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도사 귀농일지

매화도사 귀농일지 03.

화산귀환 ncp 회지 샘플

비날공방 by 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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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은 결국 원래 세웠던 계획을 접고 대학에 진학했다. 한번 하자고 마음을 먹었으면 최선의 결과를 내야만 직성에 풀렸던 청명은 기어코 국내 1위 대학의 농대에 성적 장학금을 받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수능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고 입학한 데다 시험, 과제, 실습을 전부 완벽하게 해내는 학생을 오랜만에 만난 교수들은 감격의 눈물을 글썽였다. 아직 이 나라의 장래는 밝구나. 실상은 장학금 받고 학교 공짜로 다니는 김에 본전을 뽑으려던 청명이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교수들은 청명에게 자기 연구실에 오라며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냈다. 덕분에 청명은 교수님들이 주는 팥 차를 실컷 얻어 마시며 대학 생활을 보냈다.

“청명아, 너 이번 동아리 회식 갈 거야?”

“아니, 나 이번엔 일이 있어서 못 가. 돈도 없고.”

“이번 회식 회비 쓴다고 한우 무한리필 집에서 한다는데”

“그래서 회식을 어디서 한다고?”

대학에는 청명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다양한 종류의 동아리가 있었다. 친목질 성향의 동아리를 하나하나 거르며 쭉 살펴보던 청명은 게시판 구석에 붙은 등산 동아리의 홍보 포스터를 보았다. 함께 동아리 홍보를 구경 왔던 동기는 산에 진심인 놈들만 모여서 힘들다 소문이 자자한 곳이라 청명을 말렸고, 청명은 그 자리에서 등산 동아리에 가입 신청서를 냈다.

동아리 회장은 등산하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게 뭐냐는 질문에 경치 좋은 곳에서 마시는 술이라 말한 청명의 대답에 폭소하며 가입을 허락했다. 그곳에서 청명은 건축과에 다니는 동갑내기를 만났는데, 의외로 서로 마음이 잘 맞아 사적으로도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당보야, 나 너 말고도 친구 생긴 것 같다. 연락처에 등록된 번호를 보는 기분이 참으로 오묘했다.

“그래서 졸업하면 정말로 시골로 가려고?”

“어, 그래서 땅 사려고 알바 하고 있어.”

“뭐? 청명이 너 귀농하려고?”

다른 곳에서 술을 마시다 청명이 있는 테이블로 끼어든 회장이 청명의 빈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덩치가 크고 호쾌한 인상의 회장은 전생의 야수 궁주를 작게 줄여둔 것 같았는데, 생긴 것만큼 술도 호쾌하게 마시는 사내였다. 병맥주 두 개를 따서 하나를 청명에게 넘겨준 회장이 씩 웃으며 건배를 제안했다. 술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청명은 흔쾌히 맥주를 들었고, 끝나지 않을 건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마시던 도중 회장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턱을 문질렀다.

“청명이 너, 땅값이 싸면 정말 어디라도 상관없는 거냐?”

전생과는 다르게 숙취를 해소할 내력이 없어 잔뜩 취한 채로 리필받은 소고기를 굽던 청명의 눈이 번쩍 뜨였다. 청명이 급히 고개를 끄덕이자 회장은 ‘우리 어머니께 들은 얘긴데.’ 하며 입을 열었다. 회장의 어머니께서 친구분이 귀촌하려고 샀던 땅을 최근 헐값에 내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일 있냐며 물어보니, 그 땅에만 가면 자꾸 헛것이 보이고 심지어는 귀신까지 봤다며 그런 땅에선 도저히 못산다고 질색을 하셨단 것이다.

“선배, 주소 내놔요.”

“진짜로 가보게? 알아보니까 귀신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던데?”

“걱정하지 마세요, 저 청명이거든요?”

청명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종종 눈에 보이는 영혼들을 도경을 외워 넋을 빌어준 경험이 있는 청명에게 귀신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길을 잃고 이승을 떠도는 영혼들은 가야 할 곳을 알려주면 알아서 사라지기 마련이었으니까. 오히려 무서운 것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싼 땅값이었다.

