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도사 귀농일지 04.
화산귀환 ncp 회지 샘플
첫 삽을 뜨고부터 일 년. 길고도 길었던 공사 끝에 완성된 집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친구는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 작품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청명은 눈앞에 나타난 익숙하고도 그리운 장소를 보며 말없이 추억에 잠겼다.
내부 마감과 인테리어는 어느 정도 타협했지만, 방의 위치나 큰 틀만큼은 수정 없이 그대로 밀어붙인 집의 외형은 화산의 장문인 저를 똑 닮아 있었다. 원본이 되는 건물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테지만, 두 번의 생을 살며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장소였던 만큼 청명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곳의 풍경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청명이 오면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주던 청문이 있었고, 또 무슨 사고를 쳤냐며 손에 당과를 쥐여주고선 얌전히 실토하라고 구슬리는 백천과 틈만 나면 검을 대보자던 이설이 있었으며, 틈만 나면 사고를 쳐 장로의 품위를 깎아 먹는다는 이유로 혼이 나는 조걸과 잔소리하는 소소, 그 모습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던 윤종이 있었다. 사소하고 별거 아닌 일상들이 정말로 소중하다 깨닫고 났을 땐 전부 잃어버린 후라니. 청명은 씁쓸한 마음을 꾹 누르며 품에 안긴 백아의 정수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수고 많았다.”
“너도.”
두 사람은 툇마루에 앉아 마당의 매화나무를 바라보며 맥주캔을 부딪쳤다. 지난겨울 조경을 위해 담장을 따라 미리 심어둔 묘목이 무사히 자리를 잡고 꽃을 피운 것이 소담하니 보기가 좋았다. 화산이라면 응당 이래야지. 별다른 말은 없어도 만족스럽게 웃는 청명을 보며 친구 역시 따라 웃었다.
“너 그렇게 기뻐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런가?”
“다음 주에 이사한다고 했던가?”
“어, 부모님이 도와주신대서.”
“너무 시골이라 사실 좀 걱정했는데, 너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뭐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진짜 청명이 너라서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친구가 새 육포를 까서 제일 큰 조각을 백아에게 건네자, 백아는 그것만 쌩하니 받아 들고는 청명의 품에 자리를 잡았다. 적어도 백아는 확실히 너만 좋아하긴 하네. 그렇게 말하며 가벼운 한숨을 흘리자 청명은 얻어먹는 주제에 예의가 없다며 백아의 머리를 가볍게 콩, 두드렸다. 백아는 육포와 청명을 한번 번갈아보더니, 이내 품에서 나와 친구의 손에 머리를 한 번 꿍, 부딪히고는 제 발을 손가락 위에 착하니 올렸다. 그리고는 이거면 됐지? 하고 인간들을 돌아보는 태도에 청명과 친구는 그만 속절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새로 산 가전제품들은 미리 시골집으로 보내놨고, 생필품이나 식재료. 잡다한 살림살이는 현지에 가서 살 예정이었던 청명의 이삿짐은 생각 외로 단출했다. 옷가지와 컴퓨터, 당장 쓸 이불과 책 몇 권이 짐의 전부였다. 상자에 나눠 담는 것으로 이사 준비는 간단히 끝이 났다.
새 물건에 그다지 욕심이 없던 만큼 사용하던 침대나 가구를 챙겨갈까 고민했었으나, 부모님은 가구 역시 새로 사는 게 어떻겠냐 넌지시 제안했다. 하나뿐인 아들의 흔적을 너무 갑작스럽게 지우고 싶지 않아서였기도 했고, 청명이 언제 돌아와도 마음 편하게 지낼 곳을 남겨두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여기도 평생 청명이 네 집인 걸 잊지 말거라.”
부모님은 청명의 손에 통장 하나를 쥐여주었다. 청명의 이름으로 개설된 통장에는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있었는데, 못해도 몇 년은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청명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부모님이 웃으며 설명했다.
“이게 다 뭐에요?”
“네가 결혼하게 되면 집값에라도 좀 보탰으면 해서 주려고 했던 거야. 그런데 혼자 힘으로 땅도 사고 집도 마련할 만큼 똑 부러진 우리 아들이니까 나중보단 지금 네가 필요한데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청명은 잠깐 머뭇거리다 팔을 벌려 부모님을 끌어안았다. 이제는 낳아준 부모보다 키도 훨씬 크고 덩치도 있는 청명이었으나, 여전히 갓 태어난 아이의 얼굴을 겹쳐보던 부부는 말없이 웃으며 청명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원활한 시골 생활을 위해 장만한 새하얀 포터 트럭에 짐을 실은 청명의 뒤를 따라 부모님의 SUV가 따라 달렸다. 시내에 도착해 필요한 살림살이를 한 보따리 장만하고 맛집이라는 국밥집에서 점심까지 해결하고 나서야 세 사람은 청명의 집 마당에 도착했다. 남는 땅을 정돈해서 만든 주차장에 차를 대고, 양손에 바리바리 짐을 든 채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나온 백아가 청명의 목덜미에 올라타 냅다 머리를 비볐다.
