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소소] 가출을 잘 하는 사천당가의 독녀 (2)
거기 가주님 딸이 있는데, 데려와야 한다고요? 제가요?
* 원작파괴 시점: 당가에피와 운남에피 사이
* 청명이 당가를 방문하기 수년 전 소소가 강호로 자의 반 타의 반 가출을 하여 비영의(飛影醫: 그림자를 날리는 의원)라는 별호를 가지게 되었다는 설정입니다 청명이가 당군악의 부탁으로 비영의를 회유하러 갑니다
* 무협알못
십수개의 호롱불이 어두운 산 속을 밝혔다. 일렁이는 빛의 행렬은 사천당가의 독녀가 있는 혼례길이었다. 친영행렬은 매우 화려했지만, 그것이 무색하게 주변은 어둡기 그지 없었다. 혼례길은 군중의 환영도 푸른 하늘조차도 없이 깊은 밤중 도망치듯 이루어졌다.
"나도 말 위에 있을래."
"안돼요, 공녀님. 가마 안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는 명이 있었어요."
"아버지의 명이니?"
".......그건..."
당소소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사천은 마치 하나의 작은 국가나 마찬가지이고, 당문은 그곳을 통치해온 왕부(王部)나 다름없다. 당가주의 독녀(獨女)인 당소소에게 지위와 부란 그녀가 태어날 적부터 당연히 주어지던 것이었다.
어릴적의 당소소는 자신의 삶에 어떤 제약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수많은 불가능의 존재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예외의 대상이었다.
매일 같이 당가주의 무릎 위에 앉아 장난을 치다 잠들곤 했던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란 언제나 그래왔듯이, 야무지게 요구하면 무엇이든 흔쾌히 주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얼마 안 가 자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스승님,"
또랑또랑한 아이의 음성에 당소소의 스승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배우는 비도술은 패 오라버니나 잔이가 배우는 것과는 다른 것 같아요."
"당가의 여인이 배우는 비도술은 당가의 무학과 궤가 다릅니다."
"저도 오라버니와 동생들이 듣는 가르침을 받고 싶어요."
"......"
"안되나요?"
"그것이 저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저는 당가의 무학이 궁금해요. 저도 이 가문의 근본인 당가의 비도술과 독공을 알고 싶어요."
"소소 아가씨..."
"...아버지께 이야기를 해보면..."
.
.
.
"발칙한 것이!"
성난 원로의 목소리에 당소소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번 가주는 마음에 들지 않아. 애지중지하는 딸이 당가의 법도마저 깔보고 있지 않는가. 제 자식 하나조차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당가를 경영할 수 있어!"
마치 하늘 같이 멀고도 두렵기만 했던 원로원의 장로들이 당소소의 코앞에서 그녀를 비난했다.
가문의 은혜를 모르고 욕심이 하늘을 찌른다고. 그녀가 바라는 것은 가문의 근본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의 터전이었던 당가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그녀의 아버지가 당소소의 어깨를 감싸왔지만, 당가의 장문이라고 하던 당군악도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태상장로들이 강보에 싸온 회초리를 무르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당군악이 다정히 타일렀다.
"소소, 궁금해하는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이 아비도 들어줄 수 없구나."
"당가에는 무학 말고도 다른 유용한 기술들이 있지. 원한다면 배우게 해주마."
내가 그 말에 뭐라고 했더라.
곤란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고 변명했는지, 눈물을 쏟았는지.
죄의 무게를 직시하기 어려워 고개를 떨구고만 있었는지.......
그 후로 당소소는 증명해야만 했다.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믿음이 가문을 망칠 어리석음이 아니라는 것을.
무학엔 일절 관심 두지 않았다. 당가의 의술을 섭렵하고 여인에게 필수라는 바느질과 자수를 배웠다. 허용된 비도술도 일정 수준 이상 습득했다.
그녀를 가르친 스승들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는 당소소의 재능에 찬사를 보냈다. 당소소는 종종 되뇌었다.
이거면 충분해.
이젠 더 이상 아버지를 곤란하게 하지 않아.
