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보 드림] 암향화연(暗香花燕)
유료

[화산귀환/당보드림]암향화연(暗香花燕)

04. 연말

*매화연 4화 이후의 시기입니다.

*적폐/날조 캐해석 주의.

* 자캐가 당보를 진료하는 뒷얘기를 추가로 볼 수 있습니다. (유료입장)

“후우..”

창 밖의 입김이 하얗게 공기 중에 번진다. 연홍 련은 실내복을 입고 담요를 어깨에 걸친 채 시린 공기를 쐬면서 창가에 기대앉아있다. 흐린 하늘에 눈이 소복이 내리면서 지상의 풍경이 점점 하얀 눈이 쌓이는 걸 보는 건 제법 즐거웠다. 물론 밖에 다닐 땐 발이 시려서 썩 좋아하진 않지만.

“서월아, 창문 닫아줄래? 환기 때문이라도 너무 춥다.”

“아, 죄송해요 언니. 제가 너무 구경했죠.”

침상에서 꾸물이는 여인의 말에 연홍 련은 뒤늦게 창문을 닫는다. 누워있는 여인은 제 팔을 괴어 연홍 련을 본다.

“네가 눈 구경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으니 그건 괜찮아. 놀러 다니고 하면 좋았을 텐데 아쉽겠네.”

“어쩔 수 없죠. 단장님이 가능하면 안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으니깐요.”

악단에서의 겨울은 극단적이었다. 아주 바쁘거나 혹은 여유롭거나. 올해는 독한 고뿔이 유행한다 하여 공연에 찾아오는 관객이 평소보다 주춤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야외보단 실내 공연, 아니면 중요한 내부 행사 위주로 참여하는 편인데 그 수도 평년보다 줄었다. 소문으론 단순한 고뿔이 아니라 기이한 시체가 나온다던데. 단장님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니 경거망동 하지 말라 하여 이렇게 처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단장님이라면 아마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연홍에 연통을 넣어보곤 하겠지. 만일 정말 수상한 일이 일어난 거라면..

‘그때는, 정말 돌아가야 될지도.’

그것이 연홍의 일이니까. 연홍 련은 멍한 눈으로 창밖을 보다가 익숙한 인영이 보이자 눈이 커진다. 연홍 련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낀 여인은 몸을 일으킨다.

“서월아?”

“언니,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요!”

연홍 련은 여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두툼한 겉옷을 챙겨 몸을 돌린다. 방한복을 입고 있었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밖을 나서자 뺨이 베일 거 같은 찬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질끈 눈을 감으니 바람이 곧 잠잠해진다. 시리던 찬 공기 대신 익숙한 연초 향이 났다. 서서히 눈을 떠보니 익숙한 이의 품에 안겨있어 연홍 련은 고개를 든다.

“…보야?”

당보의 팔이 보다 단단히 연홍 련을 감싸 안는다. 연홍 련은 제 품에 안겨 얼굴을 묻는 당보를 보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렇게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땐 달래주는 게 최선이다. 연홍 련의 손이 성실하게 당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니 한참 그녀의 체취를 맡은 당보가 감싸 잡은 손으로 등을 쓸어 연홍 련의 목을 매만진다. 연홍 련은 제 목에 닿는 차가움에 움츠려 기대있는 어깨를 밀어낸다.

“차가우니까 손 치워.”

“누님이 따뜻하게 해주면 안됩니까? 몸으로 데워주는 게 좋은데.”

“내가 성희롱은 장소 구분하라 했을 텐데.”

연홍 련은 질색하는 눈으로 당보 귀를 잡아당긴 채 기운을 불어넣는다. 연홍 련의 손에 의해 반강제로 고개가 들려진 당보가 인상을 구긴다.

“아야야야, 누님 저 귀... 귀 떨어집니다!”

당보의 외침에 연홍 련이 금방 손을 놓자 귀를 문지르는 당보가 투덜 인다.

“참 나, 내공으로 해결하려 하시니 친절히 부탁드렸건만... 혼내면서 기운을 불어주는 건 뭡니까.”

“너의 이상 욕구에 대한 경멸과 부탁을 같이 해결해준 거지. 내 친절에 고마워하렴.”

겉옷을 붙잡은 연홍 련은 팔짱을 끼며 새초롬히 대꾸한다. 당보는 그런 연홍 련을 내려보다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진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입을 연다.

“친절을 베푸는 김에 하나 더 부탁드려도 됩니까, 누님?”