“백아야~ 잘 있었어?”
“킷!”
기운차게 대답하는 백아의 꼬리가 살랑였다. 공사 기간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와 손길을 보태주던 부모님과 제법 정이 들었는지, 청명 이외의 타인에겐 일괄적으로 쌀쌀맞게 굴던 백아도 두 사람 앞에서만큼은 먼저 아는 척을 하거나 친근감을 표했다.
집 청소는 업체를 불러 끝내둔 뒤였으므로 냉장고에 사 온 식재료들을 넣어둔 뒤, 세 사람은 한참이나 포장을 뜯고 물건을 정리하는 바쁜 시간을 보냈다. 가전제품을 하나하나 설정하고, 살림살이가 있어야 할 장소에 물건을 채워 넣다 보니 하루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그렇게 새집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 날 오전 내내 당분간 먹을 반찬을 냉장고에 가득 채워 넣고 나서야 부모님은 아쉬운 걸음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의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청명은 소파에 드러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도시에 비하면 조용하기 그지없으나, 아무런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수많은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머나먼 곳에서 불어온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밭을 가는 농기계의 모터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소리.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집 앞 작은 하천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 고요함 속에 존재하는 자연의 시끌벅적함이란. 청명은 제 위에 올라온 백아의 배를 간지럽히며 나른한 숨을 뱉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끈한 것이 낮잠을 자기에 딱 좋은 오후였다.
* * *
청명의 새하얀 1톤 포터 트럭, 통칭 백아 2호의 짐칸에 온갖 모종이 잔뜩 실렸다. 요즘 유행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초보자도 쉽게 키울 수 있는 식물을 추천받아 한가득 구매한 청명은 근처에 있던 농기계 판매장에서도 망설임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예초기를 시작으로, 땅 파는 드릴, 소형 톱, 호미, 낫, 삽 등을 모조리 카트에 싣고, 최신형 모델이라고 나온 경운기에 쟁기와 로터리, 두둑 성형기까지 빠짐없이 배달 목록에 올렸다.
과거 매화검존 가라사대 좋은 무기를 찾을 시간에 스스로를 단련하라는 말을 남겼으나, 암향매화검이라는 최상급 만년 한철 검과 현대문물의 편리함을 맛보며 살아온 지금의 청명에게는 좋은 도구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좋은 도구를 쓴 장인이 멋진 작품을 만들어낼 확률이 높은 건 사실 아닌가. 홀연히 나타나 단 하루 만에 석 달 치 매상을 올린 큰손 손님의 등장에 후다닥 달려나온 총책임자는 청명이 쇼핑을 마치고 떠날 때까지 만면에 웃음을 머금으며 최선을 다해 손님을 모셨다.
청명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집을 짓고 남은 1,400평의 땅 중 300평의 땅에 3년생의 매화나무를 심었다. 3월 초라 매화를 심기에는 조금 아슬아슬한 시기였으나, 본격적인 농사는 처음이니 배운다는 마음으로 구매한 서른세 그루의 나무였다. 일단 이걸로 몇 년 키워보고 괜찮으면 남은 600평의 땅에도 마저 심을 계획이었다.
집 뒤편에는 작은 닭장도 세웠다. 장에서 사 온 노란 병아리들 여섯 마리가 삐약 거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해졌다. 청명의 목에서 뛰어내린 백아가 닭장 앞에 서서 킷! 하고 배를 쭉 내밀었다.
“네가 저 병아리들 돌보겠다고?”
다 키워서 잡아먹으려는 건 아니고? 청명의 물음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백아가 입을 떡 벌리고 청명의 정강이를 꼬리로 후려쳤다. 악! 극심한 통증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 청명이 쓰러지자 그러기에 왜 까불었냐며 백아가 콧방귀를 뀐다.
“이 자식아! 농담도 못 하냐?!”
“키이! 키이잇!”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지금 그걸 장난이라고 하냐! 그렇게 외치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뒷발로 땅을 쾅쾅 내리찍는 백아의 모습에, 이제는 무력으로는 이길 수 없던 청명이 먼저 한발 물러났다. 치사하게도 오늘 저녁밥이 닭고기에서 건조 사료로 바뀐 걸 모르는 백아만 신이나 닭장 주변을 뛰어다녔다.
아무것도 없던 넓은 땅은 짧은 기간 동안 정말 많은 변화를 거쳤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다채로운지 청명의 밭 근처를 지나는 동네 어른들은 오늘은 모종이 늘었네, 나무가 더 생겼네 하며 구경하고 가거나, 청명이 잘 모르는 농사 비법 등을 알려주며 가볍게 수다를 떨고 가기도 했다.
청명은 아침 일찍 일어나 시내의 종묘상에 다녀왔다. 전날 유튜브에서 파기름을 내어 만든 볶음밥 영상을 봐버린 탓이었다. 한판 가득 사 온 대파 모종을 밭에 심고 다 자란 대파로 온갖 종류의 볶음밥을 해먹을 생각에 들떠있던 청명은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다급히 흐른 침을 닦았다.
[청명아, 잘 지내지?]
