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 연회(1)
폐하께서 살구를 좋아하시니까.
***
톡. 토옥. 꽃이 송이채로 떨어진다. 탐스럽게 핀 꽃의 모가지를 날선 가위로 꺾어내는 것이, 어쩐지 잔혹하게도 느껴진다. 청윤의 시종, 지엽은 떨어지는 꽃들을 바라보았다. 꽃이 떨어질 때마다 고개를 까딱이는 것이 모이를 쪼는 닭을 보는 듯한지라. 청윤은 픽 웃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묻는다.
“정신 사납게 어찌 그러고 있느냐?”
“마마. 그건 왜 자르시는 거예요?”
“내 원정*에게 물으니, 이리 꽃을 솎아내지 않으면 과실이 잘아진다 하더구나.”
“전에는 이런 일, 직접 안 하셨잖아요. 사가에도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선 신경이나 쓰셨나요?”
“그땐 그랬지.”
“그런데 왜…….”
“폐하께서 살구를 좋아하시니까.”
( * : 정원이나 과수원 따위를 관리하는 사람)
청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돈다. 지엽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공자께서는 어찌 기분이 좋지 않으실까. 귀한 선물도 잔뜩 받은 날에…….
오늘 아침, 궁인들이 청윤당 앞뜰로 우르르 몰려왔다. 황제께서 하사하신 물건들을 나르기 위함이었다. 성지에는 청윤의 행실을 칭찬하며 역적을 소탕한 공을 세워 상을 내리노라 하는 말이 적혀있었다. 지엽과 청윤당 소속인 궁인들은 제가 모시는 주인께서 이만큼이나 상을 받으셨다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께서 보내오신 물건들은 하나같이 최상품이었다. 비단 열 필에 무명 스무 필, 이 나라에서는 얼마 나지도 않는 귀한 약재, 금 일 관, 그리고 온갖 화려한 귀고리, 팔찌, 가락지, 상투관, 동곳, 비녀…….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은비녀였는데, 자개를 얇고 둥글게 하여 꽃잎을 만들고, 눈부시게 투명한 수정을 깎아 술을 달아 만든 매화 장식이 달린 정교한 비녀였다. 햇빛을 받으면 화사하게 빛이 나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지엽은 탄성을 내뱉었다. 청윤의 아버지가 대장군이니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온갖 종류의 재보를 한 자리에서 감상하는 것은 흔한 기회가 아니었다.
“폐하께서 마마를 정말 많이 아끼시나봐요!”
“그리 보이느냐?”
청윤은 은비녀를 쓸어보다가 그대로 목함을 닫았다. 그제야 지엽과 궁인들이 청윤의 낯빛을 살핀다. 오늘따라 유독 차갑게 가라앉은 안광이 음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마……, 기쁘지 않으세요?”
“폐하께서 이리도 많은 보배들을 보내오셨으니 후궁으로서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다만, 폐하께서 내 충심을 몰라주시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란다.”
충심을 몰라주다니, 성지에도 청윤을 칭찬하는 말들이 잔뜩 쓰여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 중 태반은 어려운 말이라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였으나, 그런 것들이 대단한 치하의 뜻임은 지엽도 알았다. 혹,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걸까? 지엽은 하사품을 둘러보았다. 하기야, 우리 마마께서는 사가에 계시던 시절부터 장신구를 즐겨하지는 않으셨지. 지엽은 눈치껏 궁인들에게 손짓하여 황제께서 내리신 하사품들을 적당히 정리했다. 비녀는 어찌할까 여쭈었더니 그냥 두라 하시기에, 그래도 그건 마음에 드시나보다 싶어 조금은 안심했었더랬다.
“너무 많이 자르시는 거 아니에요?”
“네가 뭘 모르는구나. 아쉽더라도 잘라주어야 큰 열매를 맺는 법이지.”
지엽이 아무리 원정이 아니라곤 하여도, 가지에 남아나는 꽃이 없는데 열매가 크게 맺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싶다. 그가 황당하여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기는 개뿔…….”
“뭐라고 했느냐?”
“아무것도 아니네요.”
청윤은 금방 가위를 놓지는 않을 듯했다. 아무래도 올해 청윤당에서 살구를 보기는 글렀다고, 지엽은 생각했다.
03. 연회(1)
광한원. 황제의 허락 없이는 발도 들일 수 없는 안평전의 정원이 오늘따라 소란하다. 이곳에서 황제가 청윤을 비롯한 후궁전 사람들을 위하여 연회를 열기로 한 까닭이다.
청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한 자리라고는 하였으나, 문객과 무객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이런 건 기억을 하시나보지.”
이화정 옆 배나무에 기대어 앉아 검을 손질하던 허낙걸이 광한루로 술과 음식을 나르는 궁인들을 노려본다. 옆에 있던 서경래는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입 좀 조심하시게! 폐하의 용태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중죄임을 모르는가?”