“뭔데. 이상한 거면 혼난다?”

“누님만 괜찮으면 오늘 제가 머무는 처소에 오는 건 어떻습니까? 할 얘기도 있고.”

연홍 련은 멈칫 이다 당보를 물끄러미 올려본다. 곱상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웃지 않으면 날카로운 인상임에도 이번엔 달랐다. 평소같이 예의 웃고 있지만 답지 않게 제 눈치를 살피는 시선에 연홍 련은 몸을 돌린다.

“..단장님께 허락 맡고 올 테니 잠깐 기다리렴. 나도 네게 볼일이 있으니까.”

**

당보와 함께 객잔에 들어온 연홍 련은 방한복을 정리해서 걸어둔다. 당보는 화로에 불을 피우기 시작하며 방한복을 정리하는 연홍 련을 흘겨본다. 평소와 달라지지 않았다. 당가에서 그녀를 감시했다는 걸 알았을 때, 가문에 대한 환멸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당가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미친놈들이라는 건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듣게 된 건 불쾌감의 정도가 달랐다. 이 여인에게 위해를 가하기라도 했으면 당가의 피바람은 제 손으로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원래는, 붙잡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한 짓은 아니었지만 자신 때문에 불쾌한 경험을 한 여인이다. 악단이 머문다는 객잔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까워졌을 때, 고민하던 자신은 지나가려 했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진. 갑자기 나타나 놀랐지만 경멸하거나 하다못해 타박할 거란 예상과 다르게 자신에게 바로 꽂혀있는 제비꽃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곪아있는 상처를 터트린 바늘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서린 반가움에 실처럼 이끌렸다. 자신이 보고 싶었던 만큼 그녀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제게 찾아온 온기가 너무 소중해서.

불을 피워낸 당보는 방을 구경하는 연홍 련의 뒤에 다가가 허리를 감싸 안는다. 연홍 련은 뒤에서 안는 당보에게 몸을 기울여 올려본다.

“오늘따라 어리광이 잦구나.”

“연말이잖습니까. 집 들어가긴 싫으니 누님이랑 시간 보내렵니다. 누님이야말로 순순히 받아드릴 줄은 몰랐는데. 올해는 안 바쁘오?”

“요즘은 일이 줄기도 했으니까. 이상한 소문도 나고 하니 조심하는 거지.”

당보의 얼굴이 조금 딱딱해진다. 연홍 련은 당보의 표정에 손을 뻗어 뺨을 쓸어낸다.

“바빴던 모양이던데. 무슨 일 있니?”

“…일은 무슨, 그럼 오늘은 제가 누님 독차지해도 되는 겁니까?”

당보는 연홍 련에게 웃으며 제게 올려진 고개를 붙잡듯 가느다란 목을 쓸어 만진다. 연홍 련은 시선이 가늘어지더니 뺨을 쓸던 손에서 꼬집어 잡는다. 당보는 예기치 않게 뺨이 꼬집어지니 한껏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야야아약, 이번엔 또 뭡니까!”

“얼굴이 굳어놓고 시치미는. 나머진 앉아서 얘기하자꾸나. 내게 할 얘기 있다며?”

연홍 련의 말에 뺨을 문질이는 당보가 멈칫 인다. 연홍 련은 방을 둘러보다 귤 바구니를 들어 보인다.

“귤도 있으니 저기 앉아서 먹자, 아니면 심각한 얘기니?”

“...제가 무슨 얘기할 지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내려보고 있으니 연홍 련은 가만히 당보를 본다. 초조함이 가득한 시선을 보니 연홍 련은 작게 웃는다.

“응. 자객에 관한 거지? 그치만 네가 보낸 것도 아니잖아.”

“안다 해도 이건 충분히 불쾌한 경험입니다, 누님.”

아무리 자신을 아끼는 다정한 이라도 엄연한 선이 있다. 시간이 지난 일이라 해도 화를 내는 게 당연한 건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어가기엔 이 꺼림직한 불안감부터 매듭짓고 싶었다. 연홍 련은 여전히 팔을 풀지 않는 당보에게 머리를 기댄 채 생각에 잠긴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내게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니?”

“...예?”

당보는 황당함에 저도 모르게 반문한다. 연홍 련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건지 고개를 들어본다. 비꼬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눈이 제게 향한다.

“화를 내길 원해? 아니면 원망을 하니, 경멸받고 싶은 거니? 이미 비슷한 반응은 다 보인 거 같은데도 대답을 원하니까 잘 모르겠구나.”