주소를 받아 낸 청명은 다음날 곧장 그 지역의 부동산으로 향했다. 중개업자와 땅 주인은 귀신 들린 땅을 팔아치울 수 있다는 희망에 조금만 깎아달라는 청명의 에누리에도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청명은 아등바등 모은 아르바이트비만으로 무려 천 오백 평이라는 넓은 땅을 구할 수 있었다. 비록 그동안 모은 돈을 거의 써버려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하긴 했지만, 농사지을 땅이 생겼다는 사실이 뛸 듯이 기뻤다.

“진짜 그 땅 샀어?”

“어. 졸업하고 돈 모아서 바로 내려가려고.”

“귀신 나오는 건 어쩌고?”

“내가 누구냐, 진작에 다 해결했지.”

청명이 킬킬 웃으며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얼큰하고 뜨끈한 버섯 들깨 육개장을 안주 삼아 열심히 잔을 비우던 청명은 문득 친구의 잔에 시선이 닿았다. 첫 잔을 비우고 다시 채워준 이후로 뭘 그리 생각하는지 음식과 술에 전혀 손을 대고 있지 않았다.

“뭐해, 안 먹고.”

다 식겠다. 청명의 재촉에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청명을 보며 대뜸 부탁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너 이번에 샀다는 땅에 집 지을 거지.”

“살려면 그래야지.”

“그 집, 내가 짓게 해주면 안 돼?”

그리고는 술잔을 연거푸 비우며 구구절절 설명을 이었다. 자기는 집을 지어보는 게 정말 큰 소원이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인 것 같다고. 너만 괜찮으면 설계비용이나 자잿값도 자기가 일부 지원하겠다며 청명을 붙잡고 매달렸다. 정말로 둘이서 가능한 일이냐 물으니, 요즘은 셀프 건축이라며 비전공자도 시간과 돈만 있으면 자기 손으로 직접 원하는 집을 짓는 게 가능한 시대라 덧붙였다. 문득, 청명의 뇌리에 화산의 풍경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어디에도 없는 화산의 흔적을 정말 내 손으로 남겨둘 수 있다면…

“정말 내가 원하는 집을 지을 수 있다, 이거지?”

“어. 너무 무리한 디자인만 아니면.”

좋아, 같이 하자. 집 짓는 거. 청명의 결정에 친구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열심히 하겠다고 청명의 손을 붙잡아 흔들었다.

그로부터 일 년 후. 꾸준히 대학원 진학을 권하던 교수님의 제안을 거절하고 무사히 대학을 졸업한 청명은 셀프 건축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로 귀농 계획의 막을 열었다. 그동안 계획했던 것들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서류 작업과 대지 측량, 기초 공사는 방학 때마다 내려가 미리 해두었고, 건축과 친구가 교수님에게 조언을 구해가면서 청명의 주문에 딱 맞게 그린 설계도 역시 준비가 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공사 첫 삽을 뜨는데 기분이 어떻습니까.”

“그거 진짜 찍는 거야?”

“그럼 진짜지, 가짜로 찍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해.”

친구는 공사 현장을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릴 것을 제안했다. 건축 기록으로도 쓰고, 겸사겸사 취업할 때 포트폴리오로도 쓰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처음엔 떨떠름한 청명이었으나, 유튜브에 광고 수익이 붙으면 돈이 들어온다는 말에 촬영을 허가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오늘은 보시다시피 청명이 부모님도 도와주러 오셨습니다!”

“어휴 뭘 이런 걸 다 찍고 그래? 별거 없는데.”

“앗, 혹시 불편하시면 아버님 나오시는 부분은 나중에 전부 편집할까요?”

“저 양반 오늘 화면에 잘 나온다고 전날 팩도 하고 잤으니까 그냥 찍어도 괜찮아.”

“당신은 왜 그런 걸 말해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신혼처럼 꽁냥거리는 부모님의 모습에 청명은 고개를 저었고, 친구는 보기 좋다는 듯 웃었다.

속도는 조금 느리지만 계획했던 대로 건축은 차곡차곡 진행됐다. 그 모습을 담은 친구의 건축 유튜브는 예상치 못한 인기를 얻었는데, 장발에_입만 다물면_과묵한 이미지의 잘생긴 미남이 걸걸한 입담을 곁들여가며 집을 짓는 모습이 사람들이 보기에 꽤 재밌었던 모양이었다. 종종 나오는 부모님을 귀여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청명과 친구의 티키타카 대화 모음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에 편집의 힘이 곁들여지니 실시간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도 몇 번이나 영상이 올라갈 만큼 주목을 받은 것이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아, 힘들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하면 되겠네.”

