전쟁 이후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그들도 가벼이 근황을 주고받자 그들 사이에 퍼지는 훈훈함에 한때 수련으로 암기와 검을 주고받았던 사이였다는 사실도 잊을 것 같았다. 

"대체 언제까지 수다만 떨고 있으려고? 나 그냥 처소로 돌아간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는 시큰둥한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한 곳으로 획 돌아갔다. 전쟁 전 그로부터 혹독히 받은 수련 탓에 몸에 새겨진 반사 신경이었다. 백천의 뒤에서 휘적휘적 따라오던 청명이 삐딱한 자세로 멈춰 섰다.

"오랜만입니다."

호칭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포권하며 가볍게 인사했다. 예전이었으면 '청명 도장' 내지는 '화산검협'이라 불렀을 테지만, 지금은….

청명은 전쟁 중 자신이 매화검존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천마의 목을 베고 깨어났을 때 지금의 몸이었노라고. 그가 전쟁 중에 정체를 밝힌 이유는 단순했다. 매화검존梅花劍尊이라는 별호가 마교와의 전쟁에서 어떤 빛을 발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피로 얼룩진 전쟁의 빛이었고, 희망이었다. 이번에도, 그리고…… 아마 백 년 전에도. 

당패는 그 백 년 전의 전쟁에 대해 청명에게 이야기를 듣고자 화산을 찾아온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당가뿐만 아니라 화산도 매우 바빴기 때문에 방문할 틈을 찾지 못했지만 이제야 숨돌릴 틈이 나니 미루지 않고 곧장 연락을 취한 것이다.

"뭐야? 날 만나고 싶다더니, 설마 빈손으로 왔냐?"

"청명아……, 제발……."

청명이 툴툴거리자 백천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정체가 충격적이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청명은 화산의 삼대제자로 남고자 했고, 화산의 모두가 청명을 이전과 같이 대하고자 했다. 청명이 본인 입으로 매화검존 이야기를 해줄 때를 제외하여 화산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매화검존에 대한 언급 및 취급은 암묵적으로 금기시하고 있었다.

어째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풍경에 당패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제가 시간을 내어 달라고 했는데 어찌 빈손으로 왔겠습니까. 당가에서 귀한 술을 챙겨왔습니다."

"크, 이 맛에 애들 키우는 거지. 가자,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해줄 테니까."

당패의 말에 청명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다가와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격한 움직임에 잠깐 휘청인 당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걸음을 따라 이동했다. 백천을 지나치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술 하나에 태도를 바꿔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제 선조의 모습에 백천은 결국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오, 역시 내 취향을 잘 안다니까. 비싼 술들로 잘 골라왔네."

탁자에 올라온 술병을 훑은 청명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무엇부터 마실지 고민하나 싶더니 가운데에 있던 술병 하나를 턱 집어 들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술병 마개를 따면서 당패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당가의 소가주나 되는 놈이 날 찾아온 거냐? 보아하니 화산검협이 아니라 매화검존에게 볼 일이 있나 본데."

"……둘은 같은 인물 아닙니까?"

"당연히 동일 인물이지. 하지만 전쟁도 끝난 판국에 굳이 그 별호를 달고 다닐 생각은 없다. 전쟁 끝나고 매화검존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며 찾아오는 녀석이 어디 한둘인 줄 알아? 네가 당가 놈이라 거절 안 하고 받아준 거야. 그러니까 얼른 물어보고 돌아가라. 아직 당가도 어수선한 것으로 아는데, 소가주라는 인간이 자리를 비워서야 되겠냐?"

"백 년 전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병째로 술을 마시려던 청명의 손이 멈췄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청명이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당패를 바라보자 잠깐 움찔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움직임을 못 알아챌 청명도 아니었지만. 이내 한숨을 푹 내쉰 그가 꼴깍이며 들고 있던 술을 마시고는 병을 내려놓았다.

"……백 년 전의 전쟁은 왜? 다 끝났는데."

"이번 전쟁은 끝났죠. 뒷수습도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당패가 청명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게 백 년 전 전쟁을 궁금해하지 않을 이유가 됩니까?"

"……화산은 나를 포함해 기록을 남길만한 녀석들도 죄다 대산에서 죽어 기록 조차 남기지도 못했고, 설사 남겼다고 해도 마교 놈들이 쳐들어오면서 죄다 불타 마교에 대한 정보조차 남지 않았다. 그러니 화산의 제자들이 내게 과거의 전쟁에 대해 묻는다면 이상할 것이 딱히 없지만, 당가는 경우가 조금 다르지. 당가에 충분히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더냐?"

"전쟁 당시 당가의 많은 식솔들이 죽고 다쳤지만, 다행히 기록은 안전하게 보관되어 상한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툭 튀어나온 어르신 말투에 당패가 잠깐 눈을 끔뻑였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에 청명이 미간을 좁히고서 대꾸했다.

"전쟁은 끝났고, 기록은 남았다. 그럼 그 기록으로 충분하지 않나?"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지 않습니까."

청명이 침묵하자 당패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전쟁은 끝이 났고, 살아남은 이들은 참혹했던 과거를 잊고서 평화에 젖었습니다. 부끄러운 사실입니다만, 마교가 다시 준동하기 전까지만 해도 과거 전쟁에서 희생되신 분들을 기리지 않았고요. 하나, 도장과 수련하면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깨달았고, 전쟁을 치른 이후에는 모든 기록을 살폈습니다."

소가주가 되기 전에도, 된 이후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과거의 기록에는 그가 모르는 사실들이 가득했다. 당패가 몰랐으니 아마 당잔이나 당호도 몰랐을 것이다. 과거에 선조들이 얼마나 피튀기는 전쟁을 해왔는지, 당가의 암존暗尊이 화산의 매화검존과 사흘 내내 마교의 별동대와 싸워 박살을 내는 등 전쟁에서 절대 고수가 어찌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는지…. 그런 처절한 기록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백 년 전의 전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청명 도장…께 이야기를 듣고자 연락을 드렸던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자들에게 미래란 없는 법이라고들 하잖습니까."

그 말을 들은 청명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느릿하게 끔뻑이다가 피식 웃었다. 아무도 지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기억해주지도, 기억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 누구도 제 친우와 가족 같은 사형제들의 죽음을 입에 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잊힌 과거를 늘 가슴에 품고 산 사람은 청명뿐이었다. 그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움에 잠겨 과거에 종종 머물고는 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청명만이 제 눈앞에 있는 당패 뿐만 아니라 천우맹에게 미래를 손에 쥐여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났으니 더 이상 백 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더니….'

한참 생각하던 청명이 말없이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청명의 앞도, 당패의 앞도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술잔을 두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곳에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청명의 손짓을 따라 당패의 시선이 움직였다. 하나 남은 술잔에 술을 따른 뒤 당패에게 건넨 청명이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내가 당가를 좋게만 이야기하진 않을 텐데?"

"역사에 어찌 좋은 이야기만 있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강경한 태도에 청명이 헛숨을 내뱉으며 피식 웃었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당가 놈들 중에 정신 나가지 않은 놈이 없어."

술을 입에 쏟으며 잠시 말을 고르다가 청명의 기억 속에만 남았던 과거의 시간이 그의 입을 통해 현재로 이어졌다. 

당가에서 기록을 찾아본 당패가 기록을 넘어서 그 전쟁의 희망이었던 매화검존으로부터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게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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