“누님, 그 뜻이 아닌 거 알잖습니까. 왜 모르는 척...”

이 겉도는 대화는 대체 뭔가. 자꾸만 거슬리는 감각이 가시지 않으니 당보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다 연홍 련의 대답에 얼굴이 딱딱해진다.

“모르는 척은 네가 하고 있잖아. 나한테 할 말이 정말 그거야?”

당보의 시선이 그대로 연홍 련에게 꽂혀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을 보고 있지만 눈빛은 달라졌다. 순진무구하던 얼굴에 담담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이 시리게 빛나는 칼날 같았다. 굳어있던 당보의 입에 타들어 가듯이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 누님을 위한 거였습니다. 비도를 주었던 건.”

“알아. 네가 날 위험에 빠뜨리려 한 게 아니란 것 쯤은. 당가의 규율은 그때 처음 들었지만.”

목격을 들었다는 건 거짓말일 거다. 그랬다면 자신이 비도를 보였을 때 확인하기라도 했겠지만 그자는 순순히 맞다고 대답했다. 아마 당보와 같이 도둑을 잡은 거까지 모두 보고 있었단 거겠지. 그래서 자신을 죽이지 않고 비도만 회수해서 돌아갔으니까.

'안부를 전해달란 농담까지 지켰을 줄은 몰랐지만.'

당보에 대한 분노는 없었다. 처음 들을 땐 황당하긴 했어도 그가 자신을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당가에 대한 반감이 크지만 허당같은 면이 있는 아이니 규율을 알았어도 자신에게 비도를 주었을 거다. 연홍 련은 자신을 안고 있는 당보의 팔을 쓸어 다독인다.

“날 곤란하게 만든 게 미안한 거면 괜찮단다. 그 정도도 눈감아주지 못할 정도로 우리가 짧게 알던 사이도 아니고.”

연홍 련의 말에 당보는 제 옷자락을 꾹 잡았다. 어디까지가 그녀의 애정이고 신뢰인 건지 모르겠다. 한참을 말이 없던 당보가 입을 연다.

“......제가 보고 싶었습니까?”

당보의 질문에 연홍 련은 부드러이 웃는다. 휘어진 눈꼬리에 비치는 제비꽃 눈동자가 따스하게 자신을 본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니? 당연한 걸 묻는구나.”

작게 타박하는 말임에도 그를 보는 눈은 여전했다. 소담히 미소 짓던 연홍 련은 당보의 팔에서 손을 뻗어내니 그의 고개가 같이 숙여진다. 연홍 련은 제 손에 닿아지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너야말로 내가 보고 싶진 않았고? 고생한 티를 내서 내게 어리광 부리러 온 건 줄 알았는데.”

당보는 말없이 쓰다듬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보고 싶지 않았냐고? 감시가 붙었단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오고 싶었다. 빌어먹을 당가놈들 때문에 누님이 무슨 꼴이냐고 대신 화내고 그녀 곁에 있고 싶었다. 사천에서 기이한 시체가 나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당가가 저지른 짓이라는 오명 때문에 가문에서 자신을 붙잡은 통에 수습하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혔다. 사천 내에서의 소문은 중원에 널리 퍼지기 전에 가문에서 막아내고 있지만 그것도 이젠 시간문제일 거다. 이미 의심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 들리고 있었으니까. 당보의 입이 능청스레 휘어진다.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누님. 그러니 오늘은 잔뜩 예뻐해 주셔야 될 겁니다.”

당보의 말에 연홍 련은 피식 웃는다. 이제야 겨우 평소의 장난스러운 그로 돌아왔다. 그녀는 톡톡 당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엄지를 치켜세워 제 방한복을 가리킨다.

“고생한 암존에게 선물을 줘야겠구나. 궁금하면 이거 풀고 저 옷 뒤져보렴.”

연홍 련은 당보의 품에 나와 귤 바구니를 들고 화로 근처에 다가가 앉는다. 여기에 차만 있으면 좋을 텐데. 타오르는 불꽃을 구경하던 연홍 련은 고개 돌려 당보에게 묻는다.

“여기 물 주전자랑 잔은 있니?”

“있긴 합니다만, 차 마시고 싶은 겁니까? 그건 없을 텐데요 누님.”

옷을 뒤적이는 당보가 포장된 함을 집어 들며 대답하니 연홍 련은 웃으며 품 안에서 작은 통을 꺼내보인다.