사방에 흩어진 자재를 정리하고, 비를 맞지 않게 방수포로 잘 감싼 청명은 집 뒤쪽으로 펼쳐진 언덕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자! 산책하러 나간 강아지를 부르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자, 어디선가 토도돗 날 듯이 뛰어온 새하얀 무언가가 청명에게로 달려와 품에 폭 안겼다. 청명은 손가락으로 보드라운 털 뭉치의 이마를 복복 긁어주었다.

“오래 기다렸지. 가자.”

“키이!”

청명의 말에, 강아지와는 확연히 다른 울음소리를 가진 하얀 털 뭉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울었다.

 

* * *

 

청명이 아직 대학생이던 작년 겨울이었다. 방학을 틈타 건축에 필요한 기초 공사를 끝내두기 위해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청명은 종종 넓은 땅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곤 했다. 혹시나 미리 관리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거나, 아니면 앞으로 여기에 뭘 심고 어떻게 관리할지를 생각해보기 위함이었다. 땅은 넓고 해볼 수 있는 건 무궁무진했다. 내년 겨울엔 배추를 심어서 김장을 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산책을 이어가던 도중, 청명은 근처 풀숲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뛰어다니는 걸 보고 말았다.

이 근방은 야생 동물의 출몰이 빈번하다는 말을 미리 들었다. 만일 농사에 해로운 동물이라면 미리 방도를 구해두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크게 자극하지 않도록 청명이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 그때였다.

인기척을 느낀 짐승이 풀숲에서 쏙, 하고 머리를 내밀었다. 새하얀 털에 까만 점을 찍은 듯 콕 콕콕 박힌 눈코입이 상당히 앙증맞았으나, 펑 솟아오른 털이 상당히 경계 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한 사람과 한 마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풀숲으로 쏙 들어간 짐승이 다급히 탁 트인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청명은 익숙한 짐승의 외형에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며, 설마 싶은 마음으로 한참이나 달싹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백아?”

그 이름을 알고 있던 인간들이 모두 죽은 후, 참으로 오랜만에 제 이름을 들어본 백아는 그대로 청명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 작은 몸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나오는지, 청명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백아를 꼭 끌어안으며 한참을 쓰다듬어 주어야만 했다.

백아는 청명이 남겨준 최후의 내력과 정순한 기운 덕에 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살고 있었다.

화산의 일대 제자가 키우던 애완동물에서 화산의 수호신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문파와 무학이 사라지고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훨씬 긴 세월이 흘렀다. 내공을 다룰 수 있던 마지막 제자가 숨을 거둔 해에 백아는 화산을 떠나 세상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면 사냥해서 먹이를 구하고, 졸리면 굴을 파고 들어가 잠을 잤다. 세상이 발전하고 인간이 늘어날수록 정순한 기운을 가진 땅을 찾는 것은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이 땅 역시 다른 곳으로 향하던 도중 잠시 지친 몸을 쉬려 했을 뿐으로, 귀기가 서려 백아가 살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어느 곳보다 깨끗하고 맑은 공기로 변하더니, 흡사 과거의 화산파와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게 아닌가.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이미 오래전 죽고 없어진 그립고 얄미운 이를 꼭 닮은 인간이었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꼼짝도 못 하고 쳐다만 보고 있으니 손을 내민 그 인간에게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흘러나왔다.

 

…백아?

 

그때의 청명과 지금 눈앞에 있는 이가 완전히 똑같지 않다는 건 안다. 이 인간에게선 내력이라곤 쥐뿔도 찾아볼 수 없었고, 아마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앞발 하나로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 비실비실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백아는 청명이 내민 손을 외면하기는커녕, 그 품에 달려가 안기는 쪽을 택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백아의 자리는 이곳이었으니까.

그 후, 청명의 건축 브이로그에는 종종 새하얀 털을 가진 족제비가 이곳저곳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백아가 청명에게 꼭 붙어 애교를 부리는 모습만 모아 올린 백아 특집 영상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덕분에 건축 유튜브의 구독자 수는 가볍게 50만을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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