형제들처럼 무학을 계승하지는 못하지만 이대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하지만...
이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
그 해 당소소는 자신에게 들어온 혼처를 반려했다. 당군악은 그 뜻을 존중해 주었다. 좋은 기회를 제 발로 차버렸다며 오랜만에 노인네들의 핀잔을 받았다.
.
당가타의 어느 한 구석에 어린 여자아이의 통곡소리가 울려퍼졌다.
다른 여아들이 그녀를 달래려 애를 썼지만 회초리가 왔다간 종아리의 환부는 고름이 노랗게 짓무른 모습이 너무도 끔찍해, 빈말로도 괜찮다는 말조차 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벌로 인해 입은 부상이므로 그 어떤 치료도 하지 말라는 명이 떨어졌으나, 보다 못한 당소소는 약과 침을 싸들고 여아의 숙소에 들이닥쳤다. 평소에는 갈 일도 없는 장인의 여식들이 지내는 곳이었다.
다음날 술시까지 치료를 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다는 당부를 모조리 무시하고, 이러다가 더 큰 벌을 받는게 아니냐며 우는 아이에게 마치 벌을 주듯이 막무가내로 상처를 씻고 약과 함께 싸매주었다. 고통을 덜어주는 풀을 찧어 즙을 내고 감초와 함께 먹였다. 짠 눈물에 팅팅 불은 여아의 눈이 점차 이지를 찾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그..."
"소소 언니."
"소소 언니. ...덕분에 살 것 같아요."
"아픈데 치료도 받지 못할 죄는 아닐테니까."
"그런데..."
여아가 잠시 진정했나 싶더니 또다시 히끅대며 울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이 아니다. 무저갱같이 막연한 두려움이다. 조그마한 아이는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 통곡을 꾹꾹 눌러담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저 이제... 시집 못 가나요?"
"뭐?"
이게 뭔소리냐 홱 고개를 돌리자 다른 여아들이 황급히 설명을 시작했다.
"서하가 수련하는 어른들을 훔쳐보다가 걸려서 이 꼴이 난거거든요."
"비전을 눈에 담아버린 여자들은 무학이 유출될 수 있으니 당가 밖을 나가지 못하고, 평생 여기 갇혀서 지내야 한다고 어른들이 겁을 줬어요."
"그건 아니라고 얘기해주었는데도..."
어른들의 짓궂은 거짓말에 이 서하라는 아이는 세상을 잃은 듯이 울고 있었다.
혼인 못 하는게 뭐라고. 그게 그리 아쉬워서 울 지경인가? 물론 이 아이의 두려움이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남편이 없는 여인의 고달픔을 이 어린 것도 아는 게지.
"어쩌면 그게 맞을 수도 있어."
"네?"
"뭐 어때? 만약 여기서 나오지 못하게 된다면 어버지에게 기술을 전수해달라고 해봐. 잘하면 장인이 될 수도 있을거야. 이름은 알리지 못하겠지만."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해봤어?"
"......."
"잊지마. 여기 어른들이 아무리 앞길을 막아도, 그중에서도 네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있어. 그것이 그저 참고 감내하는 것이라도."
당소소가 서하의 퉁퉁 부은 다리에 침을 놓아주었다.
"답답하긴 하지만 여기가 공방만 몇개야? 당가만큼 배울 기회가 많은 곳도 없어. 너만의 기술이 있다면 아무도 널 쉽게 건들지 못할거야. 막말로 처가살이 해서라도 장가 오겠다는 남자도 있을 수 있고. 그럼 당가를 나오지 않더라도 혼인은 할 수 있잖아?"
"........"
"하긴, 이런 말도 무책임하긴 하지. 일단 내 말대로 해봐. 그리고 열여덟이 되고 나서도 앞날이 막막하면 나한테 와. 유용한 패물이라도 쥐여줄테니."
"...네에."
.
.
.
가마 바깥에서 풀숲이 스치는 소리에 이어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쇠붙이들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보지 않아도 덥고 붉을 피가 땅을 후두둑 적시는 소리.