“차는 내가 갖고 있으니 물건만 좀 빌리마.”

연홍 련은 몸을 돌려 물 주전자를 화로에 올리고 다탁에 올려진 잔을 꺼낸다. 통을 열어 손에 털어내니 종이에 쌓인 찻잎을 풀어낸다. 새까만 찻잎들이 작은 버섯 모양으로 압축 되어있다. 화로에 올려낸 물이 끓어오르자 연홍 련이 주전자에 찻잎을 넣으니 제 주변을 기웃이는 당보가 묻는다.

“운남 보이차입니까?”

“응. 귀빈에게 선물 받았지. 자사호가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대충 우려도 마실만해.”

짧게 우려낸 찻주전자를 가져와 찻물로 잔을 데우고 우려낸 차를 한번 비워낸다. 차의 먼지를 씻어내기 위한 세차를 거치는 연홍 련의 손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검붉은빛 수색의 차가 모락모락 피어나니 연홍 련은 잔을 가져와 담요를 가져온 당보에게 내민다.

“마셔보렴.”

연홍 련에게 담요를 건넨 당보는 잔을 받아 맛을 보니 쌉싸래한 감칠맛이 혀에 감돌았다. 제가 피우는 연초와도 비슷한 맛에 당보는 피식 웃는다. 대충 우렸다고 말은 해도 이 여인이 우리면 싸구려 엽차도 고급 녹차처럼 우리는 데 맛 없을 리가 없다. 바닥에 편히 앉은 당보가 느른히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여 보인다.

“누님 솜씨는 알아줘야 된다니깐요. 덕분에 제가 호강합니다?”

“입에 맞는 거 같으니 다행이구나.”

연홍 련 역시 잔을 들고 맛을 본다. 찬 공기가 은은히 들면서 따뜻한 차가 몸에 들어가니 그야말로 노곤해지기 딱 좋았다. 연홍 련은 잔을 다탁에 두고 받아낸 담요를 어깨에 덮어 옆에 앉는다.

“그래서, 뭔가 아는 거라도 있니?”

“뭘 말입니까, 이상한 소문이 한두 개여야지.”

연홍 련이 옆에 앉자 당보는 제 뒤쪽의 침상에서 이불을 끌어와 같이 덮어 차를 기울인다. 시큰둥한 당보의 태도에 연홍 련은 가늘게 흘기며 그를 본다.

“검은 시체에 관해 아는 게 없냐는 거지. 요즘 그것 때문에 말이 많잖아.”

검은 시체. 처음은 독한 고뿔처럼 앓는 건가 싶더니 온몸이 검붉게 물들어 심하면 불에 탄 것처럼 검은 시체가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이 때문에 독에 당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와 당가를 의심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 연홍 련은 당보가 그 이유로 바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무리 자기처럼 가문에서 겉돌아도 당가를 내버려 둘 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제 앞에선 바쁘지 않았다고 하는 걸 보니 기특하긴 하지만 심각한 일이라면 자신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당보는 연홍 련의 시선에 머리를 긁어낸다.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 않은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하아…아직은 저도 모릅니다. 적어도 독이 원인은 아니에요.”

“시신을 한번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전염병은 아니고?”

“전염병도 아닙니다. 오히려…무공에 당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연홍 련은 눈이 동그래진 채 당보를 본다. 무공이라니. 그럼 누군가가 고의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거 아닌가. 그는 표정을 구기고 있지만 그 역시도 생각이 많은지 장난기 많던 눈동자가 가라앉아있다. 연홍 련은 얼굴을 굳히며 그를 보다 손에 쥐고 있는 찻잔을 내려본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돌아가게 생겼구나, 연홍이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당가보다 연홍을 더 신뢰할 테니까요.”

당가가 독의 조종으로 불려 독과 비도술만 유명한 거 같지만 의술로도 높게 쳐주는 가문이다. 물론 의술로만 따지면 당가보다 연홍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기 때문에 지금같이 당가가 의심을 받을 시기라면 연홍 역시 바쁠 것이다. 그들은 의원이자 연단가니 시체에 관해 조사하고 치료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겠지. 연홍 련이 생각에 잠겨있으니 고개 기울여 그녀를 살피던 당보가 어깨에 기대 연홍 련이 쥐고 있는 찻잔을 포개 잡는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시죠, 련 누님. 당장에 연홍에서 부르진 않을 겁니다. 그때까진 지금을 즐겨야 되지 않겠소?”

