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하늘이 내리는 기적이라 했던가. 신이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기적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하늘 위의 존재가 누군가를 애정하는 만치 차갑게, 눈송이가 대기를 얼렸다. 세계가 잿빛에 잠겼다. 그러나 세상에 유일한 것 하나는 온전히 제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다. 만물의 어머니이자 위대한 자연. 시린 계절이 굽이치는 세월까지 얼리지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 있다. 그것은 행복도 슬픔도, 아픔도 아닌 그 무언가. 텅 빈 가슴 속을 메꿔줄 단비 같은 감정인 동시에 공허로 채워오는 안개 비스름한 것.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심장을 조금씩 적셔온 그 감정은, 너를 만난 순간에야 비로소 개화해 내 온몸을 잠식했다. 이 감정에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애틋한 느낌. 그러니까 그건.
살아가면서 후회를 참 많이도 했더랬다. 이때 이랬으면 좋았을 걸, 저 때는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지만, 과거를 반추하며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생각해보면 후회투성이인 인생이었으나, 앞으로 걸어갈 길이 더 많이 남았기에. 홍민재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더 완벽해지면 되는 일이었다
감히 바라고, 꿈꾸고, 간청하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시여. 빛을 내려 어둠의 안식을 깨닫게 하시고, 어둠을 드리워 빛의 축복을 우러러보게 해주신 첫 번째 은총을 저희의 첫 자식으로부터 여전히 잊지 않았나이다. 오늘도 변함없는 태양을 내려주시어 하루를 당신의 보살핌으로 살았습니다. 부디 저희에게, 성 나타께
기차를 처음 타보기는 로톨로도 마찬가지였으나, 로톨로는 어제저녁까지 기차 내부 그림을 보며 좌석을 찾는 일을 미리 상상했었기에 헤매지 않고 제법 능숙하게 자리를 찾아냈다. 나타와 로톨로의 자리는 미닫이문이 달린 4인석이었다. 초록색 천을 덮은 푹신한 좌석 두 개가 마주 보고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벽에 붙은 큼직한 창문의 커튼은 위로 올라
“감히 바랍니다. 꿈꾸고, 간청하옵나이다.” 멀지 않은 예배실에서 앳된 목소리들이 자아내는 아침 기도 서문이 넘어 들어왔다.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은 성 나타는 언제나처럼 천진한 눈길로 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나이가 지긋한 사제가 예의 바른 태도로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성녀시여. 이번 알현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봉헌하면 되겠습니까
*성인물 *선정성, 폭력성 등 모든 소재 주의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성인입니다. *등장하는 학교는 대학교입니다. 아래는 후기와 부록 만화, 컨셉화들이 이어집니다. . 저는 멜리오르, 리히트같은 천사나 성자같은 인물을 묘사하는 데 늘 어려움을 느낍니다. 완전무결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 자체가 멜리사가 나오게 된 배경일 수 있겠으며, 그래서
[Web발신] 안녕하세요, 경기00정신의학과의원입니다. 김서연 환자분 ‘2024 자살 방지 로봇 보급 이벤트’에 당첨되어 연락을 드립니다. 2024.00.00일까지 방문하셔서 신분증과...... 로또는 죽어도 당첨 안 되고 이런 건 당첨되네. 깡통 하나 집에 둔다고 자살이 막아지면 우리나라 자살률이 세계 1위이진 않겠다고, 서연은 생각했다. 자살
있잖아요, 나는 우울할 때마다 명치에 예쁜 장식용 가위를 꽂는 상상을 해요. 침대에 흐르듯이 누워서 반짝이는 은빛 날을 꽂으면 우울과 함께 살들이 터져나오는 거죠. 그 옆엔 사랑하는 당신이 꼭 있어야 해요. 나의 죽음을 보고 슬퍼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아, 다른 사람들도 있으면 좋겠네요. 내 죽음에 후회할 사람들. 내게 더 잘할걸 울며 통곡해야 해요. 그래
*** 톡. 토옥. 꽃이 송이채로 떨어진다. 탐스럽게 핀 꽃의 모가지를 날선 가위로 꺾어내는 것이, 어쩐지 잔혹하게도 느껴진다. 청윤의 시종, 지엽은 떨어지는 꽃들을 바라보았다. 꽃이 떨어질 때마다 고개를 까딱이는 것이 모이를 쪼는 닭을 보는 듯한지라. 청윤은 픽 웃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묻는다. “정신 사납게 어찌 그러고 있느냐?” “마마. 그건
건조한 공기가 실내를 바싹 태웠다.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며 돌아갔다. 교실에 혼자 남은 인영이 흠칫, 몸을 떨었다. 권여루는 지금 교실에 우두커니 혼자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달이 맺혔고 별이 빛을 흘리는 시각. 떨어진 별빛은 지상에 안착하지 않고 지평선 너머 어딘가로 사라지길 반복했다. 밤하늘이 제게로 떨어지는 걸 지켜보던 소녀
본명을 필명으로 쓰는 비주류 소설가. 이제 그의 손이 활자를 연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의 심상 세계가 현실로 다시 녹아드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고 나서 절필했다. 그렇게 들었다. 적어도 그녀가 살아 숨 쉬는 동안에 아버지의 이상이 재차 실현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에. 째깍째깍. 시침이 5와 6 사이를 가리키고. 모두가 빠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았다. 이토록 모순적인 말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사랑했지만 그리워하지도, 애타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뿐이었다. 하나 단 한 가지. 내가 진실로 연모했던 것이 있다면… 그가 만든 세계였다. 권여루는 자신의 아버지가 만든 세계를 사랑했다. 친애하는 소설가가 빚어낸 세상을 눈에 담았다. 어렸을 때는 그것만이 세상
***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장마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도 연습으로 결석한 동아리 부원 채주현과 서하늘─결국 주현과 하늘도 나중에 고전문학부에 가입했다. 본인들의 의지가 강했다─로 인해 소연과 단둘이서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동아리 활동의 일환이었다. “여루야, 일단은 네가 동아리 부장이니까 주현이랑 서하늘한테 감상문 걷는 건
채주현은 불우한 가정환경을 타고난 이가 아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나름 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왔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신체적 정서적 학대도 없었다. 그렇게 보였으며 본인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집착의 결정체 같은 이가 생겨난 것일까? 이 광기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마냥. 그렇게 갑자기 생긴
한창 바쁜 활동 시기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이 하루 주어졌다. 활동 주에는 정말 드문 일이었는데, 매니저의 배려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주현은 생각했다. 그의 성과가 아닌 내 성과다. 어쨌든 내가 잡아낸 휴식의 기회니까. 아직 2월이라 날이 추웠다. 항상 차가운 음료만을 고집하는 소녀를 떠올리며 나는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딸랑- “안녕하세요.
태초에 이름 붙이길, 나는 그것을 거미의 입이라 하였고. 그것을 다시 거미의 집이라 하였네. 다양한 생명을 품은 둥지는 내 안식처 되어, 나는 지난 과거를 묻고 새 우주를 맞이하며 노래 부르네. 아아, 드디어 여기 알리노라. 옅은 봄 향기는 수런거리며 짙어지고 여름. 아름다움을 새기는(麗鏤) 계절이 진정 도래했음을. *** 여루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