“들리지도 않을 텐데, 뭘.”
낙걸이 짜증스럽게 손을 쳐내자 경래가 항복한다는 의미로 두 손을 들어보였다. 낙걸은 쯧, 하고 혀를 차면서도 못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조금 더 깐족거렸다가는 궁둥이를 걷어찼을 텐데.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강엄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네.”
“무슨 말이 그런가? 나도 목숨 귀한 줄은 안다고.”
평소 같았으면 낙걸에게도 잔소리를 하였을 엄의였지만, 그는 딱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낙걸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이렷다.
누각 삼면에 드리운, 자수가 새겨진 은근한 가림막과 입구와 중간을 넓게 비워놓고 중앙을 바라보게 둔 식탁의 배치를 보라. 이전에도 황제는 갖은 일을 이유로 연회를 열어 한명씩 세워놓고 억지로 재주를 부리게 하였다. 그것은 무료한 황제의 삶을 달래줄 낙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문객과 무객들이 열심히 제가 잘하는 것을 선보여도 웃으며 상을 내리는 일은 어쩌다 한번이요, 수고했다거나 잘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나마도 선방이라. 대부분은 무표정으로 일관하거나 심드렁하게 한숨이나 쉬어댔다.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띄어보려 아양을 떨어대던 이들은 수치심만 가득 안고 누각을 내려가곤 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청윤의 공을 치하한다는 말을 핑계 삼아 후궁전의 인사들을 희롱이나 할 것이 분명하리라는 게 문객과 무객들의 생각이었다.
“재미난 얘기를 하시나봅니다.”
“소 공자.”
영영 뚜해 있을 것만 같던 낙걸이 드물게 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소 공자라 불린 이의 이름은 소몽란. 문객의 신분이지만 후궁이 되려는 이는 아니다. 그는 문객과 무객들의 예절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후궁전 문객과 무객들 중 가장 연장자이며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어 콧대 높은 가문의 자제들도 그의 앞에선 언행을 삼가는 편이었다.
“곧 폐하께서 오실 듯하니, 자리로 가시지요.”
“알겠습니다.”
몽란의 말에 낙걸을 비롯한 이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청윤이 광한루 위로 오른다. 문객과 무객들은 감탄했다. 황제께서 온갖 귀한 옷감을 많이 보냈다고 하더니, 이번에 새로 옷을 지은 모양이었다.
잠자리 날개와 같이 엷은 비단을 여러 겹 겹쳐 풍성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옷자락에 자수는 정교하여 고아한 멋이 있었고, 짙은 회색의 옷감은 흰 피부를 돋보여주었다. 반짝이는 은비녀는 어떠한가. 빛이 비출 때마다 자개가 영롱히 빛을 발하는 것이, 평소 청윤을 시기하는 이들의 입에서도 어쩔 수 없이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비록 외모로 랑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려함이었다.
벗들과 앉아 담소를 나누던 유섭 역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청윤이 랑으로 책봉된 이후로 이렇게나 화려한 차림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지 않던가.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리던 유섭이 청윤과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포르르 달려 나온다.
“형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치장하신 모습은 처음 봐요!”
“폐하께서 날 위해 연회를 열어주시는데, 성의를 보여드려야하지 않겠느냐.”
“성의 정도가 아닌데요? 너무 멋지세요!”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모습에 청윤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체통을 지키거라.”
“지금 제 체통이 중요한가요? 보세요. 저들도 폐하 눈에 들어보겠다고 나름대로 꾸민 것 같은데, 형님 앞에선 뱁새들에 불과하잖아요.”
“유남은.”
“네에, 네에. 입 다물게요, 청윤 마마.”
유섭이 제 입을 집는 시늉을 하자 청윤이 피식 웃었다. 오래지 않아 황제가 광한원에 들어섰다. 행차를 발견한 이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자 누각은 삽시간에 고요에 잠겼다.
“황제 폐하 납시오!”
궁인의 목소리에 문무객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일제히 엎드렸다. 일순 멈칫한 동화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계단을 올랐다. 귀걸이를 비롯한 온갖 장신구가 한번에 바닥에 닿으며 잘랑이는 소리가 작게나마 들려온 탓이다. 하기야, 오늘 같은 날에는 차림새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니 그럴 만도 하였다. 누각 위로 올라온 동화는 사위를 둘러보다가 엎드린 이들 중에서 청윤을 찾아냈다. 기실 찾아내고 말 것도 없는 것이, 상으로 준 것들을 전신에 두르고 있으니 몰라보기가 더 힘들었다. 동화는 청윤을 부축해 일으키며, 절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내 이곳에 모이라 한 이유는 편하게 즐기고자함이니 앞으로는 이런 연회에서 절할 필요 없다. 모처럼 꾸몄는데 치장이 망가지면 아깝지 않겠느냐.”