제 손을 감쌀 만큼 크고 기다란 손이 찻잔을 감싸 잡으니 연홍 련은 당보의 손을 본다. 거무튀튀한 손 끝이 제 손을 감싸고 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그의 손끝이 어둡지 않은 날이 오히려 더 적으니까. 보이차 특유의 흙내음과 함께 유독 짙게 느껴지는 연초향이 그가 오랜만에 제 곁에 있음에 안도되었다. 연홍 련은 피식 웃는다.

“..그 말도 맞긴 하구나. 지금이 중요한 거지.”

잘못하면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질 뻔했다. 연홍 련이 마저 차를 즐기고 있으니 당보 역시 옆에서 차를 마시다 생각난 듯이 소매에 넣어둔 함을 꺼내 보인다.

“내 선물이 이거 맞소?”

“응. 연말 선물로 줄려던 건 아니었지만.”

당보가 포장을 풀자 가지런히 담긴 담뱃재들이 보이니 느른한 미소를 짓는다.

“담뱃재라, 연초 싫어하는 분이 잘도 준비하셨소?”

“네가 좋아하니까. 내 취향껏 고르긴 했다만 마음에 들진 모르겠구나.”

당보는 멈칫 인채 연홍 련을 빤히 본다. 연홍 련은 차를 마시고 출출한지 바구니에 있는 귤을 꺼낸다. 껍질을 까기 시작하자 즙이 튀어 손가락에 묻어난다.

‘과즙이 많은 귤이네. 손수건을 꺼내야..’

연홍 련이 손수건을 찾으려 하니 그녀의 손을 잡아낸 당보가 느릿하게 제 얼굴에 가져와 작게 혀를 내밀어 과즙을 핥아낸다. 연홍 련은 제 손가락을 핥는 당보를 보다 그의 얼굴을 덥석 잡는다. 경직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시선에 당보는 당황하지만 느릿하게 연홍 련을 부른다.

“련…누님?”

“너…... 혀는 왜 그래?”

순간 거무스름한 혀가 보였다. 독의 영향일 수 있겠지만 시체에 관한 소문을 듣고 나니 저도 모르게 철렁했다. 그가 무공에 당했다면 그냥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연홍 련은 당보의 얼굴을 잡아 입술을 누른다. 입가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당보는 고개를 빼내 장포 소매로 입가를 가린다. 연홍 련은 보기 드물게 당황한 당보 모습에 자신이 더 당황한다. 평소엔 본인이 더 하면서 엄청 놀라네. 미간을 찌푸리는 당보가 느리게 설명한다.

“……뭐겠습니까, 독쟁이가 독 먹고 온 게 뭐가 신기하셔서.”

“독이라고?”

연홍 련은 제 손을 잡고 있는 당보의 손을 본다. 손끝의 검은 기운은 평소랑 비슷했다. 심하면 손끝이 아닌 손가락 중간까지 퍼지기도 하는 이가 혓바닥도 그런 줄은 몰랐다. 그야 타인의 혓바닥을 쉽게 볼 수 있는 부위는 아니라지만. 연홍 련은 제 머리에 든 생각 그대로 당보에게 묻는다.

“그럼 한번 살펴봐도 되니?”

검은 시체가 독에 당한 게 아니라면 독에 당한 상태를 눈으로 확인해두는 건 참고가 될 거다. 연홍에 돌아가기 전에 미리 사전지식을 갖고 가는 게 자신도 좀 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테고.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확실한 비교가 되겠지만 독이라면 지금 옆에 있지 않은가. 연홍 련의 제안에 당보는 황당하단 듯이 그녀를 바라본다.

“…지금 절 진찰하겠다는 겁니까? 갑자기?”

“네 말대로 그 시체가 독이 아니라면 비교를 해봐야 될 거 아니냐. 잔말 말고 혀 내밀어 보렴.”

연홍 련은 손을 까딱이며 당보를 부르니 그는 한참 연홍 련을 보다 소매 너머로 얼굴을 숙여낸다. 대체 이 누님은 사람을 왜 이리 괴롭히는가. 자신을 위해 고른 선물에 동해져 유혹하려 했더니, 갑자기 제 얼굴을 붙잡아 한다는 얘기가 진찰이라니. 맥이 풀리는 반응이다. 당보는 열이 올라오는 얼굴을 진정시키곤 머리를 쓸어올려 미간을 찌푸린다.

“…알겠으니 입에 손가락 넣진 마시지요, 누님. 그러다 손에 묻어도 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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