“뭐야, 너였어?”
너였냐니, 반응이 그게 뭐냐. 사람 섭섭하게…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가 토라진 듯 잠시 꿍해졌으나, 두 사람 모두 지내온 시간이 있는지라 서로가 진심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청명은 전화를 스피커로 돌린 뒤 앞주머니에 넣고, 심다 만 대파 모종을 다시 쥐며 간단히 안부를 물었다.
친구는 자신이 그린 설계도와 그간 찍어뒀던 영상, 완성된 청명의 집 사진을 자료로 이름 있는 설계 사무소에 취직하는 데 성공했다. 신입에 막내라 하는 일은 아직 잡일밖에 없다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 배울 것이 많다며 친구는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잘됐네. 너 그런 일 되게 하고 싶어 했잖아.”
[열심히 배워서 언젠가 내 사무실도 가지고 싶으니 부지런히 배워야지.]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 건 조금 아쉽지만, 각자의 길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청명은 그걸 위안으로 삼았다. 그렇게 한참 근황을 나누던 중, 문득 생각이 났다며 친구가 청명에게 유튜브를 해볼 생각은 없냐 물었다.
“유튜브?”
[귀농 브이로그 같은 거 찍으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우리 셀프 건축할 때 영상 나는 지금도 종종 돌려봐. 되게 재밌어.]
“글쎄다. 딱히 생각은 없는데…”
[내가 쓰던 카메라 너 줄게, 편집도 알려줄 테니까 한번 해봐.]
“누가 보긴 할까?”
[내가 장담하는데 너는 혼잣말만 해도 구독자가 생길 타입이야. 나 믿어.]
그리고 너희 부모님도 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말은 안 해도 늘 네 걱정 많이 하시잖아. 반박할 수 없는 친구의 설득에 청명의 마음속 저울이 아주 조금 귀찮음에서 괜찮은데? 로 기울었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 건 죽어도 하지 않는 청명을 잘 알았던 친구는, 청명의 반응에서 일말의 긍정적인 부분을 엿본 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청명아, 유튜브 광고 수익 잊었어?]
맞다, 그게 있었지. 부모님이 주신 저금으로 생활에 여유는 있었지만 원래 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 아닌가. 통장에 찍힐 부수입을 상상하던 청명의 입에서 꺄르륵 하는 웃음이 터졌고, 청명이 완전히 넘어온 것을 확신한 친구는 수화기 저편에서 짧게 주먹을 쥐었고, 대파를 심는 동안 가볍게 산책을 즐기고 온 백아는 청명의 목에 올라타려다 눈이 돈으로 변한 청명의 모습에 흠칫하며 거리를 벌렸다.
친구의 예언은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부담 갖지 말고 가볍게 하라는 친구의 말에 별 기대 없이 올렸던 일상의 기록은 ‘어? 이 사람 건축 브이로그에 나왔던 그 사람 아닌가?’라며 청명을 알아본 이들 덕분에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청명이 품은 유잼의 기운을 미리 맛봤던 구독자들이 개인 SNS에 지난 건축 영상의 하이라이트를 편집해 올리며 청명의 계정을 홍보했고, 어색하게 혼잣말하며 잡초 뽑고 밭에 물을 대고 병아리 밥을 주다 반려 족제비와 티격태격하는 청명의 모습은 웃기고 재밌고 즐거운 힐링 물로 인기 급상승 동영상의 흐름을 탔다.
청명의 동영상의 볼거리는 그뿐만이 아니었는데,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한 건 한 달밖에 안 됐다는 초보 농부가 손을 대는 작물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크고 굵은 결실을 만들어버리는 미친 재능을 가졌단 점이었다. 열매를 맺는 데 두 달 정도 소요되는 방울토마토가 한 달 반 만에 쑥쑥 크더니 가지가 휠 정도로 튼실하고 꽉 찬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다거나, 무성하게 자란 상추들이 마치 작은 나무처럼 보일 정도로 자랐다거나 하는 일이 청명의 밭에선 빈번했다. 오죽했으면 다른 곳에서 키운 걸 옮겨심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정도였다.
하지만 시비가 걸리면 절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던 청명이 정말 순수하게 ‘식물은 원래 이렇게 자라는 거 아냐?’ 하고 답글을 달자, 상황을 지켜보던 모두가 청명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트 | 저 정도면 진짜 찐 아님?
@기력없음 | 무슨 드루이드도 아니고
@애플민트 | 저 사람 하는 거 보면 가끔 무슨 1호선 꼰대 할아버지 같음
└@김닻별 | 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매검날닦개 | 진또배기 한국인한테 드루이드는 너무 서양풍 아닌가?
@프리미엄찹쌀떡 | 신선? 도사?
└@비날 | 도사 좋네, 매실 키우니까 매실도사 ㅇㄸ?
└@마감하는별가루 | 매실 보단 매화 어때요, 매화도사 괜찮지않나
청명의 구독자 대다수가 그 댓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렇게 청명의 유튜브 별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매화도사가 되어 있었고, 청명을 구독하는 구독자들의 애칭은 기나긴 토론 끝에 매실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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