황제께서 이런 농담도 하는 분이었던가. 웃음기 섞인 옥음을 들은 이들이 제 귀를 의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의 부축을 받은 청윤은 미소 지으며 옷매무시를 정돈했다. 그 모습을 본 궁인들은 과연, 폐하와 랑 두 분 사이가 참으로 다정하다 여겼으나, 동화는 옷소매의 주름을 반듯하게 펴는 손길에서 청윤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청윤처럼 총명한 사람이 화려하기만 한 은비녀의 의미를 모를쏜가. 황후에게 내리는 봉잠도 아니요, 금도 아닌 은으로 만든 비녀라. 가만히 꽃처럼 황제의 옆에 예쁘게만 있으라는 소리였다.
하나, 동화는 입 밖으로 맴도는 말마저 내뱉어버릴까 봐 참아내는 중이었다. 아직 이화정의 배꽃이 피지 않았건만 이렇게 입으니 네가 오늘 이곳의 배꽃이노라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진심으로 치장이 잘 어울려서 보기에 좋다고 느낀 점이기는 하나, 청윤을 그렇게 희롱하였을 때 동화 본인의 기분이 통쾌해지리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어찌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사람의 옆구리를 찌르는 짓을 하겠는가. 그랬다가는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달아나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화는 그런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랑을 경계하라는 지령을 받기는 하였으나―그 지령을 내린 이가 누구인지 따위는 아직 기억나지 않지만, 동화에게는 아직 청윤이 필요했다.
“……, 청윤. 잘 어울리네.”
“황공하옵니다.”
동화는 황상께서 자리에 앉으시기만을 기다리는 문객과 무객들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러다 문득, 미간을 좁히며 탄식했다.
“이게 무슨…….”
“폐하. 무슨 문제라도…….”
“치워라.”
“예?”
다짜고짜 치우라는 말에 광한루에 있던 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치우라’한 대상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탓이다.
궁인들은 어쩔 줄을 몰라하는 어린 문객과 무객들을 힐끗거렸다. 설마하니 사람을 ‘치우라’고 하시었겠느냐마는, 폐하께서는 기분이 상하면 곧잘 말이 거칠어지고는 하셨으므로 그닥 이상할 것까진 없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게다가 문객과 무객들을 둘러보자마자 치우라 하시었으니,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궁인들은 광한루 바깥으로 치워버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대관절 누가 황상의 심기를 건드렸는가. 모두 황제의 눈치만 보고 있노라니, 동화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날이 좋은데 저리 둘러쳐놓으면 바람이 통하질 않지 않느냐. 갑갑하니 전부 치우란 말이다.”
사람이 아니었단 말인가, 하며 어리둥절해하는 인사들을 보고 있노라니 두통이 이는 듯 했다. 이런 반응들은 다 뭐란 말인가. 도대체가 휘는 이런 궁인들과 함께 이 황궁에서 어찌 살아왔단 말인가. 동화의 입에서 한숨이 나오자 뒤에 서 있던 궁인 하나가 허겁지겁 고개를 조아리고는 뒤에 있던 이들에게 손짓하였다.
“예, 예. 명 받잡겠사옵니다.”
“오늘 연회를 누가 준비하였느냐?”
동화의 물음에 주란이 답했다.
“이화이옵니다.”
“하, 그 아이는 왜…….”
“그를 불러올까요?”
“되었다. 말을 똑바로 전하지 않은 내 잘못이겠지.”
“송구하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하는 게 좋겠구나.”
“예.”
주란의 명령에 궁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곧 누각의 테두리를 감싸듯이 퍼져있던 자리가 보기 좋게 모였다. 황제와 청윤의 자리를 빼고 일곱씩 네 줄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중간이 비어있는 구조임은 동일하나, 주변에서 중앙을 구경하는 형태가 아니라 문객과 무객들이 서로 마주보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문객과 무객의 자리 뒤로는 도리어 공간이 남아서 악단이 들어와 앉았음에도 충분히 여유로웠다.
누각 위에 있는 이들이 배치된 자리에 의아해하고 있는 사이 황제는 자리에 앉았다. 문무객들이 멀거니 서 있으니, 동화가 입을 연다.
“무엇 하는가? 자리에들 앉지. 내내 그대로 서 있으려고?”
그제야 청윤을 비롯한 사내들이 눈치를 보며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황제로부터 먼 곳부터 앉기 시작하였다.
사실 동화가 오늘 연회를 연 데에는 비단 청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한 목적만 있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청윤을 견제할 인재를 찾아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
지금 후궁엔 청윤 외에는 마땅한 군 후보가 없다. 이전에 휘가 유섭을 총애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밤을 함께 한 사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궁인들은 자연히 청윤을 황후와 다름없이 떠받들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그를 밀어내려면 구실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가령 몸과 마음이 건실한 황제의 새 정인이라든지.