이내 이 행렬에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그녀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가마로 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이 당소소에게 말했다.
"정말로 당가의 비전을 모르는지 이 칼로 직접 시험해보라는 명이 있어서."
당소소는 가마 속에 앉아 품 속에 있는 비도를 쥐었다. 열여덟이 된 서하가 혼인 길을 떠나던 당소소에게 준 선물이었다.
-앞날이 막막하니까 유용한 패물이라도 쥐여드릴게요, 소소 언니.
.
.
.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말을 마친 당소소가 아차 하며 보이지 않도록 작게 혀를 빼물었다. 저도 모르게 아가씨일 적의 어투를 쓰고 말았다. 당소소는 비영의라는 별호를 인지할 무렵부터 일부러 어르신의 말투를 썼다. 자신의 목소리와 말투가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녀의 사소한 전략이었다.
당혹감도 잠시, 그녀는 죽립의 틈새 너머로 침착하게 청명을 바라보았다. 검은 무복을 대충 걸치고는 칼 하나만 차고 온 행색에 비해 그가 앉은 식탁 위의 음식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또 술은 저거 대체 몇 병이야? 혼자 먹은 거 맞아?
비무행을 다니는 검객인가? 아니면 저번의 기루 칼잡이들 같이 어디서 듣고 온건지 모르겠는 소문으로 찾아온 걸 수도 있다. 아무튼 정보를 얻으러 다니는 거지나 하오문도는 아닌 듯 하다. 무인인 것은 맞는데, 실력은 어느정도인지는 잘 감이 오지 않는다.
'누구지?'
한편, 그녀를 관찰하고 있는 건 청명도 마찬가지였다.
'얘구나?'
청명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당소소의 장포였다.
'뺏어 입었네.'
염색을 한번 더 거쳐 검게 보이도록 만들려 한 흔적이 보이지만, 당소소가 입은 것은 당가 특유의 소매가 넓은 녹빛 장포가 맞았다. 자주 본 이가 아니라면 잘 모를 수준이기는 하지만.
당군악의 말에서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저것은 아마 당소소를 데리러 갔던 형제들 중 하나의 장포였던 것인 듯 하다. 어느 연약하고 불쌍한 놈이 빼앗겼을꼬. 쯧쯧쯧.
물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요함은 당가인으로서 좋은 자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청명은 당소소를 화산에 보내어 의술을 전수하게 하겠다는 당군악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런 애를 화산에 데려와도 되는걸까?
근묵자흑이라고. 애들한테 안 좋은 영향이 가면 안되는데, 쩝.
청명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서로 시선만 던지는 시간이 길어지자 당소소가 먼저 침묵을 깼다.
"나와."
아까와는 달리 전혀 격의 없는 어투, 이를 악문 목소리였다.
"저요?"
눈앞의 소년이 시큰둥한 얼굴로 저를 가리켰다.
너 아니면 누구겠냐?
"그래. 그냥 나와. 굳이 여기서 얘기할 이유 없잖아?"
"그건 그렇죠."
청명이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왜 이렇게 열이 받지.'
당소소가 돌아서며 입을 꾹 다물었다. 외관은 자신보다 어려보이면서 기껏 먼저 건넨 말에는 대답도 않는 청명의 태도가 조금 거슬렸다.
경고로 살기를 살짝 흘릴까 싶기도 했지만 사람의 왕래가 많은 객잔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어차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용건으로 온 것은 아닐 터였다. 뭔진 몰라도 당장 적대심을 드러내지는 않으니 일단 평범한 이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실력이 어느정도인지는 잘 감이 오지 않는것이 영 불길하지만...
반면 이 놈은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이 손을 뒤로 모은 채 당소소를 따라오고 있었다.
순진한건지 생각이 없는건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그저 겁은 없고 호기심이 많은 애송이인듯 한데, 적당히 겁 줘서 돌려보내자.'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걸 보면 최소한 어줍잖은 힘으로 설치는 부류 아닌 모양이군.'
두사람은 숲으로 향했다. 장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자욱했다.
서로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쓰면서 들은 음악 : 영화 아가씨 b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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