그런데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입궁한 자들이 이리도 황제를 두려워하니, 아무래도 이 궁중에서 ‘인재’ 찾기란 제법 어려운 일이 되지 싶다. 동화는 속으로, 대충 볼일만 끝나면 적당히 있다가 자리를 비워주기라도 해야하나 생각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또 무엇이 심기를 거슬렀는지, 황제의 미간이 좁아진다. 황제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청윤이 슬쩍 바라보니, 광한문에서부터 단정하지 못한 차림을 하고는 허둥지둥 뛰어오는 이와 뒤를 따르는 시종이 있었다.
뛰어오는 이는 문객인 양천곡이다. 그는 금년에 겨우 열세 살 되어 후궁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다. 평소에도 자주 늦잠을 자는 편이라 궁인들이 깨워주곤 하였는데, 오늘은 연회 준비로 바빠서 깨워줄 이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시종의 차림새도 엉망인 것을 보면 아마 여느때처럼 혼자 자지 못하는 천곡을 위하여 같이 잠을 자다 지각을 했을 게 뻔했다.
황제가 지각이라면 특히 예민하게 굴고 불같이 화를 낸다는 점을 알고 있는 이들은 혀를 쯧쯧 차거나 불똥이라도 튈까 싶었는지 조용히 눈을 돌렸다. 차라리 연회가 시작되어 떠들썩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런 적막강산에 저리도 급히 뛰어오면 모르는 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으악!”
…제 옷자락을 밟고 넘어지기까지 하다니.
“아이고야…….”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경래가 입을 다물었지만 뒤에 무슨 말이 올 지는 다들 알아차린 듯했다.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났구나.’ 누가 보아도 그런 얼굴이었으니까. 광한루에 올라 앉은 이들의 안색이 점차 흙빛으로 물들어가던 그때였다. 천곡을 지켜보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누각 계단을 내려간다. 연회를 망쳤노라고 혼쭐을 내려 하시나. 아니면 기분이 나쁘다며 자리를 파하고 침전으로 돌아가시려나. 긴장과 체념 비스무리한 감정들이 뒤섞인 시선 사이에서, 그러나, 황제의 행동은 뜻밖이었다.
“괜찮으냐?”
“네?”
기껏 내민 손을 쳐다보고만 있노라니, 동화는 천곡을 손수 일으켜 세워주었다.
“폐하를 뵈…! 아니, 송, 송구…….”
멀뚱히 서서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늠해보던 천곡은 뒤늦게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횡설수설하였다. 하지만 동화는 딱히 천곡의 사죄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애초에 그의 관심은 천곡의 행동에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아니었으니 그러했다. 그는 천곡의 어깨를 잡아 빙그르르 돌려보더니 중얼거렸다.
“다치진 않은 것 같고.”
“폐, 폐하?”
“이 옷이 원래 너희 공자가 입는 옷이 맞느냐?”
돌연 저에게 날아온 황제의 물음에 시종은 겨우 입을 열었다.
“예, 예!”
“옷을 이리 크게 입는다고?”
“공자께서 요즘 부쩍 키가 크는 중이다보니 맞는 옷이 없는데, 그렇다고 옷을 자주 지어입기가 어려워 조금 넉넉하게 지었사옵니다.”
“내가 보기엔 조금 넉넉한 정도가 아닌 것 같구나. 이러면 움직이기도 불편하고 지금처럼 넘어지기도 하지 않겠느냐.”
“소, 송구하옵니다.”
“내게 송구하다 할 일은 아니고. 주란.”
동화의 부름에 언제부턴가 옆에 있던 주란이 예, 하고 답했다.
“아무리 키가 큰다고 해도 하루에 한 척씩 자라는 것은 아닐 터인데 옷을 이리 허수아비처럼 입히면 어찌한담. 침방에 일러 천곡의 옷을 몇 벌 지으라고 해.”
고요 속에 퍼진 동화의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황제의 언행이 생시임을 믿지 못한 까닭이다. 궁인들이 알던 황제는 우선 옷차림이 단정치 못하다며 핀잔을 하였음 하였지 다정히 옷을 지어주어라 하고 신경써주진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황제는 문객과 무객들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알지 못하였다. 그가 금원에 있는 무객을 보고 누군데 함부로 궐에 들어왔느냐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는 궐 안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런 황제가 ‘천곡’에게 ‘옷을 몇 벌 지’어주라 하시니 놀랄 노 자라! 누군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몇몇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으나, 가장 놀란 이가 있다면 낙걸일 터다. 방금 말했던 황제의 호통을 받은 무객이 바로 낙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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